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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음/두려움

친밀감의 대체물

by FraisGout 2020. 8. 24.

  우리는 사료 없이 일해야 하는 말에서 벗어났다. 프로이트와 같은  남자들이, 감정의 세계를 억압하는 
것은 해로운 일이라는 것을 보여  줬을 때, 그것은 인간적인  욕구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일보 전진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나면서, 심리학적 판단이 환자의 증세에 대한 어느 정도 기초적인 처방 이
상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게 증명되었다. 심리학자들은  산업사회에서 정신적인 장애의 원인들을 줄일 수 
있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늘 새로운 해결 방법과 눈부시도록 멋진 치료 모델들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론적인 완성도면에서 질이 떨어지며, 종종 정신분석의 치료 효과조차  낮다. 새로운 치료의 발
견은 새롭다는 면에서, 그리고 그런 까닭에 아직은  희망이 꺾였다거나 치료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부담
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이점이 있다. 또 심리치료의 확고한 형태라는 부담에  질질 끌려다닐 필요도 없다. 
마치 사기꾼이 단테의 지하세계에서 납으로 된 무거운 옷에 질질 끌려 다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앞으
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핵전쟁이나 환경파괴라는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은 '해결 방법'은 여기서 논외
로 삼자. 만일 이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그 후 살아남은 자들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잊
고, 이전의 전쟁시대에서처럼 서로 긴밀하게 밀착되어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니면 장기적인 위기 속에
서 산업사회들이 살아 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할지도 모른다. 정치적인 대립은 더 치열해졌다. 그리
하여 한번 권력을 얻은 정치가는 예외 없이, 도로  추락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
해있다. 성공을 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의 감정적인 능력조차 자기에게 요구되는 역할 수행의 업무에 합
목적적으로 사용할 수 잇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반대편에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중하차하고 잇다. 이와 비슷하게 실직자의 수가 증가하는 한편, 요구되는  업무량 역시 엄청나게 늘어
가고 있다. 다만 이런 대립이 더 이상 심화되지 않고, 갈등관계에 있는 양쪽이 함께 공동의 자유 공간을 
발견하고, 거기에 정주하게 된다면, 이러한 산업사회의  체계는 변화할 것이다. 산업사회는 여전히 시민
사회적인 덕목과 해악, 즉 근면과 게으름으로 유지되고 잇다. 그리고 비인간적으로 일하고, 그러고 나서
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는, 감정관계라는 보호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더 이상은 불가능하
며, 또 이것이 문제시되지도 않는다. 감정관계를 현재의 위험에서 구해 내어 보호하길 원하는 사람이 있
다면, 그는 그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회체계에 공격을 감행
하고, 노동의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가, 라고 물을 수  있다. 만일 이것이 효과적이라면, 그것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기계의 인공지능화를 훨씬 더 뛰어넘어야 한다.  사회의 구조는 바뀌어야만 한다. 
산업사회에서의 정신의 손상을 사적 관계의 영역에 점점 더 간한 압박을 행사는 식으로 '해결'하려는 것
은, 문제를 더 극단화시킬 수 있다. 보다 더 실질적인  해결 방법은 전혀 다른 방향에 있다. 그 해결 방
법은 감정의 관계에서 부담을 덜어주고, 능률화의  요구, 기술적인 완벽주의, 맹목적인 성장주의의 한계
를 스스로 규정하고 통제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산업사회의 논리로 해결하려던 시도들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케이블 TV와 위성방송이 개통
되면서, 파트너들은 서로에게 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다만 아름다운 애정 
영화가 나오는 채널에 눈을 고정시킬 따름이다. 의약품  산업은 슬픔으로부터의 도피로 인해 발생한 공
포나 우울증과 싸우기 위해 새로운 의약품을 개발하고  있다. 오늘날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는 가장 많이 
처방되고 있는 약품이 되었다. 누구든 다른 사람에게서 편안함과 친밀감을  느낀다면, 굳이 수면제나 안
정제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심리치료 약품은 전체  의약품 시장에서 가장 성장 가능성이 높은 부
분에 속한다. 최근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80년 (구)서독에서 11살까지의 아이들이 거의 백만 번의 안정
제 처방을 받았다.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일년간 소비되는 7억의 전
체 개별 의약품 중 3분의 1이 심리치료제다. 이는  갓난아기와 노인을 포함한 전체 인구가 일년에 일인
당 세 번 처방 받는 것과 같다.
  나에게는, 개인을 비난의 여지가 많은 수동태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변화를 위해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이 사회를 우상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의미 없어 보인다. 이 사회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비난들을 넘어서서 개인의 운명에 간섭하고, 개인을 자기의 기준에 맞추게 하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나는 심리치료의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심리치료가 자기가 싸워야 하는 사회라는 이름의 
거센 물결을 인식하고, 누군가 (심리) 기술에 의해 규정된 이 사회 환경 속에서 친밀감을 보존시킬 사람
이 필요하다는 걸 인식한다면, 의미 없는 허황된 기대감은 갖지 않을 것이다. 다른 정신분석가들은 내가 
사회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회학자는 내가 결국은 정신분석학자라는 이유
로 아마도 나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금 이렇게 두 개의 의자 사이에 
놓인 공간에 서 있는 게 힘들게 느껴진다. 하지만 누군가 비록 시험삼아 나와 같은 자리에 서고자 한다
면 그것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이렇게 두 의자 사이에서 고민한다면, 인간에 관한 학문이 갖
는 변화의 과제를 조망할 시야를 얻게 될 것이다. 인문과학(자연과학에 대비되는)이라는 표현은, 심리학
과 사회학 둘 다 실증주의라는 외투를 입고 있음으로 해서 이 두 학문간의 관계가 베일에 싸일 수 잇다
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리고 나는 산업화 과정의 부산물을 연구하면서,  인간을 새롭게 발전된 기
술을 자연파괴적인 생활양식에 적응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의학이 사회 전반에 걸친 반생명적
인 영향력에 부분적으로 잠식당했다는 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학은 심리치료를 포
섭하려는 위협을 재차 가하고 있다. 이에 저항하는 세력은 산업혁명을 통해 생성되었던 환상(자연을  지
배하고, 만인을 행복하게 하고, 노동의 착취를 근절하고, 그래서 결국은 허무와 슬픔을 약속하는...)에 비
견될 수 있는 권력을 얻을 수 없고, 어떤 물질적인 약속도 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서서히 그 힘을 
축적해 나가고 있다.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권력 그 자체를 신봉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미래
를 장밋빛으로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들에게 실제적인 안녕을 기대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인문학이다. 이 인문학은 이제 막 피어나고 있는  싹이며, 산업사회와 자연의, 착취로 규정된 관계의 틈 
속에서 자라나고 잇다. 이런 틈새가 제한적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그것을  확장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비
판적인 정신분석의 목표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정신분석의 기술은 자족적 상황을 넘어서서 아예 망각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 책은 위에서 말한 인문학의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부관계 조언가나 심
리치료사를 위한 더 많은 일자리가 아니라, 환자와 상담가 모두의 의식의 전환이다. 상담가가 스스로 자
기의 존재 이유를 문제시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그들은 환자와 자기 자신을 문제 
해결이라는 부담스런 짐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잇다. 문제 해결은 도움을 받는 자와 주는 자 양쪽이 함께 
노력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산업사회의 이전 단계까지 만연했던 전문가의 신봉이 지금은 전문가에 대
한 회의로 뒤바뀌고 있다. 한편 비이성주의가 유행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단지 경제적으로 '가장 
저렴한'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이유로 자연보호구역에 고속도로를  계획하는 이성주의에 대한 깊은 불만
족을 표현하는 것이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의사, 교사, 정치가, 변호사, 언론인, 목사, 관료들이  공공연
하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곳은, 마치 손가락으로 희생양을 지목하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언론인은 의사
들이 비난받는 것을 즐긴다. 또 심리학자들은 청소년들의 정신적인 장애를  교사의 책임으로 돌린다. 전
문가들은 자기의 직업 이데올로기를 확고히  부여잡고 있든가(이를테면, "의사가 아니면  의료적 문제에 
당연히 함께 이야기할 수 없다!"), 아니면 자기가 누려 온 권력을 포기하든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만 한다. 만일 후자를 택한다면, 그들은 자기의 피보호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환자나 전문가 한쪽만으로
는 해결할 수 없었던 '강제적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강제적 상황 
하에서 그들은 기껏해야 공생관계밖에 형성할 수 없었다. 이 관계 속에서 그들은 치료의 미흡한 결과의 
책임을 이리저리 떠밀기만 했다("환자가 그렇게 요구하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그렇게  많은 약을 처방하
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의사가 처방전을  하나 달랑 써 주고는 돌려 보냈답니다!"). 전문
가의 자아비판에 대해 이제까지 지적한 내용은 뜨거운 돌 위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 정도에 불과
하다. 친밀감의 결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그러한 이야기들로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
면 그들은 자기의 고유한 감정에 더 많은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파괴하려고 위
협을 가하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항해, 좀더 가까워지려는 욕구의  불완전성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킬 수 
잇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화 속 왕자의 죽음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신화에 의하면,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남자들뿐이며, 그것
이 도한 남자들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스벤데  메리안의 유명한 책 '동화 속 왕자의 죽음'에
도 이 신화를 뒷받침할 요소들이 잇다.  작가는 책에서 한 남자와의 자전적인  사랑 이야기를 소개한다. 
거기서 남자는 전도유망한 왕자에서 차갑고 무뚝뚝한 개구리로  변해 버린다. 그리고 어느 익명의 작가
(아르네 피비츠)는 '반 여성적인' 동화 속 왕자의 역을 맡고는, 남성적 시각에서 '나는 동화 속 왕자였다'
를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스벤데 메리안의 책에서 나타나는 다소 어수선한  솔직함에 차가운 냉소를 보
이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나는 이렇게 상반되는 두 입장을 분석하고,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라는 주제가 그들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밝혀 보고자 한다.
  
    역할 수행과 통제를 향한 노력
  '동화 속 왕자의 죽음'의 저자인  스벤더는 자신을 정치와 페미니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여성으로 
묘사했다. 그녀는 '진보'의 작업에 집중적으로 몰두했다. 그녀는 진정한 여성 해방과 잘못된 여성 해방을 
구분했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남성들과의 관계를 평가절하했다. 그 이유는 이 관계에서는 감정 자체보다
도 남성들의 욕구에 순응하는 게 우선시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나의 성 정체성은 그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아주 크나큰 문제를 말이다. 내가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고 인간적인 온기를 느끼길 
바랄 때, 그것은 술집이나 디스코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건 진정한 친밀
감이다. 만일 내가 그런 친밀감 없이도 누군가와 잠자리를 같이하려고 작정을 하기만 한다면, 정말로 침
대에 누울수도 있을 것이며, 나의 육체적  기능을 자발적으로 충실히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수박 겉핥기식의 그런 애정의 유희에는 관심이  없다." 어떤 경우에도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가 신문에 낸, 남자 친구를 구하는 광고를 보고 찾아온 남자를 철두철미하게 관찰한
다. "왼쪽 여성, 나이 24세, 남성적이지 않은 남자 원함. 젊을수록 좋음." 이 광고에서  보면 이상적인 남
자가 그의 특성들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부정("남성적이지 않은")으로 규정되어 있다. 스벤데와  아르네
의 섬세한 감정들은 늘 누가 지금 어떤 일을 수행해야 하는지, 또  수행했는지, 그리고 수행해야만 할지
에 대한 토론으로 인해 단절되었고, 이런 식으로 피임이 문제시되었다.  "피임약 먹니?" 하고 그녀가 물
었을 때, 그가 먼저 묻지 않은 것이 그녀는 몹시 기분 나빴다. 그가 아니라고 대답했을 때, "그래?  아주 
친절하구나. 하지만 나도 피임약을 먹지 않아!"라고 스벤데는  말했다. 아르네는 여성의 문제를 아직 충
분히 연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비난하는 원인이 되곤 했다. 아르네는 
또한 모든 남성은 여성의 적이란 말에도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수동적으로  앉아, 여성에 대한 적
대적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스벤데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그가 더 적극
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한편 스벤데는 관계 속에서 자기가 '덜 극단적이고, 덜 용감한 쪽' 
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스벤데가 역할 수행이라는 사회적  당위성을 기준 삼아 행동한다는 
점은, 자기보다 덜 의식화되어 있고, 덜 참여적인 여자들을 저급하게 평가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여
기서 그녀가 어렸을 적에 동년배를 우습게 여겼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나도 어리고, 미숙했던 적
이 있었다. 나도 물론 사춘기라는 것을  겪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에도 나는 다른  아이들과 같지는 않았
다. 나는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들보다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실제로 동년배랑 친하
게 되더라도 항상 금방 싫증이 나곤 했다."
  
    동일성의 갈망
  스벤데의 자아실현은 경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그 경계는 그녀가  체험한 관계들을 단지 억압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슷한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이를테면 "파트너십에서 정치적인  견해차이는 빵
과 물처럼 필요한 것이다")를 그녀는 자기와 아르네 모두에게 적용되는 행동규범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
가 실제로 그녀와 다른 입장을  가진, 차별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런 의견 대립에 흥미를 가졌는지는 
스벤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원할 때는, 그가 그런 원칙을 따라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결
국 그가 그러기로 약속했다.("아르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정치 세계에서의 나의 미래에 관해 종
이에 써 놓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 그와 토론하고 싶다고  했다. 첫 번째 토론에서 우리는, 
내가 정치적인 활동 영역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전
혀 반응하지 않는다. 그 종이에 대해서조차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내가 그것에  관해 함께 이야기 나누
길 원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모든 견해 차이는 위협적이다. 하지만 스벤데를 정말로 이해할 수 있
는 남자가 과연 있을까? 아르네는 그녀가 체험한 것과 동일한 것을 체험했어야 하고, 또 체험해야만 했
다. 이런 관계에서 '이해'라는 표현은 믿을 만하게 보이며, '남성적이지  않은 남자' 라는 표현 역시 믿을 
만하게 보인다. 이 표현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여성스러운 남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분석적으로 재구성해 보자면 이렇다. 아이는  남녀 양성적인 어머니와 동일화되고 싶어하면서도 
그것을 두려워한다. 이러한 욕구는 단지 단기적인 육체적 결합만을 허용하기 때문에, 좌절을 겪게 되고, 
그 좌절 앞에서 분노를 느끼게 된다. "나는 분노를 느낀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렇게 수년 동안 성적 대상
으로 이용했던 여자란 것에 대해 전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가 말하는 것으로부터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귀결짓는다.  남녀관계에서 더 많은 감정
을 투자하는 쪽은, 남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아' 라고 나는 반박했다. 그는 자기가 독립
적인 한 개인으로서 이러한 문제로 아주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는 것을, 내가 별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난  그렇게 추측했다. 그는 자기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성적 압박이 
무엇인지 모른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성적 착취'가 무엇인지, 그  뒤에 얼마나 끔찍스런 혐오의 감정
이 숨어 잇는지를 말이다. 여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남자들과는 아주 다르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훨
씬 더 심한 것을 체험한다."
  스벤데는 화가 났다. 아르네가 그녀와 똑같은 체험을 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똑같은 판단을 하지 않
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녀관계에서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더 투자한다'는 점에서 그와 의견을 같이하
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사회학적으로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주장이다. 그녀 스스
로, 너무 많이 투자한다고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는 그녀가 규범화시키는 제안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의 두려움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이상적인  어머니처럼 아이를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보호할 수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실제 이와는 다르다. 아르네는 자신
이 단지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관계를 경험했다고 중립적인 태도로 시인해야 했고, 반면 스벤데는 인류
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훨씬 더 심한 것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매애(여성해방론자들이 주장하는)라든가, 여성은 인류의  근원이다 라는 말은  옳다. 하지만 이것은 
추상적이며, 어떤 실재적인 관계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아르네라는 이 남자는 살아 있는 개인이다. 하지
만 그는 여성이 갈망하는 친밀감을 주기 위해, 전체 여성운동을 자기 의식안에 수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피할 수 없는 차별성을 유지시키고, 그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랑의  감정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스벤데는 남자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여자를 원했다. 그가  수년에 걸친 굴욕의 역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정도로 강하고, 또 그러면서도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길 바랐던  것이다. "여자가 느끼는 감정이 무
엇인지, 남자에게 전달하는 문제에서 언어는 큰  구실을 못한다. 내 몸이 수년간  이용되는 것을 참아야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다. 하지만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렇게 괴로운 심정을 지금 2미
터 밖에 떨어져 있는 남자의 머릿속에 단 한 마디도 집어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스벤데와의 관계 안에
서 그는 공생적 통일체를 생성시켜야 하고,  그 안에서 모든 감정을 둘로  나누고, 그럼으로써 스벤데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한다. 그런 탓에 그는 인간이라기엔 너무 창백한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동시에 
그러한 체념은 통제와 초월적인 힘 없이는 위험하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사랑 속에서 체험한 친밀감이 
공동의 (그리고 개별적인) 가치들에 관한 토론에  의해 재생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힘든 노력을 
통해서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나누고, 늘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칠 준지가 된 어머
니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스벤데는 나와 성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남자가 다른 모든 점에서 나와 조
금이라도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처음 
아르네를 알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갑자기 내가 원하던 대로 흘러갔다.  서로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으
며, 모든 일은 저절로 잘 되어갔다.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 남자와 마주 앉은 나
는 그에게 성적 착취가 무엇인지 의미를 전달할 수조차 없다. 그는 남자들도 여자들처럼 똑같이 잠자리
에서 이용될 수 있다고 말하고는 신문을 들여다본다." 스벤데는 '현실 속'의 아르네가 이 부분에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았다. 하지만 동화 속 왕자는 그러면 안  되었다! 그녀가 
특별히 더 노력하고, 더 많은 의견과.  더 좋은 견해들을 일깨워 준다며,  동화 속 왕자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스벤데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차별성에 대한 두려움
  '내 감정은 예전과 같다. 하지만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일이 여전히 남
아 있었다' 라며 스벤데가 책의 말미에서 이제까지의 관계를 정리했다.  "내가 바라는 일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걸 지금 말한다면, 그는  아마도 반응을 보일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그에게 하지 못한 말은 
아주 새로운 그 무엇이다. 그는 지금 서류 분류함을 하나  갖고 있다. 그 안에 모든 게 들어 있다. 모든 
것이 말이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더 이상은  그에게 말할 수 없다. 만일 그가 그것에 반응을 보
이지 않는다면,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아르네는 아무것도 변한 것
이 없었다. 우리의 관계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 가능성을 말살시켰다." 거울대상을 놓고 벌인 투쟁은 명료한 통찰이 아니
라. 힘의 소비와 탈진을 거친 뒤 마감되었다. "아르네는  실은 상담치료가 필요하다"라고 스벤데가 밝혔
다. 어쩌면 심리상담가가, 스벤데가 추구하던 동일성을 이끌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위
해 자기의 감정들을 소진시켰다고 했다. 아르네는 건축 자재와 같다. 그의 개인적인 성격들은 사랑의 대
상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남자를 위한 '기초 재료들' 이다. 그는 그녀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고, 그녀
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결국 그는 적이 되었다.  그것도 단순한 적이 아니라, 모든 여성의 적이 되
었다. 동일성의 추구, 그들을 구원하는 공동  규범의 추구는 현실과 상상이 결합된  동지를 갈망하게 했
다. 그녀는 아르네에게서 이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들과 같은 친밀감을  원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다
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겪지 못했던 대화 단절의  문제를 그와는 겪는다며 그를 공격했다. 물론 그녀
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런 문제를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어떤 사람과 이상적
으로 감정을 교류하면서 동시에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어떤  사람과 이상적으로 감정을 교류하면서 
동시에 그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라디오의 수신 안테나를  접으면서, 고음질의 
방송을 들으려는 것과 같다. 그런  식으로 스벤데는 비난과 함께 건물의  재건축 설계도를 마치 동전을 
던지듯 바닥에 던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을 받는 거지에게는 너무  적은 돈이었다. 그것이 스벤데에게
는 가치 있는 선물이었지만, 아르네한테는  공허한 상투어이고, 적은 내기  돈에 불과했다. 둘은 각자의 
화폐를 교환하기 위한 적합한 환율에  합의하지 못했다. 각자가 관계에 '더  투자했다'고 주장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투자의 가치에 대해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상호 이해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스벤데가 뛰어난 언변으로(그리고 아르네가 말주변은 없으나 기꺼이) '관계'와 '대화'에의 욕구를 강조한
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 그로부터 더 강한  파트너십을 만들어 내는 데 무
능력하다"라고 스벤데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앙케나 자비네, 그리고 나하고도 전인적인 인격체로서 대
화를 할 줄 몰랐다. 그것이 모든 적극적인 관계의 시작인데도 말이다."
  공생관계를 향한 외침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관계의 좌절은 역할  수행의 실패로 체험되었고, 무능력
하고 상황을 분별 못하는 상대방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스벤데는 어떻게 자기의 무게 중심을 잃었는지
를 깨닫지 못했고, 자기의 주장을 줄기차게 반복함으로써 아르네라는 '전인적 인격체'에 대해 곰곰이 생
각해 보질 않았으며, 그 대신  그가 왜 그녀 자신의  확장된 인격체로서 기능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동일화를 추구하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법이다. "그와의 성관
계에서 만족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 밖의 모든 영역에서  그의 무지 그리고 둔감성과 
싸워야 하는데 말이다." 페레나 슈테판의 자전적인 소설,  '껍질 벗기기'("나는 다른 여자와 함께 있으면 
나 자신에 대해 뭔가를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남자와 함께 있으면,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과, 그를 
위해 나의 몸을 대기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에도 스벤데 메리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성에 지나치게 적응하는 것에 대한 묘사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의 해결 방법은 스벤데와 다
르다. 오직 동성간의 관계만이 절망의 근원인 차별성으로부터, 그리고 공생적인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남
자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모순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스벤데도 고백했다. 남자 친구와 갈등
하면서 여성 동성애자들을 질투한 적이 있다고 말이다. "그들은 성가시고 화나는 일로부터 자유롭다. 그
들은 싸우는 대신 그들 자신을 위해 힘을 쏟는다." 하지만  스벤데는 동성애자가 아니다. 그녀는 남자와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아실현에 쏟아붓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진
정한 파트너십이란 그런 것이어야만 하지 않는가!" 스벤데는 늘 자기가 아르네를 위해 모든 일을 할 준
비가 되어 있고, 그를 위해 정말 많은 일을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멍청한 사람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그를 위해 하려고 하는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한다. 그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모
든 게 불공평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그를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하는 건가? 과연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일까? 그녀는 그를 독립적인 인간으로
서 사랑하는가? 그것이 분명하지 않다. 스벤데는 그녀의 자아실현에 아르네가 상응하지 못할 때, 실망하
고 분노를 느낀다. 그녀는 그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꾸고 싶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자기와는 다
른 사람의 실재에 의해 동시에 모든 것을 포괄하는  친밀감에 초점이 맞춰진, 제한적인 욕구 해소가 좌
절되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가 스벤데의 현실이다. 스벤데가 그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아르네 역
시 이러한 현실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결국 이들 관계에는 고통과 거리감만이  남게 된다. 이런 관계에
서는 늘 상처가 다시 덧나고, 처음에 그토록 만족스러웠던 바로 그것, 다시  말해 성적인 일치감이 결여
된다.
  
    깨지기 쉬운 표상
  공생적인 합일을 추구함으로써 파트너의 개별성은 완전히  말살되며, 이러한 개별성은 당사자 자신의 
자아를 위한 건축 자재로 둔갑한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파트너는 관계 안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데 필수
적인 고정성을 잃게 된다. 그것의 전형적인 상징이 바로 뱀파이어다. 뱀파이어는 연인의 피를 마시고는, 
이로 인해 생성된 강력한 결속을 통해 그 연인을  죽인다. 그리고 마침내 연인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것
도 얻지 않는다. 통념적으로, 사람들은 우유를 기대하는 한, 그 소를 잡지  않는다. 바로 이런 보호 행위
가 스벤데에게는 어렵다. 정신분석적인 발전  모델에 의하면, 이런 상황의 배경에는  불안하고 흔들리기 
쉬운 성격을 가진 아이를 이해하고 친밀하게 감싸 줄 수 있는 어머니에 대한 기대가 숨어 있다. 아이가 
이런 기대에 심하게 실망을 하게  되면, 그 결과는 꿈이나  무의식의 다른 상징적인 생산물로 나타나는 
동일성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보상받기  위해 어머니를 잡아 먹는 식인종의  욕구를 발전시킨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을 분간하기는 매우 어려우며, 거의 불가능하다.  아이가 식인종처럼 깨물기 때문
에 엄마가 젖을 주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엄마가 젖을  너무 조금 주기 때문에 아이가 젖을 깨무는 것
인가? 이렇게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은  엄마와 아이가 처한 사회적인  상황과 맞물려 있다. 어머니들은 
무언가를 줄 수 있을 만큼 충족된 삶의 여건을 가지고 있는가? 부부생활은  어떠한가? 남편의 직장생활
은 어떠한가? 어머니들은 도움을 받고 있는가, 보상을 받는가?  그들은 스스로 다시 활력을 찾을 수 있
는가? 가족은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는가? 공생에 의거한 기대감은 연인에 대한 표상을 깨지기 쉽게 만
든다. 연인의 모든 비협조는 어린 시절의 실망을 연상시키고 분노를  일깨운다. "그는 나를 더 어루만져 
주어야 했다. 우리는 그래도 '함께' 피임 문제를 얘기했어야 했다... 그가 피임 문제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가졌던 분노와 회의가 점차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그가 나보다  먼저 일어났을 때, 나는 열린 문 틈
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부엌과 거실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처음으로 나
는 아주 진지한 생각에 빠졌다. 그와의 관계를 오늘 당장 끝내는 게, 그렇게 성급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말이다... 더 늦어지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피임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저 사람
이 머릿속에 담고 있는 생각이란...  나보고 앞으로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와는 여성 문제에 한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난 사랑에 빠져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걸 허용하란 말인가?... 
그것도 일방적으로?" 스벤데가 갖고 있는 연인에 대한  내적 표상에는 고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아르네와 함께 있을 때와 혼자 있을 때 나타나는 감정의 폭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와 함
께 있을 대면 이별을 생각하고, 갑자기 벙어리가  되거나, 서로 간의 차이를 견디기 힘들어하며, 토론하
자고 그를 강요하거나, 한밤중에 빗속으로 그를 내몰기도  한다. 하지만 아르네가 없을 때는, 과거의 소
중한 추억들이 몰려든다. '나는 그에게서 여성 문제에 대한 순진한 태도를 버리게 할 거야!' 그래서 그녀
는 그에게 긴 편지를 섰다. 하지만 그녀는 몹시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편협하고 단순한 남성우
월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뭔가를 배울 의욕이 없음을 질책하고,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들을 예를 들어 설
명한 것에 대해 그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유일한 문제는 당신과 함께 있는  게 
너무도 좋다는 거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당신과의 접촉, 날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는 모든 접촉이 내 안
에 어절 수 없이 가둬져 있던 욕구들을 다시 끄집어 낸다는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 이제는 헤어지는 게 
나한테는 좋을 것 같아." 그녀는 이렇게  편지를 맺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녀가 가진  환상과 실제의 아르네 사이의  끊임없는 불협화음을 견디기보다는 완전히 
헤어지는 게 더 쉬웠다. 스벤데는 환상 속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의 아르네로부터 동화 속 왕자를 
추출해 내었다. 하지만 실제의 아르네는 그녀가 짜 맞춘 퍼즐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이
해하지 못했고, 자기의 퍼즐에 대해서도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퍼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
처럼 행동했다. 아르네가 자기도 스벤데를 동화 속 공주라는 그의 환상의 제재로 이용하고자 한다면, 여
기서 치열하게 서로 싸우는 한 쌍의 남녀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아르네는 공생적인 욕구면에
서 체념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는 사랑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없어 보인다. 그는 뭐든 스벤
데가 하게 내버려두면서도, 그녀에게 사랑하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사
랑으로 서로의 영역을 구분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행동을 마치 열쇠와 자물쇠의 관계처럼 그
녀에게 맞춘다. 스벤데가 극단적인 이론으로 무장한 채 전진하는 동안, 그는 불확실성 안으로 숨어든다. 
그가 아무 저항 없이 스벤데의 광범위한 요구를 감내하는 것은, 그녀의 책임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견
디는 한, 그것은 그녀를 정당화시킨다. 그러고 나면 모든 문제가 사라져 버린다. 어쩌면 그는 그렇게 함
으로써 자기가 할 수 잇는 한, 뭔가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뭔가 사랑하는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 연인에  대한 어떤 확고한 내적 표상이 없기 때문
에(이 부분에선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큰 책임이 없다), 자기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스벤데의 공격
에 대항해 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슬픔으로부터의 도피
  "나는 나를 특별히 여성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아직은 그렇게 심하게 
여성의 억압에 대항해 투쟁을 벌이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덜  참여적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싶지도 않
다." 스벤데가 여성문제 참여운동에 그렇게 깊게 그리고 경쟁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와 관
련된 의심을 없앨 수 있을까> 그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필요로 한다.  어쨌든 그녀는 '여성의 
억압에 대항해 심각한 투쟁을 벌여 왔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다음에 인용되고 부가 설명되는 그녀의 
갈등보다는 적어도 덜 소모적이며 어느 정도는 더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스벤데는 그와 같은 주
장을 통해 자기가 투쟁해야 할 슬픔을 회피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르네를 사실은 원하지 않
았다고 확신한다. 이미 만난지 3일 뒤에 헤어져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무리해서 힘을 소비할 필요
가 없었고, 그 흔한 여성에 대한 정신적인 착취를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아르네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슬픔을 억압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이런  슬픔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고, 
그로부터 도망쳐야 했기 때문에  더욱 슬픔의 감정을 괴롭혔다.  그녀는 아르네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좌절됐을 때, 그리고 그 좌절에 몸을 맡겼을 때에야 비로소 슬퍼할 수 있었다.  그 때 그녀는 마침내 아
르네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좌절의  시기를 연기하기 위해, 투쟁하고,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아르네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린다. 마침내 다시 울 수 잇게 되었다. 그를 생각하면 말을 일어버린다. 하지만 눈물은 아르네
를 잊게 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깨달음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것은 곧바로 부
정되고 만다. "아니야,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돼... 선책의 여지는  없어. 분명한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이 혼란스럽게 눈물을 흘리는 것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야. 이 두  가지는 서로 결합되어야 해." 거꾸로 
된 세상이다! 스벤데는 여기서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했다. "분명하게 눈물을  흘리는 것이 혼란스런 글
을 쓰는 것만큼 중요하다."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물이  그녀가 아르네와 겪은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분명히 표현하는 반면, 그녀의 글은 그녀를 매번 새로운 방식으로 동화 속 왕자에 대한 애
증이란 미궁 속에 헤매게 만들기 때문이다.
  
    풍자 혹은 독설
  스벤데 메리안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르네가 어떻게 익명의 동화 속 왕자가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동화 속 왕자였다'라는 책에서 발견되는  스벤데를 향한 풍자와 독설은 공생  투쟁이 어떤 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스벤데가  자기의 책에서 풍부한 언어 구사에  적극적이었다면, 이 책의 
저자는 그녀의 갈등을 우습게 만들고,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공개했다. 저자 아르네는 침묵하는 
아르네를 변호한다. 그러면서 그는 좌파적인 논쟁들의 묵시적인 규범들을 끄집어 낸다. "나는 눈에 띄게 
정치 의식을 가진, 진보적인 여자 친구만을 대적할  수 잇다. 나의 여자 친구는 어느  정도 토론 기질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여성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녀는 좌파가 
아니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한 사람이 가진 남성우월의식을 깨
뜨리기 위해 작업하는 이런 '관계'는  반드시 필요하다. 누구나 그런 식으로  관계를 진전시키고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남성우월의식에 대해서 토론하면서 발생하는 관계의 어려움은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
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해서 적극적으로  대립한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스벤
데가 성관계를 진지하게 다루고, 관계의 완전성을 요구함으로써 그 관계를 힘들게 했다면, 이 책에 나타
난 남성적 시각에 근거한 풍자는 방향을 달리한다. 그리하여 감정은 사회적인 유행을 따르는 논쟁에 속
함을 보여준다. 모든(정치적인) 일은 서열을 가진다. 스벤데의  욕구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거나 비극적
인 오해에 의해 제약받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로 멍청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문제와 갈등에 광적으로 
중독된' 것이다. 스벤데가 남자 친구 아르네와의 관계에서 열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자기의 감정을 꾸미
지 않고 드러낸 것에 비해, 이 저자의 풍자는 경멸적이고 교만하게 보인다. "그녀는 이상적인 남자를 퍼
즐로 조립했다. 그러다 어떻게 된 일인지, 퍼즐이  뒤죽박죽 되어 버렸다. 그러자 이제는 전쟁모함 퍼즐
을 가지고 꿈의 왕자를 조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녀는 꿈의 왕자 퍼즐 조각 하나를 찾아낼 때면 언제
나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의 인생을 걸 사랑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그는 "여성의 문제가 사회 체계의 문제라는 것을 모르는 멍청한 사람..." 이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이 모든 것을 지능의 문제인 것처럼 다룬다.
  저자는 적극적인 여성운동을 인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러한 보호막 속에서 개인적으로 저항하기 위
해서이다. "그녀에게 진지하게 말을 해 줘야 할까?" 풍자 작가  아르네가 자문한다("나한테서 원하는 게 
뭐야?" 라는 질문에 대하여). "'충동이 생기면 성교를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라고? 아니다, 그
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게다가 여성운동이 있지 않은가. 여
성운동의 사상을 여러 해 동안 강력하게 주입받아 온  우리는, 그와 같은 여성 착취적인 발언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며, 여성을 오로지 쾌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여성을 비하시키는 일일뿐더러, 그런 사
람은 아주 추잡한 난봉꾼이다.  ...그렇지만 그럼으로써 자발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간접적인 통로는 
더 멀어졌고, 이제 새로운 놀이의 규칙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 동화 속 왕자의 죽음과 풍자적인 저
자 아르네의 부활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비극은, 감정의 영역까지 확대된 역할 수행의 규범이 거짓된 행
위를 내세우게 했다는 데 있다. 여성이  오르가슴을 연출하듯이, 남성은 대화와 토론의  욕구를 꾸며 낸
다. 당사자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걸 감지한다. 스벤데는 파트너십에 있어서 전
문가인 양 등장한다. 그러면 풍자 작가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 전문가를 어떻게 속인담?' 스벤데
는 아르네가 자기에게 다가오고,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길 원한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통제의 
욕구만을 따라야 한다. "그녀는 검열관으로 일하느니, 차라리 내 머릿속에 들어와 사는 게 나을  것이다. 
그녀는 내 머릿속에 들어오고 나가는 생각들을 검열하고,  마음에 드는 생각에는 여성운동이 인가한 통
행증에 도장을 찍어준다." 스벤데는 종종 자기의 힘든 상황이,  아르네가 뭔가를 깨우치기에 무능력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처럼 행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에 대해 이 풍자 작가는 응큼한  멍청이의 모습으로 대응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아르네는 울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냉소적인 우월감으로 굳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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