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심리학/여자

원시 사회의 여성

by Frais Feeling 2020. 4. 28.

1. 풍요의 여신

  원시 시대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매우 불완전하다. 더욱이 인류 최초의 조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나 적다. 최초의 인류와 진화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거의 대부분은 최근 30 년 동안에 이룩된 것이다.
  1950 년대까지 사람들은 인류가 약 1백만 년 전에 지구상에 나타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59 년 거의 25 년 동안 아프리카의 들판을 헤맨 끝에 세계 
최초의 인류라고 생각되는 화석을 발견한 루이스 리키와 매리 루키 부부는 이 화석이 
200 만 년 전 것임을 밝혔다. 그후 다시 매리 리키는 350 만 년 전에 살았던 
오스트랄로피테신의 발자국 화석을 발견했다. 분자생물학자인 빈센트 살리치 박사는 
혈액 단백질의 유전자를 분석하여 인류가 약 4,5백만 년 전에 침팬지와 인간의 공동의 
조상으로부터 분리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류가 출현한 것은 최소한 2백만 년에서 4,5백만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인류가 문명 시대에 들어간 것은 가장 빠른 지역에서도 약 5천 년 내지 일만 년 전 
정도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의 99--99.9%가 원시 시대였다.
  이 아득한 옛날의 기나긴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 시기는 
생물학적인 진화가 인류의 발전을 선도하였다. 프래드글래인박사는 2백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신 그레사일과 150 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신 로버스트의 이빨 
화석이 갈린 모양을 분석하여 그들이 과일이나 나뭇잎 등 채식을 했다고 주장했다. 
억센 앞발도, 날카로운 송곳니도 없는 유인원은 최초에는 다른 동물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의 두뇌는 아직 원숭이의 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최초로 사냥을 한 인류로 알려진 것은 호모 일렉투스다. 사냥에 적합한 도구를 
발명함으로써 비로소 인류는 숲 속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고, 나아가 다른 동물을 
지배하게 되었다.
  원시 시대를 연구하는 데에는 화석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현존하는 원시 사회를 연구함으로써 옛날의 원시 사회를 밝히고자 한다. 
그러나 이 사회들을 통해 원시 시대에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많다. 이 사회들의 
대부분은 수렵과 채집을 하고 있으며 원시 농경 사회도 있다. 현존하는 원시 사회는 
전체 원시 시대에서 보면 완전히 후기의 사회이다. 뿐만 아니라 문명 사회와의 접촉을 
통해 변모된 것도 많고, 단지 몇몇 부족의 생활이 과연 전체 원시 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각각의 특수성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신화나 전설을 분석하여 원시 시대의 삶을 추적했다. 신화와 전설 
역시 오랜 세월에 걸쳐 각색되어 왔기 때문에 이를 통해 순수한 원시 시대의 상을 
추출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작업들을 통해서 우리는 원시 
시대에 대해 말해 주는 몇 가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 지식은 무엇보다도 우선, 문명 사회에 비해 현저히 평등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생산력의 발전 수준이 매우 낮아서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의 생산물, 즉 잉여 생산물을 생산하지 못했다. 모든 사회 
성원들이 그때그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착취할 가능성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생산 도구들도 보잘 것 없었고 
생산물도 적었기 때문에 각자의 소유물 역시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생산력이 낮은 사회의 생산 관계는 공산적 관계였다. 즉 모든 사회 성원들이 
공동으로 일하여 그 성과를 공동으로 분배했다. 기록 영화 『부시맨』은 남자들은 
공동으로 사냥을 하고 여자들은 채집을 하여 어른부터 아이까지 골고루 제 몫을 
분배받아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노동이 발달하지 않은 사회의 조직은 기본적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혈연적 조직이었다. 생산을 둘러싼 인간 관계가 혈연 관계로부터 독립될 정도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혈연적인 관계 내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여성의 지위는 어떠했으며, 그것을 규정한 요인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현존 원시 부족들에서 여성의 지위는 다양하다. 그것은 자연 조건, 
노동 방식, 가족의 형태, 전쟁의 빈도 등에 달려 있다.
  먼저 중요한 요인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전쟁이다. 인간의 두뇌가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동물과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고, 자기의 동료 이외에는 
무서운 적이 사라지게 되었다.
  먹을 것, 혹은 보다 나은 생활 조건을 위한 각 집단간의 투쟁이 벌어졌다. 직접적인 
인류 내부의 살생 투쟁이 생존의 조건의 하나가 되었다. 공동체 내부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평등하고 협조적이었던 이 단계에서 전쟁은 주로 부족과 부족 사이처럼 
서로 다른 공동체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전쟁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수록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개인이나 집단의 위치가 강화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엘빈 
토플러가 말했듯이 폭력은 경제적 요인, 지식 등과 함께 지금까지 역사에서 권력의 
주요한 기반의 하나였다. 전쟁은 통상적으로 남자의 일이었고 전쟁이 생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수록 남자들의 지위가 높았다.
  자연 환경도 수렵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자연 조건이 
나쁜 곳일수록 여성의 지위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는 자연 조건이 성별 
분업과 생산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식물이 거의 살 수 없는 
혹독한 자연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남자들의 사냥에 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에스키모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가장 낮았던 반면, 먹을 것을 구하기가 보다 쉽고 
여자들이 거기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숲지대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훨씬 나았다.
  또한 종교와 같은 문화적인 요인도 영향을 미쳤다. 많은 원시 사회에서 여성들이 
주술사나 제사장, 주술로 병을 고치는 의사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성은 영적인 세계, 천계, 초월적인 힘의 중재자였다. 이런 역할을 하는 여성들은 
높은 존경을 받았고 부락의 일에 대해 많은 권한을 가졌다.
  또 하나의, 그리고 보다 중심적이고 주도적이며 다른 요소를 규정하는 요인은 
노동의 발달과 그 안에서 여성의 역할이었다.
  노동이 발전함에 따라서 최초로 나타난 분업은 성별 분업이었다. 예를 들면 사냥이 
먹을 것을 구하는 주요한 방법의 하나가 되자 이는 주로 남자의 일이 되었다. 거프는 
175개 현존 수렵 채집 사회의 97%에서 사냥은 남자의 일로 한정되어 있다고 
말했다.(주1) 이는 사냥을 위해서는 며칠씩 들판을 뛰어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부시맨에 관한 관찰은 이를 잘 보여주는데, 남자들은 독화살로 기린을 쏜 후, 기린이 
기진해서 쓰러질 때까지 사나흘 동안을 기린을 쫓아 들판을 헤맨다. 여자들은 아이를 
돌봐야 했으므로 사냥은 당연히 주로 남자의 일이 되었다. 여자들은 집 주위에서 채집 
활동을 했다. 그녀들은 수백 가지 식물의 다양한 이용법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지식이 여성들로 하여금 원시 농경을 시작하게 했다. 이런 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노동 분업은 남녀의 지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즉 그 사회의 
주요한 산업을 맡은 쪽이 주도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현존 원시 사회를 보면 
그 사회의 생계 유지를 채집에 의존할수록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높았고, 사냥에 
의존할수록 남자들의 권리가 강했다.(주2)
  수렵이 도구와 생산력의 발달을 주도한 중요한 산업이었던 많은 초기 수렵 사회에서 
여성들은 부차적인 위치에 있었다.(주3) 그러나 종속 정도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고, 
대개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렵 사회라 하더라도 대개 채집 노동이 식량 
조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원시 부족들을 연구한 결과, 
고기는 수렵 사회의 경우에도 총 음식물의 20--40%정도만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콩, 
이파리, 뿌리, 호두, 버섯 등의 식물로 충당하였다.(주4) 특히 사냥을 할 수 없는 
건기에는 식량의 대부분을 여자들이 조달했다.

  어느 곳에서나 가족의 생계는 떠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는 남편이나 아들보다는 집에 
머물러 있는 여자들의 노고에 더욱 의존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짐승들을 고되게 
쫓아다니다가 빈손으로 스스로 배를 곯으며 집으로 찾아드는 것은 실제로 
원시인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푸성귀는 남자들뿐 아니라 나머지 가족 
모두에게 중요한 식품이었다.

  원시 농경의 발달과 함께 여성의 지위는 보다 높아졌다. 원시 농경을 발명하고 
주도한 것이 채집을 맡았던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현존 원시 사회에 대한 
실증적 분석에서도 나타나는데, "여성이 평등하거나 남성보다 약간 우세한 여성 
중심적 사회는 초기 수렵 사회보다 초기 정착 사회에서 상당수 발견"된다는 
것이다.(주5)
  여성들이 원시 농업을 창안하고 주도했으며 따라서 생산 노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연구 보고들에서도 나타난다.

  여성들은 식물을 채집하는 과정에서 곡괭이와 같은 도구를 발명하였다. 호주의 
센트럴 빅토리아의 원주민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쓰여진 보고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즉 그 지역에서는 여자와 어린이들이 고구마와 같은 식물의 뿌리를 캐내기 
위해서 막대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막대기는 불로 달구어 단단하게 만들고, 그 끝을 
뾰족하게 간 것이었다. 이렇게 뿌리를 캐기 위해 땅을 파헤친 것은 농경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은 사냥한 짐승을 가축으로 사육하는 법과 
씨를 뿌려서 작물을 거두는 원시 농경 기술까지도 발명해 내었다.

  원시 농경을 여성들이 주도했다는 것은 신화나 제사 의식에도 반영되어 있다. 많은 
사회에서 여성은 농경과 관련된 여러 제사 의식에서 제사장으로 주역을 맡았으며, 
신격화되기도 했다. 그리스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와 세메즈라든지 독일 풍요의 여신 
프리카 등이 그 예이며,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농업 신으로서 신모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주6)

  주몽이 부여에서 위태롭게 되어 남으로 망명할 적에 신모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가라고 싸주었으나 이별하는 슬픔에 그 보리 종자를 잊어버렸던 것을 신모는 사자인 
비둘기로 하여금 주몽에게 보냈다.

  원시 농경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생산에서의 역할과 여성의 지위와의 상관 
관계를 잘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노동을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시대의 
주요한 산업의 담당자인가, 생산력의 발전을 선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생산 노동에서의 중심적인 역할은 단순히 여성들이 양적으로 많은 노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그 사회의 노동 중에서 중심이 되는 산업과 분야를 
담당한다는 의미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생산이 
갖는 의미만으로 여성의 지위를 설명할 수 없다면서 그 이유로 만약 그것만으로 
설명해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19세기의 노동자나 농민의 생활과 사회적 지위가 
훨씬 나아져야만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첫째로 무계급 사회인 원시사회와 
계급 사회를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 계급 사회는 소유를 통해 자신은 노동하지 
않고 타인을 착취할 수 있으므로, 소유라는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로 
19세기 노동자나 농민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낮았던 것은 여성들이 양적, 
시간적으로 더 많은 노동을 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그 사회의 부차적인 산업과 노동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에서의 역할이 여성의 지위에 규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생산에서의 역할만이 여성의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자연 
조건, 가족의 형태, 전쟁의 빈도와 폭력의 필요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총화로서 인류 
발생 초기부터 발달해 온 문화 등 여성의 지위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이 많으며, 그 
때문에 각 사회의 여성들의 삶이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요소들 중에서 생산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다른 요소들에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
    2. 원시 시대의 가족

    1) 가족, 자연의 요구
  원시 시대의 여성의 지위를 결정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가족의 형태이다. 원시 
시대의 가족은 최초의, 유일한 사회 조직이었다. 가족도 다른 사회 조직처럼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그러나 최초의 가족이 어떤 모습이었을까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매우 적다.
  가족을 구성하는 것은 어느 정도 고등한 동물에서는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동물들이 얼마간 지속적인 가족을 형성하는 가장 일차적이고 보편적인 
요인은 임신한(혹은 부화중인) 암컷과 새끼의 부양이다. 동물들은 각기 고유한 종족 
번식의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그들이 자연에 적응해 온 오랜 기간에 걸쳐 
본능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인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정적이다. 암수가 짝을 짓는 
형태나 새끼를 부양하는 방법에 대해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암컷의 임신(혹은 
부화) 기간이 길고 새끼를 적게 낳을수록, 그리고 새끼가 태어나서 자립할 때까지의 
기간이 길고 태어난 후에 배워야 하는 것이 많을수록 가족 관계는 지속적이고 
가족간의 정서적 유대 관계도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보다 고등한 
동물일수록 강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원숭이는 새끼를 오랫동안 키우면서 먹이를 
얻는 법, 위험을 피하는 법 등을 가르친다. 고등 포유류에서는 대개 수컷이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우리는 대부분의 포유류들에서뿐 아니라 조류나 어떤 종류의 
파충류, 양서류, 심지어 곤충들에서조차도 눈물겨운 모성애와 부성애를 확인할 수 
있다. 또 가족의 형태나 지속성은 먹이를 취하는 방식, 생존 방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주7) 예를 들면 호랑이의 경우 새끼를 낳은 직후부터 암컷이 활동을 할 수 
있으며 주로 혼자서 사냥을 한다는 사실은 암컷만이 새끼를 돌보고 수컷은 혼자서 
살아가는 그들의 생존 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맹수의 먹이가 되는 보다 
약한 초식 동물들은 무리를 지어 살면서 새끼를 공동으로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물의 가족을 인간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가족 역시 인간이라는 
종이 자신의 종족을 보존하는 방법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즉 가족의 가장 기본적이고 
흔들릴 수 없는 기초는 남성과 여성이 합하여 자식을 낳는다는 것이고, 자식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부모의 물질적, 정신적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 임신 기간과 산후 회복 기간이 길고, 적은 수의 
자식을 낳으며, 자식의 성장기가 길고, 또한 아무리 단순한 인간 사회라도 언어, 전통,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많은 노력가 노동(점점 
많아지는)이 필요하며 이 노동은 가족간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장과 생활에는 감정적 유대와 상호 교류가 반드시 필요하다. 요컨대 자식의 성장과 
성인의 생활에 필요한 상호 협력과 의존이 인간 가족의 지속성과 단일성, 강력한 
감정적 유대의 궁극적인 기초이다.
  물론, 남녀의 결합은 종의 번식을 위한 의식적인 의도에서라기보다는 자연적인 
충동에서 비롯된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의 목적이 곧장 자녀의 출산은 아니다. 오히려 
보다 많은 경우 자녀의 출산은 결혼의 결과이며, 때로는 예기치 않은 부산물이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에게 이 부산물을 어쩌면 결혼 자체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도록 
함으로써 역으로 결혼을 지속하도록 만들었다.
    2) 가족의 옛 모습
  요컨대 가족은 한편으로는 종족 보존의 본능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녀를 기르고 
생활하기 위한 남녀의 협업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가족은 각각의 사회와 역사적 
시기에 있어 이에 합당한 형태를 향해 발전해 왔다. 그 과정은 일률적이지 않다. 자연 
조건, 노동 방식, 문화적 요인들이 가족의 형태에 영향을 미쳤다.
  현존 원시 사회에서나,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 사회들에서나 가족의 모습은 실로 
천차 만별이다. 원시 사회의 가족의 형태는 군혼과 단혼, 모계제와 부계제, 모처제와 
부처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현존 원시 사회를 볼 때 수렵^5,23^ 채집 사회의 가족 구성은 절반 이상이 남편, 
아내, 자녀들로 구성된 소규모의 핵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주8) 대규모의 
가족은 농경이 발달된 이후에 비로소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가족이 자년 양육을 위한 부부의 협력에 기초해 있으며, 그 원초적인 형태가 
집단혼보다는 단혼에 보다 가깝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노동 방식의 변화가 가족의 
형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단혼을 현재의 일부일처제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인간의 가족은 
매우 원시적인 상태로부터 발전해 왔다. 초기의 인류에게는 성교에서 어떤 금기가 
없었을 것이다. 즉 처음에는 형제 자매간의 성교는 물론, 부모와 자식간의 성교도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는 역사적으로 광범위하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성서를 보면 
형제 자매간의 결혼은 다반사이고 아버지와 딸의 성교도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근친혼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불과 수백 년 전의 일이다.
  신라 시대 왕실의 경우, 기록이 확실한 53건의 결혼 중 13건이 부계 혈족혼, 즉 
근친혼이었는데, 신분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원시 
시대의 관행이 남아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 시대에도 광종, 덕종, 문종의 
왕비는 그들의 친 여동생이었으며 경종, 성종, 예종의 왕비는 그들의 종자매였다. 고려 
왕실의 기록에 나타난 왕비 51 명 중에서 동성혼이 22 명이나 된다. 기록되어 
전해오는 것은 이러한 왕실의 혼인 뿐이지만, 근친혼의 풍습이 왕실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을 것임은 명백하다. 근친혼을 금지한 것은 고려 11 대 문종 때부터(1080 
년경)이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근친 상간은 조선조에까지도 답습되어, 근친혼을 곤장 
80--100 대로 다스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주9)
  이런 원시 상태로부터 근친혼에 대한 금기가 발달해 왔다. 이는 한편으로는 
근친혼의 유해한 우생학적 결과를 막기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와 자식, 부부와 
형제 자매의 관계가 혼동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생겨났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혼동은 가족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또 단혼과 함께 여러 가지 형태의 집단혼을 발견할 수 있다. 단혼은 부부의 성적 
자유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결혼은 보다 쉽게 해체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푸에블로 서쪽에 거주하는 호피(Hopi)족의 경우, 부부 관계는 쉽게 해체될 수 
있고 이혼율이 약 34%였다고 한다.(주10)
  이때의 남녀 관계가 자유로왔다는 것은 부족 국가가 출현한 이후에도 전해 내려온 
원시 시대의 유습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가장 느리게 변화하는 제사 
의식에서 보존되어 왔는데,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고구려와 부여의 백성들은 10월의 제천 행사 때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큰 무리를 이루어 연일 먹고 마시며 노래와 춤으로 밤을 지새웠으며, 이 
기간은 "귀천이 없는 절기"로서 이 기간 중 남녀간에 생긴 애정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주11) 신라에서도 제천 행사 때에는 남녀가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일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즐겼다. 고구려인들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곧 결혼을 
하였으며, 이러한 풍속은 이미 유교 윤리를 익힌 중국인들의 눈에 음란하게 보일 
정도였다.
  또한 고려 시대에도 자유로운 남녀 관계가 일반 백성들 사이에는 많이 남아 있었다. 
중국 송나라 서경이 고려 사회를 보고 쓴 '고려도경'에는 남녀가 구별없이 시냇가에서 
옷을 벗고 목욕하며, 결혼하는 데 있어서 "가볍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고 놀라고 
있다. 고려 시대의 종교 행사인 연등회, 팔관회 등에서도 뭇 남녀가 집단적으로 자리를 
같이하여 즐기었다.
  조선 시대에 와서 유교를 숭상한 양반들에 의해 '남녀 상열지사'라고 매도당한 고려 
시대의 고려 장가는 자유로운 남녀 관계를 전해준다.

  얼음위에 댓잎자리보아 임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얼음위에 댓잎자리보아 임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정둔 오늘 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하략)(주12)

  (전략)
  삼장사에 불공드리러 갔더니
  그 절 주지스님 내 손목을 잡더이다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나거들랑
  조그만 상좌중아 네말이라 하리라
  더러듕성 다리러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위 다로로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같이 울창한 곳 없거니
  (하략)(주13)

  원시 사회의 초기부터 부부와 자식으로 구성된 단혼 가족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으리라는 가정은 기존의 모계제나 부계제 가족에 대한 상과는 맞지 않는다. 
모계제와 부계제의 문제에 대해 로위는 순수하게 모계적이거나 순수하게 부계적인 
사회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버지를 전혀 계산에 넣지 않는 모계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계제와 부계제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것이었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로위는 가족은 모계와 부계 양계적 원칙으로, 동족 
조직은 단계적 친척 관계로 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가족 단위는 언제나 어머니와 
아버지, 그들의 자식들로 구성된 반면, 친족 조직은 모계나 부계 어느 한 편으로 
되었다는 것이다.(주14) 여기서 모계냐 부계냐는 가족의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 상속이 모계를 따르는가 부계를 따르는가를 규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친족 제도가 모계냐 부계냐를 결정한 주요한 요인은 그 사회의 주요한 
산업과 그 담당자가 어느 쪽이냐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물려주어야 할 기술과 전통, 
사회적 유산 혹은 귀중품이나 도구 등 재산의 소유자가 어느 쪽이냐에 따라 모계냐 
부계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머덕의 '민족지'에 따르면 약 862개의 원시 사회 중 모계제 
사회는 약 100개 정도인데, 이는 원예 농경의 형태를 갖는 호미 경작 사회이고, 
부계제는 대개 잉여물이 생기는 농경이나 가축 사육 사회라고 한다.(주15) 원시 
농경의 담당자가 주로 여성이었고, 농경, 목축의 담당자가 주로 남성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는 식량 조달에서 남녀의 위치와 상속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즉 원시 시대에 부계가 발달하는 주요한 요소는 식량을 획득하는 데서 남자가 
차지하는 위치였을 것이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역시 그 자식과 강력한 
유대로 묶였다.
  그러나 또한 앞의 예로부터 모계제가 좀더 원시 시대 초기의 가족 형태이고, 
부계제는 보다 후기의 형태일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잉여 생산물이 생기는 
단계는 원시 시대가 문명으로 넘어가는 시점으로 원시 농경보다 후기이다. 또한 
부계는 부부 관계가 보다 안정적이고 단혼이 보다 확립된 경우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부계는 모계 가족보다는 좀더 후기에 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원시 시대의 
대부분의 경우에 여성들이 식량 획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모계 가족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모계 씨족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러한 모계 씨족의 존재는 현존하는 원시 부족의 경우 외에도 여러 나라의 신화와 
전설, 단어의 어원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대개의 건국 신화나 영웅 설화를 보면 
그 어머니는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 명백하지만 아버지는 여자가 길을 가다 알을 주워 
먹고 자식을 낳았다든지 하는 식으로 명백하지 않으며,(주16) 부권이 확립된 후세에 
와서야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식으로 덧붙여진 경우가 많다.
  또 단군 신화의 '웅녀'이야기, 성명의 성자가 여자가 낳았다는 뜻을 가졌다는 사실, 
중국의 고대 성씨에 여자 변을 가진 성씨가 많다는 것 등등이 모계 씨족의 존재를 
말해준다.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관습상 신랑과 신부의 어머니가 성이 같아선 
안된다.(주17)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신라 상대의 석씨와 김씨 제왕이 박씨인 혁거세의 제사를 
지낸 것은 혁거세가 그들의 외조나 외조의 외조가 되기 때문이었으며, 신라 하대의 
박씨왕이 김씨왕의 제사를 행한 것도 같은 이유였는데, 이는 모계의 유습이다. 이러한 
모계의 유습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까지 남아 있었으며 거의 완전히 부계로 바뀐 
것은 조선 시대 후기에 와서였다.
    3) 장가 오는 남자
  노동에서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과 함께 가족이 여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모계제로 인해 
여자는 동일한 씨족에 속하고 남자는 다양한 다른 씨족으로 흩어진다는 사실은 원시 
시대의 여성 우위의 현시적 기초였다. 즉 모계 씨족의 족외혼 규칙에 의해 남자들은 
결혼을 하게 되면 자신이 태어난 씨족을 떠나 다른 씨족으로 옮겨 갔다.
  성경을 보면 창세기 2장 24절에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또 리빙스턴은 '남아프리카에서의 전도 여행과 탐험'에서 
여성들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토인 부족의 생활을 전해주고 있다.(주18) 
특히 잠베이의 바론다인들은 여성들이 평의회를 열며 결혼한 남자는 자신의 부락을 
떠나 아내의 부락으로 옮겨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는 장모에게 평생 동안 나무를 
공급할 의무를 진다. 만일 이혼하면 자식은 어머니의 소유로 남는다. 그 대신에 
여자는 남자를 부양한다. 몇몇 부부의 경우이긴 하지만 남자는 결코 반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리빙스턴은 전해 주고 있다. 그리고 여자를 노엽게 한 남자에게는 
굶기는 벌을 내렸다. 또한 당시 대우혼이 행해지던 이러쿼이 세네아카족 내에서 
수년간 선교 활동을 한 A.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여성들은 다른 씨족의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모든 물건은 공유였으나 너무 
게을러서 자기 몫의 일을 하지 못하는 남편이나 애인은 가련하게도 여기서 
제외되었다. 그가 아무리 많은 자식과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느 때고 명령 
한마디면 봇짐을 싸고 나가야만 했다. 그가 이 명령에 거역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거역하고서는 배겨날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씨족으로 돌아가든가(대개의 
경우 그랬지만)다른 씨족에서 새로운 혼인 상대를 찾아야 했다. 여성은 씨족 내에서, 
그리고 모든 곳에서 최대의 권력자였다. 여성들은 필요할 때는 족장을 파면하여 일반 
졸병으로 만드는 일까지도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할 수 있었다.(주19)

  이런 모계 사회의 유풍은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해모수와 유화 아씨가 야합하는 대목을 보면 "서민은 
서민과 결혼하나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가서 폐백을 드리고 사위됨을 재걸 
삼걸 한 위에 그 부모의 허락을 얻어 결혼하며, 그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하여 그 집에 머슴이 되어 3 년의 고역을 다하고 딴 살림을 차리어 자유의 
가정이 되는 것인고로"(주20)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여전히 모계 씨족 사회의 결혼 
풍속이 잔존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풍속은 조선 전기까지도 약간의 
모습을 달리하면서 꾸준히 유지되었다. 즉 고려 시대까지는 결혼한 딸과 사위와 
외손자를 포함하는 가족, 사위의 입장에서 보면 장인, 장모를 포함하는 가족이 
이상적인 가족이었다. 장가간다는 말도 '장인,장모의 집으로 간다'는 뜻이다.(주21)
  이러한 제도는 조선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유명 무실하게 되었는데, 그 명맥만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즉 혼례시 신랑이 신부집으로 초행을 하여 3일을 지내고 함께 
시집으로 가는 풍습이 그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문이나 지역에 따라서는 
석달이나 때로는 해를 넘겨 '달묵이', '해묵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주22)
  현존하는 원시 사회를 총체적으로 분석한 결과, 원시 농경 사회는 모계제이며, 
대부분의 모계제나 원예 농경 사회에서는 모처제의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주23) 원시 사회의 모계제는 여성의 생산 노동에서의 위치와 함께 원시 
시대 여성의 높은 지위를 결정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4)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원시 사회의 여성의 지위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여성의 모성이 
존중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생산과 가족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의 반영이며, 또한 
당시의 평등한 생산 관계의 반영이다. 즉, 생산이 다른 사람을 최대한 착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삶 그 자체를 위해서 행해졌기 때문에 모성을 
희생하면서까지 노동을 강요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출산은 언제나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로서 그것에 관한 많은 전통적 관례가 있으며 
흔히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 원시 사회는 모성이 법과 관습에 의해 보호되고 신성한 
대상으로 간주되며, 그녀 자신은 자신의 처지에 긍지와 행복을 느끼는 이상이 
실현되는 사회였다. 말리토프스키에 따르면 멜라네시아의 여자들은 한결같이 자식에 
대한 열렬한 갈망을 보여주며,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이러한 그녀의 느낌을 
지지하고 그녀의 성향을 조장하는 동시에 관습과 관례에 의해 그것을 이상화한다. 
관습에 의해 임신부는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되며, 이는 원주민의 실제적 행동과 감정 
속에서 완전히 현실화되어 있는 이상이다.
  많은 원시 사회에서 월경 중이거나 출산을 맞은 여성들을 공동체 전체가 보호하고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부락내에 산옥을 두어 월경 중인 여자, 임산부들이 들어갔다. 
월경 중인 여자는 8--9일, 산부는 50여일 정도를 여기서 지냈다. 이런 풍습은 모자에 
대한 공동체 전체의 책임과 출산의 공동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 월경과 출산을 
존중하여 여자가 성장하여 '월경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면 씨족신의 축복을 받는 
사건으로 여겼다. 몇 년전 일본의 오끼노시마에서 행해진 풍속 조사에서, 첫 월경을 한 
딸을 집안과 마을에서 축복하는 행사가 있다는 사실이 보고되었다.(주24) 월경을 
비밀스럽고 수치스러우며 불결하게 여기게 된 것은 문명 사회 이후의 일이다.(주25)
  문명 사회는 임신 역시 부끄럽고 사적인 일로 치부한다. 임신한 여성의 모습은 보기 
흉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20세기 초 한 독일의 신사는 여자에게 국회의원 
피선거권을 주지 말자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의회의 
연단에 선 임신부를 상상해 보는 것이 좋다. 얼마나 '비미학적' 인가."(주26)
  그러나 인류 최초의 미술품에 속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문명 사회와는 상반된 
원시인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인류 최초의 예술 작품의 하나인 이 여인상은 풍만한 
젖가슴과 불룩한 배를 한 임신한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는 생명의 
생산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숭배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태어난 아이에 대한 공동체의 공동 책임이라는 의식과 이를 강조하는 문화적 
양식들도 발전했다. 일본의 민간 전승에는 '치오야'라는 풍습이 있는데, 이는 부락 
내의 임산부의 동년배, 즉 같은 연령층의 여성이 태어난 아기에게 첫 젖을 먹이는 
것을 말한다. 태어난 아기가 그 생모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속하는 
것임을 표현하는 풍속이다. 출산과 수유 뿐만 아니라 양육도 공동화되어 있었다. 
일례로, 일본에는 지금의 탁아소와 같은 전문 양육 시설이 있었다. 또한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집회소 제도와 상호 교육제가 있어서 
여자 어린이와 남자 어린이는 각각 집회소에 들어가 각종 상호 훈련을 하고 
어른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함께 성인식을 치르고 어른 집단에 
낄 수 있었다.(주27)
    5) 아버지, 성실한 보모
  대개의 원시 사회에서는 남성 역시 임신한 여성의 부양에서 양육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역햘을 공유하고 있었다. 현대 유럽의 부계 사회와 멜라네시아의 원시 
모계 사회에서의 아버지의 역할을 비교 분석한 말리노프스키의 연구에 의하면 현대의 
부계 사회보다 원시 모계 사회에서 아버지와 자식들이 훨씬 친밀하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었다.(주28) 현대의 부계 사회에서는 아버지의 권리가 확고한 데 반해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매우 소원하다. 이에 비해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하는 모계 사회에서의 아버지는 그 반대였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멜라네시아의 아버지들은 가장도 아니요, 그의 혈통을 자식에게 전승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생계의 공급자도 또한 아니다. 멜라네시아에서의 '아버지의 위치'는 
순수한 사회적 관계다. 이런 관계에서 아버지가 맡은 역할은 어디까지나 아내의 
자식에 대한 그의 의무일 뿐이다. 아버지는 '아이를 팔로 받기 위해' 존재한다. 
트로브리안드의 전형적인 아버지들은 근면하고 성실한 보모다. 그는 어린 아이가 아직 
유아일 때에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보모이고, 그가 아동이 되면 그들과 놀기도 하고 
업어주기도 하며 그들의 기호에 맞는 재미있는 오락이나 일을 가르쳐 준다. 사회적 
전통은 이러한 일들을 아버지의 소명으로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도 아버지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의무를 열심히, 그리고 기꺼이 수행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말리노프스키는 "일반적인 남성에 있어서 그들이 자식에 대하여 
애정적이고 부드러운 감정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명백하다"고 
말한다. 아버지에게 자식에 대한 아무런 특권이나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며, 그는 
그러한 것들을 획득하려고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특권이 없음으로해서 그는 
아버지로서의 본능을 자유스럽게 따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자녀 양육게 대한 남편의 공동 책임이라는 의식은 이를 강조하는 다양한 문화적 
표현들을 만들어냈다. 그 중 유명한 것으로 원시인들 사이에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쿠바드'라는 풍속이 있다. 이는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그 남편이 '공동 
책임'이라는 강력한 의식에서 같이 진통하고 같이 앓아 눕는 풍속을 말한다. 기록 영화 
'몬도가네'를 보면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가까운 곳에 있는 물 속에 들어가 진통의 
괴로움을 같이 앓으며 고행하는 아프리카인의 모습이 나온다. 이런 풍속은 아프리카뿐 
아니라 아메리카, 인도, 중국, 우리나라 등 각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인도에서 
남편은 아내가 진통을 시작하면 여자의 옷인 '사리'로 바꿔 입고 머릿수건을 동여맨 
채, 산실에 같이 누워 진통하는 흉내를 내는 습속이 있었다. 중국의 운남성이나 
지주성에서도 남편은 한 달 내지는 40일간 산부와 함께 누워 산욕의 괴로움을 
같이한다. 유럽의 피레네 산맥 지방에서도 이런 풍속이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세계 공통적인 풍습이 발견된다. 평안도 박천 지방에서는 
'지붕지랄'이라 하여, 산모가 진통을 시작하면 남편은 그 산실의 지붕위에 올라가 
용마루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또한 '상투잡이'라는 풍속도 이와 같은 
것이다. 산모는 아이를 낳을 때 삼신 끈을 붙잡고 힘을 주며 아이를 낳았는데, 이 삼신 
끈으로 남편의 상투를 이용한 것이다.

  남편은 산실의 문 밖에서 문기둥에 버티어 서서 창호지를 찢고 산실 안으로 상투를 
처박는다. 산모는 이 상투를 쥐고 서서 힘을 쓴다. 필사의 안간힘일 것이니 오죽 
아팠을 것인가. 혹 상투가 짧거나 늙어서 약해졌을 때는 '상투빌이'라 하여 가발로 된 
상투를 빌어다가 야물게 턱을 걸고 산모로 하여금 붙들게 한다.

  이 상투 삼신승 풍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민요도 전해져 오고 있다.(주29)

  우습세라 우습세라
  젊은 각시 아날때는
  제 남편의 상투쥐고
  울콩불콩 낳는다고

  또한 상투빌이에 관한 민요도 있다.

  이집저집 다니면서
  상투 상투 빌려 주소
  아 낳으면 은공 갚아
  천년만년 잊지않고
  그 은공을 갚겠다고
  앞길 바빠 뒷길 바빠
  
  마루 위에 앉아서는
  상투꽁지 길게 매고
  문창구무 한구멍에
  들이들이 밀었단다.
  각시각시 상투 쥐고
  이,이,힘 쓰면서
  애를 쓰며 당기더니
  상투머리 쑥 빠지자
  당콩 같은 빨간 애기
  말똥 말똥 빠져났네.

  이런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더라도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의 출산 후의 어떤 부담을 
공유하게 하거나 최소한 그녀를 동정하는 행위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사회적 
장치들이 모든 사회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쿠바드는 물론 현대의 입장에서 볼 때 
명백히 불합리한 관습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깊은 의미와 필수적인 기능을 보여준다.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두 사람이 결합하여 인간 가족을 이룬다는 것을 강조하고 
아버지와 자식을 도덕적으로 매우 친밀하게 만들며 전통적인 관습과 규범을 통해 
남성으로 하여금 자식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아이가 아버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쿠바드는 또한 출산이라는 창조 행위에 동참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열렬한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직접적으로 아이와 결부되어 있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자식을 
낳는 과정에의 참여가 제한되어 있다. 원시 사회의 아버지들은 쿠바드를 통해 창조의 
고통을 나눔으로써 아이와 아내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고, 태어나고 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을 명백히 하고자 했을 것이다.
  쿠바드는 또 출산의 고통에 대해서도 문명 사회와는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이브가 
죄의 대가로 출산의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성경 구절이 상징하듯이 문명 사회에서는 
출산의 고통이 여성의 저주받은 표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쿠바드는 출산의 고통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모든 위대한 것의 창조에 따르는 필수적인 고통으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자들은 자신이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여성들이 
임신출산에서 겪는 고통은 그들이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훨씬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만드는 소중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있기까지 그 어머니의 무한한 노고가 어려있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6) 우주 창생의 어머니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생산 노동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함께 당시의 지배적인 사회 
조직인 친족 집단에서의 여성의 위치는 원시 공산제 여성의 지위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은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존경을 받았다.

  여성이 가족 단체의 지휘자이며 선도자였다. 따라서 또 여자는 집안에서나 가족의 
일과 종족의 일에서도 높은 존경을 받았다. 여자는 싸움의 중재자이며 재판관이고 
또한 사제로서 예배의 일까지 맡았다.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성 속에는 무엇인가 신성한 성질, 예언자적 성질이 숨어 있다고 독일 사람들은 
믿는다. 그 때문에 그들은 여성의 충고를 존중하고 그녀의 의견을 듣고 따른다."(주30)

  우리나라에서도 여성이 제사를 주관하였으며, 무속 신앙에 나오는 산신, 삼신, 풍신, 
용신, 태양신 등과 신라의 일급 호국신인 나림, 혈예, 골화의 3산의 신도 여성이었다. 
또 삼신 할머니, 청실홍실 할머니 등의 이야기는 원시 시대에 씨족 내의 대소사에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전해준다. 제주도에 전해오는 한 민담은 당신 
사람들이 여성을 우주 창생의 어머니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옛날 선분대 할망이라는 키 큰 할머니가 있었다. 얼마나 키가 컸던지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다리는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쳤다 한다   이 거파는 
'성산봉을 빨래 바구니로 삼고 소섬을 빨래돌 삼아' 빨래를 하고 치마 자락에다 흙을 
담아 나르다가 흙이 새어 오늘의 소화산을 이루기도 하고 육지에 다리를 놓아주기도 
하고 주먹으로 봉우리를 쳐서 움푹 패이게 하거나 오줌을 누어 흙이 떠내려 가 섬을 
만들기도 하는 등 우주 창생의 어머니였다.(주31)

  이런 설화들은 모계 사회의 지도자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친근감 있는 경외심을 
표현하고 있다. 모계 사회의 모권은 가부장제 사회의 부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머니는 폭력이나 강제, 부에 기초하지 않은 자연적인 권위를 가진 존경과 애정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의 태내에서 여성의 억압과 착취를 가져오는 새로운 
힘이 생겨나고 있었다.

      (주)
  1. k.gough,the origin of the family, 정현백, (새로쓰는 여성의 역사, 원시고대편) 
여성사 연구회, '여성2' 창작사, 1988, 페이지 269에서 재인용.
  2. 정현백, 위의 책, P. 265.
  3. K.GOUGH, 앞의 책, 정현백, 앞의 글, P. 269에서 재인용
  4. 정현백, 앞의 글, P. 267
  5. 정현백, 앞의 글, P. 276
  6. 김철준, '동명왕편에 보이는 신모의 성격', '한국고대사연구', 지식산업사, 1975, 
P.37
  7. 예를 들면 사막 뀡의 암껏은 한 낮의 사막의 열기를 참으면서 알을 품으며, 
수컷은 부화된 새끼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80킬로나 떨어진 곳가지 날아가서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힐 위험을 무릅쓰고 앞 가슴털에 물을 담아와서 개끼들에게 먹인다. 
조류에서는 새끼를 기르기 위한 암수의 협력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새들은 
알을 번갈아 품으며, 어떤 새들은 암컷이 알으 품는 동안 수컷이 암컷에게 먹이를 
가져다 준다. 또 아프리카 청개구리는 암컷이 낳은 알을 수컷이 지킨다.
  8. 정현백, 앞의 글, P. 263
  9. 김용숙, '한국 여속사', 민음사, 1989, P. 27, PP. 60--61.
  10. 정현백, 앞의 글, P. 272에서 재인용.
  11. '북사' 고구려진, 한명숙, '조선시대 유교적 여성관의 원리론적 고찰',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 학위 존문, 1986, P. 48에서 재인용.
  12. 만전춘별사 의역, 고정희, '한국여성문학의 흐름', '또하나의 문화 제 2호', 
평민사, 1986, P.100에서 재인용.
  13. 쌍화점 의역, 위의 책, P. 101
  14. lowie,priitive society, 말라노프스키, 한완상 역, '미개 사회의 성과 억압', 
세계사상전집 20, 삼성출판사, 1981, p. 125에서 재인용.
  15. george peter murdock, ethnographic atlas, 1967, 정현백, 앞의 글에서 
재인용.
  16. '흠정 만주원류고'에 나온 청조 발상사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맏이 
은고륜, 둘째 정고륜, 막내 불고륜의 세 선녀가 있어 장백산의 천지에서 목욕하더니 
신작이 붉은 열매를 물고 와서 막내 선녀의 옷 위에 놓으매 선녀가 그것을 먹고 
잉태하여 아기를 낳고 이름을 포고리옹순이라 부르니 이 분이 만주 청횡계의 
시조니라."
  17. 아우구스트 베벨, 선병렬 역, '여성과 사회', 한밭, 1983.
  18. 같은책
  19. 모간, 최달곤, 정동호 공역, '고대 사회', 현암사, 1978.
  20. 신채호, '조선 상고사 상', 삼성 미술문화재단, 1977.
  21. 최재석, '한국 가족 제도사 연구' 일지사, 1983.
  22. 박혜인, '전통적 혼례의식에 나타난 한국 가족의 성격', '여성문제연구'.
  23. 정현백 앞의 글
  24. 묵자 책 29 참조
  25. 구약 성경에 보면 월경을 부정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출산한 여성까지도 
부정하다고 하였다. "여인이 피를 흘리는데 그것이 월경인 경우에는 7일간 부정하다. 
그 여인에게 닿은 사람은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그 여인이 불결한 기간 
중에 누웠던 잠자리는 부정하다. 그 여인의 잠자리에 닿은 사람은 옷을 빨아입고 
목욕을 해야 한다. 그래도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그 여인이 않았던 자리나 
않았던 것 위에 있는 물건에 닿은 사람도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그 여인이 
앉았던 자리나 앉았던 것 위에 있는 물건에 닿은 사람도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그 여자와 한 자리에 든 남자는 그 여인의 불결이 묻었으므로 7일간 
부정한다. 그 남자가 누웠던 잠자리도 부정하다.(구약성서 레위기 15장 19--24절) 
야훼는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여자가 아이를 배어 사내ㅔ 아이를 낳았을 때는 
월경하는 동안부정하듯이 한 주간 부정하다. 그리고 여인은 30일 하고 3일간 피로 
더러워진 몸이 깨끗하게 되기까지 성소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계집 아이를 낳았을 
경우에는 두 주간 월경하는 동안 부정하듯이 부정하다. 그리고 피로 더러워진 몸이 
깨0끗하게 되기까지 66일간 집에 있어야 한다.(레위기 12장 1--6절)."
  26. 베벨, 앞의 책, p.300.
  27. 묵자 책 31쪽 참조
  28. 말리노프스키, 앞의 책. pp. 31--37 참조
  29. 이규태, '이규태 걸작 선집',pp.204--206.
  30. 베벨, 앞의 책, p.30.
  31. 이부영, '한국 민담 속의 여성 원형상', 김열규 외, '여성의 전통상', 민음사, 
1985. pp.80--82. 

'심리학 > 여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급적 지위와 여성 문제  (0) 2020.04.28
땅에서 하늘의 절반으로  (0) 2020.04.28
고대와 중세 사회의 여성  (0) 2020.04.28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  (0) 2020.04.28
하늘에서 땅으로  (0) 2020.04.2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