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본가 계급 여성, 황금빛 예속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전래의 성별 분업을 타파한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에
있어서는 결정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성별 분업이 자본가 계급에 있어서는 아직
완강하게 지켜지고 있다. 노동자 중에서 여성의 비율이 40%에 달하는 반면, 자본가
중에서 여성의 비율이 단지 1.4%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서관모의 연구에 따르면 1985 년 현재 우리나라 경제 활동 인구 중 자본가 계급은
1.4%인 22 만 명에 불과한데, 그 중 여성 자본가는 전체 자본가의 1.4%로 겨우 2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주1)
사유 재산의 소유와 상속이 가족 관계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는 자본가의
가족이야말로 여성이 아직도 고전적인 역할, 즉 상속자를 낳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부일처제 가족이다. 자본가의 아내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일은 미래의 상속자를 낳아서 잘 키우는 일이다. 여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미래의
상속자를 낳아 기르는 것인 한, 여성이 사회 활동으로부터 배제되거나 최소한 남편의
보조자, 혹은 부차적인 담당자에 그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자본가 계급에게 있어서는
성별 분업이 더욱더 확고해졌다.
봉건제 사회의 가족이 하나의 생산 단위였던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 사회의 가족은
단지 소비의 단위이다. 자본가 계급의 여성들은 법적으로는 남성과 평등해졌지만,
실제로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봉건 시대보다도 더 좁은 영역에 갇히게 되었다. 봉건
시대 영주의 아내들은 남편 대신 장원의 경영을 맡아보고, 가신을 거느리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에 와서 가족과 생산이 완전히 분리됨에 따라 자본가
가족 내에서는 남편의 일과 아내의 일도 보다 더 확연히 구분되었다. 또한 봉건 시대
귀족의 지위는 귀속적인 것이었으며, 그의 토지는 신분과 함께 세습되는 영속적인
권리였다. 그러나 자본가의 지위는 끊임없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만 유지되는 것이다.
사유 재산권은 신분과의 결합이나 농민의 하급 소유권 따위를 떼어버리고 완전히
배타적인 권리로 완성되었지만, 그대신 그것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더욱더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빈둥거리고 사냥이나 다니는 것으로 소일할 수도 있었던
귀족에 비하면 오늘날의 지배 계급인 자본가들은 비교할 수 없이 바빠졌다.
자본가로서 성공하는 것은 거의 전적인 시간과 정력을 투자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여자들은 일차적으로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가 남편을 가진 여성이 자식을 돌보는 대신 구태여 험한 일에 뛰어들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다.
가족을 단위로 생각할 때 이러한 성별 분업은 가족이 살아가는 하나의 합리적인
방식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을 놓고 보면 이런 분업이 불평등의 기초가 된다.
자본가인 남편이 많은 부를 쌓아올릴 수 있는 반면, 임신, 출산, 육아 등에 전념하고
있는 그 아내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자본가 계급 내에서 법적인
평등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남성에게 예속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생산과
가족, 사회적 활동과 사적 생활의 분리가 진행될수록 부르주아 가족의 여성은 드높은
담에 둘러싸인 성에 갖힌 꼴이 되었다. 단지 그 담이 황금 벽돌로 되어 있다는 것으로
인해 이들의 예속이 잿빛이 아니라 황금빛으로 보이는 것이다. 엥겔스는 부르주아
가족의 눈부신 광휘에 숨겨진 본질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경우,
적어도 유산 계급에 있어서는 남편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어떠한 법률상의 특권이 없더라도 그에게는 지배자의 지위가
부여된다. 가족 내에서 남편은 부르주아지이며 아내는 프롤레타리아트이다." 부르주아
가족의 이러한 황금빛 지배 예속은 다음과 같이 찬미되고 있다.
흔들림 없는 지혜를 가지고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주인인 그가 모든 것을 다스린다.
지켜주는 자, 이끌어가는 자, 그리고 심판하는 자, 그는 부귀영화를 쌓아올린다.
그 밑에서, 이름난 철학자인 마틴 터퍼의 말을 빌면 "가정의 선량한 천사인 어머니,
아내, 여주인"이 훨훨 날개치고 다녔다.(주2)
자본가의 아내들은 착취한 부에 기생해서 산다는 점에서 노동자 계급과는 정반대의
사회적 위치에 놓여있다. 그러나 가족 내에서는 재산의 소유자인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다. 즉 이들은 이중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한편으로 이들은 남편을 통해서
지배자의 권리의 일부에 참여하고, 부유한 생활을 누린다. 이들은 자기 자신은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고 남편이 획득한 이윤에 기생해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사치와 낭비, 비생산성의 분야에서 명예 학위를 얻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가족
내에서 이들은 피지배자의 위치에서 불평등을 감수해야 한다. 특권과 부유한 생활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편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그들이 누리는 권리 역시 제약되고
불안정하다. 이들이 누리는 가장 큰 권리라고 해야 소비 생활의 담당자로서의
권리인데,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살기 빠듯한 노동자들과는 달리 자본가에게 있어
소비(노동자들이 일생 동안 뼈빠지게 일해도 도저히 한 번에 만져볼 수 없는 엄청난
돈을 단순히 사치와 방탕에 써버리는 자본가들의 어마어마한 소비)는 그의 부 전체에
비해 아주 적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의 지위는 단지 혼인을 통해서 유지되는데 혼인은 자본주의와 함께 매우
약화되었다. 자본주의는 세습적인 신분 제도와 결별함으로써 결혼의 자유뿐 아니라
이혼의 자유도 그 법전에 새겨넣었다. 그리고 이는 여성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남성이
우월한 지위를 갖는 사회에서는 보다 흔히 남성의 권리로 변한다. 물론 아직은 지배
계급들이 겉만 번지르르한 명예를 위해 사랑 없는 결혼을 유지하는 경우가 피지배
계급의 경우에서 보다 많긴 하지만, 법률과 강력한 관습에 의해 보장되던 봉건 시대
안방마님의 자리에 비해 현대의 '사모님'의 자리는 매우 불안정해졌다.
이런 상황으로부터 이들의 여성 운동의 목표와 방향이 나온다. 그것은 기존의 체제
내에서 남자들의 권리를 같이 누리는 것이다. 재산 상속권의 평등과 국가 기관에의
평등한 참여가 이들의 핵심적인 요구이다. 서구와 우리나라의 부르주아 여성 운동이
참정권 운동과 가족법 개정 운동으로 전개되어 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그나마 남성의 영역에 뛰어들어 개척을 하고 있는 2천
명의 여성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들이 개척자로서 온갖 편견과 불이익과 차별과
역경과 맞서 싸워왔으며, 이를 이겨내왔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2천여만 명 중에서 2천 명이 누리고 있는 남녀 평등의
권리가 나머지 1천 999 만 8천 명 여성들의 고통과 억압 상태를 상쇄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성공한 여성들의 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이들의 성공이 대다수의
상대적 빈곤과 소외를 이면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의 존재는 인구의 대다수를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고는 먹고 살 수 없는
노동자로 만드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이들 대다수 여성의 삶을 고려하지 않고는
남녀 평등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자본가로서, 이 사회의
지배자로서, (그들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층 계급 여성들을 억압하는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부르주아 여성 운동,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모든 여성에게 공통된 이해 관계"가 갖는 한계다. 게다가 자본가의 아내들은 대개
자본가 계급의 딸들로서 어느 정도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부동산 투기나 증권 투기
등 지하 경제 활동에 손대고 있는 경우도 많으며, 실제로 그 방면에서도 이미 확고한
명성을 구축했다. 이들은 자본가로서 성공하기에 (같은 조건의 남자들에 비하면)
장애가 많지만, 다른 계급과 계층에 비하면 오히려 유리한 위치에 있다. 노동자 계급
여성들에게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자녀 양육에 있어서도 이들은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더욱이 사회 활동의 법적인
자유 (특히 국가 기관의 고위직에의 진출 보장과 일정 비율의 할당 등)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이들의 문제는 점점 더 부차적인 것으로 축소되어 가고 있다. 남은 가장 큰
문제는 '사모님'의 지위에 안주하는 자기 자신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정권 획득과
가족법 개정 이후의 서구의 부르주아 여성 운동이 여성들 자신을 향한 '자기 개발'의
호소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여성 해방에 있어서 부르주아 계급
여성의 역할이 이미 끝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역할은 노동자 계급 여성의
어깨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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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노동자 계급 여성, 진퇴 양난
노동자 계급의 여성들은 자본가 계급 여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처지에 놓여 있다.
자본가 계급 가족의 가장 중요한 구성 원리는 재산을 지키고 상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 가족의 가장 중요한 구성 원리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는 노동 분업과 이에 기초한 생산 수단의
소유에 달려 있다. 봉건 사회에서 농노 남성은 주요한 생산 수단인 토지에 대한
점유권을 가졌으며 이는 남성을 중심으로 상속되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농민은
토지를 빼앗기고 무산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여성 지배의 기초도 잃어버렸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나성과 여성을 똑같은 무산자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똑같이 노동자로
만듬으로써 적어도 노동자 계급에 있어서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예속에 절반쯤
종지부를 찍었다.
자본가 계급과는 달리 사실 오늘날 노동자의 아내는 자식을 낳아서 키우는 일에
전념할 수가 없다.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여성들 자신도 나가서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여성들은 남자들과 함께 사회의 짐을
떠맡게 되었다. 노동자 계급 여성이 노동자 계급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88 년
현재 33.7%이고, 여성 경제 활동 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8.4%다.(주3)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는 1960 년대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했다. 여성 노동자의 증가율은
남성 노동자 증가율보다 훨씬 높다. 이는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노동자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됨으로써 가정 안과 밖을 축으로 한 노동
분업도 붕괴되었다. 남존 여비라는 '우주의 법칙'은 적어도 노동자 계급에게는 잘 안
통하게 되었다. 성별 분업을 결정적으로 붕괴시키고 여성을 대거 사회적 노동에
참여시킨 것은 자본주의가 여성에게 가져온 가장 중요한 진보이며, 다른 모든 진보의
기초이다. 여성들이 새로 떠맡은 짐이야말로, 그들이 가정과 사회에 대해 가지는
권리의 기초이다. 여성들은 생산 노동에 참여함으로써 생산의 주인이 되고, 사회와
역사 발전의 주체가 된다. 여성이 생산력의 주요한 담당자가 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수천 년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여성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는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를 해방이 아니라, 자본에의 예속으로 만든다. 여성은
가정에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그것은 보다 완강한 적에게 예속되기 위해서였다.
여성들은 노동자로서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자본의 착취와 억압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위치가 다시 노동자 계급 여성들의 가정 내에서의 지위를 열등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여성은 사회적 노동에서나 가정에서나 모순에 처하게
된다. 이런 모순은 다음과 같은 말에 요약되어 있다.
월요일 아침 그때부터 시작하는 일주간을 생각하고 나는 가정에 있는 여자들을
부러워한다. 그렇지만 일요일 저녁 하루의 청소를 끝낸 후에는 나는 그녀들을
동정한다.(주4)
직업을 갖든 가정에 머물든 그것은 자유지만, 그 자유는 진퇴 양난으로 귀결되었다.
이제 여성 노동자를 진퇴 양난에 몰아넣는 사회적 노동과 가사 노동의 문제들에 대해
살펴보자.
(주)
1. 서관모, '한국 사회 계급 구성의 사회 통계적 연구' , 김진규 외, '산업사회 연구',
한울, 1986. 이 중 개인 기업주가 1천 300 명, 고급 관리자가 600 명이고, 고급
공무원은 통계에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극소수이다. 2천만 여성 중에서 2천명, 이
0.1%의 여성들만이 그나마 자본주의가 가져다 준 남녀 평 등의 실질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 극소수의 성공한 여성들은 흔히 요즘은 여자도 능력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다는 증거로 거론되며, 우리 사회의 남녀 평 등의 표징이 되고 있지만, 역으로
성공한 여성은 극히 적다는 지표가 되고 있기도 하다.
2. e. j. 홉스봄, 정도영 옮김, '자본의 시대', 한길사, 1983, p.389.
3. 노동부, '노동 통계 연감', 1989.
4. 클로디 블로이엘, 김주영 역, '하늘의 절반' 동녘, 1985,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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