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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여자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과 여성

by FraisGout 2020. 4. 28.

2. 가사 노동

    1) 가사 노동이란?
  가사 노동하면 흔히 요리, 빨래, 육아 등의 노동을 연상한다. 그런데 요리나 빨래, 
육아가 곧 가사 노동은 아니다. 다같이 고추장을 만드는 노동이라도 집에서 하면 가사 
노동이지만, 고추장 공장에서 하면 사회적 노동이다. 빨래는 세탁소에서도 하고, 
육아는 탁아소나 유치원에서도 한다. 같은 노동도 가사 노동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있고, 사회적 노동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가사 노동은 무엇인가?
  가사 노동은 사회적 노동에 대비되는 말이다. 즉 사회적 단위(공장, 회사 등)에서 
사회를 향해(다른 사람들의 소비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가족의 
소비를 위해 행해지는 노동을 가리킨다. 가사 노동을 역설적으로 생산의 사회화의 
산물이며, 곧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봉건 사회에서도 요리나 빨래, 육아들의 노동이 
행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생산 역시 가족을 단위로 해서, 주로 가족의 소비를 위해 
행해졌다. 가족의 소비를 위해서 행해진다는 점에서 농업 노동이나 요리 등 식품 생산 
노동, 육아, 빨래 등의 서비스 노동은 모두 사용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같은 
의미를 가졌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생산과 서비스 노동이 점점 더 사회화하였고, 이 
과정에서 사회화되지 않고 가정에 남아 있는 노동이 가사 노동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사 노동의 영역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달에 
따라 점점 축소되고 있는 유동적인 것이다.
    * 가사 노동의 이중적 의미
  가사 노동은 여성에게 이중의 의미로 다가온다. 하나는 가족을 위한 자발적인 봉사, 
애정의 표현으로서의 의미이다.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 반찬을 만들고 집을 
꾸미고 밤참을 준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더욱이 
거기에는 자본가의 강제와 감시도 없고, 노동의 산물이 자기 것이 되지 않는 비애도 
없다. 거기에는 사회적 노동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당해야 하는 온갖 소외가 없다. 
노동은 애정에서 나온 자발적인 것이며, 그 결과는 가족이 향유한다. 따뜻하고 안온한 
가정을 꾸미는 일! '정말 여자로서 더 이상의 행복은 없을 지도 모른다.' 가정은 
사회적 노동에서 여성이 받는 소외를 보상해주고, 가사 노동은 사회적 노동에서 
소외된 여성들에게 존재 이유를 제공한다. 여성들은 가족에게 없어선 안될 존재가 
되며, 그것은 애정과 헌신이라는 후광으로 고귀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만큼 행복하지만은 않다. 현실에서 자발적인 봉사는 일방적인 
희생을, 고귀한 헌신은 무보수의 비애를, 자본으로부터의 자유는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동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사 노동의 부담은 사회적 노동을 장애물 경주 같은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후자의 측면이 더 지배적이 된다. 이것이 
가사 노동이 여성에게 갖는 두번째 의미이며, 보다 현실적인 의미다.
  가사 노동의 문제는 첫째로 가사 노동 그 자체의 문제, 둘째로 사회적 노동과 가사 
노동의 양립의 문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제 가사 노동의 문제를 하나씩 살펴보자.
    2) 가사 노동의 가치는 얼마?
    * 집에서 논다?
  우리나라 주부의 1일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한 연구를 보면 1988 년 현재 
8--9시간에 달한다. 가사 노동이 휴일이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주당 
56--63시간으로 우리나라의 평균 임노동 시간보다도 길다.(주43) 한 조사에 의하면 
막내 자녀가 4살 이하인 가정 주부의 가사 노동 시간은 평균 11.6시간이나 
된다.(주44)
  또 외국 주부의 1일 가정 노동 시간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1981 년 현재로 하루 
평균 6.6 내지 6.8시간의 가사 노동을 하고 있다. 주당 노동 시간은 46.2시간으로 
역시 이들 나라의 임노동 시간보다 길다. 최근의 한 미국 잡지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 
가정 주부들의 가사 노동 시간은 평균 주당 92시간이나 된다.(주45)
  사실, 가사 노동 시간은 정확히 잴 수도 없다. 아이는 끝도 없이 어머니의 손길을 
요구하고, 아내의 배려가 충분한 지점은 어쩌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가사 노동은 
안하면 금새 표시가 나지만, 해도 표시는 안나고, 해도해도 끝이 없는 노동이다. 
대부분의 가정 주부들은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잘 때까지 집안일에 매여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일하는 주부를 두고 사회는 '집에서 논다'고 한다. 남편은 아내를 
'먹여 살린다'고 말하고, 자식들은 어머니가 '그냥 집에 있다'고 한다. 아무리 일해도 
'그냥 논다'고 취급되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가정 주부의 운명이다.
    * 가사 노동의 가치는 얼마?
  하루 종일 일하는 가정 주부가 '그냥 논다'는 말을 듣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사 
노동을 해서는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 수 없는 노동은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가사 노동을 해서는 돈을 벌 수 없는가? 
가사 노동이 사회적 노동과 달리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가치를 
생산하는 데도 그것을 지불 받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남편의 임금 속에 가사 
노동의 가치도 들어 있는데, 그것이 표면상 나타나지 않아서 주부의 몫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둘러싸고 학자들 사이에 이른바 "가사 노동 논쟁"이라는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가사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급진적 여성 해방론자인 델라 코스타는 가사 노동이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잉여 
가치를 낳는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므로 가치는 물론 잉여 가치를 낳는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입각해 한때 가사 노동에 대한 임금 지불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또 세콤브는 가사 노동을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으로써 소상품 
생산과 같다고 보았다. 노동력의 가치에는 생활 자료의 가치뿐 아니라 그 생활 자료를 
최종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화시키는 노동인 가사 노동의 가치가 포함되며, 
주부가 생산한 가치는 그 가치를 포함한 노동력이 상품으로 팔림으로써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마르크스 경제학의 입장을 고수' 한다고 알려진 폴 스미스는, 
가치는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에서만 발생한다는 등의 이유로 가사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가사 노동의 가치 문제는 현실의 필요에 의해서도 제기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가정 
주부가 교통 사고를 당했을 경우 손해 배상이나 이혼시 재산 분할 청구권의 근거로서, 
가사 노동의 가치를 무엇에 근거하여 얼마로 평가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지난 1985 년 교통 사고를 당한 한 여성 노동자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재판부가 가사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에 대해 일용 도시 여성 근로자의 일당 4천 원을 
적용한 일이 있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가사 노동의 경제적 기여를 인정했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진일보한 것이지만, 이를 일용 여성 노동자의 일당으로 계산한 것이 
부당하다는 여론과 함께 가사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계산할 것이냐 하는 논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서구에서도 가사 노동의 가치 평가 문제가 주부들과 학자들의 관심사가 되고, 이를 
화폐로 계산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방법으로 고안된 것은 지금까지 5가지 
정도가 있다. 요리, 청소, 빨래, 가정 관리, 육아 등 각각의 가사 노동을 요리사, 
청소부, 세탁부, 보모 등등의 전문가에게 맡길 경우의 비용으로 계산하는 전문가 대체 
비용법, 가사 노동 전체를 가정부와 같은 사람에게 맡길 경우의 비용으로 계산하는 
총합적 대체 비용법, 가사 노동을 함으로써 하지 못하는 사회적 노동에서의 임금 
수입에 의해 계산하는 기회 비용법, 주부 자신이 가사 노동을 그만두고 사회적 노동을 
할 경우,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임금 수준에 의해 계산하는 요구 임금 
방법, 가사 노동의 가치에 대한 주부 자신의 주관적 평가액에 의해 계산하는 주관적 
평가법 등이 그것이다.
  이런 방법에 따라 가사 노동의 가치를 계산하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정영금 씨의 연구에 의하면 전문가 대체 비용법에 따른 가사 노동의 가치는 53 만 
8천 438원이고, 총합적 대체 비용법에 따르면 42 만 469원, 기회 비용법은 52 만 9천 
941원, 요구 임금 방법에 따르면 72 만 9천 201원, 가사 노동의 가치에 대한 주부 
자신의 주관적 평가 방법에 따르면 50 만 2391원이다.(주46)
  미국 '스타지'는 전문가 대체 비용법에 따라 미국 주부가 가사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연간 4 만 8천달러(약 3천 264 만원, 월 평균 272 만원)를 넘는다고 분석했다. 
그 내역을 보면 가사 노동 시간은 1주일에 무려 92시간 가량으로, 청소부로서 1주일에 
6시간, 연간 1천 825 달러(약 124 만원), 세탁부로 주당 4시간, 연간 696 달러(약 47 
만원), 요리사로 주당 15시간, 연간 1 만 4천달러(약952 만원), 웨이트리스로 1주일에 
7시간, 연간 1천 820 달러(약 123 만원), 가정 교사로 주당 10시간, 연 5천 2백 
달러(약 353 만원), 운전 기사로 1주일에 6시간, 연 3천 644 달러(약 247 만원) 
일하고 이에 심리학자로서 연간 1 만 4천 달러(약 952 만원)와 유모로서 연 4천 680 
달러(약 318 만원), 쇼핑에 1주일에 6시간, 연 6천 240 달러(약 424 만원)이다.(주47)
  이런 계산들 중 한 두 가지는 교통 사고시 손해 배상이나 이혼시 재산 분할의 
근거로서 현실적으로 유용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계산법들은 모두가 가사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다른 형태로 바꾸거나 다른 경우를 미루어 계산한 
것으로 어느 것도 곧장 가사 노동이 생산한 가치로 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는 
역으로 가사 노동의 가치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사실, 가사 노동의 가치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가사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사 노동을 통해 돈을 벌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사 
노동이 판매를 위해서 행해지지도 않고, 가사 노동자가 그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 
임금을 받고 고용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밥을 지어 팔면 돈을 벌 수 있다. 
또 식당에 고용되어 요리를 해도 임금을 받는다. 세탁소는 빨래를 해주고 돈을 
받는다. 간호원은 환자를 간호하고 임금을 받으며, 심지어 똑같은 가사 노동을 하고 
파출부는 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집에서 아무리 밥하고 빨래하고, 가족을 간호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쳐도 한 푼도 벌 수 없다. 가정 주부는 밥을 지어 팔거나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가족의 소비를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가사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준다.
  상품의 가치에는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가 있다. 사용 가치는 물건의 유용성이다. 
교환 가치는 하나의 물건이 다른 물건과 교환되는 비율로 나타나며, 상대적으로만 
표시될 수 있다. 이 교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 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 생산이고, 우리가 어떤 물건의 가치가 얼마인가라고 
할 때 그 가치는 바로 교환 가치를 뜻한다.
  가사 노동은 물건의 유용성을 증가시킨다. 쌀을 밥으로 만들고, 더러워진 옷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그것이 갖고 있는 유용성을 높인다. 이 유용성이 곧 사용 가치다. 
가사 노동은 사용 가치를 생산한다. 사용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서 가사 노동은 
유용하고 필요한 노동이다.
  그러나 가사 노동은 (교환)가치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노동자가 
음식을 만든다고 하자. 이 노동자의 요리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며, 음식물의 가치에는 
요리 노동의 가치가 포함된다. 그러나 집에서 요리를 해서 가족이 먹을 경우, 이때의 
요리 노동은 사용 가치는 생산하지만 '가치'는 생산하지 않는다. 음식의 사용 가치는 
가족의 사용, 즉 소비에 의해 실현된다. 사용 가치를 위한 가사 노동에 대한 대가는 
가족의 '사용', 즉 소비로 충분하다. '가치'란 원래 교환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즉 
하나의 상품이 얼마만큼의 가치(사용 가치가 아니라)를 가졌는가는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비율로만 표현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밥 한 공기의 가치가 밥 한 공기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밥 한 공기의 가치는 그것과 교환될 수 있는 다른 상품, 
혹은 화폐로만 표현된다. 밥 한 공기는 이를테면 쌀 두 공기, 혹은 500원의 가치로 
표현된다. 그러나 사용 가치는 다른 사용 가치와 비교될 수 없다. 자기가 먹은 밥 한 
공기의 사용 가치는 다만 밥 한 공기의 사용 가치일 뿐이다. 이때 밥 한 공기가 
500원의 가치로 표현되는 것은 그것이 교환을 통해 밥 한 공기를 생산하는 데 드는 
사회적 노동량이 다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량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용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은 사회적 평균 노동으로 전화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가치를 알 수 없다. 교환 가치는 상품 생산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상품 생산이 아닌 자급 자족을 위한 생산으로서의 가사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여기서 가사 노동을 소상품 생산에 비유하는 것도 잘못임을 알 수 있다. 가사 
노동이 소상품 생산과 같다는 주장, 가사 노동이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는 
주장은 노동력이 상품이 되었다는 사실을 일면적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고 가사 노동과 
노동력 재생산의 관계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가사 노동은 사회적 노동에 비해 소비와 
좀더 밀접히 관련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력을 직접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가사 노동은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를 위한 노동이다. 가사 노동의 
직접적인 생산물은 노동력이 아니라 음식과 같은 물질과 청소나 육아와 같은 여러 
가지 서비스다. 즉 유용성을 생산하는 것이지 노동력을 직접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력의 생산은 (출산을 제외하면)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등의 소비로만 이루어진다. 
소비와 소비를 위한 노동은 구분되어야 한다. 이것은 식사와 요리가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사 노동은 이 소비를 위한 유용성을 만드는 것이며, 판매를 위해 상품 
생산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가사 노동은 소상품 생산이 아니라 자급 자족적인 
생산이다.
  그러므로 가사 노동을 해서 돈을 벌 수 없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은 자명한 일이다. 돈을 벌려면 화폐와 교환을 해야 하는데, 가사 노동은 자급 
자족적인 노동인 것이다. 문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돈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사 노동만이 홀로 자급 자족을 위한 것으로 남아있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사용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서 가사 노동은 노동력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을 절감함으로써 노동력의 가치를 
낮춘다. 예를 들어 가사 노동을 하지 않고 이를 모두 상품으로 구입할 경우, 즉 음식을 
사서 먹고, 아이는 탁아소에 맡기고, 세탁은 세탁소에, 청소나 기타 잡일은 서비스 
센터에 맡길 경우, 생활비는 그 만큼 상승할 것이고, 임금이 높아져야 할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할 경우, 4인 가족의 최저 생계비가 150 만원이 든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음식을 집에서 만들어 먹고, 아이는 집에서 기르고, 빨래와 청소도 집에서 하는 것으로 
가정한 최저 생계비는 80 만원 정도가 된다고 하자. 이 경우, 가사 노동은 70 만원의 
가치를 절약한 셈이다(그리고 이것은 결국 노동자의 재산 형성에 대한 가사 노동의 
기여가 된다. 즉 직접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돈을 절약함으로써 재산 형성에 기여하는 
것이다). 자본은 이 사용 가치를 위한 생산으로부터 이득을 볼 수 있다. 만약, 가사 
노동을 통해 여성이 70 만원의 노동력 재생산비를 절약했는데, 남편을 통해 그 자신의 
노동력 재생산비로 10 만원만을 지급한다면 자본은 이를 통해 60 만원의 임금을 
절약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사 노동은 단순히 잔존할 뿐 아니라, 자본에 의해 
재생산되기도 한다.
    * 가사 노동과 사회적 노동간의 모순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생산 사회이다. 생산의 목적은 자급 자족이 아니라 판매이며, 
따라서 교환 가치가 지배한다. 그런데 가사 노동은 자급 자족적인 생산으로서 
자본주의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전자본주의적인 생산 방식이다. 즉 가사 노동은 
자본주의의 영역 외부에 있다. 상품 생산 사회에서 사용 가치는 가치로 인정을 받을 
수 없다. 가사 노동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유용성을 제공하지만, 교환 가치를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무가치한 것이 된다.
  자급 자족, 사용 가치의 생산이 주를 이루었던 봉건 사회에서는 여성이 가사 노동을 
한다는 것이 지금과 같이 고립과 무가치를 의미하지 않았다. 가사 노동 담당자로서 
여성의 경제적 역할 역시 남성과 마찬가지로 '생산적'인 것이었다.
  일단 상품 생산이 지배하게 되자 교환 가치가 전부이고 사용 가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자본주의가 생산의 각 분야에 침투하여 상품 생산을 확대할수록, 
(교환)가치의 힘은 점점 더 커지는 반면 사용 가치는 상대적으로 점점 더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 결국은 완전히 무시되어 버린다. 이것은 사회적 노동에 대한 가사 
노동의 종속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불평등을 
낳는 경제적 토대이다. 봉건 시대의 여성은 관습적, 법률적 차별 속에서도 
'생산자'로서의 위치를 가졌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의 여성은 법률적인 평등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노동인 가사 노동에 예속됨으로써 '소비자'의 위치로 전락하였다.
  가사 노동의 잔존으로 인한 여성의 가사 노^36^예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불평등이 순전히 경제적인 관계를 통해 재생산되게 하는 핵심적인 요인이다.
  대부분의 여성이 가사 노동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사 노동을 하는 여성의 
처지가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우선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과 가사 
노동만을 하는 여성은 차이가 있으며, 가사 노동만 하는 경우에도 남편이 가족의 
생활비에 충분한 임금을 버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차이가 있다 (물론 여기서 
남편의 임금이 높은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각 경우를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3) 주부의 현실
    (1) 중간층 주부
  돈 잘 버는 임금 노동자 남편을 가진 살림하는 아내라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상이 
탄생한 것은 자본주의가 독점 단계에 들어서면서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우선,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관리, 행정, 전문, 기술, 사무직 등 정신 
노동 분야가 점점 확대되고, 그 중요성이 증가한다. 이에 따라 이전에는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던 정신 노동자들이 자본의 지배하에 들어와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자본은 
이들의 공급과 재생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가장 안정적이고도 
값이 싸게 먹히는 방법은 이들에게 가족 임금을 주어 그 아내들이 가사 노동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독점 단계에서 막강한 힘으로 발전한 노동 운동을 
약화시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즉 정신 노동자와 육체 노동자,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를 차별하고, 이들 사이에 격차를 형성하여 노동자를 분열시키는 것이다.
  이들 정신 노동자, 혹은 숙련 노동자들은 미숙련 단순 육체 노동자들과는 달리 
언제든지 대체가 가능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직종에 여성을 고용할 경우, 모성 보호와 탁아소 등의 비용과 관리의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이런 직종에는 주로 남자들이 고용되었다. 중간층 남성들은 점점 더 임금 
노동자가 되었지만, 중간층 여성들은 임금 노동자가 되지 못하고 그들의 아내로서 
가정 주부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독점 단계에서 구조저이고 항상적인 문제로 대두한 실업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여성들이 그 일차적인 희생양이 되었다. 독점 단계에 와서 '여성의 본분은 가정을 
지키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강화되었고, 여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업자로 
가정으로 돌려보내졌다.
  여성 노동자에 대한 무자비하고 가혹한 착취는 실제로 가정을 파괴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노동력의 재생산이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대해 자본은 노동력의 재생산을 
사회화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함으로써 여성의 가족에 대한 봉사와 
희생을 통한 가족 유지를 꾀하였다.
  이 결과 노동자의 상층에 속하는 소수의 남성들이 가족 임금을 지급받게 되었고 
그들의 아내는 가정을 지키도록 권장받았다. 자본은 남성 노동자에게는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으며, 여성들에게는 상류 계급의 여성과 같은 생활을 
꿈꾸도록 선전하였다.

  이제 중간 계급의 여성은 이전에 상류 계급의 여성들을 위해 마련되었던 지위를 
더욱더 열망할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에 숙녀라는 개념은 연약하고, 게으르고, 
순결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가정 내의 요구에 충실한 여자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가치는 그녀의 아름다움, 기질 등의 장식적인 가치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여인은 결코 
임금 노동자일 수는 없다. 이러한 이상은 너무나 확고하고 거의 종교적인 성격까지 
띠어 '진정한 여성다움의 숭배'라고까지 불리웠으며 여성들로 하여금 그 이미지와 
미덕에 무조건적으로 추종할 것을 요구하였다.(주48)

  이러한 여성의 모습은 앞의 광고에서 전형적이고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다. 
즉 정열적이고 강하고 유능한 남편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나약하고 비생산적이긴 
하지만 성적 매력이 있는 여성이다.
  중간층 가정 주부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여성상'이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집에서 살림하는 여성이 갖는 모든 속성이야말로 '여자답다'는 말 속에 
표현되는 찬미와 멸시(그리고 멸시로서의 찬미까지)를 모두 담고 있다.
  이들은 하층 주부나 혹은 생산직 여성 노동자들의 '소망'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생계의 절대적인 압박이나 사회적 노동에서 자본으로부터 당해야 하는 온갖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중간층 가정 주부의 실제 
처지는 그렇게 이상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J. 버나드의 연구에 따르면 기혼 여성이 기혼 남성보다 정신 건강 상태가 훨씬 
나쁘며, 전업 주부가 취업 주부보다 더 고독해 하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낀다고 
한다.(주49) 특히 산업화와 함께 주부들의 신경증이 남성보다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신경증 증세를 나타내는 여성의 수는 1950 년대에는 남자와 같은 정도였으나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1960 년대 이후부터는 남자보다 훨씬 많아졌다. 이들이 
겪는 문제는 무가치함, 사회적 고립, 경제적 의존, 자아 실현의 위기 등이다.
    *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
  가정 주부가 부딪치는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가사 노동이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행해진다는 데 있다. 가사 노동은 자본주의 외부에 있으며, 따라서 '사회'의 외부에 
있다. 사회적 노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사 노동은 외딴 섬과 같은 존재이다. 가사 
노동은 안 할 수 없고 필요하고 유용한 노동이지만 사회에서는 잊혀진 노동이다. 이는 
가사 노동의 담당자가 사회의 '외부'에 있고 따로따로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사적인 영역에 갇혀 있다. 생산의 사회화가 엄청나게 진전되어 전세계를 
상대로 한 생산이 이루어지고, 지구가 하나로 된 시대에, 따라서 인간의 사회성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가정 주부는 가정이라는 사적이고 좁은 영역에 갇혀 있다.

  우리 사회의 주부는 자유로이 다닐 수는 있으나 그녀에게는 특별히 가볼 만한 곳이 
없다. 따라서 그녀의 감옥에는 담이 필요없다.(주50)

  가정에 들어감과 동시에 그녀의 사회적 존재는 잊혀진다. 그리고 사회적 존재로서 
잊혀진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잊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존재를 더 이상 
갖지 않게 됨과 동시에 가정 주부는 자신의 이름도 더 이상 갖지 않게 된다.
  사회적인 활동이 단절됨과 함께 자기 자신의 삶도 단절된다. 그녀는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자신으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녀는 
^456,356,356,356,123^의 아내, ^456,356,356,356,123^의 어머니로만 존재한다. 그녀의 
활동은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이 전부이다. 그녀 자신의 삶은 남편과 자식의 삶에 
형체가 없이 녹아버린다. 그러나 대상화된 자신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 또 남편이 
아니다(이것은 그리 자명하지 못하다). 자신의 삶은 남편의 삶에 녹아들었지만, 남편의 
삶은 자기의 삶이 될 수 없다. 나의 삶은 어디론가 없어지고 남는 것은 공허뿐이다.

  아내는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남편보다도 우수한 실력을 인정받고 자아의 실현이 
보장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남편과 결혼함과 동시에 모든 것이 달라져 
버리고 만다. 남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아내에게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당신의 모습, 
천사같이 아름다워'라든지 '당신은 아이를 낳는다는 소중한, 소중한 일을 하는거야' 
라고 속삭여 왔다. 아내도 그것이 행복인 줄 알았다. 그러나 중년이 되고 아이들도 다 
큰 지금에 이르자 부인은 지독한 상실감에 사로잡혀 신경 쇠약에 걸리고 만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느낌,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이다. 아내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면서 조금씩 무너져 버린다. 자신의 
손으로부터 떠나가 버린 자신의 삶을 통곡하면서.(주51)

  가사 노동에 자신의 삶을 바친 대가는 '자아의 위기'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삶, 무너져 내리는 삶. 이것이 가사 노동을 통해 이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하는 
운명이다. 얼마 전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가정 주부로 있던 한 여인이 자기 실현을 
하지 못해 고민하다가 자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렇듯 가정 주부들이 겪는 자아 
정체성의 위기는 점점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 퇴보와 사회적 무능력
  가사 노동을 여성만이 담당함으로써, 그리고 여성이 가사 노동만을 담당함으로써 
생기는 또 하나의 문제는 여성들이 뒤처지고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W부인은 결혼할 당시만 해도 자신이 남편보다 학벌, 가문, 키 등 모든 면에서 
객관적으로 우월했기 때문에 남편의 횡포에도 의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W부인은 결혼 7 년쯤 후부터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모든 
면에서 W부인보다 열등했던 남편은 직장에서 인정을 받아 승진을 거듭하면서 
경제적으로도 능력이 있는 어엿한 중년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W부인은 '젊은 
날의 매력마저 없어진 평범한 가정 주부'일 뿐이었고, 매일 집안에서 애만 키우다 보니 
점점 열등해지고 무능해져 있었다. 나중에는 남편까지도 W부인을 무시하는 듯이 
행동했고, '네가 뭘 아느냐'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W부인은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고 남편을 미워하기에 앞서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게 되었다.(주52)

  가정 주부가 무능하고 사회에서 뒤처지게 되는 것은 가사 노동이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가사 노동이 대개 단순 반복적인 육체 노동이고, 낙후되고 후진적인 
노동이기 때문이다.
  가사 노동은 우선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낙후되어 있다. 가사 노동을 
통해서는 사회 전체에 대한 안목이나 사회 생활의 경험이나, 사회적 인간 관계의 
경륜이나, 혹은 적어도 한 가지 일에 대한 직업적인 숙련, 그 어느 것도 쌓을 수 없다.
  게다가 가사 노동은 소비를 위한 노동이다. 아무리 일해도 표가 나지 않는다. 밥을 
아무리 해도 먹어 없어지고, 그릇을 닦고 또 닦아도 또 수북이 쌓이고, 방은 쓸고 
쓸어도 또 더러워진다. 끝도 없는 노동이 이어지지만, 그 노동의 성과는 어떤 형태로도 
쌓이지 않는다.
  가정 주부는 이러한 단순 반복적이고 쌓이지 않는 노동에 지쳐 나가떨어지게 된다. 
가사 노동의 후진성은 그것이 사회화되지 않고 개인적인 부담으로 남아있는 데서 오는 
것이다. 개인적인 부담으로서의 '집안일'은 원시적이고 손이 많이 가는 방식으로 
언제까지나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주부들을 지쳐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가사 노동은 후진적인 생산 부문이다. 사회적 노동은 눈부신 속도로 엄청나게 
발달하고 있으며, 나날이 새롭고 많은 양의 지식과 훈련, 경험을 필요로 한다. 이에 
비해 가사 노동은 상대적으로 정체되고 후진적인 영역이다. 흔히 사회 활동에서 
무능하여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에게 '집에서 애나 보지'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가사 노동에 대한 실제 이하의 비하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는 가사 노동의 
상대적인 위치를 표현한다. 가사 노동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쉽고, 따라서 가장 천대를 
받는 노동이다.
  가정 주부가 직장 여성이나 남편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지금과 같이 
사회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데 몇 년간 가사 노동만을 하다 보면 사회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기 쉽다.
  이 때문에 특히 고통과 갈등을 겪는 것이 중간층 가정 주부들이다. 남편들이 대개 
가장 앞서가는 정신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사 노동과의 격차가 더욱더 
두드러지고, 대개 고학력인 이들 주부들은 결혼할 무렵엔 남편과 대등했는데, 세월이 
감에 따라 서로 다른 노동의 영역이 그 사이에 심연을 가로놓기 때문이다. 이 심연을 
메우려는 가정 주부들의 노력은 안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효과는 
미지수이다.(주53)

  남편이 밖에서 하는 일하고 비교를 하면 생각만 해도 속상해서 죽겠다. 나는 공부할 
것 다하고 파출부도 아니고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면 너무 한심하다. 남편은 
집안일 하찮게 보지는 않지만 쉽게는 본다. 골치 아픈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남편은 
사회에서 자꾸 성장해서 앞으로 나가고 나는 집에만 있으니까 아무래도 퇴보하는 것 
같다. 나중에 말도 안통할까봐 계속 조바심이 나고 마음이 급하다. 일부러 신문은 
경제난까지 샅샅이 본다. 남편하고 거리감이 생길까봐. 그건 또다른 압박감이다.

  요즘 사회 생활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이들도 새롭게 배우는게 너무나 많은데 그런걸 
보니까 이러다가 내가 아빠하고 아이들하고 말이 안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점 점 나혼자만 모르고 소외될 것 같다. 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9시 뉴스라고 
토요일날 심야 토론은 꼭 본다. 그런거라도 봐서 남편한테 뒤지는 것을 좀 메꾸려는 
것이다.

  편하기는 집안일이 편하다. 학교에 가면 내가 직접 수업이라는 내 일을 맡아서 하고 
담임으로서 아이들을 지도해야 할 입장이니까 계속 신경을 써야 하고 또 다른 문제도 
생기고 하니까 갈등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런 갈등이 있는 만큼 발전도 하게 된다. 
좀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을 직업적으로 하는 거니까. 집안일은 
단조로우니까 집에 있으면 퇴보하는 것같고 집안일은 쉬는 만큼 쌓이기만 하는 거니까 
성취감이 전혀 없는 일이다.

  여성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남자들은 흔히 '남자들은 돈 버느라고 고생하는데 
여자들은 집에서 남편이 벌어오는 것 갖고 살림만 하면 되니 얼마나 편하고 좋으냐, 
배가 불러서 하는 소리다'라고 한다. 물론 사회적 노동에 비해서 가사 노동은 편하다. 
그러나 남녀의 위치를 바꾸자고 한다면 그러자고 할 남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편한 만큼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고생하지 않고, 애쓰지 않고 얻어지는 것 
중에 값진 것은 없으며, 새로운 것을 향해 끊임없이 자기 개발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은 퇴보와 사회적 무능, 천한 대접뿐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 편한 
지위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의 강요라는 데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남은 가사 
노동은 여성 종속의 최후의 사슬이다.
    * 천직인가, 천직인가?
  가정 주부는 우리 사회 최후의, 최하의 천직이다. 그것이 최후의 천직인 이유는 가사 
노동이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듣기 좋은 말과는 달리 직업에는 귀천이 있는데, 
가장 천한 직업도 직업이 없는 것보다는 귀하다.
  가정 주부는 영원한 아마추어다. 가정 주부가 되는 데에는 어떠한 직업적 훈련도, 
직업 정신도, 전문성도 필요하지 않다. 가정 주부는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애도 키우고 숙제도 지도하고 장도 보고 가계부도 쓰고 꽃도 키우고, 남편, 
자식과 상담도 하지만 요리는 요리사보다 못하고, 빨래는 세탁소 주인만큼 할 수 
없으며, 아이 교육은 교사만큼 할 수 없고 화초를 정원사만큼 잘 가꿀 수 없다.
  조금이라도 전문적 훈련이나 교육이 필요한 노동은 전부 사회화된다. 남는 것은 
단순 반복적인 육체 노동, 전문적인 훈련이나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 노동이며, 
남편과 아이의 '시중을 드는 일'이다.
  '시중을 드는 일'. 이것이야말로 현재 가사 노동의 본질이다. 린 존스턴의 연재 만화 
'좋든 나쁘든'을 보면 아내가 온 집안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쳐다보고 있다. 그녀는 
고함친다. "다른 사람들의 뒤를 따라 다니며 치우느라고 내 인생을 다 보냈어. 맙소사, 
이것이 그들이 내게 바라는 거야!!!"(주54)
  가사 노동은 가족원의 소비와 관련된 노동이다. 밥을 하고, 밥상을 치우고, 이불을 
개고, 옷장을 정리하는 일은 자신의 생활과 관련된 일이다. 이것을 각자가 자기 자신의 
일로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시중드는 일이고, 따라서 시중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해야 한다면, 그것은 시중이며, 그 사람은 하인과 
같은 존재가 된다.
  바로 이 때문에, 가사 노동은 결코 자발적인 애정으로 될 수 없으며, 일방적인 
희생이 되어 버린다. 이 관계 속에서 남편과 아내는 주인과 종이 된다. 심지어 
자식에게조차 여성들은 시중꾼, 종이 된다. 가사 노동을 여성의 천직으로 규정하는 한, 
그것은 천직이 된다. 가사 노동을 통해서 여자들은 하찮고 시시하고 비천한 것에 
동화된다.
    * 갈등과 불안
  가정 주부가 겪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가사 노동과 사회적 노동 사이에서의 
갈등과 번민이다. 자본주의는 가사 노동을 사회적 노동과 분리시켜 여성의 일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해체되고 점점 축소되는 영역으로서 였다. 주부가 하는 일은 점점 
중요성과 비중이 줄어들고, 가정 주부는 점점 해체되어가는 집단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정 주부는 탄생과 동시에 소멸해갈 운명을 타고 났다. 주부의 위치는 이미 그리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며 사회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더욱더 불안정해진다. 이는 가정 
주부들이 정체 의식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주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일단 주부로 집에 눌러 앉은 이후 제대로 된 직장에 정규 
직원으로 재취업하기는 하늘에 별따기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노동을 하기에는 육아를 
비롯해 걸리는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는 여성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전문직 여성의 수도 
많아진다. 집에서 살림하는 여성의 전형성도 점점 퇴색한다. 직업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이 점점 바람직한 여성으로 이야기된다. 광고 문구마저 바뀌고 있다.

  캐리어 우먼의 승용차, 엑셀 TRX
  일하는 여자는 아름답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가치를 더욱 높여가는 캐리어 우먼. 
일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자기만의 시간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간다.

  여자는 자기 세계를 가질 때 아름다워 진다. 그렇게 자신있게 사는 여자일수록 
파트너의 선택은 르망 스패셜 팩!

  양쪽에서 가정 주부의 위치는 위협을 당한다. 중간층 가정 주부들은 자아 실현의 
욕구와 가사 노동 부담, 현모양처와 캐리어 우먼 사이에서 갈등하고 불안해 하면 
주눅이 든다.

  제 또래의 주부들은 뭔가 전문적인 일에 뛰어들어 자기 실현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모두들 갖고 있지만 가정 일에 매달리다 보니 이미 갖고 있던 자신의 능력조차 
사장시켜 버렸어요. 또 사회에서 요구하는 데두 적구 하니까 그냥 체념하고 사는 게 
대부분이죠. 그리고 저 같은 경우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또 내 능력을 
계발해 보려 노력하다가도 막상 날 필요로 하는 일이 있을까, 사회에서 날 받아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설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여자이기 때문에 변화하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과 사회에서 제대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는 것, 이런 
이중의 고민 때문에 요즘 많이 불안해하는 편이에요.(주55)

  이런 갈등은 중간층의 지위가 불안정하다는 것에 의해 더욱 가속화된다. 새로운 
상품들이 계속 개발되고, 물가 인상의 압박 속에서 임금은 그만큼 인상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처음에 
이들은 보다 유한 마담식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점차로 알뜰 주부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한데 어울린 것은 중간층의 중간적인 
성격 때문이며 게다가 불안정성이 자꾸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길게 다듬어 
매니큐어를 한 손에 레이스로 짠 장갑을 끼고 전시회를 보러 다니는 고상한 여인의 
꿈은 빨래와 설겆이와 요리에 시달려 쭈글쭈글해진 손을 보고 한숨짓는 가정부의 
현실로 다가온다. 경제적 지위의 불안정은 가정 주부의 위치를 흔드는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한편으로는 가사 노동을 온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을 사회적 
노동에 끌어들이며, 한편으로는 여성의 경제적 의존을 재생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에게 가족의 생활에 충분한 임금을 주지 않는 자본의 모순된 작용은 가정 주부를 
진퇴양난, 사면초가에 몰아넣는다. 가정 주부는 이 가운데 하루하루를 착잡하고 
불안하게 보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처방은 어떤 것일까?
    * 생기있는 하루하루
  가장 흔히 제시되는 해결책은 더욱더 열심히 가사에 몰두하라는 것이다. 즉 '가사 
노동을 통해서 자아 실현을 하라'는 역설이다. 또 자아의 공허를 소비를 통해서 
메우고, 점점 보잘 것 없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다 더 많은 소비로 치장하라는 
것이다. 즉 소비를 통해서 자아 실현을 하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결국은 
자본주의 사회의 복음, '소비하라, 소비하라'는 것으로 귀착된다.

  부엌은 주부의
  자기 실현 공간입니다.
  가정의 중심은 주부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루 세 번 매일같이 반복되는 똑같은 부엌일,
  신혼초에는 몰랐던 지루하고 권태스러운 하루 일과.
  당신은 혹시, 짜증과 의욕 상실로 웃음을 잃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남편은 남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모든 면에서 자기를 실현시켜 가고 있는데 비해
  당신만은 예전 그대로인 것 같은 생각에
  소외감마저 느끼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지금 당신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주부로서의
  '자기 실현' 공간입니다.
  스스로 일하고 싶고, 즐겁게 일하며 일을
  마쳤을 때 밀려드는 성취감으로 생활 의욕이
  끊임없이 샘솟는 부엌,
  삶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절실한 것입니다.
  가까운 한샘 대리점에 전화를 걸어주시는 일로부터
  전혀 새로운 당신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여자는 하루를 위하여 일주일을 기다린다. 그러나 사소한 사랑 싸움도 르망과 함께 
풀어 버리는 또 다른 멋과 여유!

  참으로 이 얼마나 교묘한 그물망인가. 자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은 여성이 부엌일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엌을 치장함으로써, 부엌일을 더욱더 추구함으로써, 
부엌일에 더욱더 자신을 동화시킴으로써 상실을 극복하라는 것이다. 부엌일 때문에 
권태와 소외감을 느끼지 않느냐? 부엌 가구를 바꿔라! 더 맛있는 요리를 해라! 집을 
더 멋지게 치장해라! 그래도 안되면 르망을 타고 놀러가라. 일주일의 권태에 값하는 
하루의 권태가 구원을 줄 것이다.
  이는 '여자의 자리는 가정'이라는 성별 분업을 강화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은폐되며, 더욱더 고도화된 형태로 재생산된다. 자본은 이들의 
불행을 다시 한 번 자본에 얽어 매는 미끼로 삼는다. 어디에나 펼쳐진 악순환의 
그물코에 여성들은 또 한 번 걸려든다. 알면서도 걸려든 이 그물에서 여성들은 제 
꼬리에 달린 방울을 잡으려는 고양이처럼 맴을 돈다. 여자들은 한샘 유로에 전화를 
걸고, 전자 렌지를 사서 더 맛있는 요리를 할 궁리를 하며, 매직 쉐프를 꿈꾸고, 
르망을 사자고 졸라댄다.
  그러나 '새로운 당신의 생활'은 시작되지 않는다. 부엌과 안방 사이, TV광고와 전자 
제품 대리점 사이, 소비와 더 많은 소비 사이, 공허와 허무 사이. 게다가 가사 도구의 
더 많은 소비를 통해서 가사 노동에서의 자아 실현을 꾀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역의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가사 도구들은 부분적으로는 가사 노동을 더 다양하게 
만들지만, 기본적으로는 가사 노동을 기계화함으로써 해체하고 단순화하는 작용을 
한다. 가사 노동은 점점 더 편리해지고, 점점 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되고, 가정 
주부는 점점 더 시간이 남아돌게 되며, 주부의 역할은 더욱더 쓸모없게 된다. 자본이 
제공하는 마지막 은신처조차도 그리 안전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번민하고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내리는 마지막 처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본은 고통받는 여성들을 또다른 돈벌이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돈벌이의 
대상으로서의 삶, 진통제를 통해서만 유지되는 삶이야말로 자본주의가 가정 주부에게 
보장하는 '생기있는 하루하루'이다.
    * 새로운 주부상?
  가정 주부의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짐에 따라 최근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활발해 지고 있다. 중간층 주부들은 여성들 중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을 받은 
층이며, 따라서 많은 잠재력을 가진 층이고 남녀 평등을 위해 할 일이 많은 층이다.
  그런데 개중에는 주부의 문제를 더욱더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런 움직임의 많은 부분은 주부의 쁘띠부르주아적인 
위치에서 오는 허위 의식을 강화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삼으려 한다. 얼만 전 '또 
하나의 문화'가 「새로운 사회, 새로운 주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주최측의 주제 발표에서 발표자는 가정 주부들이 가진 당당함과 주눅든 모습의 
양면성을 보자면서 '이런 된장 찌개는 내가 아니면 아무도 못 끓인다'는 당당한 태도가 
있는가 하면, 일해서 돈 버는 여성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사회적 추세 속에 '영원한 
미숙련 노동'으로 남아있는 집안일에 열등감을 느끼는 경향이 더 짙어지고 있다'면서 
새로운 주부상을 만들기 위해 당당함의 근거를 합리적으로 재조정해서 주눅들음을 
완화할 길을 찾자고 제안했다.
  토론에 참여한 한 주부(32세)는 대학 졸업 후, 전문직에서 일하다가 아기를 낳아 
기르느라 전업 주부가 됐다면서 '남편의 봉급을 맡아 살림하는 것이 전혀 의존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재취업 기회가 있었지만 아이를 기르며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남는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취업하지 않았다'며 바깥에 
나가 돈을 벌어야 성취감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을 냈다.
  또 한 주부는 남편의 봉급에 가족 수당이 포함됨으로써 주부가 집안에서 하는 일에 
대한 간접 보수가 매겨져야 한다면서 가사 노동의 가치화나 주부 운동의 자리 매김이 
꼭 가정에서만이 아닌 노동 현장의 과제로 주어질 때가 됐다고 말했다.
  '주부들이 자신의 일을 주위 상황과 여건 등을 고려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직업인가를 분석해 보고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을 때는 가능한 
다른 사회 참여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 동안 무조건 취업만이 대책이라고 보아 온 
것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때', '가정 주부에 만족하는 여성들에게는 사회 개혁의 한 
구석을 담당할 수 있는 소비자 운동이나 학부모 운동 등을 통해 자부심을 느끼도록 
해주어야 한다', '7시에 집을 나서서 러시아워의 만원 차에 부대끼면서 출근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부럽겠어요?' 그리하여 아이들의 가정 환경 조사서에 무직이라고 쓰는 
대신 주부라고 쓴다든지, 주부를 살림꾼, 살림가, 또는 살림 경영인이라 부르는 등 
'주부라는 직업인으로서 당당함'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생각들은 중간층 가정 주부의 쁘띠부르주아적 허위 의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흐름은 성별 분업을 강화하고, 유지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며, 노동자 
계급 여성의 운동과 상치된다. 여자가 가사 노동을 맡는 성별 분업이 여성이 남편에게 
종속되는 주요 이유고, 여성의 저임금과 기타의 각종 불이익과 차별의 주요한 
메카니즘인 마당에 이를 정당화하는 것을 노동 운동의 목표로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런 주장은 이들의 의식이 얼마나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또 하나의 허위 의식은 가정 주부를 '스스로 선택'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은 
문제를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어렵고 힘들며 감시와 강제 
속에서 일해야 하는 사회적 노동 대신, 집에서 자유롭고 자발적인 일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렇게 각자 좋아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회의 객관적인 현실을 무시하고, 마치 각개인의 
희망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는 듯이 말한다.
  게다가 가사 노동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말과 가사 노동이 이 사회에서 놓여있는 
위치를 호도한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가사 노동이 선택할 만한 것인가? 스스로 
노^36^예가 되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 오히려 괴롭고 회피해야 할 
일일 것이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고, 주인이 되는 것은 역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원해서 노^36^예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노^36^예라는 사실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다. 그의 위안은 오직 한 가지 
뿐인데, 스스로 '의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거의 전적으로 남편에게 달려 있으며 만약 남편이 없다면 자신의 사회적 위치는 하루 
아침에 뿌리채 흔들릴 것임을 직시하려 하지 않고 있다. 현실 앞에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이런 공허한 관념이야말로 이 선택론의 유일한 받침대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힘들이지 않고 얻어지는 것 중에 값진 것은 없다.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이는 것에서 당당함을 찾는다면 그만큼의 당당함이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들이 이에 주관적으로 만족한다면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고 전문화가 이루어 지는 세상에서 그 상대적 가치가 점점 평가 절하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나름대로 당당하게 살겠다는 포부를 갖는 것은 
가상하기는 하지만 우물 바깥에서는 통하지 않으니 가엾은 일이다. 만원 버스에 
부대끼고, 노동에 시달리고, 상사에게 질책당하고, 부하 직원에게 신경쓰고, 임금 
인상을 위해 밤을 세우고 목이 쉬고, 더러 피도 터지고, 혹은 감옥에 가야 할 위험과 
맞서는 이 모든 일들은 하고 싶지 않지만, '남편의 임금의 절반은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인정받고 싶다. 남녀 차별의 드높은 담을 허물기 위해 남자들보다도 몇 배나 
더 고생은 하고 싶지 않지만, 남자와 평등하게, 혹은 직장 여성과 평등하게 대우받고 
싶다. 여성 해방을 위한 신산스럽고 고통에 찬 노력은 사양하고 싶지만 그 해방의 
과일은 자기 좋을 대로 따먹고 싶다. 자신은 그릇된 현실에 안주하면서, 그릇된 현실의 
쓴 맛은 모두 피하고, 현실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
  이런 좁은 시야와 주관적인 생각 자체가 주부라는 위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성별 분업의 이데올로기와 고용과 임금에서의 남녀 차별의 
근거가 되고 있으며, 이들이 전형적인 여성상인 듯이 이야기 됨으로써 탁아소의 
미비를 비롯한 심각한 문제들이 가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그 자신이 
희생자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의 여성 억압을 재생산하는 메카니즘의 핵심적인 
고리이기도 하다. 이런 가정 주부의 위치를 고정화하려는 시도가 여성 노동자들의 
이해와 상반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들은 주부의 위치를 고정, 강화하는 
운동을 노동 현장에서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런 흐름은 전체 여성 운동에 오히려 
해를 가져올 것이다.
  한 가정 주부는 주부 문제에 대한 접근들이 주부에 대한 애정이 없다고 비판했다. 
우리는 주부들의 현실에 대해 깊은 동정을 느낀다. 그러나 중간층 주부들이 이 현실에 
안주하면서 자기 지위를 합리화하고 옹호하는 데 여념이 없는 한 사랑받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그들이 허위 의식을 벗어던지고, 여성 노동자들의 이해와 자신들의 
이해를 일치시킬 수 있을 때만, 자기 계층에 한정된 협소한 이해가 아니라, 자신들을 
포함한 모든 여성의 이해를 위해 봉사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봉사의 대가로서만 
애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 하층 주부
    * 현모 양처의 공간
  구로 공단 근처의 벌집, 도시 달동네의 판자집. 대문을 들어서면 곧장 부엌이고 바로 
옆에 방이 한 칸씩 붙어 있다. 부엌은 0.5 평이 조금 넘는 정도로 돌아설 데도 없고 
방은 2 평도 채 안된다. 명색이 사원 주택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5개의 
계열 회사를 거느린 흄관, 전주, PC관 생산 업체인 A사의 경기도 오산에 있는 사택을 
보자. 방 1, 부엌, 시멘트 마루가 전부고, 네 세대가 맞붙어 통풍이 좋지 않다.
  벌집과 판자집과 사원 주택의 공통점은 이밖에도 많다. 공동 화장실과 잘 안나오는 
수돗물, 연탄 난방 등. 앞의 사원 주택에서도 수돗물은 아침 6시에서 9시, 낮 
12시에서 2시, 저녁 6시에서 9시에 시간제로 나온다.

  나를 제일 성가시게 하는 것은 수돗물 받는 일과 구공탄 가는 일이다. 부자 
동네에서는 한강물이 더러워져서 미제물이나 약수를 사다 먹는다지만 나는 그 한강 
물이라도 우리 집에 콸콸 나오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이조 말에 찍은 사진에 나오는 '물 긷는 여성'의 모습을 서울 시내 복판에 있는 
동네에서도 여전히 볼 수 있다. 재래식에, 연탄 난방에, 더운 물은 물론이고 찬 물도 
잘 안나오는 좁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부엌이 '현모양처의 공간'으로 여성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층 가정 주부들 역시 앞에서 말한 가사 노동의 성격에서 오는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 그러나 가난이 가사 노동에서 오는 고통을 한층 
배가시킨다.
  이상의 표가 보여주듯이 취사에 조차 연탄을 사용하는 42.4%나 되며, 편리한 
가스나 전기를 사용하는 가정은 16.6%에 불과하다. 난방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연탄을 사용하는 가정이 74.7%나 된다. 기름을 사용하는 가정은 겨우 3.9%에 지나지 
않는다.
  가사 노동의 주요 조건인 주택 설비는 더욱 한심하다. 재래식 부엌이 87.0%이고 
부엌이 없는 가구가 전국적으로 3.3%, 대도시에는 무려 6.4%나 된다. 온수가 나오는 
목욕 시설은 전국 평균의 두 배가 넘는 대도시의 경우에도 9.5%에 불과하고, 목욕 
시설이 없는 경우가 가장 낮은 대도시에서 74.0%이다. 화장실도 수세식률이 전국 
평균 두 배가 넘는 대도시가 26.5%에 불과하고, 화장실이 없는 경우도 2.7%나 된다.
  중요한 가사 도구인 냉장고와 세탁기의 경우 냉장고는 도시 가구의 반 정도인 
51.5%, 세탁기는 16.1%만이 소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있는 가전 제품도 전기료를 
아끼기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남편의 저임금은 일차적으로 열악한 가사 노동 조건을 가져온다. 일차적으로 먹는 
것, 입는 것을 해결해야 하므로, 가사 노동 조건을 개선할 여지가 없다. 역으로, 
열악한 조건에서의 아내들의 과로가 남성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보완하고 있다. 가사 
노동을 통해 보다 많은 사용 가치를 생산함으로써 소비를 절약하고, 저임금을 
보완하는 것이다. 자본은 이를 통해 저임금을 유지하는 이익을 누린다.
  이들은 중간층 주부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상품들을 이용하지 못하고, 대신 
이를 자신이 직접 손으로 한다. 예를 들면 유아를 위한 일회용 기저귀 대신 헝겊 
기저귀를 사용하고, 외식을 하거나 라면 이외의 인스턴트 식품, 반조리 제품, 배달 
음식을 이용하는 일도 극히 드물다. 요즘은 수퍼마켓이나 백화점에서 전화 한 통이면 
물건을 배달해 주지만, 이들은 값이 싼 시장에서 온통 몇 바퀴씩 돌면서 가장 싼 곳을 
찾느라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빨래도 손으로 하고, 노동을 경감시키는 
편리한 가사 도구들을 사용하는 대신 더욱 강도 높은 가사 노동으로 상품 구입을 
대신한다. 즉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을 온통 '몸으로 때운다.'
  가사 노동자로서 하층 주부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소비를 극도로 제한하고 있다. 
이들은 돈을 벌지 못하면서 살림살이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살림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계비를 절약하는 것이다. 절약의 첫번째 대상은 자신의 몫이다. 
없는 살림에 자식과 남편을 챙기다 보면 자신을 위한 소비는 그야말로 최소한으로만 
이루어진다. 속옷마저도 자식이 입다가 낡은 것을 입고, 어쩌다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도 남편과 자식, 때로는 시부모에게 먼저 주고 나면 자신은 언제나 남은 찌꺼기 
차지가 된다. 아이를 낳을 때조차도 병원 한 번 못가고, 친구들과 어울려 친목 모임을 
가질 수도 없으며, 문화 생활이나 오락, 나아가 책을 읽는다든지, 사회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먹고 자는 생활에도 쫓기어 영양 실조, 빈혈, 
과로와 신경통에 시달린다. 이런 비인간적인 삶을 사는 여성을 우리 사회는 '알뜰 
주부', '장한 어머니'라고 미화하고, 그 중 가장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희생하고 
최소한의 삶을 산 주부를 뽑아서 대통령 표창을 준다. 아내들의 눈물겨운 희생 위에 
우리 사회가 서있다는 것을 정부도 잘 알고 있다. 단지, 이들이 더 이상 희생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기보다는 그 희생을 장려하는 쪽으로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간접세를 통해서 하층 근로자로부터 소득의 30%정도를 세금으로 거두어 가는 
정부는 이 세금을 대중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몇몇 독점 재벌과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서 사용한다. 학교 급식의 실시나 상하수도를 비롯한 대중 위생 설비, 편리한 입식 
부엌을 갖춘 값싼 공동 주택, 누구나 싼 값으로 이용할 수 있는 탁아소, 임산부들의 
건강과 출산, 모자 보건을 책임지는 보건소,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체육과 오락 시설, 
이용하기 편리한 도서관 등의 건설은 완전히 외면한 채 호화 맨션 아파트,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무기의 생산과 도입, 선거 자금으로 쓰고 있다. 이들은 남편의 
임금만으로는 도저히 평균적인 생활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절박하게 일자리를 
얻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급속히 분해되어 임금 노동자가 되고 있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기혼 여성 노동자는 주로 이들 하층 주부들이다. 그러나 아이를 맡길 
탁아소가 없다는 것이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이다. 상층 노동자들이 가정 탁아나 파출부 
등을 이용하여 그나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이들은 비용 때문에 엄두도 못낸다.
  급속히 임금 노동자로 분해되고 있는 이들 하층 주부들은 쁘띠부르주아적인 허위 
의식을 보다 적게 가지며, 임금 노동자들에 대해 훨씬 더 일치감을 느낀다. 노동 
운동의 지원에서 나타난 이들의 맹렬한 투쟁성은 그 한 징표이다. 예를 들어 86 년의 
경동 탄광의 파업에서 부녀자들은 장장 32시간에 걸친 도로와 철도 점거 농성을 
주도하여 탄광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파업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87, 88 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이들은 노동 운동의 빼놓을 수 없는 지원 
세력이 되었다.
  이들의 맹렬한 투쟁의 배경에는 물론 가정 생활을 포함한 노동자의 전 생활에 대한 
자본의 지배와 착취의 강화가 있다. 이런 투쟁 속에서 여성들은 가정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적 관계를 인식하게 되고,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음으로써가 
아니라, 남편과 함께 자본가에 맞서 싸움으로써만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무기력하고 나약하고 고립된 '살림이나 하는 여편네'로부터 사회 운동에 
당당히 한 몫을 차지하는 사회 세력이 되고 있다.

  오늘도 잠자리 들 시간에 시커먼 굴 속 막장으로 우리 식구 밥을 위해 졸린 눈의 
그이를 보냈다. 애들 공부도 시킬 수 있고, 집도 있고 돈도 모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안고 광산촌에 온 사람이 우리 가족만은 아닐 것이다. 처음 사택에 살 때에는 눈물만 
났다. 쪼그만한 방 한 개에 부첰 한 개, 수도와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다. 
건물을 허술하게 지어서 옆방에서 말하는 소리까지 다 들리지만 이런 사택도 못들어 
오는 사람이 많다니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공동 수도에서 물을 받아야 하고, 일주일마다 바뀌는 남편 갑을병에 맞춰 
밥해주랴, 애들 챙기랴, 탄가루가 날리니 빨래는 해도해도 끝이 없고, 한 푼이라도 
생활에 보탬이 될까 싶어 부업으로 뜨개질을 하려 해도 회사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그것도 쉽지 않다. 거기에다 일에 지친 남편은 집에 와서 큰소리만 치게 되고 우리는 
맘에도 없는 소리로 서로를 아프게 하면서 부부 싸움을 하곤 하였다. 나라고 왜 
모를까? 햇빛도 없고, 공기도 부족한 수천 미터 땅 속에서 언제 다치거나 죽을지 
모르고, 진규폐까지 걸린다는 그 힘든 일을 하는 남편이 왜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참고 견디면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1 년을 
넘기고 2 년을 넘기고 그렇게 3 년째에 접어들던 작년 8월, 남편 회사에서 농성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불안한 마음으로 동네 아줌마들과 같이 회사에 올라갔다. 
아저씨들이 질서 정연하게 반별로 앉아 노래를 배우고 있었다.
  우리들이 하나 둘씩 모여 꽤 많이 모이자 농성을 지도하던 분 중에 한 분이 왜 
농성을 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구호를 외쳤다. "도급제 철폐하라", "어용노조 
물러가라", "임금 인상하라". 우리도 남편에게 질새라 큰소리로 외쳤다. 회사가 떠나갈 
듯이, 온 산이 떠나갈 듯이 한 목소리로 한 마음으로 온 가족 모두 크게크게 외쳤다. 
그동안 회사에서 얼마나 남편을 못살게 굴었는지, 얼마나 고통스런 환경에서 일을 
했는지 어렴풋이 알던 것을 자세히 듣게 되고, 아이들 교육 문제, 사택 문제, 남편들의 
건강 문제를 서로 마음 터놓고 얘기하니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나만이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니구나, 모두가 나와 같은 무제를 안고 살고 있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 왔다. '우린 모두 한가족이구나', '모두가 하나이구나'. 벅찬 감동으로 우리는 가족 
장기 자랑, 부부 장기 자랑, 노래 자랑 등 재미있고 평화적으로 농성을 하였다. 같이 
모여있을수록 우린 깊은 신뢰로 더욱 강해진 것 같았다. 회사에서는 여기서 협상하자, 
저기서 협상하자 시간만 끌고 우릴 분열시키려고 별별 소문을 다 퍼뜨리고, TV에선 
우리가 폭도가 된 것처럼 떠들었지만 우린 굳건하게 싸워나갔다. 우린 서로의 힘에, 
우리의 힘에 놀라면서도 기뻤다. 비로소 인간으로 살아있는 것 같았다. 경찰의 잔인한 
진압으로 농성이 해산되고 다시 남편이 일을 가기 시작하던 날, 나는 오랫동안 울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협상 장소 때문에 대표들끼리 싸우지만 않았어도, 아니 우리가 
더 철저히 준비만 했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텐데. 그래도 개운치 않았다. 
우리와 회사가 싸우는데 제3자인 경찰과 노동부, 지방 유지들이 나서서 왜 회사 편만 
들었을까? 그들이 끼어 들지 않았으면 우리는 충분히 우리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었을텐데. 갑자기 그들에 대한 분노가 일어났다. 나쁜 놈들, 우리 편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진짜는 회사 편만 들던 그들이 너무 미웠다.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그들은 정말 모를 것이다. 나는 시커먼 물이 흐르는 이곳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모습인가를 생각해 본다. 세상 원망이나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닐 것 같고, 체념하고 살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일단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남편과 같이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 곳에서 생기는 우리 모두의 아픔이 무엇이고, 그 아픔의 
근원이 무언가를 생각해 보고, 이 아픔을 남편과 힘을 합해 없애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이 시간 이후로 한편으로 접어두었던 인간적인 삶에 대한 
희망을 다시 일깨우며 서로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고 살리라 결심해 본다.
        (어느 광부의 아내)(주56)

  남편들의 투쟁에 동참하면서 이들은 가정 주부의 좁은 시야와 가부장제의 낡은 틀을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가정 주부라는 데서 오는 고립 분산성과 단순히 남편의 
지원자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적인 운동을 벌이는 
것이 필요하다. 즉 지역 단위의 조직을 통해 지방 자치제에 참여하고, 주택이나 
상하수도, 탁아소 문제와 여성에 대한 차별 철폐, 취업 기회의 확대를 위한 운동 등을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3) 취업 주부
    * 동동거리자 저무는 하루
  88 년 현재 10인 이상 기업체의 기혼 여성 노동자는 38 만 5천 636명으로 전체 
여성 노동자의 25.5%이다(기혼 여성 노동자의 74.9%는 10인 미만 기업에 취업하고 
있다). 89 년 말 현재 종업원 10인 이상 사업장의 기혼 여성은 전체 여성 노동자의 
30%인 47 만 명이고, 종업원 1인 이상의 전 사업장에서는 100 만 명을 넘어 남녀 
노동자 전체의 10%를 차지하게 되었다. 기혼 여성 노동자의 비율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아울러 이 사회가 여성의 어깨 위에 지우는 부담과 이중 노동의 고통도 
증가하고 있다.
  이들의 하루는 최소한의 생리적 필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노동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게다가 그 노동 시간들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일견 무미건조해 보이는 일과표의 행간에는 취업 주부들의 땀과 노심초사와 피로와 
고생스러움과 동동거림이 숨겨져 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도시락 싸고 나면 머리도 제대로 빗지 
못한 채 회사로 달려가야 한다. 회사에 가면 숨돌릴 틈도 없이 작업대에 앉아야 한다. 
고등 학교 다니는 아들 때문에 새벽 1시에 자고 다시 5시에 일어나 아들 도시락을 
싸주어야 한다는 이씨 아줌마의 얼굴은 늘 푸석푸석하고 눈 언저리는 부어 있다. 
대부분의 아줌마들은 말로는 "몸이 너무 피곤해서 주간 일만 해야겠다"고 하면서도 
막상 돈을 벌어서 자식들을 학원이라도 보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한 명도 빠짐없이 
잔업을 한다. 나를 비롯해서 아줌마들 모두는 동동거리며 뛰어 다닌다. 아침 출근할 
때도 뛰고, 점심 때 아이들 저녁 차려놓기 위해 집에 잠깐 들를 때도 그렇고, 퇴근해서 
집에 올 때도 뛴다. 하루종일 쪼달리고 바쁘다.
  어제 회사의 아줌마들과 하는 계 모임에다가, 집들이까지 겹쳐서 모처럼 놀다가 좀 
늦게 들어왔다. 그랬더니 남편은 "여편네가 무슨 짓 하느라고 이렇게 밤늦게 
쏘다녀"라며 화를 냈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막상 그런 소리를 들으니 나도 화가 났다. 
결혼해서 산지 10 년이 넘었지만 나는 늘 남편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곗돈 부어 탄 
돈도 남편이 유세한다고 할까봐 마음놓고 자랑하지도 못했다. 여자는 이럴려고 
태어났나 싶다(박금숙, 32세, 성신 화학 여성 부장).(주57)
    * 안팎곱사등이
  하루종일 쪼달리고 바쁜 취업 주부가 얻는 보상은 직장과 가정에서의 성취가 아니라 
양쪽에서의 비난과 질책이다. 사회적 노동에서는 가사 노동의 부담으로 인해 "직장 
일에 소홀하다", "책임감이 없다"고 비난받고, 가정에서는 사회적 노동으로 인해 
"가정을 소홀히 한다", "여자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고 비난받는다. 직장에서는 
모범적인 노동자가 될 수 없고, 가정에서는 훌륭한 주부가 되지 못한다.
  이중 노동은 여성을 안팎곱사등이로 만든다. 가장 정상적이고도 이상적인, 그래야 
하는 직자오가 가정을 가진 여성이 오히려 이중의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나는 방송 스크립터였다. 내가 맡고 있는 프로는 꽤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주간 
다큐멘터리 프로로 노동 강도와 노동 시간에 있어 방송국 내에서 정평이 있는 
프로였다. 잔뜩 고픈 배를 움켜 쥐고 아무도 없는 집에 문을 열고 들어와 보면 설거지 
통에는 설거지거리가 담겨 있고 안방에는 이부자리와 잠옷들이 널려 있다. 그 순간 
얼마나 화가 치밀고 힘이 빠지는지는 아마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밖에 
가스나 수도, TV나 전기 밥솥, 세탁기 등이 고장을 일으켰을 땐 당장 불편도 
문제지만, 고칠 일도 막막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의 사회가 이 세상의 모든 여자는 
항상 집에 있는 걸로만 안다. 그러니 온정신을 모아 방송 일에 집중해야 할 시간에 
나는 회사 전화로 각종 애프터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어서 전기 밥솥에 보온이 
안된다는 둥의 얘기를 해야만 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들을까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조바심을 쳐가며 말이다. 그 때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생각해 보라(또 나는 일의 
하중이 비교적 가벼운 날을 택해 밥솥을 고칠 사람이 올 시간에 맞춰 퇴근을 
비정상적으로 앞당겨야만 한다). 점심 시간이면 점심을 되도록 빨리 먹고 나서 회사 
지하의 구판장에 간다. 동네 슈퍼에서는 살 수 없는 물건들(속옷이나 로션, 다음날 
먹을 빵이나 쨈 등)을 사서 사무실로 돌아 온다. 그때 양손에 들린 비닐 봉투에 
사무실 동료들이 시선을 던질 때면 난 어쩐지 집안일을 회사까지 끌어들이는 칠칠치 
못한 여자, 회사 일은 대충하는 여자로 낙인찍히는 것만 같아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곤 했다.
  피곤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나의 일과는 집안 대소사가 겹칠 땐 극에 달한다. 
그리고 나의 방송 일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처음 그런 경험을 한 것은 현대 
중공업 사태가 한창 달아오르고 있을 때였다. 우리 프로에서도 그 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우리 팀 사람들 모두는 그 아이템을 책임질 적격자로 나를 꼽고 있는 듯했다. 
나 역시 몹시 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4--5일간 출장을 가야 한다는 데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미혼이었던 다른 동료에게 그것을 맡기고 나에게는 
서울에서 취재할 수 있는 것으로 배당하려 했다. 나는 그런 결정을 애써 번복시키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댁쪽에 생일 잔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시댁은 
생일에는 가족 모두가 모이는 강력한(?) 전통이 있었는데 결혼한 지 얼마 안된 
새며느리라는 입장 때문에 현대 중공업과 생일 잔치를 바꾼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때로는 집안 행사에 용감하게 빠지기도 했지만 역시 정신적 
스트레스는 줄어들지 않았다. 더구나 다른 동서들은 일찍부터 와서 식사 준비를 
하는데 나는 식사 시간에 겨우 맞춰 오곤 했으니, '직장다닌다는 핑계로 일도 안하는 
얌체 동서'로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각자 바쁘고 피곤하게 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달라져 갔다. 남편은 자기 일에 관록이 붙고 노하우가 쌓여갔지만 
나는 눈치보기와 요령만 늘어갔다. 남편은 프로그램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부당한 압력 
때문에 고민하고 또 그에 대항해 싸웠지만 나는 고장난 전기 밥솥과 식사 메뉴(집안 
모임용), 방송일이 뒤범벅된 채 정체 모를 괴물과 싸웠다. 그리고 나는 차츰 방송 
노조의 당면 과제와 현안이 무엇인지, 그것이 지금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깜깜해져 갔다. 이 동지 없는 싸움에(생각해 보라, 세탁소나 가전 제품 회사나 은행, 
그리고 '가족', 무엇 하나 내 편이 되어 주었나) 나는 차츰 지쳐갔다. 결국 나는 일을 
그만 두었다. 물론 전적으로 가사 노동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방송 일을 그토록 
황망히 정리하게 한 주요한 요인이 이중 노동의 피곤함이었음은 부인하지 
못하리라.(주58)

  이 경우는 그나마 아이도 없고 생활 수준이 높은 전문직 여성의 경우이다. 육아는 
다른 어떤 가사 노동보다도 더 여자한테 떠맡겨지는 률이 높다. 게다가 가사 노동을 
책임진다는 것은 단순히 밥하고 빨래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가정 일을 온통 주관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쪽을 다 정상적(?)으로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 결과 여성들은 사회적 노동에서, 나아가 노동 조합 활동을 비롯한 사회 활동에서 
남성보다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 가사 노동에 발목을 묶인 여성과 홀가분하게 뛰는 
남성의 경주에서 누가 유리한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아이 하나는 업고 하나는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에 빨래거리를, 머리에는 설거지거리를 이고 허덕거리며 
달리다 보면 남자들은 이미 저만큼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관람석에서는 이른 
소리가 들려온다.
  "그 봐라, 여자가 하면 얼마나 하겠냐."
  게다가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은 언제나 여성들이 뒤집어 쓰기 
마련이다. 남편이 가정에 불성실하더라도 그것은 '사회 생활하자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용인되거나 아니면 "그렇게 만든 여자 탓"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차츰차츰 사회적 노동에서 자기를 실현하고, 사회에 참여하여 역사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포부는 꺾이고 좌절한다.
  가사 노동의 책임은 여성 노동자가 사회적 노동에서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예를 들어 소련은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에 
있어서는 세계 제일의 수준에 도달했다. 16세에서 54세의 여성의 거의 90%가 
전일제로 고용되어 있거나 학업을 하고 있다. 여성들은 노동력의 51%를 구성하고 
있다.(주58) 그러나 가사 노동의 사회화와 남녀 분담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가사 
노동 책임은 여전히 주로 여성이 지고 있다. 1967 년에서 1970 년 동안의 남녀의 
노동 부담을 보면, 직업을 가진 남성은 일 주일에 가사 노동 10시간을 합쳐 주당 
51시간을 일하는데 비해 직업을 가진 여성은 가사 노동 27시간을 포함해 일 주일에 
65시간을 일한다.(주60) 이것이 여성들이 사회적 노동에서 남성보다 낮은 위치에 
놓이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가사 노동 문제는 여성 문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른 한편, 여성들은 사회적 노동의 부담으로 가정을 제대로 보살필 수 없다. 여성을 
안팎곱사등이로 만드는 것은 안과 밖의 과중한 노동 부담이다. 사회적 노동과 가정을 
양립시키기에는 사회적 노동과 가사 노동 모두의 부담이 너무 무겁다.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노동 시간(게다가 여성 노동자의 노동 시간이 더 길다)으로는 
아무리 가사 노동을 줄여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잔업, 
특근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되어 있으니 가사와의 양립이 순탄할 수가 
없다.(주61)

  오후5시 30분 퇴근이지만 항상 7시 30분까지 연장 잔업한다. 원래 애들 때문에 난 
잔업 안 하려고 했는데 월급제라 회사에서 허락해 주지 않는다. 대신 탁아소 마감 
시간 때문에 밤 10시까지 하는 야근(1주에 2 회)은 나만 빠진다. 그러면 다른 미싱 
아줌마들이 왜 혼자만 야근 안 하느냐고 뭐라고 그런다.

  원래 오후 5시 30분 퇴근인데 잔업한다고 하면 몰래 도망 나오곤 했다. 애초에 잔업 
안 한다고 들어 갔는데 매일 잔업이 있으니깐 나혼자 빠지기가 미안하다. 그렇지만 난 
탁아소 시간 끝나면 애를 맡아줄 사람이 없어서 퇴근 시간이 넘어서도 일이 지체되면 
애 걱정이 되어서 일이 손에 안 잡힌다.

  사무직의 경우에도 연장 근로가 밥먹듯 행해진다. 여성 노동자를 기피하는 중요한 
이유가 될 정도다. 이 사실은 기업이 노동자의 가정 생활을 염두에 두지 않으며, 이를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직장과 가사의 양립을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가사 노동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 즉 가사 노동의 사회화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전업 주부의 가사 노동 시간은 9시간에서 12시간에 이르며, 취업 주부의 
가사 노동 시간도 무려 4시간 정도에 이른다. 그것도 사회적 노동 시간이 워낙 길기 
때문에 최소한으로 줄인 것이다. 나이 어린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앞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훨씬 더 길다. 가사 노동의 사회화와 남녀 분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설사 8시간 노동제가 실시된다고 하더라도 여성 노동자는 하루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 가사 노동의 사회화가 미흡하다는 것은 가사 노동 문제가 개별 
부부들 사이의 부담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가사 노동 부담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자녀 양육이다. 그것은 자녀 양육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급한대로 때울 수 있는 
다른 문제들과는 그 질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이들 문제에 이르면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이 아이들조차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서 무엇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지 
알수 없게 되어 버린다. 자식의 인간다운 성장과 맞바꿀 만한 무엇이 이 세상에 
있겠는가? 그런데 자본은 여성을 노동자로 끌어들이면서 자녀 양육은 여전히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 남겨 놓는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여성 노동자들은 이중고와 
죄책감에 시달리며, 아이들은 정상적으로 자라나지 못하는 것이다.
  여성이 사회적 노동에 남성과 평등하게 참여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노동자 가족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도 가사 노동을 사회화하여 그 부담을 줄여나가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대해 이를 기대하는 
것은 가시 나무에 호박이 달리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왜 가사 노동이 사회화되지 
않는가? 가사 노동이 사회화되어야 할 필요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이 절박한 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외면당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 가사 노동이 사회화되지 않는 이유
  그것은 가사 노동의 사회화 역시 자본주의적 생산의 근본적인 목적인 이윤 추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노동과 가사 노동의 경계는 
근본적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위해 어떤 가사 노동의 사회화가 필요하고 가능한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화가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에 적합한가 아닌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자본의 이윤 추구에 의해 가장 일차적으로 사회화되는 가사 노동은 기계제 대공업의 
의한 대량 생산이 유리한 경우이다. 대규모 공장 생산이 가내 수공업을 대치하는 
것이다. 정미, 직조나 의복의 제조, 비누 등의 생활용품, 인스턴트 식품을 비롯한 식품 
산업의 발달 경우가 그것이다. 이 경우에는 상품으로 구입하는 것이 집에서 만들어 
쓰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므로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에 적합하며, 노동력 
재생산비를 낮추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인스턴트 식품을 제외한 매끼의 식사는 상품으로 구입하는 것이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보다 싸게 들지 않는다. 매끼의 식사는 기계제 대량 생산에 한계가 
있고(보관, 운반, 저장 곤란), 생산성 향상을 통해 가격을 낮추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즉 아직까지 매끼 식사의 요리에 있어서는 기계제 생산의 이점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집에서 만드는 편이 훨씬 싸게 먹힌다. 따라서 하루 세끼의 식사는 자본주의적 
산업으로 발달하지 못하낟. 만약 하루 세끼를 사먹는다면 노동력의 재생산비는 훨씬 
상승할 것이고, 따라서 임금이 더 높아져야 한다.
  다음으로 사회화되는 것은 서비스 노동 중에서 전문적인 지식이나 훈련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교육과 의료, 간호 등이 그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을 
하기 위해서도 노동자들이 점점 더 많은 지식과 훈련을 갖추어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육은 노동자의 재생산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며, 노동자 대중이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임금이 높아지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자본은 교육을 노동 
과정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으로만 제공하려 한다. 그러므로 대중 교육은 자본의 
이윤 추구를 위한 사업으로는 발달하지 못한다. 초 중등 교육에서 순수한 사립 학교가 
발전하는 것은 현재의 사립 국민학교처럼 소수를 위한 값비싼 학교로서 뿐이다. 
대중의 교육은 오직 공공 사업으로서 최소한의 수준으로, 그것도 교육받을 권리를 
위한 대중의 투쟁의 결과로서만 발달해왔다.
  노동 대중의 보육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보육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집에서 아이를 키우도록 하는 것이 탁아소에서 키우게 하는 것보다 노동력의 
재생산비를 절약하게 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또 교육과 달라서 현재로서는 
자본이 노동자에게 노동을 시키기 위해 반드시 육아를 사회화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자본이 바라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 초등 교육 이상의 교육을 받을 필요는 
있지만 반드시 탁아소에서 자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거꾸로 노동자의 편에서도, 
학교에 가야 하는 것처럼 반드시 탁아소를 이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실은 현재 남아있는 가사 노동을 사회화할 경우, 그것 자체로서는 자본에게 
이윤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동자의 임금을 높이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와 이윤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본의 입장에서는 가내 노동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를 여성에게 맡기는 것이 경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 노동의 사회화를 진전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확대됨에 따라 인구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노동자가 되고, 기혼 여성 
노동자에 대한 수요도 증가한다는 점이다. 이에 의해 두 가지 방식으로 사회화가 
진전되는데, 첫째로, 자본이 탁아소의 건설을 비롯한 추가적인 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기혼 여성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불가피하고 이익인 한에서, 자본에 의해 탁아소가 
발전한다. 두번째로 기혼 여성에게 탁아소와 여러 가지 서비스, 가사를 대체하는 
상품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이 주어지는 데 비례해서 탁아소와 서비스 센터, 
가사 대체 상품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혼 여성은 고용에서도 꼴지 차지, 임금에서도 꼴지 차지라는 사실에 의해 
가사 노동의 사회화는 생산의 사회화의 꼴지 차지가 된다. 한편으로는 기혼 여성을 
고용하기 위해 가사 노동 사회화의 비용이 든다는 사실이 기혼 여성의 고용을 
제한하고, 다른 한편으로 기혼 여성의 고용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 다시 가사 
노동의 사회화를 제한한다.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미혼 여성과 기혼 여성 노동자 사이의 경쟁도 기혼 
여성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즉 자본이 값싼 미혼 여성 노동자나 가사 노동의 
부담이 없는 남성 노동자를 쉽게 구할 수 있을 경우, 혹은 탁아소 없이도 고용되고자 
하는 기혼 여성을 구할 수 있을 경우(아이를 그 조부모에게 맡긴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자본은 탁아소 건설을 비롯한 가사 노동 사회화로 떠밀리지 않는다.
  특히 산업간, 부문간 불균등 발전의 모순이 한결 심각하여, 산업 예비군이 많고, 
노동자들간의 경쟁이 보다 격심한 우리나라에서 자본가들은 노동력 재생산의 위협이나 
노동력의 부족, 모성 파괴에 대한 여성 노동자의 저항에 보다 적게 부딪쳐 왔다. 
여기서부터 재벌의 규모에 관한 한 세계에서 앞에서부터 손꼽히지만 탁아소의 발달에 
관한 한 뒤에서부터 손꼽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생겨났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가사 
노동은 자본의 이윤 추구와 자본주의적 노동 과정의 필요, 기혼 여성 노동력에 대한 
수요의 증가에 의해 사회화되어 가지만, 산업 예비군의 존재와 노동력 재생산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려는 자본의 본성에 의해 그 과정이 고통스럽게 지연되고, 
최소한으로 제한된다.
  자본의 목적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생산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거나, 노동자의 
자녀들이 바람직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다. 
자본의 일차적인, 그리고 흔들림 없는 관심은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지 인간으로서의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자녀를 
기르며, 노동자의 자식들이 어떻게 자라는가는 자본의 관심사가 아니다.
  자본의 목적은 오직 보다 많은 이윤에 있으며, 이를 위해서 노동력의 재생산비를 
가능한 최저한의 수준으로 깎아내리고 노동력에 대한 착취를 최대화하려 한다. 
그러므로 자본은 요리, 육아를 비롯한 가내 노동을 사회화 하는데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반대로 이를 여성의 책임으로 떠넘기면서도 효과적으로 부려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생산력이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확대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자본의 목적이 이윤 추구에 있는 한, 따라서 노동력의 최대한의 착취에, 곧 
노동력 재생산비의 최대한의 절약에 있는 한,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자본주의 발달의 
자연적 과정에 의존하는 한, 노동력 재생산의 사회화는 언제나 최소한으로만 
이루어지며, 가장 뒤떨어진 부분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여성 노동자는 사회적 노동과 가사 노동의 이중 부담으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도록 강요되고, 노동자의 자녀는 그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 남아서 
노동자가 될 수 있는 최저한의 수준에서 자라난다. 이것이 한 해에 수천억 달러의 
예산을 전쟁 물자의 생산에 쓰는 '선진국'들의 실상이다.
  가사 노동의 사회화, 그것도 올바른 방식의 사회화는 자본의 자연적 과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여성 노동자들의 의식적이고 주체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여성의 해방이 가사 노동 사회화의 목적이 되는 한에서만 가사 
노동은 올바른 방식으로 사회화된다.
    *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가사 노동의 문제는 그것이 사회화되지 않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사 노동의 
과중한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이 사회적 노동에 참여할 권리를 찾기 위해 가사 
노동의 사회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가사 노동 문제는 
사회화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화가 일거에 행해지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가사 노동 자체가 완전히 사회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사 노동의 사회화에는 
한계가 있다. 자녀를 돌보는 일에는 탁아소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부분과 부모가 
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식당, 세탁소, 서비스 센터가 할 일이 있고, 가족이 할 일이 
있다. 가사 노동은 개인과 가족의 일상적인 생활과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사회화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가족에 남는 가사 노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가족이 분담해야 
한다. 가사 노동을 남녀가 분담하도록 하는 정책과 재교육이 실시되어 다른 나라들에 
비해 가사 노동의 분담이 가장 잘 되고 있다는 중국의 경우를 들어 보자.

  중국에서의 가사 노동의 변화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가사 
노동을 사회화하고, 재편성하고, 가족 밖에서 가사 노동을 조직화하는 일이다. 주로 
이러한 사회화에 의해 가사 노동은 점차 감소한다. 그러나 주부들을 가사 노동에서 
해방하기 위해 집단화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측면도 있다.
  이 제2의 측면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이유는 생산을 올리기 위해 가사 노동을 가능한 
한 집단화할 필요가 있다는, 여성 해방에 관한 관료적인 구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은 가사 노동과 사회적 노동의 차이를 지극히 피상적으로 받아들인 
데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가사 노동은 결코 '가족적인' 것이 아니며, 가족에 의해 
수행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가족을 위해서 오로지 여성이 수행하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이빨을 닦아 달라고 하거나 옷을 입혀 달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가 침대를 정돈하고 구두를 닦고 남편이 어지럽혀 놓은 것을 치우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되고 있다. 이 비교는 억지라고 생각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자가 자기 몸을 씻겨주고 머리를 손질해 주고 분을 발라주고 옷을 입혀 
주는 전용 하인을 사용하던 일이 그리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비교가 억지가 아님을 이해할 것이다.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침대를 정돈하거나 솔질을 
하거나 옷을 꿰매거나 청소를 하는 일은 이빨을 닦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각자가 
스스로 그것을 하는 것을 아주 당연한 일이고,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다. 오늘날의 중국은 그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게 된 나라이다. 20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었던 것은 남자들도 가사 노동의 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사 노동을 배우고, 그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경멸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가사 노동은 이미 여자의 일은 아니다.(주62)

  그러나 이 당연한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그리 당연하지가 않다. 다음 표는 노동자 
부부의 생활 시간을 비교 조사한 것이다.
  이러한 남녀의 가사 노동 시간의 차이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난다. 다른 나라의 취업 여성과 취업 남성의 주요 가사 노동 참여율을 보면 
프랑스는 여성 95.2%, 남성 58.4%, 미국은 여성 93.8%, 남성은 50.3%이며 소련은 
여성 98.7%, 남성 73.4%, 폴란드는 여성 98.2%, 남성 58.2%이다.(주63) 이는 
한편으로는 취업 남성의 절반 이상이 가사 노동을 분담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절반 정도는 가사를 외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른 여러 나라들보다 특히 심각하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가사 노동은 
라면 끓이는 것 정도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많은 맞벌이 부부의 경우 똑같이 
바깥에서 일하고 들어와 남자는 안방으로, 여자는 부엌으로 간다. 그리고 명령이 
쏟아진다. 이래서는 남녀 평등은 물론 가정의 평화와 행복도 있을 수 없다.

  신혼의 몇 달간은 꿈과 같이 흘러갔다. 상호 견제와 공동 생활에의 열정으로 남편은 
나보다 오히려 열심이었다. 나 역시 오랜 객지 생활에 지친 남편에게 '따듯한 가정'을 
주고픈 소망 때문에 가사 노동에 신경을 퍽 썼다. 윗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잔업을 
빼고 공장 활동(당시 노조를 만들기 위한 예비 모임들)도 표나지 않을 만큼 소홀히 
하면서 부리나케 집으로 와 남편을 기쁘게 할 반찬 만들기에 전전긍긍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사 노동은 소꼽장난이 아님이 여지없이 증명되었다. 
명절, 제사, 시부모, 친정 부모 생신을 비롯한 각종 경조사가 모두 내 차지로 떨어졌고 
단칸 살림도 살림이랍시고(물론 나의 살림 욕심도 가미되었지만) 이불 빨래며 김치, 
된장, 간장 담그는 일이며 각종 세금 납부에서부터 철을 넘기면 안되는 옷장 정리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노동력을 요구하였다.
  게다가 남편은 이런 자질구레한 일은 도통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설거지나 
밥 몇 번 하는 것으로 온갖 생색을 다 내곤 했다. 모처럼 별러온 휴일에도 미뤄온 
이불 빨래는 안중에도 없이 공장 동료와의 약속으로 밖에서 보냈다. 처음에는 
자발적이었던 가정의 노동이 차츰 내게 질곡으로 다가왔다. 남편은 남편대로 내가 
공장 일로 좀 늦거나 휴일에도 나가면 은근히 "여자들은 모여서 왜 그리 오래 
쑥덕거려. 회의 체계가 영 안 잡힌 것 아니야?", "요새 밥상이 왜 이리 황폐해?"라는 
비난을 하곤 했다. 이런 저런 항변도 많이 하였고 내가 파논 함정에 내가 빠졌다는 
느낌과 함께 "왜 결혼했나?" 한숨지며 혼자 울기도 하였다.(주64)

  우선 직장 생활이 어쩔 수 없이 가져오는 가정에의 소홀함을 용납치 않는 
분위기^36^예요. 어디 맞벌이가 여자 혼자의 만족을 위한 겁니까? 남편과 함께 힘을 
합쳐 남보다 앞선 가정을 꾸려 보자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도 자기는 손끝하나 까딱 
않으면서 집안이 어수선하다는 등 불평만 늘어놓는 남편을 볼 때는 과연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라는 허울좋은 표현을 쓸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어요.(주65)

  가사 노동을 여자만이 하는 것은 남편과 아내의 불평등의 기초인 동시에 그 
집약적인 표현이다. 아내가 가사 노동의 부담으로 인해 사회적 노동에서 남편보다 
불리한 입장에 놓일 뿐 아니라, 가사 노동을 아내가 전담하는 것은 아내가 남편의 
시중을 드는 것, 남편의 하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사 노동은 가족을 
위한 노동이고 애정이 기초가 된 자발적인 배려일 수 있지만, 그것이 오직 여성만이 
하는 일이 되면, 희생이자 시중이 되는 것이다. 가사 노동을 혼자 떠맡게 됨으로써 
여성 노동자들은 남편에 의해서까지 억압을 받게 되며, '불행한 결혼에 대해 절망' 
하고 남편조차도 자신의 편이 아니라 그 반대 편이라는 사실에 완전히 '홀로서기'의 
처지에 놓인다. 가사 노동 문제는 노동자 부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갈등의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얼마 전 『한겨레 신문』에 연재된 중국 기행 연재 만화에서 박재동은 중국에서는 
남자들이 요리와 빨래, 청소, 장보기를 하고 여자들은 아이 보기와 집안 꾸미기를 
한다고 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들이 요리와 빨래, 청소, 장보기, 아이 보기와 
집안 꾸미기를 하고, 남자들은 이불 개기와 생색내기를 한다.
  남자들이 이불 개기와 설거지만으로 생색 내기를 하는 까닭은 가사 노동에 대해서 
배우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배우고 익혀 
일상사가된 가사 노동이 남자들에게는 낯선 영역인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 안 하던 
일을 하면 그것이 전체 가사 노동의 어떤 부분인지를 모르고 스스로 굉장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가사 노동 전체를 배우고 익히게 하기까지는 많은 학습과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남의 일을 도와준다는 시혜 의식 때문에 생색을 내는 것이다.

  지난 3,4 년 동안 기나긴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4 년 전 조안나가 전일제 
근무를 시작했을 때, 아기 맡기는 책임도 그녀 몫, 청소 책임도 그녀 몫, 요리도 그녀 
몫이었어요. 그렇습니다. 내가 도와주기는 했습니다만, 항상 그녀에게 나는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다, 난 당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했어요. 난 공정함이 
습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었죠. 모든 책임은 그녀의 몫이었으며 난 그저 기회있을 
때마다 도와주었을 뿐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거죠. 지금은 내가 빨래더미를 바꿀 때 
아내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일 
뿐이며, 우리는 각자 해야 할 우리 자신의 일을 하는 겁니다.(주66)
    * 가부장적 기득권
  "당신 이제 학교 선생 그만둬. 당장 사표 내고 주부 노릇 착실히 해."
  "."
  "똑똑히 거듭 말해 두겠는데 그만두라면 그만둬. 나도 가장 노릇 좀 제대로 해보고 
싶어, 아침엔 남편보다 먼저 일어나 곱게 화장하고 머리맡에 건강식도 대령하고 
넥타이도 매주고 대문 밖까지 배웅나와 일찍 들어오라고 신신 당부하고, 낮엔 회사로 
코맹맹이 소리로 전화도 좀 걸고, 저녁에 들어가면 왕을 받들듯이 정성껏 환대를 하고 
양말도 벗겨주고 발도 씻겨주는 그런 아내가 되어줘야겠어. 이건 명령이야."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이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체제에 의해 명백히 이득을 누린다. 
남편이 아내의 노동력의 가치까지 자신의 임금으로 지급받음으로써 가부장적 특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 임금을 받는 상층 남성 노동자는 그 임금을 통해 
가정에서 임금이 될 수 있는 권리까지 부여받는다. 그 아내들이 상류 계급 여성의 
생활을 본뜨고자 하는 것처럼, 이들은 상류 계급 남성의 지위를 향유하고자 한다. 
아내의 복종과 봉사와 서비스, 그리고 이를 '명령'할 권리. 가정이라는 소왕국을 
다스리는 근엄하고 권위있고, 그리고 동시에(속으로는)자애로운 임금. 그 왕관이 주는 
매력은 포기하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것이다.
  그러나 왕관은 루이 16세가 단두대에 오름과 동시에 땅에 떨어져 버렸다. 머리 위의 
왕관은 없어졌는데, 머리 속의 왕관에 대한 향수는 아직 살아남아서 헛된 '명령'을 
발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가부장적 지위를 확고히 보장할 만한 튼튼한 물적 기초가 
없다. 이들의 재산이란 생산 수단이 아니라 생활 수단에 불과하고, 가족 임금을 
보장받는 상층 노동자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노동자이다. 그의 지위는 다른 모든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불안하다. 다른 모든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상층 
노동자들도 '자본을 증식시켜주는 한에서만'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며, 경기의 변동에 
그 운명이 달려 있고, 실업, 물가 상승, 임금의 하락,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 등에 의해 
그 지위가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
  대졸 남성의 취업난, 실업과 중견 사원의 적체 상태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이는 불가피하게 중도 탈락자들과, 엄청난 긴장과 압박감 아래 남아서 일하는 자들을 
만들어 내는 속에서만 이들의 지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느 날 
출금했더니 자기의 책상이 없어져 집에 돌아와 어린이 놀이터에서 울었다는 한 가장의 
이야기는 이들의 가부장적 지위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부장의 지위는 확고부동한 권리가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며, 실제로는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려야할 의무'를 뜻한다. 최근 가정에서 남편, 아버지의 지위가 약해지고 있는 
것은 남성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가부장적 권리가 허구적이기 때문이다. 높아지는 생활 
수준에 따른 가족원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만도 이들에게는 점점 어려워 지고 
있다. 가정에서의 '가장'의 지위가 확보되기에는 그의 임금 노^36^예로서의 운명은 
너무도 위태로운 것이다. 한 평생을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살아온 가정 주부가 어느 날 
'위기의 여자'가 되는 한편, 위태위태한 가부장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하는 임금 노^36^예로서의 남편은 항시 '위기의 남자'의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런데 어쨌든 이들 상층 남성 노동자들이 가부장적 권한을 가질 조건을 어느 
정도나마 확보하고 있는 데 비해 대다수의 남성 노동자들은 그럴 만한 조건을 갖고 
잇지 못하다.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하는 가장은 사실 명목상의 감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권위와 권리 대신 버거운 부양의 의무와 무능력한 가장이라는 
초라한 현실이 있을 뿐이다.

  나는 과거 협신중하 공사에 입사하여 지금도 근무중이다. 당시 급료 4 만 9천 원 
급료 수령시 이것 저것 털고 나면 집사람에게 급료 봉투를 전해주기가 민망하다. 
이유는 수령한 급료로서는 1개월의 생활비는커녕 10일분의 생활비 밖에 안되니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집사람이 불쌍하기 짝이 없다. 나도 미안하고 더욱이 자식들 
보기에는 더욱더 미안한 생각이 든다. 자식을 학교에 보내면서 자녀 교육의 
뒷바라지도 확실히 못하고 자녀 교육비도(3개월 분 118,100원) 납기일 내에 납부하지 
못하니 자식들에게도 얼굴을 들 수가 없다.(주67)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 '가장'들의 신세다. 왕관만 없어진 게 아니라, 그것을 올려 
놓을 얼굴도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도 가련한 임금 노동자는 여전히 집안에서는 세 
식구의 밥줄을 쥔 하늘이라는 데서 만족을 느끼고 있다.
    ------
      하늘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 돈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것지.(주68)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임금 노동자도 그 사람에게만은 "밥 줄을 쥔" 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하늘'이다. 그러나 이 흔들리던 작은 하늘은 아내가 남편과 
함께 돈을 벌러 나감으로써 마침내 반쪽 하늘이 되며, 따라서 동시에 땅의 반쪽이 
된다. '남편이 아내를 벌어 먹이는' 관계가 무너짐과 동시에 '남편과 바깥일, 아내는 
집안일'이라는 분업 역시 붕괴된다. 이들 남편에게 아내의 가사 서비스를 받을 만한 
근거와 조건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역시 머리 속에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무엇이 떨어진다"는 옛날 이야기가 살아 남아서 이들을 안방에 고정시켜 
놓고 있다.
      --------
    주제 파악

  사내 자식이 부엌에 들어가면
  무엇이 떨어지고
  기집애가 싸돌아 다니면
  집안이 망한다고
  누누이 귀에 익게 들었다.

  집안이 망했는데 못 다닐 곳은 어디며
  맞벌어 먹는 판에
  부엌에 들어가면 또 어떠랴

  기집애는 돌아다니지만
  사내 자식은 안방에 앉아
  한나절 잔소리가 쏟아진다.

  물 떠와라 밥 차려라 양말 빨아라
  속옷 찾아놔라 청소 깨끗이 해라
  애 달래라 반찬 신경써라.(주69)

  아내의 사회적 노동을 받아들이기는 그래도 쉬운 일이지만, 자신의 가부장적 권리를 
포기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때문에 남편에 대한 재교육과 훈련은 많은 경우 
'투쟁'으로 화한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가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힘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들의 투쟁에 의해 남편들은 
단단한 가부장제의 알에서 깨어나고 있다.

  나는 33세의 가장으로서 아내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청탁받았을 때 
주저함이 없이 응하게 된 동기는 가사 노동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실천을 
일상화하기까지 아내와의 지난했던 투쟁을 밝힘으로써 나와 동일한 고민을 하면서 
고통받고 있을 이 땅의 남성 동지들에게 미력하나마 도움을 주고자 하는 동지적 배려 
때문이다. 연애 시절, (아내는) 나에게 배우자상에 대한 견해를 물었는데, 나는 평소의 
생각대로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남편을 기다리고 집에서 아이나 키우며 
집안일을 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정색을 하며 한심한 듯 나를 
쳐다보더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그런 전근 대적인 사고 방식을 아직도 갖고 
있느냐'고 따져왔다. 나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남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그런 
괘씸한 발언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결혼 이후, 막상 두 사람이 생활하게 되자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식사 
준비와 설거지 분담 문제, 공동 빨래 문제, 방 청소 등등에 대하여 아내는 동일하게 
역할을 분담하자고 제의했다. 나는 가장으로서의 권위도 누리고, 좀더 편해지고 싶어서 
결혼한 것인데 편해지기는커녕 계속해서 구속과 문제 제기를 받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나는 시간이 나거나 기분이 내키면 가사 노동을 일정 부분 도와주려고 했던 것이지, 
동등하게 분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남자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는 가정 내 민주화를 
위해서는 가사 노동 분담이 필수적이라며 나를 집요하게 설득하여 했다. 가사 노동 
공동 분담표도 작성하여 붙이고, 1주일에 한 번씩은 꼭 평가를 하고, 적어도 1 년(결혼 
기념일)에 한 번씩은 얼마나 자신의 생활과 가정 생활에 충실했는가를 평가하자고 
제안했다. 합의가 되지 않으면 잠도 자지않고 끈질기게 문제 제기하고 토론하자고 
덤벼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 제안을 형식적이나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나에겐 견디기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다. 창피한 일이지만 결혼 후 만 2 년까지는 거의 
매일 가사 노동 분담 문제로 부부 싸움을 했다. 나는 가사 노동의 지원자, 보조자이긴 
했으나 적극적인 담당자는 결코 아니었다.
  결혼 후 2 년이 지난 어느 겨울, 도저히 참지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쌓인 나는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이혼하는 편이 훨씬 서로에게 좋겠다'고 하면서 이혼을 
하자고 했다. 당시 내 심정은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저런 여자를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내는 내가 이혼하자고 한 말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는 죽음까지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하였다. 
'당신과의 삶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생활 속에서 내가 당신에게 제기한 문제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끊임없이 지적해 온 것이다. 당신의 이혼 제기는 관계의 
포기이며 비겁한 도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럴 생각이라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삶을 정리하는게 낫다고 본다'며 아내는 극단적 방식으로 나왔다.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아내의 성격이나 기질이 갖고 있는 특수성, 그리고 나의 완고함이 
부딪쳐서 빚어진 사건이라고 본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아내의 방식이 어떠했든지간에 내가 올바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행히 아내의 극단적인 방식에 내가 변화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남자로서 그 동안 누려왔던 기득권을 포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나의 생활에 
변화가 있기 시작했다. 억지로 시작했던 가사 노동이었지만, 다음 날 새로운 노동을 
위한 재생산 노동으로서의 가사 노동의 가치를, 나날의 실천과 아내와의 생활 평가를 
통해서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남녀 차별의 전형이 
가사 노동을 여성에게 전담시키는 형태로부터 출발되는 것임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인식과 실천이 가사 노동의 분담을 통해 통일되면서 우리 둘 사이에는 동지적인 
애정과 신뢰가 성숙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주70)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떨어지는 것이 있긴 있다. 그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 
가부장적 기득권이다. 이것을 버리(게 하)기까지의 과정은 멀고 험한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가 성숙한 애정이라면 가사 노동은 참으로 할 만한 노동이 아닌가? 오직 멀고 
험한 성숙한 애정보다 눈 앞의 가부장적 이득에 연연해 하는 남자만이, 즉, 남자답지 
않은 남자만이 부엌에 들어가기를 꺼릴 것이다.
    * 가부장적 기득권의 이면
  게다가 아내를 부려먹을 권리로서의 가부장적 기득권은 실상 달콤한 껍질에 싸인 
독약과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궁극적인 이익은 자본에게 돌아가고,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남편과 아내 모두의 착취율의 강화와, 남성들의 가정으로부터의 소외와, 
부부 관계와 부모 자식 관계의 왜곡과 파괴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남성 노동자에게 
가정 책임을 면제하는 대신 생산 과정에서 가정 책임을 다 할 수 없을 정도의 강도 
높은 노동을 시킨다.

  남자들 점심 시간에 한 번씩 나오면 땀이 옷에 꼭 비맞은 사람 오양 척척해 가지고 
와서 맥이 빠질대로 빠져서 와가지고 밥 한 끼 먹고 가고 저녁에는 7시, 8시가 뭐야 
9시 다 돼가지고 와서 저녁밥 먹고 자는 거죠. 오면 그냥 피곤하니까 누워자는데 
솔직히 말해서 집에 와서 '아이고 내 새끼 이뻐' 하고 한 번 안아보길 해요 뭐를 해요. 
자기 몸이 피곤하니까. 베개 내려놓고 머리만 닿으면 자요. 9시면 자요.(주91)

  연구, 전문 기술, 관리직의 남성 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가정 일은 아내가 
맡아서 한다는 전제하에 이들은 자본에 의해 그 최대한까지 혹사당한다. 남성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이 이를 더욱더 강화한다. 이런 가운데 도태되지 않으려면 남성 
노동자들은 가정적인 의무를 다할 수가 없다. 밤 늦게까지 업무에 시달리는 남편, 혹은 
아버지가 집에서 하는 일은 잠자는 것 뿐이다. 책임이 없는 곳에는 권리도 없기 
마련이다. 그는 가정적 즐거움을 빼앗긴다. 남성 노동자의 가정에서의 위치는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다. 그가 어떤 권리와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아내와 자식들과의 친밀한 
인간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번다는 사실에서 나올 뿐이다. 이는 돈의 
권리이고 권위이지 그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아니다. 그는 가족 내에서조차도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물질적 존재로 존재한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거의 '돈'으로만 전달되고 표현된다. 그러나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돈말고도 
마음을 터놓는 대화와 함께 놀아주고 따듯하게 보살펴 주는 것과 같은 다른 방식으로 
전달되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남성들이 가정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이해하고 있으며, 훨씬 나은 경우에도 신체적으로 보살펴주는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남성들이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욕구들을 억압당하고 이에 둔감하도록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을 베푸는 것은 남자들 자신을 위해서도 매우 필요하다. 그런데 성별 분업의 
이데올로기와 남성의 가부장적으로서의 권위 의식이 가족들에 대한 자상한 배려를 
가로막고 있다. 그 결과 남성들의 삶 역시 왜곡되고 공허하게 된다. 그는 가족에서 
튼튼한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하며, 가족 관계를 희생하면서 추구한 사회적 성취 역시 
대개는 평생을 바친 끝에 쓸모없다고 버려지는 임금 노^36^예의 현실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에게는 설 자리가 없다. 가정에서마저 설 자리를 잃는 남성들은 
여성보다도 더욱더 뿌리뽑힌 나무가 되어 흔들린다. 남자 노인들이 여자 노인보다 
더욱더 초라하고 할 일 없고(따라서 쓸모없고) 갈 곳 없는 신세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대해 보이던 가부장의 자리는 한갖 연민의 대상이 된다.

  결혼이 현실감 있게 다가서면서 자녀 양육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소외되는 것을 보며 
자라온 탓이 크다고 생각된다. 당신은 자식에 대해서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있기는 
하였지만 자녀 교육은 어머니에게 완전히 맡기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마치 수퍼맨인 것처럼 생각되었을 뿐이고 그나마 내가 철들면서 
그러한 환상이 깨어지는 것을 보며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꼈기 
때문이다.(주72)

  가부장권의 실상은 겉껍데기의 감투 아래 가정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남성 노동자들 역시 무엇보다도 가족을 위해서 일한다. 가족이 아니라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그 모든 고역을 참고 견디도록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가족을 위한 
노동은 가족으로부터의 소외로 보답을 받는 것이다.
    * 노동과 가정의 양립
  이는 가사 노동 문제에 대한 여성 해방 운동의 목표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또 하나의 해답을 제공한다. 가사 노동에 대한 올바른 해결은 여성을 
무조건 사회적 노동에 지금의 남성들과 똑같이 몰아넣는 것에 있지 않다. 이는 가정과 
노동을 대립시키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 의해 길들여진 데서 나온 발상이다. 그와 
반대로 가사 노동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은 남성과 여성 모두가 직장과 가정, 
사회적 노동과 가사 노동을 양립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양쪽 모두에서 
자기를 실현하고 사회와 가족에게 공헌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여성 해방은 무슨 일벌레를 만드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지 않다. 일벌레는 가사 
노^36^예와 마찬가지로 비인간적인 것이다. 여성 해방의 목표는 가정을 희생시켜 
직업적 성공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가정의 조화에 있으며, 인간 
개개인이 노동을 통해서 뿐 아니라, 가족 관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인성을 
전면적으로 발달시키도록 하는 데 있다. 앞의 사례에서 가사 노동 문제를 통해 성숙한 
애정을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은 가사 노동 문제, 나아가 여성 해방이 내포한 지평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정과 노동의 양립은 양면적인 과제를 제시한다. 첫째는 여성을 가사 노동과 
가정에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사회적 노동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남성을 가족과의 인간적 관계로부터의 소외에서 해방시켜 가사 노동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제의 일단은 선진 자본주의국의 노동 
운동과 여성 운동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ILO에서는 1981 년, 가족 책임이 남녀의 공동 책임임을 분명히 하는 
조약을 제정했다. ILO의 156 호 조약과 165 호 권고는 가족 책임을 전적으로 
여성에게 부과하는 한 양성 평등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에 근거하여 가족 책임은 남녀 
쌍방과 사회가 공동으로 분담해야 한다는 것을 권고 하고 있다.(주73)
  특히 육아와 모성 보호를 둘러싼 선진국 노동 운동의 흐름은 육아를 여성만의 
책임으로 보지 않고, 남녀 모두의 책임으로 보며, 모성뿐 아니라 부성도 권리로서 
쟁취해야 한다는 데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육아 휴직을 남성도 가능하게 하고, 
모성 휴가가 아니라 부모 휴가를 쟁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실제로 
스웨덴에서는 모성 휴가가 아니라 부모 휴가를 규정하여, 아버지도 육아 휴직을 얻을 
수 있으며, 아이가 아플 때, 아이를 더 낳을 때(아버지는 어머니가 병원에 있는 동안 
아이를 돌보기 위해 부성 휴가를 받을 수 있다), 아이가 아동 복지 클리닉에 가야할 
때, 부모가 탁아소를 방문하고자 할 때(1부모당 1년에 1일) 부모는 부모 휴가를 받을 
수 있으며, 이는 일년에 한 아이당 60일로 되어 있다.(주74)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부성 급여에 관한 의식이 아직 매우 낮다.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육아를 위한 어머니의 휴직이 시급하다는 응답은 79.9%인데 비해 육아를 위한 
아버지의 휴직이 시급하다는 응답은 16.9%(도시의 20 대 남성의 경우는 19.2%, 30 
대 남성은 10%, 50 대 이상 남성은 7.9%가 시급하다고 답했다)로 낮은 응답률을 
보였지만, 젊은 세대일수록 그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에 있어, 의식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주75) 사실, 여성들이 사회적 활동을 원하고 사회 생활에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능한 소질을 발휘하듯이 남성들 중에서도 가족들에게 세심하고 
자상한 배려를 하고, 가족을 잘 보살피며, 이를 즐거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사회 활동을 잘 해내는 여자들이 여자답지 못할거라는 편견에 시달리듯이 
가정적인 남성들도 남자답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여성들이 사회적 노동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남자들은 가사 노동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가 필연적이듯이 남성이 가사 
노동에 참여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추세이며, 사회적 활동과 가사 노동을 함께 하며, 
협력해서 살아가는 새로운 유형의 부부가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들은 남녀 차별적인 
사회의 이질적인 요소로서, 현재 속에서 자라나는 미래의 싹들이 언제나 그렇듯 
강고해 보이는 낡은 관념과 관습에 시달리고, 아직은 약하고 여려 보이지만 이 강고한 
벽들을 뚫고 마침내는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간직하고 있다.

  엄마(아내)가 일 다니느라 힘들어 할 땐, 애 옷이 밀리고 하면 빨래 도와 주는데 
남들 볼까봐 문 잠그고 한다. 주로 안집 식구들이 일요일 오전에 교회갈 때 하는데, 
안집 사람이 오면 빨다가도 후다닥 방으로 들어간다. 그런 것을 남한테 보이고 싶지 
않다(30세, 용접공, 카스테레오 조립공의 남편).

  내가 애 씻기고 머리도 묶어주고 세심하게 신경쓰는 것 보면, 남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한번은 집에서 애 옷 빨고 있는데 옆집 형님뻘 되는 친구가 술 먹자고 
와서, 내가 빨래 다 하고 나가겠다고 하니깐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남의 눈 개의치 않고 한다(25세, 신발 봉제, 악기 조립공의 남편).(주76)

  성별 분업의 붕괴는 사회와 가정을, 공생활과 사생활을, 이성과 감성을 통합한다. 
그리하여 이는 남녀 모두의 전인적인 인간성을 기르며, 보다 조화롭고 풍부한 
인간으로 만든다. 가사 노동을 통해서 남성은 가족에 대해서 재인식한다. 이를 통해서 
남성은 아내와 자식들의 진정한 욕구를 깨닫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가사 노동을 
변혁하는 것은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남성을 변혁하는 것이다. 가사 
노동을 변혁하는 것은 가사 노동을 여성이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인간적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게 하는 것이고, 사회적 노동과 가사 노동과의 대립과 
모순을 폐지하는 것이며, 여성과 남성 사이의 오랜 불평등과 갈등과 불화와 오해의 
벽을 허무는 것이다.
      ------------
    3. 자본주의의 발달과 여성의 미래

  이상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에서 여성이 놓인 위치와 문제점을 사회적 노동과 
가사 노동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사회적 노동에서의 여성의 위치는 가사 노동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역으로 가사 노동에서의 여성의 위치는 사회적 노동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 노동과 가사 노동 사이의 성별 분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여성 노동자의 위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발달은 성별 분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1) 자본주의 발전 단계와 여성 노동의 변화
  자본주의의 발달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변화의 하나는 기존의 성별 분업을 
폐지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한데, 하나는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육체 노동이 해체된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임신, 육아에 필요한 시간과 신체적 소모가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기본적으로 육체적 힘의 차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이것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화하는 
하나의 중요한 표지가 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기계의 발명과 함께 확립되었는데, 기계제 대공업의 발달은 노동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왜냐하면 기계가 육체적 힘을 대신하므로, 
노동에서 육체적인 힘은 점점 불필요하게 되어 기존의 성별 분업의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인 여성과 남성의 육체적 힘의 차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기계는, 그것이 근육의 힘을 요구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근육의 힘이 약하거나 
또는 육체적 발달은 아직 미숙하지만 팔과 다리는 더욱 유연한 노동자를 사용하는 
수단으로 된다. 그러므로 여성 노동과 아동 노동은 자본가에 의한 기계 사용의 첫 
번째 결과였다!(주77)

  생산력이 발달할수록 점점 더 많은 육체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게 된다. 따라서 힘든 
육체 노동은 점점 사라지고, 대신 정신 노동이 발달한다. 이는 노동자들 사이의 육체적 
힘의 차이를 무의미하게 하며, 그런 점에서 기존의 성별 분업의 붕괴는 일률적이거나 
직선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과학 기술의 기술적 토대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하나의 산업에서 새로운 산업으로 생산의 중심이 옮겨간다는 데 
있다. 이로 인해 노동자에게 필요한 기능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노동자의 구성도 
달라진다.

  근대적 공업은 결코 어떤 과학 기술의 기존 형태를 최종적인 것으로 보지 않으며, 
그렇게 취급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종전의 모든 생산 방식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었지만 근대적 공업의 기술적 토대는 혁명적이다. 근대적 공업은 기계, 화학적 
과정 및 기타 방법들에 의하여 생산의 기술적 토대, 그리고 그것과 함께 노동자의 
기능, 노동 과정의 사회적 결합들을 끊임없이 변혁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사회 내부의 분업도 변혁시키며 많은 자본과 노동자 대중을 한 생산 부문에서 다른 
생산 부문으로 끊임없이 이동시킨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흡수되고 
축출되며 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는데, 동시에 징집되는 노동자들의 성별, 연령 
및 기능에 있어서는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난다.(주78)

  자본주의의 발달 단계에 따라 여성 노동자의 위치는 변화해 왔다. 1차 산업 혁명의 
결과로 성립한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주요한 산업은 경공업이었는데, 역서는 여성 
노동자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여성은 1차 산업 혁명의 전위대였다.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섬유 산업은 자본, 
기술, 한 장소에 집중된 노동력에 의해 매뉴팩쳐로부터 새로운 과정을 창조했다. 이 
섬유 산업의 노동력은 거의 젊은 여성 노동력, 새로 도시화된 공장 지대를 둘러싼 
농촌 지역의 가족 농장으로부터 모집되었다. 1896 년 프랑스에서는 의복 제조 
노동자의 87%, 섬유 노동자의 51%가 여성이었다.(주79)

  전체 공장 노동자 중에서 18세 이상의 성인 남성 노동자가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23%에 불과하다. 직물 산업에서 여성 노동자의 비율은 다음과 같다. 면직물 공장에서 
56.25%, 모직물 공장에서 69.5%, 견직물 공장에서 70.5%, 아마포 공장에서 
70.5%이다.(주80)

  이는 모든 나라에 공통된 현상이다. 일본에서도 산업 혁명을 주도한 방직 산업에서 
여공들이 압도적 비중을 점하고 있었으며, 1909 년에는 민간 노동자의 65%가 
여자였다.(주81) 우리나라 역시 1922 년에 여공의 비율이 전체 노동자의 20.5%이며, 
1928 년에는 33.7%로 증가하였으며, 1936 년까지 32.0--34.2%라는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주82) 방직과 같은 공장 노동자 중에서의 비율은 물론 훨씬 높았다. 여성 
노동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인은 생산의 기술적 
성격이다. 1차 산업 혁명의 결과로 성립된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주요한 산업은 방직, 
방적 등의 섬유 산업이었다. 이 산업의 기술적 성격은 여성 노동에 적합한 것이었다.

  방적이나 방직에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행하는 일은 주로 끊어진 실을 잇는 데 
그친다. 다른 주요한 노동은 전부 기계가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노동에는 어떤 
근육의 힘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손가락이 유연하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손가락을 교묘히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손의 근육이 발달해 
있는 남자 노동자는 여성과 연소자에 비해 훨씬 부적당하게 되며, 그리하여 자연히 이 
노동으로부터 배제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수력, 증기력이 손의 힘이나 팔의 힘을 점점 
대신함에 따라서 더욱 성인 남자의 고용이 줄어들게 된다.(주83)

  여성이 산업의 중심에 서자 노동자 가족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서로 바뀌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남성들이 일자리를 잃고 집안 일을 하고, 여성들이 가족을 
부양했다.

  그는 아무런 가구도 없고 더럽고 습기찬 지하실에서 친구를 만났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는가? 그는 바늘로 부인의 양말을 깁고 있었다. 문간에 있는 자신의 
옛친구를 보자마자 그는 양말을 감추었다. "잭, 무얼하고 있나?" 불쌍한 잭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래 나도 이것이 내일이 아닌 줄 알고 있어. 그러나 불쌍한 
마누라는 공장에 갔네. 마누라는 아침 5시 30분에 공장에 가서 저녁 8시에 온다네. 
집에 돌아와서는 너무나 기진맥진해 있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야 하네. 왜냐하면 나는 3 년째 실업 상태에 있기 때문이지. 
아마도 나는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나서 그는 
눈물을 흘렸다. "여기에는 여자와 어린이들을 위한 일자리는 많이 있지만 남자들을 
위한 일자리는 없어. 자네는 할 일 없이 길에서 방황하는 수백 명의 사내들을 볼 수 
있을 걸세."(주84)

  그런데 이 당시 초기의 열악한 공장 노동에 여성들을 대거 끌어들인 것은 
한편으로는 생명의 생산에 미치는 결정적인 영향에 대한 무지에 기초하고 있었다. 
당시 모성 파괴의 실상은 엄청난 것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해산할 때까지 계속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것은 일을 하지 
않으면 임금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해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여성 
노동자들이 전날 저녁까지 노동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해산을 하는 경우는 아주 
빈번하며 일을 하다가 공장 안의 기계들 사이에서 애를 낳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주85)

  젖먹이 어린애가 있는 부인은 어린애가 집에 남아 배고픔 때문에 종일 울 수밖에 
없자 우선 어린애가 우는 것을 막기 위해 아편을 넣은 14약(팅크)을 먹이고는 공장에 
나갔습니다. 이것을 먹이면 위가 마비되어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약 때문에 죽는 어린이가 많이 생겼습니다.(주86)

  질문: 어린애가 있나요?
  답: 아니요. 둘이 있었으나 고맙게도 모두 죽었어요.
  질문: 당신은 아이들의 죽음에 만족을 느끼나요?
  답: 그렇습니다. 신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애들을 길러야 할 짐을 벗었고 불쌍한 
그애들은 이런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났으니까요.

  아내는 매일 12시간 내지 13시간씩 공장에서 노동하고, 남편 역시 같은 공장이나 
다른 곳에서 똑같은 시간 동안 일한다. 이렇게 될 때 그 자녀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잡초처럼 자란다. 아이들은 1주일에 1실링이나 18 펜스의 비용으로 보모에게 
보내진다. 그들이 거기서 어떤 대우를 받을 것인가는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이로 인해 공장 지대에서 어린아이들의 사고가 놀랄만큼 증가하고 있다. 
맨체스터 검시관의 통계에 따르면 이 한 달 동안에 69 명의 어린이가 화재로 죽고, 56 
명이 익사했으며, 23 명이 추락해서 죽고, 77 명이 그밖의 원인으로 죽어, 모두 225 
명이 사고로 죽었다. 반면에 비공장 지대인 리버풀에서는 12 달 동안 사고는 단 
146건이 있었다. 『맨체스터 가디안』지는 거의 매일 호마다 화재로 인한 죽음을 몇 
건씩 보도하고 있다.
  어머니들을 고용함으로써 어린이의 사망률이 전체적으로 높아지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주87)

  아무런 대비도 없이 여성들을 가혹한 공장 노동에 혹사시킨 대가는 출산율의 감소와 
엄청난 유아 사망률, 결과적으로 인구와 노동자수의 감소라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에 
자본가들은 모성 보호 입법을 제정했다. 이것은 결국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제한해야 한다는 의미였으며 여성의 고용에 영향을 미쳤다.
  뒤이은 제 2차 산업 혁명에 의해 중공업이 발달하여 생산의 중심이 되었고, 
자본주의는 독점 단계에 들어섰다. (전자나 전기기구 등 여성이 더 많은 부문도 
있지만) 자동차, 항공 등 산업 발전을 선도하는 많은 중공업 부문에서 남성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중공업이 경공업에 비해 육체적인 
힘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하고, 작업 환경이 유해하거나 열악하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경공업이 여성에게 더 적합한 데 비해 중공업은 남성에게 더 적합했다. 그리하여 
경공업과 중공업 사이의 분업이 새로운 성별 분업으로 되었다. 그리고 중공업 
노동자와 경공업 노동자와의 격차가 남녀의 격차에 더해졌다. 물론 이것이 여성이 
중화학 공업의 노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제 1차 대전과 2차 대전 
당시 남성들이 전쟁터로 나가자 여성 노동자들은 즉각적으로 남성 노동자의 자리를 
메꾸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그 자리는 다시 남성들로 메꿔졌다.

  제1차 대전은 여성의 노동력 참여에 근본적이거나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1920 년의 여성의 고용률은 20.4%로 1910 년(20.9%)보다도 실제로 약간 
낮았다. 노조와 정부, 사회는 여성의 경제적 역할의 영구적인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대신 여성은 전시의 긴급한 필요를 채웠으며 평화가 돌아오자마자 그전의 
자리로 돌려보내졌다. 개혁가 마리 폰 클릭이 썼듯이 "즉각적인 위험이 지나가자 
편견이 다시 생활 속에 들어왔다."(주88)

  전쟁 중에는 일부 여성들이 철도 산업에서 비전통적인 직업(기계공과 같은)에서 
일했다. 전쟁이 끝나자 철도 산업은 여성들을 타이피스트, 카드 천공원, 비서, 
접수계원, 사무직원으로만 고용했다. 독점 자본이 발달하고 정신 노동의 영역이 점차 
넓어지면서 그러한 경향은 더 한층 굳어졌다. 이런 영역에서는 노동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이 중요한데, 여성은 모성 보호 문제와 가사 부담 문제 때문에 자본이 
채용을 꺼렸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관리직이나 중공업에, 여성들은 단순 사무직과 
경공업에 고용되었다. 중간층 여성들은 적당한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신분에 합당한 유능한 남자를 만나 가정 주부가 되는 것이 가능한 최선의 
길이었다. 하층 여성들도 미혼 시절 경공업이나 단순 사무직에 취업했다가 결혼한 
뒤에는 가정 주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성별 분업은 다시 확고해졌고, 차별도 
심해졌다.

  기혼 여성은 이 시기에 거의 집 밖의 노동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임신과 육아, 가사 
노동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 중간 계급의 아내들은 더욱 소수만이 일했다. 이혼했거나 
과부가 되었거나 남편이 실업한 여자들만이 일했다. 이 시기에는 여성의 노동에 대한 
수요가 크지 않았으며 여성의 대부분은 어린 아이의 어머니였다. 여성이 얻을 수 있는 
직업은 독신 여성들로 쉽게 채워졌다. 독신의 백인 여성들도 노동력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다. 고용된 젊은 독신 여성은 단지 일시적으로만(결혼할 때까지)일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저임금에 대해 불만을 말하는 여성들은 흔히 "그렇지만 너는 너를 
부양하는 남편이 있지 않느냐"라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성차별이 점점 더 거의 모든 
직업에서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직업적 위협"으로 되었다.(주89)

  중공업과 경공업, 혹은 사회적 노동과 가사 노동 사이의 성별 분업이 굳어지면서 
노동자 계급 가정 내에서의 남녀 위치는 다시 남성 우월적으로 재편되었다. 새로운 
변화는 제 3차 산업 혁명이라고 불리는 과학 기술 혁명에 의해 준비되고 있다. 과학 
기술 혁명은 생산의 자동화에서 새로운 경지를 열고 있다. 컴퓨터와 로봇 산업의 
발달은 인간을 단순 육체 노동에서 해방시킬 날을 기약하고 있으며, 정신 노동까지도 
대체하고 있다. 이를 통해 생산력의 발전 속도는 더욱더 빨라지고, 생산 기술을 
개발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산업이 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은 고업이 그 중요성을 
점차 새로운 산업에 넘겨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산업은 농업이나 
공업같은 물질적 생산 부문이 아니라, 서비스 산업같은 비생산 부문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교육, 연구, 문화 예술 활동, 의료와 
건강, 여행과 레저, 오락 등에 쏟게 될 것이다. 다니엘 벨이 말했듯이 이러한 새로운 
산업은 여성 인력을 대거 끌어들일 것이다. 이런 산업은 육체적 힘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반면, 여성들의 지적, 정서적 능력을 필요로 하고 발휘하게끔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제 3차 산업 혁명의 진전과 함께 여성 
노동자의 비중은 급증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자본가들이 여성을 고용하기 
위한 대책에 부심할 정도로 여성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여성 
노동자의 비중이 급증하는 또 하나의 기초는 새로운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한편, 노동 생산성이 점점 더 커져서 여성들에게 모성 보호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고용하는 것이 자본에게 유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 
생산성이 낮은 단계에서는 여성들이 집에서 가사 노동을 하는 편이 더 생산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제 점차 고부가 가치 산업이 발달하고, 노동 생산성이 높아짐에 따라 
여성에게 보다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또한 전반적인 노동 조건의 향상 역시 
여성에게 노동의 기회를 넓히고 있다. 앞으로의 생산력 발전이 기존의 육체적인 힘에 
기초한 분업을 붕괴시키고, 여성들이 자질을 발휘할 수 있는 노동 분야를 
확대시키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 역시 높아질 
것임에 틀림없다.
  가사 노동에 있어서의 변화가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 역시 이 시기의 일이다. 가사 
노동의 기계화와 자동화, 사회화가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 활발해졌다. 예를 들면 1956 
년에는 영국에서 전가구의 8%만이 냉장고를 가졌으나 1981 년에는 93%로 증가했다. 
1970 년에는 전가구의 30%만이 중앙 난방이었지만 1981 년에는 그 두배에 가까운 
59%가 중앙 난방이며, 가전 제품 역시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보급되어 1981 년 현재 
전가구의 78%가 세탁기를 소유하고 있다.(주90)
  또한 탁아소나 유치원이 대규모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에 와서의 일이다. 
이런 변화는 한편으로는 생산 자체의 확대 발전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급증하는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에 의해 촉진되었으며, 다시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를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2) 줄어드는 가사 노동
  성별 분업의 재편은 기계와 상품 생산의 발달에 따라 가사 노동이 해체됨으로써도 
일어나고 있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자본주의적 생산이 거의 모든 생산 분야와 
서비스 분야에 확대됨으로써 종래 가정에서 행해지던 많은 노동이 사회화되어 가정 
내의 노동은 점점 줄어든다. 우선 기계제 대공업의 발달에 따라 예전에는 여성들이 
담당했던 가정 내 생산의 많은 부분이 기계제 대공업에 포섭되어 왔다. 예를 들면, 
정미 기계가 발명되기 전에는 밥을 짓기 위해서 벼를 방아로 빻아 키질을 해야 했다. 
그러나 정미 기계와 돌 고르는 기계의 발달로 방아를 찧던 노동이 기계화되어, 가정을 
떠나 공장에서 행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쌀을 씻는 노동까지를 기계화한 청정미의 
대량 생산이 착수되었다. 이제 밥을 짓기 위해 집에서 해야 하는 일은 단지 쌀에 물을 
부어 불에 올려놓는 것 뿐이다. 또한 자동화된 기계 설비를 통한 식품의 대량 생산이 
가정 내에서 여성들에 의해 수행되던 요리 노동의 점점 다 많은 부분을 대신하고 
있다. 빵, 과자, 국수, 라면, 만두, 각종 냉동^5,23^ 건조 식품, 기타 인스턴트 식품은 
물론, 간장과 된장, 고추장, 햄, 치즈, 소시지에 이르는 다양한 식품 산업의 발달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밥과 각종 반찬을 파는 슈퍼마켓이 늘고 있다. 기계에 의한 
생산이 수공업적인 낡은 방식보다 유리한 모든 기존의 가내 생산 부문이 기계제 
대공업의 대치된다. 여러 가지 서비스 산업의 발달 역시 가사 노동을 해체시킨다. 
국민 교육의 일반화와 유치원, 탁아소의 발달은 육아 노동을 사회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화 한 통으로 가전 제품에서 농산물에 이르기까지 집에 앉아서 구입할 수 
있는 배달 사업도 발달하고 있으며, 이삿짐을 싸서 옮겨서 다 정리해 주는 이사 
대행업을 비롯한 서비스 센터도 성업중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가정집의 
청소 대행업까지 생겨났다. 또한 학교 급식을 비롯해 식당도 발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미미한 정도지만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 비율이 높은 
나라들에서는 거의 모든 학생들에게 급식을 실시하고 있다.
  여러 가지 가사 도구 역시 가사 노동을 경감시킴으로써 가사 노동을 해체한다. 
오늘날 기계제 대공업은 나날이 다양한 가사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 이 가사 도구는 
가정 내 노동의 시간을 단축하고, 노동을 경감한다. 이전에는 밥을 하기 위해 내내 
지키고 앉아 장작불을 때야 했지만 이제는 전기 밥솥에 스위치만 넣으면 된다. 가스 
렌지와 전자 렌지 등 요리 도구의 강도를 절감하고 숙련을 해체한다. 빨래 함지를 
이고 시냇가에 나가 집에서 재를 밭혀 만든 잿물로 해야 하던 빨래는 이제 전자동 
세탁기에 스위치를 넣는 노동으로 대신될 수 있다. 컴퓨터의 발달은 세탁기에게 
빨래의 양과 종류와 더러움의 종류와 정도에 따라 세탁 방식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이 개발한 퍼지 방식의 세탁기는 기름때가 묻은 옷과 
진흙이 묻은 옷을 구별하여 스스로 세탁 방식을 선택한다. 청소기도 마루와 양탄자, 
다다미를 구별하여 청소 방식을 자동 조절하는 것이 개발되었다. 기름 보일러와 가스 
보일러의 발달은 난방을 위해 스위치를 넣는 일을 한꺼번에 할 수도 있다. 최근 
보급되고 있는 홈오토메이션 장치는 집 밖에서도 원격 장치를 이용해서 이들 스위치를 
넣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집 안의 온도와 습도 조절, 공기 정화를 자동으로 하고, 첨단 
전자기기와 주방 용품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된 주방 자동화 시스템인 시스템 
부엌이 보급되고 있다. 이 부엌은 손을 갖다 대면 물이 저절로 나오는 센서식 수도와 
가스 감지 경보기 등이 갖춰져 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컴퓨터 통신망을 갖춘 
가정집과 가사를 담당하는 로봇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상품을 구입하고 싶으면 
집에서 컴퓨터를 통해 시세와 목록을 복 h전화 한 통만 하면 된다. 가사 노동에서도 
힘든 육체 노동, 단순 반복 노동이 점차 줄어들고 자동화되어 가는 것이다.
  가사 노동의 사회화와 자동화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확대 발전과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에 의해 추진된다. 가사 노동의 성격상 모든 가사 노동이 사회화될 수는 없지만, 
가사 노동이 여성의 사회적 노동에 장애물이 아닐 수 있는 조건은 이미 마련되고 
있다.
  이러한 가정 내 노동의 경감과 단순화는 두 가지 점에서 성별 분업을 해체한다. 
첫째로 이는 가정 내 노동을 하는 여성들에게 가정 밖의 노동을 할 기회를 넓힌다. 
둘째로 가정 밖의 일을 하고 있는 남성들도 가정 내 노동을 손쉽게 할 수 있게 한다. 
가사 노동이 많은 시간과 숙련을 요할 때에는 남자들이 이를 하는 것이 보다 
어려웠다. 가사 노동을 단순화하고 경감하는 가사 도구들의 발달은 남성이 가사 
노동에 쉽게 참여할 수 있게 한다. 가사 노동이 사회화와 기계화를 통해 경감되고 
단순화되는 것은 여성이 가사 노동만을 하고, 가사 노동을 여성만이 해야 할 필요를 
없앤다. 이는 여성에게는 사회적 노동에 참여할 기회를 넓히며, 남성에게는 가사 
노동에 참여할 기회를 넓힌다.
    3) 적게 낳는 시대
  여성의 생산 노동 참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요소는 피임술의 
발달이다. 봉건 시대까지 인구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으며, 특히 유아 사망률이 높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대중의 생활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도저히 
피임이 발달할 수 없다. 피임에 관한 몇 가지 비방들이 어느 사회에나 전해져 왔지만 
결코 일반화될 수는 없었다. 일반 민중들이 사용한 대표적인 산아 제한은 낙태와 영아 
살해였다.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 수유에 많은 신체적인 에너지를 소모했으며, 특히 
낙태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여성들은 인생의 활동적인 시기의 대부분을 임신과 출산, 
수유의 연속으로 보냈다.

  나는 어머니의 일곱번째 아이였다. 내 밑으로도 일곱 명이 더 태어났다(모두 14명). 
이 때문에 나는 어머니의 완전히 노^36^예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머니는 
항상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거나 혹은 젖먹이 아이를 기르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 형제들 중 위로부터 여덟 명조차 도움이 없이는 학교 갈 준비를 할 수 없을 만큼 
어린 편이었다.(주91)

  자본주의가 가져온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은 생활 수준의 일반적인 향상을 가져왔고, 
이것이 평균 수명을 연장하고 사망률을 낮추고, 특히 유아 사망률을 낮추었다.
  이와 함께 의학의 발달과 그 대중적 보급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인구가 얼마나 급격히 증가하고, 사망률이 감소했는가는 영국의 예에서 알 수 
있다. 18세기 초 영국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인구는 550 만에서 600 만이었다. 이것이 
1800 년 말에는 3천 250 만 명이 되었다. 1820 년 사망률은 인구 1,000 명 당 33.1 
명에서 21 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특히 유아 사망률이 개선되었고, 평균 수명도 
늘어났다.(주92)
  이러한 평균 수명과 인구의 증가야말로 피임술이 발달하고, 대중적으로 보급될 수 
있도록 한 기초였다. 그러나 근로 대중이 이용할 수 있는 간편한 피임법이 개발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인구 증가에 힘입어 근로 민중을 위한 간편한 피임에 대한 주장이 나왔다. 1820 년 
프란시스 플레이스가 이를 옹호하였다. 근로 여성에 대한 효과적인 혜택은 1921 년 
매리 스톱스가 할러웨이에 산아 제한 진료소를 개설 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대중적인 
피임법인 경구용 피임약이 개발된 것은 1950 년대에 와서였으며 이 알약이 널리 
사용된 것은 1960 년대의 일이었다. 그 후 값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약이 널리 
보급되어 일반 민중도 피임이 가능하게 되었다.(주93)

  피임법의 개발과 보급은 여성의 건강과 노동 능력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여성들은 일생에 걸친 임신과 출산의 연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에너지를 노동에 쏟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0 대 혹은 20 대 초반에 결혼하여 10번의 임신을 경험한 1890 년대의 노동층 
주부는 임신중이거나 갖난 아이의 첫 해에 모유를 먹이는 데만 약 15 년의 기간을 
소비했을 것이다. 이 기간에 그녀는 해산의 수레 바퀴에 묶여 있었다.
  오늘날 전형적인 가정 주부가 임신과 수유에 소비하는 기간은 대략 4 년 정도일 
것이다. 불과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에 아이를 낳고 수유하는 데 소비되는 시간이 
이처럼 단축되었다는 것은 여성의 자유의 혁명적 신장(그것은 출산을 억제할 수 있는 
힘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를 의미한다.(주94)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이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노동에서 물러나는 기간은 불과 몇 
개월에서 몇 년에 불과하다. 노동 조건의 개선, 노동 시간의 단축, 육체 노동의 감소 
등은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장애를 점점 더 줄이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술적으로는 여성의 모성 기능이 여성의 노동에서의 위치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단계에 왔다. 임신과 출산의 횟수가 줄어들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신체적 소모가 줄었다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생활 수준이 
향상되어 영양 상태가 개선됨에 따라 임신이 여성의 신체적 쇠약과 노쇠에 미치는 
영향도 줄어들었다. 임신과 출산은 엄청난 신체적 에너지의 소모를 가져오며 임산부가 
적절한 영양 섭취를 하지 못할 경우, 아이는 어머니에게서 영양소를 빼앗아 가기 
때문에 아이를 몇 명만 낳아도 여자들은 쇠약해서 껍데기만 남게 되는 수가 많았다. 
실제로 봉건 시대까지 여성의 평균 수명은 남성보다 훨씬 짧았다.
  그러나 아직도 낙태와 피임술의 발달은 다른 분야에 비하면 지극히 낮은 수준이다. 
피임과 낙태로 인한 신체적 소모는 여성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것이 여성들의 노동 능력을 감소시킨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에 
관한 과학의 발달과 사회 복지의 증진은 이로 인한 여성의 부담을 점점 더 줄여나갈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발달이 기본적으로 여성이 노동에서 부차적인 
위치로부터 벗어나 주체로 만들어 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여성 
해방의 물적 토대를 마련한다. 물론, 여성의 해방이 단순히 이런 생산력과 과학 기술의 
발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여성이 인간답게 
사는 것은 자본과 인간의 전도된 관계를 바로잡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인간, 특히 여성들 자신의 실천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 투쟁은 지난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해방을 향한 여성들의 투쟁은 역사 발전의 필연성이라는 가장 튼튼한 
동력에 의해 지지받고 있다.

    (주)
  1. 한국 여성 민우회, '함께 가는 여성', 1989.11. p.17.
  2. 민족문학 작가회의 여성문학분과위원회 편, '여성 운동과 문학', 실천문학사, 
1988, p.21.
  3. 전문직 여성클럽 한국연맹이 주최한 전국대회, "사회발전과 직업 의식의 전환" 
세미나, '조선일보', 1990,7,17.
  4. '주부생활', 1989, 12,pp.490--491.
  5. 박성준, '여성 근로자의 동기 부여에 관한 실증적 연구, k은행 여자 직원을 
중심으로' 연대 경영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6. 여성 개발원, '취업 여성의 사내 교육 실태 분석', 1990.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등 5개 도시 111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임. '조선일보' 1990. 
2.3.일자 참조
  7. 차형훈, '한국 전자 산업의 노동과정과 노동통제',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학위논문, 
1985, p.15.
  8. 이숙진, '노동자 계급 여성의 여성해방의식획득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 학위 논문, 1989,p.114.
  9. 김혜경, 신현옥, '제조업 생산직 기혼여성 노동자의 상태와 문제', 한국여성연구회, 
'여성과 사회', 창간호, 1990.p299.
  10. 여성개발원,'생산직 근로 조건에 관한 연구, 영세 봉제 전자 업체를 중심으로', 
p.123.
  11. 김혜경, 신현옥, 앞의 글, 한국여성연구회 편, 앞의 책, p.299.
  12. 김혜경, 신현옥, 앞의 글, p303.
  13. 작가 미상, '건강은 몇 등','진도 소식2', 1985, 김경숙 외, '그러나 이제는 
어제의 우리가 아니다', 돌베개, 1986, pp160--161.
  14. 민족문학작가회의 여성문학분과위원회 편, 앞의 책,p9.
  15. 위의 책, p.25.
  16. 작가 미상, '하소연 할 곳도 없이', 김경숙 외, 앞의 책, pp147--148.
  17. 석정남, '공자의 불빛', 일월서각, 1984. p.13.
  18. 정남수, '원풍 소식', 김경숙 외, 앞의 책, pp.163--164.
  19. 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90 년도 임금 인상 활동 지침', p. 38.
  20. 김은영, '뺏골 빠진 십 년에 남은 것', '시정의 배춤터, 등불5', 김경숙 외, 앞의 
책.
  21.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앞의 책, p.46.
  22. 위의 책, p. 16.
  23. 배희옥, '너무너무 괴로운 하루','요한의 메아리7', 김경숙 외, 앞의 책,pp. 
98--99.
  24.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도시근로자 최저 생계비', 1989.11.
  25. 이월미(중소기업은행 삼성남지점), '미소 뒤에는 쓰디쓴 아픔이', 
한국여성민우회,'함께 가는 여성', 1989.p.6.
  26. 풍국 노동조합, '한울타리', 제4 호, 1988.10.26.
  27. 위의 책.
  28. 동양정밀노조, '노맥' 제 7호, 1989.4.1,pp.16--19
  29. 정이환, '저임금 구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경제적 적응 양식, 생산직 남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학위 논문, 1986, p.112.
  30. 김혜경, 신현옥, 앞의 글, 한국여성연구회 편, 앞의 책,  p.307.
  31. 이종홍, '나우 정밀 노보', 1989.1.
  32. 박세일, '여성 노동 시장의 문제점과 남녀별 임금 격차 분석', '한국개발연구', 제 
4권, 제2 호 1982. 6. pp.59--87참조
  33. 실제로 여성들만 종사하는 직종에서 남녀별 차별이 없다고 생각하는 여성 
노동자들잉 상당수에 달한다. 즉 봉제, 전자의 생산직 여성만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봉제의 경우 64.0%, 전자의 경우 37.3%의 여성노동자가 남녀 차별이 없다고 
답했으며, 차별 대우를 받는다는 응답은 봉제의 경우 17.6%, 전자는 43.3%였다. 전 
산업의 조직 여성 노동자를 상대로 한 노총의 조사 결과는 이보다는 약간 높지만, 
역시 남녀 차별에 대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동등한 편이라는 
응답이 23.6%, 잘 모르겠다가 14.5%이며, 다소 차별 대우가 47.4%, 심한 차별대우는 
7.0%이다(노총,'조직 여성 근로자의 실태 조사', 1988).
  34. 인천여성노동자회, '인천 여성 노동자', 1990.3. p.5.
  35.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조직 여성 근로자의 실태 조사', 1988.8. p171
  36. '중앙일보' 1990. 3. 10.
  37. 여성 민우회, '함께 가는 여성', 15 호, p.5.
  38. 선진국의 경우에도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불안정 고용 상태에 있다. 영국의 
기혼 여성 노동자 중 전일제로 일하는 비율은 16%인데 비해 37%가 시간제로 일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에는 여성 노동자의 45%가 시간제로 일하고 있다(남성은 5%).
  39. 정체적 과잉 인구는 현역 노동자의 일부이면서 그 취업이 극히 불규칙한 영세 
중소 기업 노동자, 임시고, 일고, 가내 노동자, 가내 하청 노동자 등으로 구성되며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를 자본에게 제공하며 
노동자계급의 평균 수준이하의 생활을 한다.
  40. 순점순, 앞의 책, pp.263--264
  41. 정미숙(31세 주부), '1원 50전에 몸을 병들에 가고', '인천 여성 노동자', 
1990. 7. p.18.
  42. 한국여성개발원, '가내 노동 실태에 관한 연구', 1989. p.50
  43. 정연금, '가정 노동의 가치 평가를 위한 방법론적 모색', 이대 박사 학위 논문, 
pp.11--14.
  44. 김영란, '가사 노동에 관한 계급별 사례 연구, 신중간 계급 가족과 노동자 계급 
가족을 중심으로' 이대 사회학과 석사학위 논문, 1989, 38.
  45. '한국일보', 1989. 11. 22.
  46. 정연금, 위의 논문, p.52
  47. '한국일보', 1989. 11. 22.
  48. m.f.fox,s.hesse biber, women at work, mayfield publishing company, 
1984, p.19
  49. 묵자 책 159참조
  50. philip slater, j. bernard 1982, p.46에서 재인용.
  51. 주부 아카데미 협의회 여성 문화팀 '등우리'의 연극 "이 세계 절반의 나" 
중에서, 여성 편집위원회, '여성 1' 창작과 비평, p.280.
  52. 한혜경, '한국 도시 주부의 정신적 갈 등의 사회적 요인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 학위 논문, 1985, pp. 47--48.
  53. 김영란, 위의 논문, p. 93.
  54. 게일 킴벌, '평등한 부부', 한국여성개발원, 1988, p.92.
  55. 민족문학작가회의 여성문학 분과위원회편, 앞의 책, '여성과 계층 운동', p.27.
  56. 광산지역사회선교협의회, '광산 노동자 신문', 창간호, 1988, 4. 10.
  57. 인천 여성 노동자회, '인천여성노동자', 1990. 3.
  58. 정영훈, 한국여성연구회편,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여성과 사회, 창간호, 
창작과 비평사, 1990, p.195--199.
  59. mariyn j. davidon, cary l. cooper, working women, an international 
survey, john wiley & sons, chichester, 1984, p. 280.
  60. 위의 책, p.297.
  61. 김미하, '노동자 가족 내 성별 분업에 관한 사례 연구, 남성의 양육 참여를 
중심으로',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 학위 논문, 1989, p.57.
  62. 클로디 브로이엘, 앞의 책, pp.91--92.
  63. marilyn j. dabidon, cary l. coopre, 앞의 책, p.270.
  64. 변정옥, '민주 가정과 노동 해방', 한국여성연구회편, 앞의 책, p.208.
  65. '아내들의 행복4', '조선일보', 1986. 1. 26.
  66. 게임 킴벌, 앞의 책, p.94.
  67. '협신중하 노보'
  68. 박노해,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p.13--14
  69. 최명자, '우리들 소원', 풀빛, 1985, pp.100--101.
  70. 김종일, '가사 노동과 나의 해방', 한국여성연구회편 위의 책, pp.188--191.
  71. 이숙진, '노동자 계급 여성의 여성해방의식 획득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 학위 논문, 1989, p.72.
  72. 허진호, '자유로운 결혼 생활의 설계도, 함께하는 삶을 위하여', 또 하나의 문화 
편, '또 하나의 문화', 4 호, p.118.
  73. 여성개발원, '국내외 여성 관계 법제에 관한 연구', 1984, pp.107--115참조.
  74. marilyn j. dabidon, cary l. coopre, 앞의 책, p.156
  75. 여성개발원, '여성문제에 관한 국민 여론 조사', p.406--407.
  76. 김미하, 앞의 논문, p.84.
  77. k.marx, capital 1, penguin books ltd, 1976, p.517.
  78. 위의 책, pp. 617--618, 15장 제9절 주 227.
  79. 묵자책 208참조.
  80. 엥겔스, 박준식 외 옮김, '영국 노덩자 계급의 상태', 세계, 1988, p.408.
  81. 묵자책 208참조.
  82. 이효재, '일제하의 한국 여성 노동 문제 연구', 윤병석 외 편, '한국 근대사론3', 
지식산업사, 1978, p.105.
  83. 엥겔스, 앞의 책, p.141.
  84. 같은 책, p. 184.
  85. 같은 책, p.201
  86. 조우화 편저, '인간의 역사', 동녘, 개정판, 1991, p.176.
  87. 엥겔스, 앞의 책, p.161.
  88. m.f.fox,s.hesse biber, women at work, mayfield publishing company, 
1984, p.19
  89. 위의 책, pp.24--27참조.
  90. j.f.c. 헤리슨, 앞의 책, p.378.
  91. 헤리슨의 앞의 책, p.381에서 재인용.
  92. j.f.c 헤리슨, 앞의 책, pp.211--212.
  93. 위의 책, pp.211--212.
  94. 위의 책, pp.38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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