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적 노동
자본주의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여성을 사회의 주요한 생산 부문에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가정을 벗어나 사회적 노동에
참여한다. 오늘날 여성들이 진출하지 않은 노동 분야는 거의 하나도 없다. 미국에서는
1980 년 현재 노동력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42.5%에 이르렀다. 이는 1950
년의 29.6%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이며, 이 비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여성 노동자의 비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여성들은 사회적 노동에서 각종 차별과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다. 차별의 실상과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살펴보자.
1) 고용 차별,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1979 년에 채택된 유엔 여성 차별 철폐 조약 제 11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1. 당사국은 남녀 평등의 기반 위에 동등한 권리를 보호하도록 하기 위하여 고용
분야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도록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특히,
#1 모든 인간의 불가침의 권리로서의 노동할 권리.
#2 동일한 채용 기준의 적용을 포함한 동일 고용 기회를 보장받을 권리.
#3 직업과 고용의 자유로운 선택권, 승진, 직장 안정 및 업무에 관련된 모든 혜택과
조건을 누릴 권리, 그리고 견습, 고등 직업 훈련 및 재훈련을 포함한 직업 훈련 및
재훈련을 받을 권리(중략).
2. 당사국은 결혼 또는 모성을 이유로 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방지하며 여성의
노동에 대한 유효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다음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1 임신 또는 출산 휴가를 이유로 한 해고 및 혼인 여부를 근거로 한 해고에
있어서의 차별을 금지하고, 위반시 제재를 가하도록 하는 것(하략).
우리나라도 1985 년 1월 26일 이 조약의 정식 가입국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헌법에도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갖는다"(제 32조 1 항),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 임금 및 근로 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제
32조 4 항)고 규정했다. 최근에는 모집과 채용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의 평등과, 교육,
배치, 승진, 정년, 퇴직, 해고에 있어서 남녀 차별 금지를 규정한 남녀 고용 평등법을
제정하고 뒤이어 개정까지 했다.
그러나 여성의 현실 조항은 법 조항과는 완전히 반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제 1조,
"얼마든지 침해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여성의 노동할 권리", 제 2조, "여성을 고용
차별할 자본의 불가침의 권리", 기타 등등. 여성은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고, 일자리를 구하더라도 대부분 결혼 퇴직제로 인해 평생 동안 다닐 수 없으며,
기혼 여성의 대개의 일자리는 단순, 하위직뿐으로 평생 말단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일자리가 없다.
1985 년 현재 우리나라의 남성 노동자는 459 만 8천 명인데 비해 여성 노동자는
224 만 1천 명으로 남성 노동자 수의 약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은
일자리가 없다. 선진국의 경우에도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율은 남성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진다. 1980 년 미국 남성의 노동력 참가율은 77%인데 비해 여성의 노동력
참가율은 51.2%이다. 물론 여성의 참가율은 1950 년의 33.9%로부터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비해 남성의 비율은 1951 년 86.5%에서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노동력 참가율의 차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른 위치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여성의 고용 기회는 남성보다
제한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자기 몸뚱이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다. 그런데 여성들에게는 이 기회마저 제한되어
있다. 여성들은 자기 힘으로 생활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경제적인 독립은 인격적
독립의 토대다. 자기 자신을 책임질 수 없는 인간의 인격적 독립이란 허구에
불과하다.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예속되는 가장 일차적인 요인이다.
여성에게 일할 기회가 제한된다는 것은 여성이 노동을 통해 자신의 인간적 본성을
실현하고, 사회적 생산에 참여함으로써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실현할 권리를
빼앗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전면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생산의
사회화는 인간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발전의 토대다. 그런데 여성은 낡은 사적인
영역에 갇혀 사회의 진정한 일원이 되지 못하고 주변인이 된다.
* 결혼 퇴직
여성이 고용에서 겪는 또 하나의 문제는 결혼, 모성과 관련한 차별이다. 남성
노동자에게는 결혼이 직업 경력에서 안정성을 높이는 이유가 되지만(남자 노동자는
결혼할 경우, 가족 수당, 사원 주택, 자녀 학자금 등의 혜택을 받는다) 여성
노동자에게는 직장에서 쫓겨나는 사유가 된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다니는 이 회사에 공채로 입사했습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이고 저 또한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는 전문직으로 입사를 했기 때문에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어떤 특별한 불이익을 당하리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이사님이 부르시더니 회사 방침상 결혼하고
계속 다닐 수는 없다. 사표를 내야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주1)
결혼 퇴직제는 생산직, 사무직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 남성 노동자의
경우에는 미혼자와 기혼자의 비율이 약 4 대 6인데 비해 여성의 경우에는 약 7 대
3이다. 아직도 여성은 미혼기에 일시적으로 취업하는 일시적인 노동력으로 취급되고
있다. 최근 들어 기혼 여성 노동자의 고용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계속해서 취업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후 퇴직하여 임신과 출산, 수유기를 지난
여성들이 재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결혼
전의 직업 경력은 인정되지 않으며 그 대부분이 시간제나 일용제 등 임시직으로
일한다.
모성 책임과 결혼 퇴직제로 인해 여성의 노동력 참가율은 위와 같은 모양이 된다.
노동자의 경우, 결혼 전과 후의 비율이 더욱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 남자에 한함
여성 노동자는 점점 증가하기는 하지만, 그 대부분은 단순직과 하위직에 고정된다.
우리나라 여성 노동자의 98%는 비직급의 최하위 말단 노동자다. 이런 직업이 아예
'여성직'이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전문 기술직, 관리직에는 여성이 거의 없다. 우선 아예 채용을 하지 않는다. 전문
기술직이나 사무직, 관리직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의 구직 광고를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1985 년 『서울 신문』의 채용 광고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남녀 구분 없이
채용한 경우는 15.7%에 불과하고 남성만 채용한 경우가 60.0%, 남녀를 구분해서
채용한 경우가 22.9%였다. 최근에는 채용광고에서의 남녀 차별을 금지한 남녀 고용
평등법으로 인해 이런 광고는 많이 줄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용 차별 자체가
준 것은 아니다. 신문의 공채 광고에 명백히 남성만 모집한다고 하지 않은 경우에도
여학생이 입사 지원서를 받으러 가면 여성에게는 지원서를 주지 않는다고 하여 되돌아
오는 경우가 많다.
추천을 통해 채용하는 경우에도 여성은 제외되기가 일쑤다. 1989 년 10월 25일자
한국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A대학의 전산학과로 코오롱 그룹에서 추천 원서가 3장
왔는데, 그 과의 한 여학생의 성적이 3위 내여서 회사로 문의한 결과 '만약 여학생이
추천서를 받아오면 원서를 받기야 하겠지만 면접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답해와 그
추천장은 모두 남학생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을 아예 채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같은 직종에 채용한 경우에도 승진을
시키지 않으며, 그에 필요한 교육, 훈련도 하지 않고, 직무의 배치에서도 차별을
함으로써 하위직에 고정시킨다. 그리하여 여성은 같은 직종 내에서도 단순 반복적인
작업에 배치되어 자기 개발의 기회와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다.
사무직 여성의 경우 승진이나 승급할 수 있는 공식적인 통로가 거의 없는
편이^36^예요. 자기와 같이 입사한 남자들은 대리, 과장, 부장이 되구 월급도 1.5배,
2배, 3배로 늘어가는데 여직원들은 아무런 발전이 없으니까 결혼이나 생각하구
그래요. 단체 협약이나 사규에는 여직원에게도 승급 기회를 주고, 또 결혼해서도 다니
수 있게끔 명문화되어 있지만 사실상 지켜지는 일은 거의 없어요. 예를 들어 저희
같은 경우, 신입 사원으로 입사할 때 같은 고졸이라도 남자는 5급이구 여자는 6급으로
시작해요. 똑같은 일을 하고, 어떤 면에서 여자가 더 많은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자는 입사 후 3, 4 년이 지나야 5급이 되는데 거기다가 인사 고가를 책정한다는 건
분명 성차별이라구요.(주2)
은행의 경우 똑같이 시험을 거쳐 행원으로 입사해도 여성에게는 대부, 당좌 등 비중
있고 능력이 판가름나는 일은 시키지 않고, 주로 수납 업무만 맡긴다. 대부 업무를
배울 기회를 한번도 안주고 갑자기 상사가 대부 주임을 맡겠느냐고 물어서 여성이
자신없다고 하면 그 일을 남성에게 돌리는 경우도 있다.
타자, 복사 등 온갖 잡다한 일을 여성들이 해야 하는 것도 '성공적인 직업인'이 될
수 없게 하는 큰 이유이다. 대구 은행 인사부 과장 배정순 씨는 여성은 낮 시간 내내
잡다한 일을 하다 보면 주된 일은 퇴근 시간을 넘겨서까지 해야 되며, 이것이 오히려
무능한 여성으로 보이게 한다고 말했다.(주3)
승진을 안시키는 것은 사실상 그만 두라는 압력과도 같다. 거기다가 여성의
승진에는 성차별적인 편견에서 오는 어려움까지 있다.
여성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1급 공무원이 된 주양자 국립 의료원 원장의 이야기는
여성의 승진에 따른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녀는 보통 남자의 경우 부장이 되고 나서 1
년이나 2 년, 길어야 3 년이면 원장 또는 보사부 차관으로 승진되는 데 비해 무려 9
년 동안을 부장으로 지내야 하는 고초를 겪었다. 여러 번 그만둘까 생각도 많이
했다는 그녀가 가장 잊을 수 없는 고통은 12 년 전에 부장으로 승진했을 때 남자
과장들로부터 "앉아서 오줌을 누는 부장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한다.(주4) 여성의 사회적 노동을 가로막는 복병은 별별 무기를 다 갖고 있다.
한 은행의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승진 제도에 대해 매우
합리적이라고 답한 경우는 0.7%, 비교적 합리적이라고 답한 경우는 17.4%에
불과하고 다소 비합리적, 매우 비합리적이라고 답한 것이 각각 56.0%, 16.1%로
72.1%의 여성들이 불만을 표시했다.(주5)
기업의 사내 교육에서도 여성에 대해서는 참여 기회를 제한하고, 교육 내용도
차별을 둔다. 여성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남자 직원의 교육 프로그램은 '직무 능력
향상', '배치 전환', '자격 취득' 등 업무 관련 교육이 83.2%이며, 그 내용도 문서
작성과 관리, 원가 계산, 마케팅 등 중심 업무와 관리 능력을 높이는 내용인데, 여직원
대상 프로그램은 '전화 공손히 받는 법', '바람직한 몸가짐', '말하는 법' 등 기본 예절
교육이 교육 내용의 21%나 차지하고 업무 교육도 보조 업무를 익히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또 직급이 올라갈수록 여성에 대한 교육 제한이 두드러져, 대리에서 부장급까지의
'중간 관리자 교육은 절반 이상(50.8%)이 남성만 참여하는 프로그램이다.(주6)
그리하여 전문 기술직에서 여성의 비율은 1983 년 현재 27.4%인데, 그나마도 그
대부분은 교사와 간호원으로, 그 중 하위 집단을 구성하고 있고 행정 관리직의 여성
비율은 2.5%에 불과하다. 남자 노동자의 23.4%가 중간 관리층 이상인데 비해 여성은
중간 관리층 이상이 2.5%에 불과하다. 여성 사무직 노동자는 단순 사무직이
대부분으로 사무원 감독자의 1.6%만이 여성이다. 남자 사무직 노동자의 38.3%가
사무원 감독자인데 비해 여성 사무직 노동자 29만 2천 88명 중 감독자는 1.1.%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경리, 출납원이 40.2%, 속기사, 타자원, 카드 및 테이프 천공원이
8.0%, 교통 안내원이 6.6%, 전화 및 전신기 조작원이 5.5%, 기타 잡직이 37.9%이다.
요컨대 사무직의 여성 노동자의 대부분은 단순 노동에 종사한다. 앞의 은행
여직원의 업무에 대한 분석 결과를 보면 많은 창의력을 요구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고
대답한 여직원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대체로 창의력을 요구하는 업무는 5.7%, 반복적
단순 업무가 75.2%, 수준 이하의 업무가 5.4%였다. 이것이 여성 노동자 중에서
비교적 나은 위치에 있는 사무직 여성의 처지다.
생산직의 경우는 더 심하다. 여성은 같은 생산직 중에서도 단순 조립 가공 공정에
대량 배치되므로 기술 축적을 통해 기술공, 기술자로서 승진, 승급할 기회가 극히
제한된다. 특히 일정 기간마다의 담당 부서의 변경, 소위 배치 전환은 책임자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경우 대부분 정기적인 배치 전환을
받지 못하고 계속 한 가지 업무만 하게 되어 업무 내용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어
향후 감독자가 될 수 있는 길이 봉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생산직 여성은
견습공으로 출발하여, 장기 근속으로 조장까지는 승급될 수 있으나 반장 이상은 거의
남자만이 할 수 있다. 다음 표는 한 전자 회사의 직급별 성별 구성이다. 남녀의
위계적인 성별 분업이 얼마나 철저하고, 여성이 단순 하위직에 얼마나 절망적으로
고정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주7)
생산직 여성의 경우, 기술을 익힐 기회는 거의 전무하며, 똑같은 노동을 몇 년이고
계속하게 되어 있다. 다음 사례는 여성 노동자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가를 보여준다.
지금 16 년 째 일하고 있지만 해마다 호봉 차만 생길 뿐 절대로 승진은 안돼요.
남자들은 간혹 공원에서 준사원, 사원으로 되는 경우가 있지만 생산직 여사원은 아예
그 길이 막혀 있어요. 이것이 가장 큰 문제^36^예요. 한 직장에서 10 년 이상
일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승진이 안되니까 작년에는 간신히 싸워서 근속 수당을
따냈죠. 회사측은 승진 문제에 대해 '시청 청소부가 10 년을 일해도 청소부 아니냐'는
식으로 나와요(S제약 37세의 기혼 여성 노동자).(주8)
그런데 고용과 승진, 교육과 훈련의 순위에서는 언제나 꼴지 차지지만 여성에게
우선 순위가 돌아가는 것도 있다. 해고에서는 언제나 1순위다.
ㄱ씨가 다니던 회사는 종업원 규모 300 명 정도의 수출용 자켓을 만드는
의류회사였는데, 회사가 약간의 경영상의 어려움에 봉착하자 가장 먼저 취한 조처가
바로 사내 탁아방의 폐쇄 조치였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기와 같이 아이를 사내
탁아방에 맡기고 일하던 15 명의 기혼 여성 노동자에 대해 해고 통보와 유사한 것으로
그들 15 명 중에서 절반 이상이 당장 아이를 맡길 다른 기관을 찾지 못해 결국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주9)
* 고용 차별의 이유
여성이 고용에서 이렇게 차별을 받는 것은 어째서인가? 1984 년 한국 경영자
총협회가 전국 상용 근로자 100인 이상의 1,000개 기업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는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기업이 여성 근로자를
기피하는 이유로, 짧은 재직 기간 때문에 기술 축적이 어렵다는 응답이 31.5%, 야간
연장 근로의 법적 제한 때문이 24.5%, 유급 출산 휴가에 따른 비용 부담이 17.4%,
별도의 복리 후생 시설 부담이 13.6%, 생리 휴가로 인한 노무 관리 번잡이
12.9%였다.
여기서 둘째, 셋째, 넷째는 모두 여성 노동자의 모성과 관련해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의 변명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모성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과 여성 노동자 스스로가 결혼 후 퇴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성과 관련한 비용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자본의 이윤 추구의
논리가 여성 차별의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여성의 재직 기간을 짧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므로
두번째 요인은 첫번째 원인과 맞물려 있다.
모성은 인간 사회와 역사가 존속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고, 이를 위해 여성이
담당하고 있는 인간적이고 생산적인 역할이며 사회에 대한 공헌이다. 다른 한편
여성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인간적인 존재를 실현하고, 발전시킬 권리가 있다. 즉
여성의 인간적 삶, 나아가서는 사회와 인간 자신의 인간화를 위해서는 모성이 인간적
조건으로 대우를 받아야 하며, 여성이 모성과 노동을 양립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역사상 유례 없이 노동과 모성을 모순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생산자가 생산 수단과 결합하여 자급 자족을 위해 생산하던 봉건
사회에서는 여성을 모성을 이유로 해서 생산에서 배제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성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행해졌다.
모성을 이유로 해서 여성을 노동에서 배제시키는 것, 이것은 노동력이 상품화된
사회의 특유한 현상이며, 자본주의적인 현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을 주도하는 것은 자본이며, 자본이 생산을 하는 목적은
오직 더 만은 자본을 얻는 거, 즉 이윤 추구에 있다.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으로서,
자본가가 이를 구입할 경우에만 노동자는 노동을 할 수 있다. 자본가의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관심은 보다 많은 이윤을 위해 노동력을 최대한 싸게 사서 최대한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목적에서 볼 때 여성 노동자의 모성은 단지 여성 노동력
상품의 값을 비싸게 만들고, 사용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함일 뿐이다. 노동 강도, 노동
시간과 작업 조건 등에서 제한을 받을 뿐 아니라, 출산 휴가를 지급해야하고, 그 동안
다른 임시 직원을 고용해야 하며, 나아가 탁아소까지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에게 여성 노동자의 모성은 마치 신체의 허약이나 장애와 같은 결함으로 보이며,
노동력 상품의 사용 가치를 저하시키는 흠이 된다. 따라서 자본에게는 여성의 모성
기능이 차별 근거가 되고, 질병과도 같은 기피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본이 계속
대체할 수 있는 미혼 여성 노동자나 남성 노동자를 구할 수 잇는 한, 기혼 여성
노동력의 고용은 낭비로만 여겨진다.
그리하여 기혼 여성 노동자는 보다 부적당한 노동력으로서 차별을 받는다. 자본이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 노동 시간을 최대한 연장하고, 유해한 작업 환경을 강요하려
하는 한, 즉 자본이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서 최대한으로 노동력을 부리는 데 일차적인
관심이 있는 한, 노동력이 단지 하나의 상품인 한(이는 자본에게 본래적인
것인데)여성의 모성 기능은 차별의 근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본가는 돈을 벌기
위해서 투자한 것이지, 자선 사업을 하려고 투자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은
여성이 남성과 평등하게 일할 조건을 마련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반대로
여성을 보다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자본이 주도하는 생산의
목적은 여성 노동자의 인간적인 삶이 아니다. 여성 노동자는 자본에게 단지 하나의
상품이다. 자본이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값이 싼 노동력 상품으로서이다.
여성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지게 되면 이 매력은 싹 사라진다. 임신하여 배가 부른
여성이 직장 상사로부터 보기 싫다는 눈초리를 받는 것은 단순히 미학적인
관점에서만이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해야 할 것은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이 아이를 배고 낳고 젖을
먹여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차별의 근거로 만드는 생산 과정의
성격이라는 사실이다. 모성이 차별의 근거가 되는 것은 "생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산을 위해 존재하는" 전도된 생산 관계 때문이다.
여성 노동자를 모성 때문에 차별하는 것은 인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준다. 금전적 가치가 인간적 가치에 우선하고, 인간 자신마저 그의
상품가치로 환산되고 생명이 돈보다 경시되는 자본주의적인 상품 생산의 본성이
모성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또 하나의 요인으로 지적된, 여성의 재직 기간이 짧아서 기술 축적이 어렵다는
응답도 기본적으로 자기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앞의 사례에서도
나타났듯이 여성 노동자가 결혼 후 계속해서 일을 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자본은 이를
기를 쓰고 말리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하려 한다. 취업을 원하는 여성의
비율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E대 여학생의 경우 85 년 현재 96.5%가 취업을
희망했으며, 평생 직업을 갖겠다는 비율도 79.5%나 되었다. 생산직 여성의 경우에도
결혼 후 계속 일하겠다는 비율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회사측은 이들에게
공식^5,23^ 비공식의 압력을 넣어 그만두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모성 보호
비용을 부담하지 않기 위해서다.
물론 한편에서 여성이 결혼하면 스스로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스스로"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강제와 강요에
의한 것이다. 노총이 1988 년 조직 여성 근로자 7천 91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결혼 후 계속 일하겠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21.8%에 불과한 반면 일을
그만두겠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그 두 배인 42.3%나 되었다.
일을 그만두겠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 개발원이 1983 년 서울 경인 지역 영세
업체(50인 미만) 생산직 여성 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자 하는 이유로 첫번째가 일이 지겨워서가 38.0%, 두번째가
결혼했으므로 가사에 전념해야 한다가 35.0%이며, 세번째가 장래성이 없기 때문에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등이 16.3%로 나타났다.(주10) 즉, 첫번째와 세번째를
합하면 일에서 보람을 느낄 수 없어서 그만두겠다는 경우가 51.3%이다.
또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1990 년 7월, 서울의 전문직 사무직 여성 450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자녀 양육 때문에 직장을 포기하려 한 적이
있다는 사람이 전체의 80.6%를 차지했다. 직장 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은 자녀 위탁
문제(31.8%)와 가사 부담(17.8%)이었다. 우리 사회의 실정에서는 아무리 직업 의식이
강한 여성이라 해도 한번쯤 직장을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요컨대 여성이 결혼과 함께 일을 그만두는 것은 첫번째가 노동이 지겹기 때문이고,
두번째가 가사 노동의 부담 때문에 결혼 후 계속 직장을 다니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 여자의 본분은 가정을 지키는 일이라는 사회 규범도 크게 작용한다.
여성 노동자에게 특히 노동이 지겨운 것은 자본이 재직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여성에게는 기술 축적을 시켜주지 않아 노동에서 발전을 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로 우너인과 결과로 맞물려 있으며 그 고리의 출발은 자본 측에 있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자기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 씌우기이다.
가정 책임의 문제 역시 우리 사회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다. 가사 노동의 사회화는
자본의 이윤 추구와 관련해서만 이루어진다. 자본의 이윤 추구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곧 개별 가정에서 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뜻이고, 자본가가 이를 맡을 경우, 노동력
재생산비를 높이는 것, 즉 임금 상승과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은 이를 최대한 회피하며 결과는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 남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은 성별 분업을 해체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고정시킴으로써 이익을 볼 수 있다. 자본은 노동력에 대한 착취를 최대화하는
수단으로 분업을 고정화시킨다. 성별 분업은 이러한 분업 체게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성별 분업은 인위적인 차별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고, 자본가의
책임이 아니라 여성의 책임인 듯이 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분업은 임금을 최대한 절약하는 방안이다. 단순, 육체 노동자와 숙련, 정신 노동자를
엄격히 구분, 고정시키는 것은 노동력의 재생산비를 절약하는 방안이다. 이는 우선,
교육과 훈련 비용을 최소화시키는 방안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로 임금 격차를
통해 전체 임금 수준을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자본은 분업을 고정시키고,
노동자들 사이에 차별을 두기 위해 노동자들의 모든 차이를 이용한다. 국적, 인종,
나이, 학력, 성별 등등. 성별은 자본에 의해 가장 널리, 가장 쉽게 포착되는 차이이다.
이 분업으로 인해 여성은 결혼과 함께 일을 그만두기 때문에 자본은 여성을 미숙련
노동에 아주 싼 값으로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일생 동안
일한다면, 여성을 지금과 같이 미숙련 노동에 고정적으로 부릴 수 없다. 여성에게
남성과 마찬가지의 교육과 훈련을 받게 하고 동등한 직책과 임금을 부여한다면 노동자
계급 전체로 보아 노동력 재생산비, 즉 임금이 훨씬 증가할 것이다.
또 성별 분업을 고정시킴으로써 자본은 남녀 모두의 노동력을 최대한으로 착취할 수
있다. 남성 노동자들에게는 가정 책임을 면제하는 대신 생산 과정에서 가정 책임을
도저히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 높은 장시간 노동을 시킨다. 앞에서 여성 노동자를
기피하는 이유가 야근 연장 근로의 제한 때문이라는 응답이 24.5%나 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을 배제하는 것은 열악한 근로 조건과 과도한 노동 강도를 유지하는
수단이다. 한 산업 부문, 혹은 직업, 직무의 노동자가 대부분 남성이라는 사실, 그들이
가정 노동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는 대신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를 진다는 사실이
이들 남성 노동자의 과도한 노동, 유해한 노동 조건을 유지시키는 수단이 된다.
다른 한편 여성 노동자에게는 여자의 본분은 살림살이이고, 사회적 노동은
임시적이거나 과외 활동이라는 명분 아래 저임금, 낮은 지위, 단순 노동에 국한시키고
단기간에 걸쳐 여성의 노동력을 거의 고갈 상태에 이를 정도로 가혹하게 착취하는
수단이 된다.
이중으로 소외된 노동 속에서 여성 노동자는 노동할 권리를 향유하기는커녕, 오히려
결혼과 함께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 고통을 참고 견디도록
강요당한다. 자본은 여성에게 발전 가능성 없는 노동을 떠맡기면서, 결혼을 산업 재해
보상처럼 이용한다. 여성 노동자에게 결혼은 소외된 노동으로부터의 탈출구고, 인간
조건의 회복이고, 고통스러운 인내에 대한 보상이다 .그런데 자본은 남성 노동자에게
가족이 생활하기에 충분한 임금을 주지 않기 때문에 기혼 여성들은 다시 일자리를
찾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여성들을 자본은 시간제, 일용제로 더 열악한 조건으로
고용한다.
기혼 여성 노동에 대한 연구는 기혼 여성 노동자들이 주로 배치되는 작업이 단순
미숙련 노동, 기계화가 덜 된 공정의 손작업(대개 노동 강도가 높다), 기술은 거의
필요없고 유해 작업이라 남자들도 꺼려하는 노동(주로 여성 중심 사업장에서), 약간의
육체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공정이라고 밝히고 있다.(주11) 요컨대 미혼 여성과
남성들 모두가 꺼리는 노동을 기혼 여성들이 맡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기업체 P전자에 대한 사례 연구를 보면, 기혼 여성이 집중된 공정은
작은 단자에 2개의 전선을 끼워 맞추는 등 "반나절이면 배울 수 있고 일주일도 안
걸려서 손에 익는"단순 노동과 구리 가루를 녹이고 구리선을 뽑아내는 일을 하는
전선부의 유해 작업(11 명 중 4 명이 기혼 여성, 나머지는 남성 노동자)이다. 전선을
뽑아내는 열처리 기게는 일정 온도가 되어야 작동되기 때문에 작업의 효율을 위해
점심 시간에도 기계를 끄지 않고 작업이 계속되어 이 부서의 노동자들은 점심 식사도
식당에서 날라다가 유해한 작업장에서 해야 한다. 그런데도 기혼 여성들은 이 부서의
수당이 높다는 이유로 서로 가려고 지원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주12)
결혼 덕분에 노동에서 면제되기는커녕 이제 자식까지 딸려 돈을 벌어야할 필요가
더욱더 절박해진, 그러나 일자리를 얻기는 힘든 기혼 여성 노동자들은 가장 악조건
속으로 일하러 간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들이 결혼했다는 것이 다시 이 끝없는 단순 노동을 강요하는
명분이 된다. 노동은 본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혼의 환상이 그랬듯이, 이제 결혼의
현실이 여성들로 하여금 이 모든 고역을 참고 견디게끔 한다. 노동할 권리도, 가정을
지킬 권리도 여성 노동자에게는 보장되지 않으며, 어느 것이나 권리로서가 아니라
권리의 침해로서만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악순환의 고리를 볼 수 있다.
자본의 고용 차별 ^25,135^ 단순, 하위직 노동 ^25,135^ 여성의 결혼 퇴직 ^25,135^
여성에 대한 고용 차별. 이러한 순환 고리가 자본에게 의미하는 것은 노동력을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을 최대한 절약하고 노동력을 최대한으로 혹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으로서의 의미이다. 즉 노동력을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단순직에는
여성 노동자를 고용하여 결혼 전까지만 사용하거나 기혼 여성을 임시직으로 사용하며,
노동력의 안정적인 확보가 필요한 숙련직, 관리직 등에는 남성 노동자를 고용한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 노동자에게 의미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먹고 살
권리와 일할 권리를 제한당한다는 것이고, 남성 노동자에게 의미하는 것은 가장이라는
허울 아래 혹사당하는 것이다.
고용 차별은 사회적 노동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 중 핵심적인 것이다. 고용 차별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는 불평등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2) 소외된 노동, 8시간은 죽어 주자.
앞에서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는 가장 큰 원인이 일이 지겹기 때문임을 보았다.
노동에서 느끼는 소외야말로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못지않게 여성 노동자가 겪는
커다란 고통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성 노동자에게조차도 많은 경우 노동이 "지옥 같은 고역"이다.
그것은 근로 조건이 나쁘고 노동 시간이 길고 노동 강도가 세고 게다가 임금은
쥐꼬리만 하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노동에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되어 소음과 공해 그리고 언제 어느 때나 나의 몸 일부를
아니 전부를 앗아갈 지도 모를 기계, 부품, 크레인님께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안전화 끈을 맨다. 추운 겨울에도 구슬 땀을 흘려야 하고, 화장실에 갈
시간마저도 흔하지 않은 열악한 작업장이 나의 하루, 나의 시간과 인생을 이렇게
무의미하게 앗아가는구나.
시커먼 얼굴과 콧구멍은 연탄 장수 같다. 가슴은 왜 이리 답답하고 무엇인가 꽉 차
있는 걸까. 먼지와 가스를 많이 마셨기에 혹시 진폐증인가 하는 병이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건강이 제일이라던데 이놈의 직장은 일이 제일이고 품질이 이등이니
건강은 몇 등이나 될거나.(주13)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는 인간으로서 대접받지 못한다. 노동자는 기계나 다른 노동
수단들과 마찬가지로, 자본가가 구입하여 생산에 투입한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다.
상품으로서 노동자는 기계나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기계의 가치가 노동력의 가치와
직접적으로 비교되며, 노동자의 인간적 존재나 가치는 냉혹한 타산에서 언제나
부차적인 고려 사항일 뿐이다. 더구나 노동력은 언제든지 같은 값에 다른 노동력으로
바꿀 수 있는 상품이다. 상품으로서 노동자는 노동 과정에서 자본에 철저히 예속되어
있음을 느낀다.
노동자 자신이 생산 수단의 주인이 아닌 생산 과정에서 노동자는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며, 인간이 아니라 도구가 되고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며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된다. 그것은 생산의 목적이 생산을 하는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돈(자본)을 버는 것, 가능한 한 최대의 이윤을 얻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이윤 추구의 논리 앞에서 노동자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 조건들조차도
냉혹하게 무시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런 노동의 성격에 의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은 기본적으로 강제
노동이다. 이런 강제 노동에서 노동자를 통제할 필요에 의해 자본은 감시와 감독의
위계 질서를 만든다. 노동은 "강제와 감시 속에 우울하고 고통에 찬" 것이 된다.
그런데 여성 노동자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노동에서의 소외가 더욱 커진다. 여성
노동자의 경우, 보다 단순 반복적인 노동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 노동에서 발전의
기회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노동에서의 소외를 더욱더 극대화한다. 노동 조건이
그나마 낫고 생산직 여성에게는 선망의 대상이기까지 한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도 단순
노동, 보조적인 업무, 발전 가능성이 없는 직장 생활에서 오는 심각한 소외를 겪고
있다.
사무직 여성 근로자들이 하는 일을 한마디로 압축시키면 '커피^36,36^카피'예요.
커피 심부름과 카피 해오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뜻에서 자기비하할 때 쓰는 말이죠.
설사 자기가 어떤 일을 조사하고 정리했다 하더라도 결재 도장은 다른 남자 직원들이
찍는 그런 식이죠. 대개가 보조적인 일에 불과해요. 전화를 받는다든지, 커피를
탄다든지 하는 일이 전부랄 수도 있죠. 전화 교환수, 경리, 타이피스트, 이런 직종도
사무직이에요.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자기 일 다 하면서 손님 오면 커피 심부름
정도는 해야 하죠. 여직원들은 거의 대부분 보조직에 머물러 있을 뿐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가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여직원들이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해도 업무에
능력이 반영되지 않아서 점점 일에 대한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흥미를
잃어버리죠.(주15)
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는 강제와 감시의 위계 질서의 최하위에 놓인다. 여성
노동자는 자본의 감시와 감독의 대상으로서 가장 철저하게 대상화되고,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간부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사람 대접해 주지
않는다는 거^36^예요. 얼마 전 공장장 겸 상무라는 사람이 아주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되어서 왔는데요, 저희들을 완전히 개 돼지 취급을 해요. 뭐 천재가 돌맹이를
다루게끔 돼 있다나요, 너희는 돌맹이들이고 난 천재다, 그러니 내가 너희들을
부려먹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해요. 그리곤 완전히 기계처럼 부려먹어요.
그러면서도 자기네한테 필요할 땐 "여러분을 가족처럼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보다
나은 복지 시설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어깨를 툭툭치며 웃을 때는
소름이 끼쳐요.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일해야 하는 대부분의 생산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노동은 '죽음의 고역'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 속에서 삶이 아니라 죽음을
체험하고, 자아의 실현이 아니라 자아의 파괴를 느낀다.
그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현장 작업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증세로, 전 생활의
80%이상을 직·간접으로 굉장한 영향을 주는 심각한 문제 거리다. 출근직전부터
거침없이 밀려오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짜증 섞인 푸념 정도로 그치질 못한다. 현장
출입문은 그야말로 표현에 손색이 없는 지옥 문 바로 그것이다. 그곳을 들어서면서
마음속으로 '언제까지 이러겠나. 까짓 8시간만 팍 죽어 쥐 버리자' 생각하고 비장한
각오로 들어간다. 무엇보다도 정신 못 차리게 바쁘고 힘겨운 작업과 일일이 감독하는
상사 관리자들의 빈틈없는 감시의 눈초리와 호통에 대한 공포와 후유증이 그 주된
원인인 듯 싶다. 생산 증대를 위해 기계회전을 최고속으로 해 놓거나 현장 온도
습도가 맞지 않아 작업이 엉망이 될 경우, 이건 순전히 작업자의 정신 상태 문제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데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 것이다. 간혹 몸이 아파서
조퇴나 결근 신청을 할 경우, 이땐 여지없이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당하는데 배짱이
있어서 엄살 섞어 버티거나 아주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 않으면 정말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수작이 되어 버린다.
어쩌다 잘못해서 기계 고장이라도 낼 경우엔 으레히 가혹한 책임 추궁이 뒤따른다.
"그따위 정신 상태를 가지고 뭘하냐? 회사의 귀중한 재산을 함부로 다루냐? 회사가
얼마나 손해를 본 줄 아냐? 시말서를 쓰던가 퇴사를 해라"는 등으로 아주 노골적으로
노동의 가치를 기계보다 못한 무엇 정도로 취급해 버리는데. (주16)
소외된 노동 때문에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하고 있을 때는 인간이 아니라고 느끼고,
노동하지 않을 때에만 인간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 진정한 내 모습, 내가 바라고 원하는 내 모습은 조장 언니의 눈치를 살피며
지도원의 초침 바늘 앞에서 쩔쩔매는 그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행복한 시간과 공간
이것이다. 다른 것은 이것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나만의 휴식과 꿈을 안겨주는 16시간을 위하여 8시간은 죽어주는
것이다. 8시간 동안은 나의 이성도 감정도, 필요하다면 오장육부까지도 이곳에 빼놓고
들어가면 그만이다.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으면 그만인 것이다.(주17)
노동이 인간다운 삶의 실현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고역, 참고 견뎌야만 하는 고통인 사회에서는 노동하는 것이 권리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하지 않는 것이 권리로 느껴지고,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거꾸로 인간답게 사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므로 여성이 일할 권리를 찾는 것은 필연적으로 일을 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일을 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첫째로 자본과
노동자의 전도된 관계를 바로잡아 노동자가 생산의 주인이 되는 것이며, 둘째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남성과 동등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여성이 이 사회의 노동을 변혁하지 않고는 노동에의 참여가 곧바로 해방을 가져올 수
없으며 오히려 이중의 소외를 약속할 뿐이다.
3) 저임금, 뼛골 빠진 10 년에 남은 것
어머니. 제가 하는 일은요, 0.7--0.8mm 되는 조그만 바늘로 시계줄 부속에 구멍을
뚫는 일이에요. 그것도 그냥 기계에 맞춰 뚫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해야
하는 정밀한 작업이에요. 그냥 하면 쇳가루가 구멍 속으로 흘러들어 가니까 기름을
수도꼭지처럼 틀어놓고 그 속에 손을 담그고 일하는 거^36^예요. 그래서 항상 손이
퉁퉁 불어 나고 기름 독 때문에 얼굴에 땀이 나도 손댈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렇게
일하면서도 하루 일당이 1,710원이^36^예요. 거기다 9시까지 연장 근무를 해야 한
달에 7 만원 정도 받아요. 결근을 하루 하는 달엔 그나마 3일치 씩이나 깎이는
거^36^예요. 더구나 공단 주변에 방값이 비싸고 닭장 같은 집을 지어 놓고, 어떻게든
방세 올리고 전기세, 수도세 악착같이 받으니 주변에선 방도 못 얻고 한 시간을
버스타고 다니면서 출퇴근하고 있어요.
아침이면 거북이 등처럼 줄을 지어 기어가는 만원 버스 땀냄새와 사람 틈에
끼어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애태우다 공장에 뛰어가면 일 시작 전에 녹초가 되어
버리지 뭐^36^예요. 산다는게 이리도 고달픈 것인지.
(중략)
어머니 며칠간 방 문제로 돌아다녔어요. 지금 사는 집 기한이 2개월이나
넘었거든요. 퇴근 후 후들거리는 지친 몸으로 복덕방을 기웃거리며 며칠을 헤매다
참담한 가슴으로 돌아서길 수없이 한답니다.
어머니. 뭔지 모를 분노와 눈물이 납니다. 이 편지를 부치지 못한 채 내일은 또
퇴근하면 퉁퉁 불은 손을 감추며 방을 얻으러 다니고 또 공장으로 출근할 거^36^예요.
어머니!.(주18)
이것은 80 년대 초의 한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다. 그동안 우리 경제는 세계가 놀랄
만큼 성장했지만, 여성 노동자의 생활 이야기는 임금의 액수를 제외하면 마치 바로
요즈음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임금의 액수는 많아졌지만 노동자들의 생활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대적으로는 더 나빠졌다. 1970 년 전산업 임금
총액의 생계비 충족률은 67.8%였다. 그러나 1989 년 현재는 62.5%(정액
급여만으로는 45.0%)다.(주19) 노총이 집계한 1989 년 5월 현재 4인 가족 최저
생계비는 78 만 8천 69원이다(노동자 가구의 평균 가족수는 약 4인이다.) 그런데
1989 년 현재 월 평균 임금이 30 만원 이하인 노동자가 42.9%이며, 70 만원 이하
소득자가 전체 노동자의 70.3%다. 또 지난 1980 년에서 1987 년까지 7 년간 10 대
재벌의 자산 증가율은 평균 43.2%, 연 약 62.5라는 엄청난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데
비해 노동자의 실질 임금 증가율은 1980 년과 1981 년에는 각각 ^35^3.4%,
^35^0.2%로 오히려 감소했고, 그후 1982 년부터 1986 년까지는 평균 7.5%씩
증가했을 뿐이다. 수천 억, 수조 원의 자산이 한 해에 62%씩 불어나는데, 일년에
기껏해야 몇 백만원인 임금은 한 자리 수 인상의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자본가의 자산은 해마다 쌓여가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은 거의 대부분이 먹고
사는 데다 써버려 노동자들의 호주머니에는 언제나 먼지만 날리기 마련이다.
왜 우리 노동자들만 이렇게 못 살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뼛골이 빠지게 일을 해도
잘 살 수 없는가! 왜 나는 10여 년 동안 열심히 일을 했건만 열심히 한 것이 우습게
이렇게 못살아야 하는가. 왜 돈뭉치 한번 마음대로 만져보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가!
내가 열심히 일해도 우리 식구 먹고 살 것밖에 없다. 왜 그럴까? 그렇게 열심히
일했건만 이제 남은 것은 허약한 육체뿐인가. 정말로 허무하다. 정말로 속상하다.
마음놓고 한없이 울고 싶다.(주20)
노동자가 가난한 것은 노동자가 생산한 것을 자본가에게 빼앗기기 때문이다. 1989
년 현재 노동자 일인당 부가 가치는 1천 3백 41 만원인데, 1인당 급여액은 3백 70
만원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한 해 동안 자신이 생산한 것 중에 약 4분의 1 만을
돌려받은 셈이며, 나머지 약 4분의 3은 자본을 위해 일해준 셈이다(게다가 부가
가치에서 급여율이 차지하는 비율, 즉 노동 분배율은 1980 년의 30.0%에서 27.6%로
줄어들었다).(주21) 반면 자본은 이 지불되지 않은 노동을 먹고 점점 비대해진다. 해가
갈수록 자본가와 노동자의 빈부 격차가 엄청난 속도로 증가한다.
빈부 격차가 확대된다는 것은 노동자들의 의식에도 반영되고 있다. 노총 조합원의
임금 만족도를 보면 1984 년에는 만족한다가 42.3%였는데, 1989 년에는 20%로
줄어들고, 80%의 노동자가 불만족을 나타냈다.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전적으로 만족함은 1.7%에 불과하고(1984 년 2.3%) 어느 정도 만족함이 18.3%(1984
년 40.0%), 별로 만족하지 못함이 56.7%(1984 년 46.7%), 전혀 불만족이
23.2%(1984 년 10.9%)나 된다.(주22)
노동의 산물이 노동자의 것이 되지 않고, 그로부터 소외되어 대립된다는 것은
노동이 천대받고 반대로 노동 생산물이 숭배되며, 노동을 하는 인간이 천대받고,
노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노동 생산물을 누리는 인간이 존중받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사회에서 노동은 저주받을 고통의 원인이기조차 하다. 노동자 자신의 노동이
심화시키는 이러한 상대적 불평등과 물질에 의한 인간 지배야말로 절대적 궁핍
이상으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1985 년 1월 29일 화요일
오늘날까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바라왔나. 죽고 싶다. 세상을 이렇게 살아야 될까.
이런 식으로 살지 않으면 안될까? 노동이란 단어가 싫다. 남들은 공부할 시기에
노동이란 단어를 가지고 생활한다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너무 힘들다. 모든 게 싫다.
노동 중에서 특히 '봉제'라는 것이 이렇게 치사할까 새삼 느껴진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차별이라는 것이 없는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한 나날들을 보낼까? 생각만 해도 날아가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
있는 자와 없는 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이렇게 해야만이 사회가
형성되는 것인가.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만 하는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우리 후손들에게는 나 같은 고통, 나 같은 나날을 겪지 않도록 나만이라도
차별이라는 것이 없는 바른 생활을 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나는 괴롭기만 하다.
앞으로라도 이러한 사회가 계속되지 않고 좀더 나은 사회 속에서 우리 모두가 살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주23)
* 남녀 임금 차별
노동자 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는 노동자의 최하층으로 가장 낮은 임금을 받으며
경제적 불평등과 절대적 상대적 빈곤의 고통을 가장 심각하게 당하고 있다. 1989 년
노총의 여자 단신 최저 생계비는 33 만 1천 54원이다. 여자 단신 최저 생계비의
내역에는 한 달 동안 과일이라고는 사과 3개와 귤 천 원 어치가 전부이고, 가구는
비키니 옷장, 석유 곤로, 찬장, 가전 제품은 라디오와 선풍기, 밥솥뿐이며, 책은 월간지
한 권이 끝이다.(주24)
그런데 문자 그대로 최저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월 평균 30 만원(상여금 포함)
이하의 임금을 받는 여성 s동자가 전체 여성 노동자의 73.4%나 된다. 다시 말하면
절대 다수의 여성 노동자가 자기 한 몸 먹고 살기에도 부족한 임금을 받고 있다.
더욱이 생산직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최근 들어 정부가 정하는 최저 임금선으로
정해지는 경향이 있다. 노동부는 1990 년의 최저 임금을 시간당 690원, 즉 8시간 정액
급여로는 한 달에 16 만 5천 원으로 정했다. 노총 최저 생계비의 절반 수준이다.
그런데 10인 이상 사업장의 노동자 454 만 4천 명의 약 12.4%인 56 만 2천명이 이
최저 임금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고, 10인 미만 노동자 436 만여 명도 이와
비슷한 임금 수준으로 살아간다. 이런 저임금 층의 대부분이 여성 노동자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생산직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이를 약간 넘는 선에서
정해지고 있다. 구로동의 ㄷ전자에서 일하는 보통 여성 노동자 박영숙씨의 경우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하는 이 회사에 입사한 지 7 년이 되었는데도 월 임금 총액은 19
만 8천 원으로 20 만원을 밑돈다. 요즘 들어선 수출 부진으로 시간 외 근무 없이 법정
노동 시간인 주 46시간만 일하기 때문에 기본급에 월차, 생리 수당 등을 합한 것이 그
정도이다.(주25) 한 달 수입이 20 만원 이하라면 그 생활이 어떨지 가히 상상이 간다.
사무직 여성의 경우에도 큰 차이가 없다. 자본가들은 사무직 여성 노동자에게
생산직 여성에 대한 우월 의식을 심어 노동자라는 의식을 약화시키려 하지만, 이
'우대'의 알량한 실상은 얄팍한 월급 봉투 속에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1984 년 3월 수습 여행원 시절, 첫 봉급 명세표를 받아 쥐었던 나는 행여 누가
볼새라 얼른 감추고 말았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던 당혹감, 창피스러움,
기막힘. 은행원의 봉급이 고작 9 만 1천 원. 물론 수습이란 딱지가 붙긴 했으나, 개인
사무실의 여직원도 초봉이 최소 15 만원이 넘는다고 들었는데 십만원도 되지 않다니
한심했다. 내가 이러려고 그다지도 공부를 하고 꿈을 키우며 지냈단 말인가? 정말
억울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수습이 끝나면 월급도 많이 오르려니 했지만 기본급 자체가 적은데 차이가
있었겠는가? 월 총소득이라 해야 21만원, 식대를 제하고 나면 16 만 9천 원. 재형
저축 하나 들고 나니 손에 쥐게 되는 것은 8 만 9천 원. 난 또 한 번 눈물을 삼켜야
했다. 만 5 년이 지나 5급 여행원이 되면서도 갈등은 여전했다. 기본급만 4 만 7천원
올랐을 뿐이니. 오죽 했으면 국민은행 한 지점에서는 봉급 명세표 그 자존심마저
공개했을까?(주26)
여성 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1989 년 현재 10인 이상 사업체 여성 노동자의 월
평균 임금은 33 만 6천 8백 79원으로 남성 노동자의 평균 임금 63 만 9천 5백
78원의 52.7%에 불과하다.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사무직과 생산직을 막론하고 생산직
남성 노동자의 임금보다 낮다. 다음 표와 그림은 생산직 남성의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사무직과 생산직의 남녀 노동자의 평균 임금 지수를 표시한 것이다. 이 표가
보여주듯이 사무직 여성의 평균 임금은 생산직 남성의 70% 정도이며, 생산직 여성의
평균 임금은 50--55%에 불과하다. 여성 노동자는 초임에서부터 남성과 차별을
받으며, 해가 갈수록 임금 격차는 확대된다.
다음 표는 풍국 노동조합이 88 년 10월에 조사한 임금 실태이다. 남녀이 초임이
같은 회사는 15개 업체 중 3곳 뿐이고, 나머지는 작게는 일당 200원에서 크게는
2,400원까지 차이가 난다.(주27)
게다가 남녀의 임금 격차는 경력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생산직의 경우, 경력 1 년 미만의 중졸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66.9%인데, 경력이
5--9 년은 59.5%이고, 10 년 이상은 53.4%이다. 고졸 여성의 경우에도 1 년 미만은
76.2%인데, 5--9 년은 62.6%, 10 년 이상은 63%이다. 사무직의 경우, 고졸 1 년
미만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66%인데, 5--9 년의 경우에는 54.2%, 10 년 이상의
경우에는 64.4%이다. 그러면 이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낮은 임금을 받는 원인을 살펴
보자.
* 남편이 먹여 살려 준다?
임금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요소는 노동력의 재생산비, 즉 생활비다. 여기에는 생계를
유지하는 비용과 교육, 훈련 비용이 들어간다.
남성의 경우, 임금은 그 자신을 포함해서 전 가족의 생활비를 기준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여성의 임금은 가족의 생활비가 아니라 여성 노동자 개인의 생활비, 혹은
남편의 임금에 대한 보완물을 기준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할 경우에도 더 적은 임금을 받는 근거가 되며, 또 여성이 주로
고용된 직종의 임금이 낮은 수준에서 결정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여성이 주로
고용된 직종이 저임금직인 것은 그것이 주로 미숙련 노동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 노동력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남녀 초임의 차이와, 기혼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 여성 노동자는 근속 연수가 길어도 임금이 거의 올라가지 않는
것 등도 이런 근거에서 행해진다.
이런 기준이 통용되는 이유는 남편이 아내를 비롯한 전 가족을 부양하는 경우가
상당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남성의 평균적인 노동력의 가치는 여성의
평균적인 노동력의 가치보다 높다.
그러나 이미 기혼 여성 노동자의 비율은 여성 노동자의 30%에 달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기혼 여성 노동자가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는 실제로
자본이 남성 노동자에게 가족을 부양할 만한 임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은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성 노동자에게 가족의 생활에 충분한 임금을
주지 않으며, 여성을 고용하여 그들간에 가족의 생활비인 노동력의 가치를 분할한다.
즉 부부가 함께 벌어야 생활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1989 년 현재 기본급의 최저 생계비 충족률은 45.0%에 불과하다.
남편 한 사람의 임금만으로는 도저히 평균적인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없다. 동양
정밀 노조가 조합원과 가족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현재의 월급으로
생활하기가 어렵다는 응답이 99.2%(어렵다 70.8%, 아주 어렵다 28.4%)이고,
넉넉하다는 응답은 0.8%에 불과하다. 남자 조합원의 부양 가족이 평균 2.9 명이고
근속 연수가 평균 5 년 9개월인데, 기본급이 24 만 5천 818원으로 노총 최저
생계비의 55% 정도에 불과하다. 쇠고기를 특별한 경우에만 먹는다는 응답이
49.6%고, 가족 여행을 1 년에 1번도 못 간다는 응답이 73.1%이며, 가정 불화의
78%가 돈 때문에 일어난다고 응답했다.(주28)
이런 저임금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다수는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주29)
선반공 조씨(45세): 1978 년에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다. 지금 일당은 6,120원이다.
지금 한 달 수입은 25--26 만원이다. 이것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서 집사람이 봉제
공장에 다니는데 한 달 수입이 10 만원쯤 된다. 자식은 둘로 중학생 하나와 6
학년짜리가 있다. 네 식구가 35 만원으로 살고 자식들 학교도 보내려니 힘이 든다.
가능하면 절약을 하는데 나는 하루 차비 600원씩과 약간의 비상금 등 한달에 2
만원의 용돈만 쓰고 술담배는 안한다. 요즈음엔 옷이 떨어져서 못입지는 않으니까
옷값은 많이 안든다. 아이들의 군것질을 막기 위해 내가 엄격하게 금하고 어릴 때부터
버릇이 되서 무엇 사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제화공 박씨(33세): 3 년 전에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다. 지금은 기능공 대우를 받아
일당이 약 6,000원인데 잔업이 있으면 한 달 수입이 23--24 만원이 되고 잔업이 적어
8시간만 일하는 때는 18 만원밖에 안된다. 요즈음은 잔업이 없는데 애들 셋하고,
5식구가 먹고 살려니 힘이 든다. 집사람이 몇 년 전부터 집에서 부업을 하는데 한 달
수입이 3--4 만원밖에 안되지만 살림에는 큰 보탬이 된다. 나는 작업이 일찍 끝나면
집에 가서 집사람이 하는 일을 같이 한다. 수입이 적으니 정말 사람 사는 것 같지
않게 산다. 담배 끊는 것은 건강에도 좋다고 하지만 술 한 잔도 못 먹는다. 동료나
친구 관계가 어색해 질 때도 있다. 고기는 월급을 타고 나서나 몇 번 먹어 본다.
그러나 그 달에 예상하지 않은 지출, 즉 애가 병원에 간다든지 경조금이 나갈 일이
있으면 고기류는 못먹고 월급날 바로 전에는 김치하고 밥만 먹게 되기도 한다. 애들
교육만큼은 잘 시켜 보려고 큰 애를 집근처 유치원에 보냈었는데 돈을 못내 중간에
그만 두었다. 기본 음식 외에 과일 등은 거의 안사먹는다. 여가라든가 취미 활동은
생각도 못한다. 결혼하고 나서는 극장에도 한번 못가봤다. 그저 TV나 본다. 저축으로
계를 들지만 계를 타더라도 전세금 오르는 것 주고 빚 갚으면 그만이다.
이것이 남자가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의 실상이다. 여성들이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기혼 여성들이 취업을 하는 이유에 관한 조사를 살펴보아도 이를 명백히
알 수 있다. 최근의 한 조사에서 기혼 여성 노동자의 취업 이유는 37.3%가 생활비
부족, 애들 교육비의 마련이 21.1%, 집 장만 21.1%, 생계 책임 11.2%로 나타났다.
교육비나 집 장만 역시 가장 기본적인 생활비에 속하므로 93.9%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주30)
이런 사정은 전문직, 사무직, 생산직 노동자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절대적인 궁핍이냐 평균적인 생활 수준 유지 곤란이냐는 정도의
차이다. 전문직이나 사무직 노동자의 경우에는 절대적인 궁핍은 벗어났지만 계속
높아지고 있는 평균적인 생활 수준을 따라잡기가 힘들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상품화의 진전이고, 생활 수준은 상품을 많이 소비하는 정도에
달렸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상품들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자동차가 전문직과 사무직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점점 생활
필수품이 되어가고 있으며, 자동차가 없으면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게까지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자동차가 지금의 TV처럼 일반 대중의 생활 필수품이 될 것이다. 요컨대
평균적인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돈이 필요한데 임금은 그만큼
상승하지 않는다. 전문직과 사무직 노동자의 증가는 전문직의 지위 하락을 동반하고
있다. 임금은 물가 상승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실정이다. 남편이 전문직이나 사무직
노동자인 경우에도 평균적인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조차 남편 한 사람의
임금만으로는 점점 부족하게 된다.
그리하여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있는데, 남편과 아내가 모두 취업하고 있는 경우,
가족의 생활비를 남성과 여성 사이에 불평등하게 지급해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여성이 남성과 같은 임금을 벌어서 현재 임금 소득의 두 배를
벌게 된다 해도 문자 그대로의 최저 생계비 정도를 벌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마치 남편이 가족의 생활비를 벌고 여자의 수입은 가욋돈, 여유분이라도
되는 듯이 "남편이 먹여 살려주는 데 여자는 조금만 받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최근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른 가족 수당 지급 문제는 맞벌이의 증가에 따른 인식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즉 남성 노동자들에게만 지급되던 가족 수당을 여성
노동자에게도 지급하라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삼성 제약 노동 조합은 1990 년 배우자
수당 1 만원, 자녀 수당 1 만원(2인까지)을 '남녀 구분없이', '배우자의 수당 수혜
여부에 관계없이' 주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가족 수당 규정을 단체 협약에 포함시켰다.
또 코스모스 전자는 작년부터 남녀 노동자 모두 배우자, 자녀, 부모 각 일인당 2천
5백 원씩의 가족 수당을 주고 있으며, 자녀 1인에 한해 중 고등 학교 입학금과
등록금을 전액 지급하도록 명문화했다. 텔레 비디오와 진성 전자 노동 조합도 가족
수당을 남녀가 똑같이 받는 것을 따냈다.
전국 금융 노조 이경자 여성 국장은 "지난 해 말 개정된 가족법에서도 부부 공동
생활 비용은 부부가 공동으로 부담하도록 규정했다"면서 "맞벌이 부부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복지적 의미의 가족 수당은 남녀에게 똑같이 지급, 남녀
임금 격차를 줄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 수당이나 학자금의 쟁취는 여성
노동자의 노동자로서의 긍지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대기업이나 정부 기관에서 학자금 준다는 말만 들었는데 이번에 단체 협약에
학자금이 신설되고 보니 돈보다도 여자이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하던 것을 따내 괜히
자랑스럽고 마음이 뿌듯합니다.(주31)
그러나 물론 가족 수당의 평등한 지급은 여성과 남성이 가족의 동등한 공동
부양자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가족 수당 자체가 가족의 실제 부양비가 아니라,
그 명목의 보조적인 급여로서 각종 수당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 사이에서 남성만이 가족의 부양자가 아니라, 여성도 동등한 부양자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의식이 자라고 있는 것은 괄목할 만하다.
* 고용 차별
두번째 요인은 자본의 고용 차별에 의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자본은 노동력의
생산비가 많이 들고(임금이 높고),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는 숙련,
전문 기술직에 여성의 고용을 꺼리고, 미숙련, 단순, 육체 노동에만 주로 여성을
고용한다. 이 때문에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 실시된다손 치더라도 남녀간 임금 격차는
남는다. 실제로 서구의 경우 대부분의 나라에서 1970 년대에 동일 임금법이
실시되었지만 남녀의 임금 격차는 여전히 남아있다.
남녀 임금 격차의 요인을 분석한 박세일의 연구에 따르면 남녀의 임금 격차에서
생산성 격차로 인한 것이 66.1%이고 차별로 인한 것이 33.9%인데, 생산성 격차 중
학력차로 인한 것이 19.5%, 경력차로 인한 것이 46.6%이며, 차별로 인한 것 중 고용
차별이 18.9%, 임금 차별이 15.0%이라고 한다.(주32)
그러나 이처럼 생산성에서 오는 격차와 차별로 인한 격차를 기계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생산성 격차가 생기는 원인 자체가 자본의 고용 차별에 있다는 사실을
흐려, 임금 격차를 합리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즉 경력차로 인한 격차는
사실상 자본이 미혼 여성을 주로 고용하며, 출산 휴가 등을 지급하지 않아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기혼 여성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을
임시직으로 고용하는 등의 고용 차별에 의해 주로 생긴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
남성보다 교육 수준이 낮은 원인 역시 근본적으로 고용 차별과 임금 차별에 의한
것이다.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더라도 여서의 취업이 남성보다 어렵고, 여성에게 평생
고용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으며, 승진이 안되는 것 등으로 인해 여성이 남성보다 더
낮은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력차로 인한 격차를 고용 차별에 포함시키면, 고용 차별로 인한 격차가
65.5%를 차지하고, 학력이 낮아서 오는 격차가 19.5%, 여성의 노동력의 가치에 대한
낮은 평가에서 오는 것이 15.0%가 된다. 즉 임금 격차의 가장 큰 요인은 고용 차별에
있다.
한편 이렇게 고용 차별을 통해 여성의 저임금을 유지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애당초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노동에 종사할
기회를 없앰으로써 남녀의 임금 격차를 눈에 띠지 않게 하고, 혹은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주33)
다음으로 우리나라 자본의 종속성과 체제의 비민주성이 여성 노동의 저임금과 남녀
임금 격차를 심화시킨다.
남성과 여성 노동자의 임금 격차는 모든 자본주의국에 공통된 현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와 민주주의의 발달 정도에 따라서 여성의 지위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1932 년 이래 사회 민주당 정권에 의해 지속적으로 남녀 평등을 위한
정책이 실시되어 온 스웨덴의 경우,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남성의 90%에 달한다.
이에 비해 사회주의의 전통이 약한 미국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1979 년 미국 노동성
통계에 의하면 남성 노동자 임금의 62%에 불과하며, 1955 년 이래 35 년 동안
자민당 정부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선진국 중에서 임금이 낮기로 유명한 일본의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1981 년 현재 남성 노동자 임금의 53.3%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과 기술에서 선진국에 뒤떨어진 우리나라 자본은 보다 급속한 발전을 위해
일차적으로 저임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를 위해 지금까지도 경찰과 감옥을
동원한 폭력적 탄압을 사용하고 잇다. 저임금의 유지를 위해 그 주요한 희생 제물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여성 노동자였다.
남녀간의 임금 격차는 학력간 임금 격차, 사무직, 생산직 간의 임금 격차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주요한 임금 격차의 한 요소다. 이러한 임금 격차는 첫째로, 노동자
대다수를 저임금에 묶어두면서도 기업간의 경쟁과 급속한 기술 혁신에 필요한 기술
전문 인력을 독점적이고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안으로서, 둘째로, 노동자 내부네
차별을 둠으로써 저임금과 계급적 차별에 대한 저항을 완화, 분쇄하는 방안으로서
활용되었다. 특히 노동 운동이 아직 초기 단계였던 1960--1970 년대에는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진압하는 데 남성 노동자들이 많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독점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와 이에 따른 계급적 연대 의식의 발전에 의해
정신 노동자와 육체 노동자 간의 대립,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간의 대립은
자본가에 대항한 단일한 노동자 계급으로의 단결에 의해 극복되고 있다.
특히 최근의 노동 운동은 여성 차별 철폐를 위한 구체적인 조항들을 자신들의
일상적 경제 투쟁의 일반적인 목표의 하나로 채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경향은 1987 년 7,8월 노동자 대투쟁 때부터 나타나 현대 중전기는 여자 생산직
사원에세 근속 수당을 지급하라는 요구를 내걸었으며, 울산의 럭키 노동자들은 여자
기숙사 설립, 여사원에게 균등한 임금 지급, 여사원 생리 휴가비 지급을 내걸었고,
미포 조선에서는 "상여금 차등제 폐지하고 남녀 공히 500% 지급하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최근에는 남녀의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방안으로
기본급의 남녀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이 일어나고 있다. 코롬방은 1988 년 5월 여성 3
만원, 남성 2 만 2천 원의 임금 인상을 쟁취했고 한국 바이린은 1988 년 4월, 여성
임금은 21.4%, 남성 임금은 18.6%로 차등 인상했으며, 유유 산업도 1988 년 4월
기본급을 여성 17.9%, 남성 12% 차등 인상했다. 이런 요구나 투쟁은 여성 노동자의
노동 운동에의 참여를 활성화하고, 남성 노동자의 의식을 민주화하여 노동자 전체의
의식과 단결, 투쟁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남성
노동자들이 먼저 제안하여 기본급에서의 남녀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투쟁한 제성
정밀의 노조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전에 회사가 마음대로 임금을 올려줄 때는 오히려 더 많이 받는 동료가
미워지더군요. 이는 결국 노동자간에 위화감을 조성하여 분열을 유도하는 자본가의
분열책일 뿐입니다. 임금 차별을 없애는 일은 바로 이러한 위화감을 없애고 단결력을
높이는 계기가 됩니다.(주34)
이는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가 서로를 경쟁 상대로가 아니라 이러한 경쟁을
통해 전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는 자본과 권력에 대한 투쟁의 동반자로 여기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 전체의 문제이다.
남녀 평등을 위한 노력은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연대를 촉진하는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이런 단결된 투쟁을 통해서만 남녀 노동자는 자본과의 투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다.
4) 모성 파괴, 잘 키울 권리, 잘 자랄 권리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인간적, 여성 억압적 성격은 모성 파괴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모성은 인간 자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 사회의 전제 조건이며, 여성이
인류를 위해 담당하고 있는 생산적인 역할이다. 그러므로 모성은 여성만의 일이
아니라 남녀 모두의 일이며,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사회적인 일이다.
모체의 상태가 태아에게, 역으로 태아의 상태가 모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급속히 생성, 성장하는 생명을 몸안에 품음으로써 여성들에게는
평상시와는 다른 많은 필요들이 생겨난다. 신체적으로는 보다 많은 영양 섭취와 휴식,
적절한 건강 검진 등등이 필요하고, 유해한 환경이나 과로를 피해야 하며,
정신적으로도 즐겁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또 새로 태어난 어린 생명의
보호를 위해 물질적, 정신적으로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이것은 여성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지만, 남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태어나고 성장하며 인간답게
자녀를 가지고 기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윤 추구라는 절대 명제 앞에서는 이 '인간의 조건'도 힘없이 무너진다.
전지 전능한 자본은 상식에 무지하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에
철저히 무능하다.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은 모성과의 모순을 낳고, 여성은 오히려
모성으로 인해 각종 불이익을 당한다. 여성이 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할 때 우리
사회는 오히려 기존의 자원마저 빼앗는다. 모성 파괴는 새 생명과 여성 노동자 자신의
생명에 대한 위협이다.
* 살인 행위
노동자의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모욕을 받아야 하나요.
저는 올해 30세의 아줌마 미싱사입니다. 우리 회사는 의류 수출업체로서 종업원
600여명을 거느리는 국내 굴지의 재벌 계열 회사입니다. 저는 76 년 결혼하여 첫
아이를 낳고 목재 회사에 다니는 남편과 같이 직장 생활을 해오던 중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입덧이 심하게 나서 힘든 미싱 일을 한다는 게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남편과 같이 힘들게 모아서 산 아파트에 들어가는 10 만원이란 부금을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부어 나갈 수가 없었고, 제 스스로도 이번에 산전 산후 휴가를
따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버텨나갔습니다.
임신 7개월이 지나 해산할 때가 다가 오자 미리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저는
용기를 내어 회사 과장에게 가서 출산 휴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과장은 아니나
다를까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무슨 휴가요?"라고 반문했습니다. "출산 휴가요" "얼마나
걸려요?" "2 달인 걸로 아는데요" "그런 것은 우리 회사에는 없어요, 쉬고 싶으면
우리 회사에 안 나오면 될 것 아니요. 알아서 해요"라고 과장은 냉정하게 잘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나는 계속 과장, 부장에게 이야기했고 이들은 서로 미루어가며
나를 몰아 세웠습니다.
거기에다가 견디기 힘들었던 건 현장에서 나의 불룩한 배를 보고 퍼부어대는
조소였습니다. 남자 관리자들과 기사들은 "애새끼를 뱄으면 집구석에나 있을
것이지"라며 노골적으로 수근거려댔고 나이 어린 미싱사들도 "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측은해 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 힘을 준 사람이 바로 임신 5개월된 동료
미싱사 미자였는데 미자는 출산 휴가가 있는 것도 모르다가 내가 그런 것을 위해
싸우자, 관심을 가지고 물어오더니 "언니가 따내면 나도 청구하겠다"며 열심히
싸우라고 격려하곤 했습니다.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이것은 떳떳한 권리라는 생각으로 싸운 결과 당당히 출산
휴가를 따내었습니다. 산전 1 달 산후 1 달을 쉬고 아직 회복이 덜된 몸으로 회사로
출근을 하자 미자가 퉁퉁 부은 얼굴로 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 울먹이며 너무나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출산 휴가를 얻고 쉬게 되자 미자도 용기를
내어 과장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과장은 펄쩍 뛰면서 뻔뻔스럽다는 듯이 노려보며,
"우리 회사에는 그런 것 없다"고 잘라 말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집안 사정이 어려워
도저히 쉴 수 있는 여건이 안되었던 미자는 혼자서 고민고민하다가 드디어 임신
7개월의 아기를 병원에 가서 임신 중절 수술을 하였고, 그 후 바로 회사에 나와 일을
했더니 몸이 점점 부어 오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관리자들이 자기 부인이 이런 꼴을 당했으면 가만히 있었을까요? 아무리 자기
뱃속 차리는게 우선이고 노동자들을 우습게 본다지만 이것은 명백한 살인 행위가
아닙니까?
모성 파괴는 공인된 가장 흔한 살인 행위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 살인
행위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 독점 자본의 규모에 관한 한 선진국이지만
노동자의 생활에 관한 한 후진국인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후진적인 것이 모성 보호일
것이다.
선진국들에도 현재와 같은 수준이나마 모성 보호가 실시되기까지는 참혹하고 악명
높은 모성 파괴의 역사가 있었다. 공장 지대에서 유아 사망률이 다른 지역보다 몇
배나 높아지고, 노동력의 공급을 위협할 정도에까지 이르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게
하고서야 자본가 계급은 비로소 여성 노동자에 대한 과도한 착취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달았다. 자본가들은 스스로 자진해서 여성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했는데, 이는 자본가들이 갑자기 자비로와져서가 아니라,
그제서야 비로서 그들이 마음놓고 부리던 것이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 모성 파괴를
어느 정도 제한하지 않고는 자본 축적이 위태로우리라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즉 자본이 모성 파괴라는 살인 행위를 제한하는 것은 오직 경제적 이해타산에
의해서일 뿐이다. 노동 과정에서의 모성 파괴가 다음 세대 노동력의 지속적인 공급을
저해할 정도로 심각해지거나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커져서 임신 출산, 혹은 탁아소
등의 비용을 들이더라도 기혼 여성 노동자를 고용할 필요가 있거나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인해 양보가 불가피한 경우에만 자본은 마지못해 모성 보호를 향한 발걸음을
내디뎌 왔다. 선진국들이 앞으로 나아간 것은 언제나 노동자들이 투쟁에 의해서
뿐이다. 이런 모든 경우에도 자본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양보만을 하려하며, 그
최소한의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 자본이 원하는 만큼 공급될 수 있는 선에 의해서
결정된다. 선진국의 법률은 이런 양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법률들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조치에 불과하다. 그런데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눈
앞에 두고 있다는 우리나라는 이 최소한의 법적 조치에서도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다.
지켜도 그만이고 안지켜도 그리 큰 해가 없는 법이 구색 갖추기로 모성 보호를
규정해놓은 데 불과하다.
노총의 조사에 따르면 생리 휴가를 유급으로 쉬는 경우는 20.3%에 불과하고,
수당만 받고 쉬지 않는 경우가 46.8%, 수당도 받지 않고 쉬지도 않는 경우가 9.5%,
회사 사정상 미안해서 못쉰다가 8.9%이다. 여성 노동자가 임신했다고 해서 노동
강도를 줄여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주35) 또 육아 휴직제에 대해서도 있다는 응답은
25.7%에 불과하고 없다가 36.4%,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가 25.5%, 무응답이 12.4%로
나타났다. 이런 사실은 한편으로는 모성 보호에 관한 제도적 문제를,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 의식의 결여를 보여준다.
신문에 거의 매일 실리다시피 하는 직업병과 산업 재해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 노동자들은 수은, 납 등의 중금속에 거의 무방비인 채 노출되어 있으며, 많은
수가 생리 불순과 생리통을 겪고 있다. 최근 노동 상담소에는 "무균실에서 오래
근무했더니 생리가 없어졌어요"와 같은 호소가 줄을 있고 있다.
유해한 노동 환경으로부터의 보호는 여성 노동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
노동자에게 해로운 것은 남성 노동자에게도 해롭다. 단지 여성은 모성으로 인해 그
피해가 더 심각하고, 2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며, 그 피해가 종종 치명적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 폭발하고 있는 육아 문제
얼마전 부모가 다 일하러 나간 사이 집에서 놀던 아이들 둘이 불에 타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맡길 사람도 없고 집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고 하여 문을 잠궈
놓았던 것이다.
"혜영아! 용철아! 어디 갔니."
9일 오후 서울 망원동 대근 연립 지하 셋방을 찾은 아빠 권순석씨(30세 부천 유미
레미콘 경비원)와 엄마 이영숙씨(27세 파출부)는 타다남은 이불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혜영(5세 여) 용철(4세 남) 남매는 이날 오전 방안에서 놀다 불이 나 연기에 질식돼
숨졌다. 빠져 나오려 발버둥쳤지만 창문도 없었고 방문은 밖에서 굳게 잠겨 있었다.
권씨 부부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사람들 고향에서 같이 자라 5 년 전
농사꾼 부부가 됐으나 9백 평 논농사로는 생계를 지탱하기 힘들었다. 남매를 70세
노모에게 맡기고 부부는 지난 해 5월 서울로 올라왔다. 남편은 막 노동판을 아내는
가정부를 전전하면서 떨어져 살던 부부는 이를 악물고 돈을 모으고 빚을 합쳐 지난 해
10월 겨우 4백만원에 3 평짜리 지하 셋방을 장만했다. 혜영이와 용철이가 두 달 후
서울에 올라와 네 식구는 이산 가족 신세를 면했다. 가난을 이기려고 부부는 열심히
일했다. 권씨는 새벽같이 경비원 일을 나가 30여만원을, 이씨는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파출부로 일해 35 만원을 벌어 빚을 갚아 나갔다. 제일 큰 문제는 어린
남매를 돌보는 것이었다.
"부엌에 칼과 연탄불이 있어 위험했고 애들이 밖으로 나가면 길을 잃거나 유괴당할
것 같아 방문을 잠글 수밖에 없었어요." 맡아줄 사람이 없어 할 수 없이 남매는
방안에 갇혀야 했고 이 현실은 지금 부모 가슴에 한으로 남아있다.(주36)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탁아 문제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준다. 기혼
여성의 취업이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탁아를 필요로 하는 아동의 수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그 수는 1989 년 현재 최소치로 추정해서 151 만 명에 달한다.
이들 중 공사립 유아 교육 기관에 다니는 아동은 51 만여 명인데, 그 중 3세 이하
아동은 2천 7백 70 명 뿐이다. 적어도 1백만 명의 아동이 적절하고 안정되게
보육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유아 교육 기관에 다니는 경우도 오전 시간만 보육하는
유치원에 다니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나라 남녀 고용 평등법 제12조는 "사업주는 근로 여성의 계속 취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수유, 탁아 등 육아에 필요한 시설을 제공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법률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직장 탁아소는 공단 지역 및 근로 여성 밀집
지역의 시범 탁아소와 사업장 탁아소가 있는데, 사업장 탁아소는 전국에 걸쳐
12개뿐이다.
우리나라의 탁아소에는 대규모 탁아소로 새마을 유아원과 공단 탁아소가 있고
소규모 가정 탁아소와 빈민 탁아소 등이 있다. 새마을 유아원은 2천 413개소에 20 만
1천 명을 수용하고 있는데, 대도시 지역에서의 조사에 의하면 8시간 보육이 44%,
7시간이 33.3%로, 보육 시간이 여성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보다도 짧아 취업 여성은
이용을 못하고 오히려 중산층 전업 주부들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가 주요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가정 탁아의 경우는 비용이 월 10 만원이 넘어 이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여성 노동자 중 소수에 불과한 전문 기술직 노동자나 중산층 주부들인
것이다. 게다가 우리 나라 현행법상 3세 미만의 유아를 정식으로 수용할 수 있는
기관은 새마을 유아원뿐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새마을 유아원조차 대개 4세 이상
아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영아반은 1986 년에 와서야 서울에서 겨우 10개소에
설치되었을 뿐이다. 그나마 이 중 6곳은 오전 9시에 시작하고, 9곳은 오후 5시 이전에
문을 닫아 역시 주로 중산층 가정 주부들이 이용하고 있다. 결국 3세 미만의 유아를
가진 여성 노동자들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0--3세
유아의 보호에는 포유실과 조유실 등 많은 시설을 갖추어야 하고 인건비도 많이 들기
때문에 탁아소가 광범위하게 설립되려면 국가의 재정적 지원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정부의 계획은 어떤가? 보사부는 6세 미만의 어린이 82 만 명을 수용하기 위해서
수용 인원 10 명 규모의 가정 탁아소 2 만 5천 7백 개와 수용 인원 70 명 규모의
시설 탁아소 8천 20개 등 모두 3 만 3천 720개의 탁아 시설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필요하다고 설정한 시설 탁아소 8천 2십 개 중 올해는 겨우 250개,
1992년에도 1천 2백여 개만을, 그것도 설립 계획 수립 중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나머지 5천 5백 곳과 가정 탁아소 2 만 5천 7백 곳은 1995 년까지 세제 지원 등으로
민간 차원에서 설치하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기혼 여성 노동자는 한 해 평균
30%씩 증가하고 있는데! 요컨대, 정부는 방치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 아이는 어머니의 책임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탁아소가 드물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탁아소가 발달하는 방식에 있다. 우리 사회의 탁아소는 어머니가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동과 자년 양육을 조화롭게 해 낼 수 있어야 하며 노동자의 자녀가 가장
잘 자랄 수 있도록 사회가 지원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 사회의 탁아소는 '아이를 기르는 것이 어머니의 일차적인 의무이고
아이를 돌보는 것은 어떤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전제를 타파하지 않으며,
아이는 어머니가 집에 있어야만 잘 자랄 수 있으며 아이를 탁아소나 '타인'에게 맡기는
것은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전제를 타파하지 않는다.
탁아소는 일하는 어머니와 아이를 위한 '최선의 배려'로서가 아니라, 단지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경우를 위한 '최소한의 방편'으로서만 발전하고 있다. 그 결과
어머니는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는 최선의 경우에도 결코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아이는 최소한의 방편으로서의 탁아소에서 최소한으로 자란다.
왜 그런가? 이는 자본이 여성을 사회적 노동에 끌어들이는 목적이 여성의 해방이나
남녀의 평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임금으로의 착취에 있기 때문이다. 자본이 달리
여성을 고용할 길이 없는 경우에 탁아소가 최소한의 수준에서 발달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머니가 키워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자본은 탁아소의 건설과 같은 기혼 여성의
고용에 따른 자신의 부담을 최소화한다. 여성들에게 일이 본연의 임무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자본은 여성 노동자들이 사회적 노동에서의 비천하고 시시한 대우와
지위를 참고 견디도록 만든다. 여기에는 참으로 교묘한 연쇄 고리가 형성되어 있다.
여성들은 자식을 위해 일하지만, 그 때문에 자식은 버려져 자란다. 자본은 기혼 여성의
노동력을 싼값으로 얻고, 아이를 기르는 비용(노동력 재생산비)도 최소화한다.
이런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성이 착취의 미끼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성을
사회적 노동과 대립되게 만듬으로써 자본은 모성을 그것을 위해 여성이 다른 인간적인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짐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위대한 어머니상, 희생적인
어머니상으로 포장되낟. 그러나 그 내막은 자본이 노동력의 재생산비를 절약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모성은 희생 되고, 그 희생은 결국 자본에게 바쳐진다.
자식이 어머니에게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상황에서는 아이는
어머니에게 짐이 된다. 자본이 만들어 내는 노동과 모성의 모순은 어머니와 아이의
모순을 낳는다. 아이와 자아 실현의 욕구 사이에서 양자 택일을 강요당하는 것은
심각한 모성 파괴의 하나다.
최근 기혼 여성 노동자가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모성 파괴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아직은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모성 보호에 대한 여성
노동자들의 의식과 투쟁도 고양되고 있다.
은행의 경우, 1985 년부터 4개월의 육아 휴직(산전 산후 2개월 휴가 제외)이
가능하다. 그러나 60일의 출산 휴가는 급료를 받고 근속 연수에 포함되는 반면, 육아
휴직 4개월은 단지 휴직만이 보장될 뿐이다. 남행원은 군복무시 70%의 임금이
지급되고 그 기간이 근속 연수에 포함되는 것에 비해 불평등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또 MBC에서는 단체 협약을 통해 1988 년 9월 이후 4개월의 육아 휴직을 쟁취했다.
그 중 3개월의 육아 휴직(그 중 2개월은 유급)이 가능하다.(주37)
모성 보호와 자년 양육을 위한 싸움은 여성만의 싸움이 아니다. 아이에 대한 책임은
어머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며, 모성 보호 요구는 여성이 일할 권리를 찾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이것은 노동자의 다음 세대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한 인간으로
자라도록 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며, 노동자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의
하나로서, 남녀 노동자 모두의 문제이다.
5) 불안정 고용, 1원 50전에 몸은 병들어 가고
여성 노동자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그 중 많은 수가 불안정 고용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전체 피고용자 961 만 명 중에서 상시 고용이 811 만 4천명으로
84%이고, 일고가 149 만 6천 명으로 16%나 된다. 전체 피고용자 중에서 일고가
차지하는 비율을 남녀별로 보면 남자 14%, 여자 20%이며 임시고를 포함하면 남성
노동자의 29.1% 여성 노동자의 51.8%가 불안정 고용 상태에 있다.(주38)
불안정 고용은 산업 예비군의 일부로서 정체적 과잉 인구에 해당한다.(주39) 임시
고용, 일고 노동자들은 노동 조합에 가입할 수도 없으며, 언제든지 손쉽게 해고될 수
있고, 생리 휴가, 연월차 휴가를 받을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상여금, 퇴직금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차별 대우를 받는다. 자본가들은 이러한 임시고와 일고를 늘리고, 특히
여성을 여기에 이용함으로써 이중 삼중의 이익을 볼 수 있다. 모성 보호 비용을
절약하면서 여성 노동력을 계속 값싸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회사와 이웃 회사인 롯데 제과의 가장 큰 문제는 일용부를 쓰는 문제와 생산
품목을 하청으로 주고 있는 문제였다. 정식 공원을 쓰는 것보다 일당도 적게 줄 수
있으며 상여금과 퇴직금도 없으며 또 언제든지 필요하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할 수
있으니 회사로서는 이 얼마나 큰 소득인가?
또 일용부는 회사로부터 잘못 보이면 더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정식 공원들보다 더
많은 생산을 내야 한다. 단적인 예로 껌부의 껌파치를 까는 데 있어서 일용부에게
도급제로 일을 시키기 때문에 그들은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스스로 1시간 정도씩
앞당겨서 출근하여 경쟁을 하며 남보다 많은 작업량을 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또
종합 선물 작업 역시 도급이라 하여 혹독하게 일을 시키고 있으나 실로 월급을 타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면 회사는 도급제의 양이 다 나오지 않아서 도급제
월급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일용부를 쓰면 노사간의 분쟁도 없을뿐더러 여러 형태로
득을 보는 것이다. 회사는 득을 보게 되지만 노동 조합측으로 보면 조합원의 수효가
줄어들어 노동 조합이 자연히 축소되는 것이다. 일용부는 단 한번만 지각을 해도 월차
수당이 없어진다. 그들은 여성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일용부라는 것 때문에 생리
수당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주40)
불안정 고용의 또 하나의 중요한 형태는 가내 노동이다. 가내 노동은 흔히 하청
노동, 가내 부업이라 불리는 것으로 기혼 여성의 주요한 취업 형태다. 다음 사례는
거의 대부분의 가내 노동자를 대변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전자 조립'이라는 부업 일을 하게 된 것은 결혼 후 첫째 아이를 낳은지
100일이 지나서였다. 그때 내겐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정말이지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들겠다는 위협이 음습해 왔었다. 그러나 전자 조립은 나사 하나 죄는 데 1원 혹은
1원50전, 그것도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밥먹고 치우는 것 빼놓고 아침부터 밤 11시^36,36^12시까지 꼬박 앉아 일해도
하루에 2,000개를 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번 돈이 한달에 4--5 만원 안팎. 그러나 그 돈도 하루 이틀 사이에
어디로 간지 모르게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다. 또 일을 하다 보면 점심을 거르기
일쑤이다. 요것마저 해놓고, 요것만 끝내고 하다보면 어느덧 시장기가 가셔서 밥 맛이
통 돌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에게 밥도 제때 먹이지 못하게 된다. 가끔씩
3살짜리 첫째 아이가 와서 칭얼댈 때도 그것을 돌봐줄 겨를이 없다. 이럴 때는 돈 몇
푼 줘서 보내는게 상책이다.
돈같지도 않은 것 번다고 아이 교육은 그대로 방치되고 몸은 몸대로 망가진다고
생각하면 속상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정말이지 내가 공장다닐 때와 비교해 보면
부업 일은 공장 일보다 더 오랜 시간을 더 열심히 힘들게 일하면서도 훨씬 낮은
임금을 받는다. 이러한 낮은 임금 때문에 공장에서도 이런 부업거리를 자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일 게다. 우리 동네만 해도 많은 아줌마들이 "집에서 놀면 뭐한, 반찬
값이라도 벌어야지 않느냐"는 말에 솔깃해 낮은 단가에, 상여금도 없고 일하다 다쳐도
치료비조차 받지 못하는 부업 일을 너도나도 하고 있다. 기업주들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고, 거기다 중간 매개인까지 끼어서 정말 반찬 값도 안되는 돈을 주고 일을
부려먹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줌마들은 심심풀이가 아니라 아이를 데리고도
집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낮은 단가에도 어쩔 수 없이 부업을 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좁은 방에서 하루종일 구부리고 일하다 보면 눈이 나빠지고
팔다리에 신경통이 생기기도 하는데 마음 같아서는 아줌마들이 집단적으로 몰려가서
단가를 쑥 올려놓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옆집 찬우 엄마가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고 공장에 다니는 것이 무척이나 부럽다.(주41)
이들은 고달픈 공장 노동자조차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의 처지에 있다.
여성개발원이 1989 년에 실시한 가내 노동 실태 조사 역시 이를 보여준다. 서울시의
20개 저소득층 집단 지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 경제 활동 인구의
9.4%가 가내 노동을 하고 있다.(주42)
가내 노동 업무는 단순 반복적이고 기계화되기 어렵거나 기계화가 채산성이 맞지
않는 작업들로서 전체 제품 생산 과정에서 떼어져 나올 수 있고, 또 분리되어도 작업
과정 내용을 통제할 수 있는 공정으로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재봉과 바느질이 많고,
전자 부품과 장신구의 조립에서 마늘 까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여성개발원의 조사에서 전체의 28.9%만이 특정 기술이 필요하다고 답했으며,
71.1%는 별다른 기술이 필요없다고 답했다. 기술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경우의
62.5%가 미싱 기술이었다.
이들이 정식 노동자로 취급되지 않는 데 비해 노동 시간은 공장 노동자의 노동
시간에 육박한다. 즉 이들의 하루 평균 노동 시간은 7.74시간이나 되며, 월 평균 노동
시간이 167.2시간으로 10인 이상 사업체의 기혼 여성 노동자의 월 평균 노동 시간의
67.9%에 달한다. 또 가내 노동자의 3분의 1이 공장에 다니는 기혼 여성만큼, 혹은 그
이상 노동하고 있다.
그런데 전체 가내 노동자의 월 평균 공임액은 10 만 4천 894원으로 제조업부문
고용 기혼 여성 월 평균 임금의 절반 수준인 52.4%에 지나지 않고, 제조업 남성
노동자 월 급여액의 4분의 1(26,2%)밖에 안된다.
이 중 월 10 만원 미만의 수입을 갖는 가내 노동자가 과반수 이상인 60.6%에
이르고 1987 년 제조업 여성 노동자의 월 평균 임금 수준인 20 만원 이상인 경우는
13.7%에 불과하다.
더구나 시간당 임금을 비교해 보면 가내 노동자의 평균 시간당 임금은 627.4원으로
기혼 고용 여성 노동자의 77.7%에 불과하다. 작업 종류 별로는 미싱 일을 하는
경우가 가장 높고 실밥 따기가 가장 낮은데, 마늘 까기는 1시간당 305원으로
최하위다. 그래서 이들 스스로가 아이들 요구르트 값밖에 안된다 하여 '요구르트
벌이', 쥐가 한번에 물어오는 것밖에 안된다 하여 '쥐벌이'라 부른다. 이렇게 낮은
소득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일을 노동으로 여기지 않게 한다.
작업 환경을 보면, 가내 노동자의 93%가 자기 집에서 일을 하고, 나머지도 집이나
집 주위 골목, 일감 집 등 가정 집에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활 공간과 작업
공간을 겸하므로 생활에도 일하기에도 불편하고 비좁다(이들의 45.3%는 단칸방에서
생활하고 있고, 43.6%가 방 2개인 집에서 살고 있다). 게다가 소음, 먼지 및 본드
냄새 등에 거의 아무런 방비가 없다.
안경집 제조의 한 공정으로 본드를 사용하여 철판의 한 면에는 금박지를 붙이고
다른 한 면에는 안감을 붙이는 일을 5 년째 해오고 있다. 주위에서 냄새가 지독하다고
하고, 시동생도 본드가 안 좋으니 하지 말라고 하나 본인은 익숙해져서인지 괜찮다고
생각하며, 다만 어린 아들의 건강에 영향을 줄까봐 걱정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막내 아들(국민 학교 5 학년)에게 하루 3--4시간씩 자기 일을 돕도록 하고
있다.
이런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각종 직업병이 발생하지만, 직업병으로 취급되지 못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취업이 불규칙하다는 점이다. 여성개발원의 조사에서 지난 1
년간 현재의 가내 노동에 줄곧 종사해 온 경우는43.9%고, 1 회 이상의 비취업 기간이
있었던 가내 노동자의 비율은 40.7%,다른 종류의 가내 노동이나 직업(파출부, 행상
등)을 가졌던 경우가 15.4%였다.
그리하여 가내 노동에서 어려운 점을 묻는 질문에 임금이 싸다가 28.6%로 가장
높고, 일거리가 충분치 않고 불규칙하다가 23.2%로 두번째이며, 작업 환경이 나쁘다가
16.2%, 시간 독촉을 받는게 힘들다가 15.5%, 일 자체가 힘들다가 12.6%로 나타났다.
이런 가내 노동에 종사하는 이유를 보면 76.4%가 가사와 병행할 수 있어서라고
답했고, 12.3%가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서라고 답하고 있다. 이에 대해 기업들이
하청을 주는 주된 동기는 비용 절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식 고용 노동자에 비해
임금이 훨씬 싸고 관리 비용과 간접 비용도 적게 들기 때문이다. 1988 년 현재 기업의
노동 비용을 100으로 했을 때, 가내 노동자의 노동 비용은 57%를 밑돈다. 와이셔츠
실밥 따는 공정을 하청주고 있는 한 기업은 가내 노동자에게 일감을 줄 경우, 직접
임금 비용만도 일인당 하루 최고 2,100원에서 최저 1,200원 정도의 임금을 절약할 수
있으며, 여기에 제수당, 상여금, 퇴직금과 복리 후생비 등의 간접 비용이 가내
노동자에게는 일체 들지 않기 때문에 훨씬 싸게 먹힌다고 말한다. 게다가 노동자들의
의식 향상과 노조의 활성화로 인해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가 점점 어려워지는 데 비해
가내 노동자들은 비조직화되고 낮은 기회 비용을 갖는 특성 때문에 지배가 훨씬 쉽다.
집에서 아이들까지 돌보면서 일해야 하니 '모성 보호' 책임도 없고, 일거리가 없으면
그것이 바로 자동 해고이므로 예고도, 해고 수당도, 퇴직금도 필요가 없다. 이들 가내
하청 노동자들은 단결권이나 단체 행동권도 없고, 최저 임금제의 대상에서도 제외되며,
의료 보험 혜택도 보너스도 받을 수 없다. 문자 그대로 '무권리' 상태의 최하층
노동자인 것이다.
기업이 가내 노동을 이용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들고 있는 것은 하청 물량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내 노동은 경기 변동의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가장 손쉽게
직접적으로 떠넘기는 형태다.
가내 노동은 주로 중소 수출 업체로부터 나오며, 이는 다시 종합무역 상사 등
대기업과 하청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수출업체나 공장에는 의례
'외주과'라는 것이 있어 하청을 담당하고 있다. 하청은 공공연한 또 다른 형태의
고용임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가내 노동자는 노동자로 인식되지 않고 노동자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다.
요컨대 가내 하청은 한편으로는 저임금에 기초한 수출 산업의 모순을 최종적으로
전가하는 메카니즘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사 책임을 지고 있고, 정식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상대적 과잉 인구로서의 기혼 여성 노동력을 가장 고율로 착취하는 방식이다.
취업과 실업을 일상적으로 되풀이하는 이러한 가내 노동자의 광범위한 존재는 기혼
여성이 산업 예비군 집단을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과 산업 부문간의 심각한 불균형이 실업과 상대적 과잉 인구의 모순을 한층
심각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자본은 이 모순을 가사와 자녀 양육의 책임을 진
여성들에게 최종적으로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수위의 독점 자본의 성장 이면에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세계 수위의 가혹한
착취가 자리잡고 있다. 세계를 놀라게 한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여성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항상적인 해고의 위협 속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고혈을 짜내는 착취가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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