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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여자

가족

by FraisGout 2020. 4. 28.

가족 관계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다. 생산 관계가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면, 가족 관계는 인간의 종족이 보존되기 위해 
결혼과 자녀 양육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생산 관계가 노동과 그 생산 
수단 및 생산물의 소유와 분배라는 경제적 관계로서, 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하고 
있다면, 가족 관계는 부부와 부모 자식의 애정과 상호 원조에 기초하고 있다.
  애정은 노동과 함께 인류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다. 사랑은 또한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리고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다른 모든 것들이 이를 위해서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주1)
  사랑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다. 남녀간, 부모 자식간의 
애정이야말로 인간의 삶의 조건이자 원동력이고, 다른 모든 관계와 활동의 기초이며, 
인간 자신의 정신과 정서의 궁극적인 토대이다. 그러나 노동과 마찬가지로 애정 역시 
어떤 종류의 이상적인 상태로 존재하거나 혹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애정은 인간 
자신이 그러하듯이 동물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변화 발전해 왔으며, 그 발전은 
인간 자신의 변화 발전이 그렇듯이 모순에 찬 것이다.
  가족 관계는 생물로서의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조건이다. 또 심리학적으로는 
개개인의 심리와 성격, 인격 형성을 결정짓는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조직이다. 어떤 
사회 조직도 가족을 무시하고는 성립될 수 없다. 가족은 문화에 따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며, 가장 기초적인 사회 
조직으로서, 그 위에 다른 사회 관계들이 서는 기반을 이룬다. 가족 관계는 생산 
관계의 영향을 받지만, 가장 기초적인 조직으로서 또한 생산 관게에 영향을 미쳐왔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은 인간이 가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가족 관계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했다. 예를 들면 모성 보호나 착취가 가족을 유지하는 선으로 제한되어야 
하는 것, 여성이 가정을 맡아보는 것도 이러한 적응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가족 관계 역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그 영향은 가족의 형태에서부터 부부와 부모 자식 관계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하다. 거기에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가 모두 들어있다. 이제 자본주의가 가족 관계에 가져온 변화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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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족 이기주의와 가족의 파괴

  자본주의는 가족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작용을 가한다. 하나는 가족을 
사회의 고립된 원자로서 강화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의 인간적 유대를 
파괴하는 것이다.
    * 가족 이기주의
  자본주의 사회의 가족은 재산 상속의 단위이고, 노동력 재생산의 단위이다. 가족은 
여전히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출생부터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 성원이 직업을 
갖는 것, 병이 났을 때 치료를 받는 것, 교육을 받는 것 등등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 각 개인의 책임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이러한 필요들을 충족시키는 기본 단위가 된다. 경쟁을 기본 원리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경쟁의 또 하나의 단위가 되며, 각각의 가정은 다른 가정에 대해 
경쟁 관계에 놓인다. 가족은 사회 성원에게 의식주와 교육과 훈련을 통해 경쟁에 
나서는 무기를 갖추게 하는 곳이다. 이러한 가족 단위의 경쟁이 가족 이기주의의 
기초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자본간, 노동자간, 그리고 자본과 노동자 간의 경쟁이 
치열해진다. 가족은 적대적이고 경쟁적인 사회에 떠있는 섬과도 같은 곳이다. 
노동자들은 가족 밖으로 한 걸음만 내디뎌도 온통 적대적인 힘들에 둘러싸이게 된다. 
사회의 적대성이 발달할수록, 사회와 분리된 사적인 공간, 피난처로서의 가족의 성격도 
강화된다. 여성들은 경쟁의 단위인 가족에서 남편과 자식들이 경쟁에서 최소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원을 갖춰주고 무기를 챙겨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러한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현모양처이다. 노동자 계급 내에서 가족 
이기주의가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상층 노동자들의 경우다. 이는 소수의 
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와 지위를 얻기 위해 경쟁이 특히 
치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서 특히 가족의 
뒷받침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높은 교육을 받은 전문 기술, 사무직 
노동자들을 공급받기 위해 이들 상층 노동자들에게 가족 임금을 주어 여성들이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전념할 수 있고, 자식을 대학까지 가르칠 수 있는 정도의 임금을 
지급하므로, 가족 단위가 유지되고 강화될 물적인 기초도 상대적으로 다른 노동자들에 
비하면 튼튼한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도 가정을 파괴하는 다음의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 가족의 파괴
  경제적 단위로서의 가족은 강화되지만 인간적 관계로서의 가족은 파괴되고 있다. 
많은 노동자 가족이 자본의 탐욕스런 이윤 추구로 인한 저임금, 장시간 노동, 산업 
재해로 뿔뿔이 흩어지고 서로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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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진달래가 피고 뻐꾹새가 울 때면
  더욱 생각나는 형
  고등학교를 마치고
  돈을 벌겠다고 집을 떠난 형
  고인 눈물에 못이겨
  잘가라는 인사도 못한 나
  구차한 집안 살림을
  조금이라도 덜겠다고 나간 형은
  왜 아직 소식이 없나.
  눈보라와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고
  다시 진달래가 피고 뻐꾹새가 울도록
  건너편 먼 정거장엔
  무수히 많은 차들이 있건만
  형을 태운 버스는
  왜 하나도 없는가?(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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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혼 일기

  길고 긴 일주일의 노동 끝에
  언 가슨 웅크리며
  찬 새벽길 더듬어
  방안을 들어서면
  아내는 벌써 공장 나가고 없다.

  지난 일주일의 노동,
  기인 이별에 한숨지며
  쓴 담배 연기 어지러이 내어뿜으며
  바삐 팽겨쳐진 아내의 잠옷을 집어들면
  혼자서 밤들을 지낸 외로운 아내 내음에
  눈물이 난다.(주3)

  연애할 때나 신혼 초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직장일이 바빠지면서 아주 
집에서는 말문을 닫아버렸어요. 왜 그러냐고 따지고 들면 종일 사람에 시달려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말을 또 하라는 거냐며 버럭 성을 내곤 해요. 살을 맞대고 사는 
남편이지만 대화할 시간이 없어요. 쉬는 날은 어떤지 아세요. 피곤하다면서 문 걸어 
잠그고 종일 잠만 자는 거^36^예요.(주4)

  얼마 안되는 돈 번다고 애들이랑은 많이 떨어져 살았지요. 결혼해서 연년생으로 애 
둘 낳고 잠시 집에 있다가 큰 애 두 살 때부터 큰 애는 시골 친정에 보내고, 작은 
애는 서울 고모댁에 맡기고는 전자 공장에 1 년 반 다녔어요. 그러다가 안되겠다 싶어 
직장 그만두고 애들 데려다가 한 두 달 집에 있었더니 더 불안해져요. 그래서 
형제지간만이라도 같이 지내야지 싶어서 둘을 다 시골 친정에 보내고 A 식료품에 
다녔죠.(주5)

  아기(5세)를 평택의 시댁에 맡겨놓고 회사 생활을 하고 있죠. 한 달에 한번씩 가서 
아기를 보고 오는데 아기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파요. 엄마가 못 돌봐줘서 그렇고, 또 
혼자 떨어져 있으니 눈치만 늘어가는 것 같아서요. 야근을 하고 들어와서 잠을 자도 
아기 생각에 잠도 잘 못자고.(주6)

  나는 배가 고프다!
  한 달 500시간 이상 일을 해야 겨우 삼십만원 정도의 임금으로 하루 한 두 시간 
잠자는 아들 딸들의 모습만을 보기에는 너무나 배가 고프다.(주7)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노동자 가족의 실상이다. 끝없는 경쟁의 톱니바퀴에 
물려 있는 노동자들에게 이 사회가 부여하는 노동의 주된 동기는 가족의 생활 
향상이다. 그러나 가족의 생활 향상을 위한 노동에 의해 가족은 파괴된다. 자식들을 
잘 가르치고 훌륭히 키우기 위해 부모는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잔업, 특근을 밥먹듯 
한다. 자식들은 부모의 부담을 덜어주고 동생이라도 가르치려고 일찌감치 공장에 
간다. 그리하여 가족은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얼굴조차 잘 볼 수 없게 된다. 먹고 사는 
것, 혹은 평균적인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위해서 가정 생활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자식들은 부모, 특히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쌓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 남편과 아내는 소원해지고, 각자 뿔뿔이 살아간다. 그리하여 휴전선 철책으로 
가로막힌 것도 아닌데, 이산 가족이 되는 부모와 자식일 늘고 한 집에 살아도 
남남같이 느끼는 부부가 늘어간다.
  이러한 가족적 유대의 붕괴는 현대인들의 정서적 불안의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다. 어린이의 성장에는 밥만큼이나 부모의 애정과 가족 간의 친밀한 관계가 
필수적이다. 사랑이 결핍된 아이들은 정신적, 정서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신체적으로도 
잘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 연구가 보여주고 있다. 산업화와 함께 늘어가는 청소년 
범죄는 가정의 파괴와 깊은 관계가 있다. 또한 성인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조화롭고 애정에 찬 가정 생활은 정서적, 정신적 안정에 매우 중요하다. 가정 생활의 
파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치루는 가장 심각한 희생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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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결혼

    1) 사고 파는 결혼
    * 사랑할 권리
  자본주의가 가져온 '자유'는 결혼에도 커다란 발자국을 찍었다. 봉건 시대까지 신분 
사회의 결혼은 일차적으로 신분에 의해 규제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신분을 
폐지함과 동시에 결혼을 신분간의 결혼이 아니라, 신분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결혼으로 만들었다. 신분적 제약은 봉건 시대까지 남녀간의 사랑을 가로막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는 신분이 다른 남녀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용이와 월선이의 한맺힌 사랑 이야기는 용이는 평민인데 
월선이는 무당 딸이라는 천한 신분이라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서로 신분이 다른 
남녀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결혼에 
대한 신분적 규제는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을 억압하였으며, 때때로 사람들은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걸거나 사회 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억압에 저항하였다.
  또 하나의 변화는 결혼에서 부모의 의사보다 당사자의 의식이 우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신분 사회에서 재산과 신분의 소유자이고 장차 자식에게 이를 물려줄 사람인 
아버지는 가부장으로서 자식에 대해 거의 무제한의 권리를 가졌으며, 그 가장 중요한 
권리의 하나로서, 자식의 혼인에 대한 결정권을 가졌다. 결혼이 신분의 상속과 유지의 
수단인 한, 그 일차적인 고려 조건인 신분인 한, 당사자의 감정은 부차적일 뿐 아니라, 
흔히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가부장권의 약화를 가져왔고, 결혼은 부모에 의한 강제에서 
해방되었다. 연애 결혼이 인권으로서 선포되었다. 이제 결혼은 자유롭고 평등한 두 
당사자간의 자유로운 계약이 되었고 이 계약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호간의 
애정이라고 선언되었다. 애정이 없는 결혼은(그전에는 오히려 일반적인 
것이었던)비도덕적인 것이 되었고, 언제든지 자유롭게 폐기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진보가 갖는 의미는 엄청난 것이다. 자유 연애를 인간의 자연적인 권리로 
회복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억압, 가장 중요한 불행의 근원의 하나가 
폐지된 것이다.
    * 너무 높은 목표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자유가 그렇듯이 결혼의 자유에도 함정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신분 제도와 부모의 강제 대신 금전적인 고려를 대치시켰기 
때문이다.
  결혼에 있어 경제적 조건은 한편으로는 매우 동물적이고 자연적인 선택 조건이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이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데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녀의 양육을 예비하는 결혼에 있어서 한 가족을 영위할 만한 경제적 
능력(생활, 노동 능력)의 유무야말로 기본적인 고려 조건이다. 생활할 능력도 없이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무책임하고 방종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고려가 이러한 자연적인 조건을 넘어선 것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더이상 자연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않다. 경제적 조건이 흔히 그에게 
합당한 것 이상의 지나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조건이 우리 사회에서 사랑과 결혼을 결정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예로 혼수 문제를 들수 있다.

  서울 논현동에 사는 H양은 중매로 군의관인 K씨를 만나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중매장이는 남자 집안에서 지참금으로 1억 이상을 바란다는 말을 전해 왔다. 개업해 
줄 돈을 미리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신랑은 전주에서 의대를 나오고 부여군에서 일하는 의사다. 신부는 대학 무용과를 
나온 미모의 여성. 중매를 통해 만난 이들은 추석을 쇤 후 결혼하기로 하고 지난 1월 
약혼했다. 신부 어머니는 "아파트와 승용차를 사주고 전체 혼수 비용으로 3억 원을 
들이겠다. 장차 병원도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약혼 기간 중 신랑이 
자동차를 새로 사서 타고 다녔다. 그러나 신부 집에서 이 자동차 값을 안주고 모른척 
하자 신랑이 어느 날 "결혼 안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나중에 속셈을 알아 보니, 
"아파트 승용차를 주고 병원도 차려주겠다는 약속을 결혼 후 지켜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 때문에 미리 3억 원 어치 혼수를 확보해 두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신부 어머니는 "이런 식으로 결혼을 시켜야 하느냐"며 혼란에 빠져 있다.(주8)

  얼마 전에는 3천만원 어치의 예단이 적다고 장인 장모를 폭행한 의사 사위가 
있었는가 하면 아파트를 마련하지 못해 결혼을 못한 아들과 그 아버지가 연이어 목을 
매 자살한 사건도 일어났다. 경제적 조건은 가장 일차적인 중매 조건이다. 다음은 
경찰이 단속 때 압수한 소위 마담 뚜들의 수첩에 적혀있는 신랑 신부 후보들의 신상 
명세서의 일부이다.

  ^456,356,356,356,123^ (여)
  25세. 9월 13일 신시생
  부친, 김^456,356,356,123^씨. 의성 김씨 서울 ^456,356,356,123^대에서 박사 학위 
취득, 현재 ^456,356,356,123^대 교수
  어머니는 약국 경영, 작은 이모는 ^456,356,356,123^대 교수, 큰 이모는 종합 병원 
외과 과장
  자기 앞으로 40 평짜리 아파트가 준비돼 있음.
  모 대학 치대 재학중.(주9)

  일간 신문의 광고란에는 "결혼 상담소"라는 고정란이 있는데, 이런 광고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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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은행

  남. 외교관 30 대 재혼.
  남. 29세 행시합격자.
  20 대 상속녀. 직장 확실한 남자 원함.

  실제로 결혼에 있어서 일차적인 고려 조건이 애정이 아니라 금전적인 요인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애정은 이 일차적인 고려가 끝난 후의 이차적인 조건일 뿐이다. 
먼저 조건이 적합한 사람을 골라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자유 연애의 한계'이고 '사랑이 꽃피는 사회'의 실상이다. 누가 그렇게 하도록 
강제하고 있지 않지만, 자본가 계급은 자본가 계급과 결혼하며, 노동자 계급은 노동자 
계급과 결혼한다. 재벌과 정치계, 법조계, 군, 관료들 사이에 혼맥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결혼은 이들이 세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노태우: 장남 재헌, 동방 유량 신명수 회장 장녀 신정화. 장녀 소영, 최종현 
성경그룹회장 장남 최태원
  김복동: 장녀 미희, 강성진 증권 협회장 차남 흥구
  노신영: 장남, 정세영 현대 그룹 회장 장녀. 차남, 고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 막내 딸.
  김우중: 김준성 전 부총리
  정주영: 신한 해운
  정몽준: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 딸 영명

  결혼은 자유로운 상품 교환이 되고 있다. 결혼이라는 상품 교화에서도 역시 등가 
교환의 법칙이 관철된다. 혼기가 된 남자와 여자는 결혼 시장에서 자신의 상품 가치를 
표시한 레테르를 붙이고 보다 나은 값에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상품이 된다. 그리하여 
각자 제 값에 팔려간다. 자본가 계급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은 노동자 계급과 
결혼한다.
  등가 교환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상품 교환으로서의 결혼에 있어서 '자유 연애'란 
기껏해야 이 상품 교환의 장식물, 상품의 포장지에 붙여진 셀로판지로 된 종이꽃에 
지나지 않으며, 최선의 경우에는 공정한 거래를 더욱더 빛나게 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며, 보다 나쁜 경우에는 '공정한' 거래를 방해하는 장애물로서 쓰레기통에나 처박힐 
운명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운명은 우리나라가 자본주의화되기 시작한 
초기부터 싹텄다. '자유 연애'는 그것이 시작되자마자 배신을 당했다. '이수일과 
심순애'가 만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돈에 배신당하는 
사랑'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중요한 이 시대의 사랑의 테마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둔 돈은 마침내 인간의 가장 자연적이고 인간적이며 
내면적인 감정에 대해서까지도 승리를 거둔다. 사회적 관계만이 아니라, 사적인 
관계에서까지, 생산을 둘러싼 관계만이 아니라, 가족 관계에서도 돈은 챔피언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전제했을 때 인간은 
사랑을 사랑으로만 교환하고 신뢰를 신뢰로만 교환할 수 있다. 또 만약 예술을 
즐기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이 예술적 교양을 갖춘 인간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다면, 다른 사람에게 자극과 격려를 실제로 주어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모든 관계는 자신의 
현실적인 개인적 삶을 그 의지의 대상에 따라 특수하게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사랑의 감정도 없이 사랑한다면, 즉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삶을 표현함으로써 
스스로가 사랑받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며 결과는 불행을 
초래할 뿐이다.(주10)

  그러나 전능한 신, 돈은 사랑마저도 살 수 있는 능력을 그 소유자에게 부여한다. 
그가 설사 인격적으로 천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돈은 그를 귀한 인간으로 만든다. 그가 
설사 사랑할 능력이 없으며, 사랑받을 만하지 못하더라도, 돈은 그에게 사랑할 능력을 
부여하며, 사랑받을 수 있게 한다. 그가 못생겼더라도 돈은 그 단점을 가려준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부인을 사들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돈이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고귀한 인간이더라도 그는 천한 인간이 된다. 그가 누군가를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더라도 돈이 없는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 된다.
  돈에 배신당하는 사랑은 두 가지의 또 다른 현상을 낳고 있는데, 그 하나는 연애와 
결혼은 별개의 문제라는 경향이다. 이는 냉혹한 타산에 의해 지배되는 결혼에 대한 
보상으로 나왔다. 그러나 "사과의 반 쪽을 먹어버린 뒤에 온전한 사과를 가질 수 없는 
것처럼" 결혼과 분리된 연애가 온전한 것일 수는 없다. 연애를 결혼과 분리하는 그 
순간부터 연애 역시 타산적인 것이 된다. 그 사랑은 이기적이고 순간적이고 
피상적이며, 서로 책임지지 않는 것이 된다. 현대의 대중 가요의 대부분이 순간적이고 
퇴폐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요는 병뿐 아니라 약도 주는데, 
순간적인 사랑의 상처를 막기 위해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는 처방도 해준다.
  또 하나의 현상은 수단으로서의 애정이다. 인간이 수단이 되고, 결혼이 거래가 되면, 
애정도 거래를 위한 수단이 된다. 자본주의 자유의 진가가 구두닦이에게 재벌의 꿈을 
심어주는 데 있듯이, 자본주의적 자유 연애의 진가는 애정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신데렐라의 꿈, 혹은 재벌 사위가 되는 엘리트 사원의 꿈을 심어주는 데 있다.
  결혼이 이렇게 매음이 되는 것은 자본가 계급에게 전형적이다. 자본가 계급에 
있어서는 거의 노골적으로 금전적 고려가 애정에 우선하며, 흔히 당사자의 의사보다는 
아버지(재산을 소유한)의 의사가 우선한다.
  그러나 경제적 요인이 지나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부자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다. 
노동자들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부자들에 있어서는 부가 그들의 자유를 
가로막는다면 노동자들에 있어서는 궁핍이 그 자유를 가로막는다. 이들에게 경제적인 
조건은 곧장 먹고 사는 생활의 문제다. 가족의 최저 생계비에 훨씬 못미치는 생산직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은 이들을 결혼 상대자로 적합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생산직 여성 노동자들은 "넥타이 매고 일하는 신랑"을 얻는 것이 소망이다. 인천 여성 
노동자회가 1989 년 12월 인천 지역 전자 산업 중 민주 노조가 있는 사업장의 여성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결혼 상대자로 남성 노동자를 택하지 않겠다에 
찬성이 46%, 반대가 54%로 나타났다.
  * 신랑감 제일 조건 학벌인가?
  그렇다. 이 사회에서 학벌은 곧 경제력으로 통하고, 인정받는 직장을 얻으려면 전문 
대학이라도 나와야 하기 때문에 다소 인간성이 떨어져도 학벌이 좋은 편이 결혼 
상대자로는 낫다고 본다. 결혼은 현실이지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하려면 인간성만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안정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밥만 굶지 않으면 최고이던 옛날과 달리 인간답게 살려면 문화 생활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보는데 이 역시 경제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더구나 생활이 궁핍하면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내기 마련이고 부부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그런 가정에서는 
자녀 교육도 원만히 이루어지기 어렵다. 궁핍한 가정에서 아웅다웅하며 자라는 
아이보다야 여유있는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가 성격도 좋고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경제력의 문제는 맞벌이하면 되는 것이고, 직장 생활을 계속해야 자기 발전도 
된다고 하는데 기혼 여성 노동자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임신·출산에 따른 
작업량의 부담은 고사하고 아이를 낳으면 당장 맡길 곳도 마땅하지 않고, 탁아소에 
맡긴다 해도 아이 키우며 집안 일, 공장 일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한다. 결혼해서까지 
고생스럽게 사는 것을 바라는 여성 노동자가 어디 있겠는가.(주11)

  이런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이 농촌 총각의 결혼난이다. 농업의 피폐로 
농촌 총각은 가장 부적당한 결혼 상대자가 되었다. 대도시에는 젊은 매춘 여성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지만, 농촌에는 젊은 처녀가 없다. 상대적 빈곤은 인간의 조건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 결혼을 못해 비관 자살하는 농촌 총각이나 돈을 위해 스스로를 
망치는 매춘 여성은 그 대표적인 희생자다. 자본주의는 사랑의 싹을 틔웠지만, 그것은 
미처 피기도 전에 시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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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적 상황들의 불확실성에 관하여

  폴리
  내가 바라는 것, 그건 너무 많은가요?
  우울한 인생 중에 한번쯤
  한 남자에게 나를 바치는 것
  그것은 너무 높은 목표일까요?
  피첨(성경을 두 손에 들고)
  그건 이 세상 인간의 권리란다.
  잠깐 왔다 가는 인생이기에 행복하고
  세상 모든 즐거움을 나눠 갖고
  돌덩이가 아니라 빵을 먹는 것은.
  그건 이 세상 인간의 적나라한 권리란다.
  그렇지만 누군가 자기 권리를 또한 찾았다는 말
  그 말은 슬프게도 아직 아무도 못들었지, 아, 어디에 그런일이
  누가 한 번 권리를 찾고 싶지 않겠니
  하지만 상황이, 그게 그렇질 않단다.(주12)
    2) 신데렐라 콤플렉스
  자본주의 사회의 결혼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여성에게 결혼이 생존 
수단이라는 점이다. 속된 말로 결혼을 영구 취직이라고 하는데, 결혼을 함으로써 
여성이 먹고 살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엥겔스는 결혼이 보다 더 흔하게 
여자쪽의 매음이 된다고 말했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재투성이인 부엌에서 먹고 자야 할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놓여 있었다. 백설 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백조의 호수의 
오데뜨 공주 등도 한결같이 비참한 처지나 곤경에 빠졌다. 가사 상태에 빠지거나 
마술에 걸려 인간으로 살 수가 없었다.
  오늘날 노동자 계급의 여성들은 매우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녀들의 대부분은 
"남자에 한함"이라는 마법에 걸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인간답게 살 수가 없다. 
그녀를 이 견디기 힘든 비참함과 마법에서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백마의 
기사"뿐이다. 결혼을 주요한 소재로 삼았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제인 오스킨 시대에 젠트리 계급의 여성이 적입을 선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혼이란 교양은 있되 재산이 얼마되지 않는 여성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명예로운 대책이었다. 그러한 결혼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는 확실치 않다 할지라도, 
빈곤을 면하려면 여성들이 가장 기꺼이 바라는 보장된 길인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오스틴의 소설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선택할 경우 상당히 합리적인 배려를 하고 
있다. 낭만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것이 혐오스럽다 할지라도, 생존에 관심을 갖는 
이상 여자에게는 필요한 것이었다. 오스틴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오늘날의 
여성들이 대학을 선택할 때와 마찬가지로 남편을 선택하고 있다.(주13)

  신데렐라에게 결혼은 현실로부터의 구원이며 피난처다. 여자는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려고 싸우는 대신 참으면서 기다린다. 자신을 이 비참함에서 구제해 줄 
누군가를. 그는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악취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용감히 쳐부수고, 
그녀를 구출할 것이다. 그리고 왕자의 성으로 가서 공주는 이제 더 이상 현실의 
무시무시한 적들과 맞서 싸우지 않아도 되고, 먹고 사는 것, 그 절박한 고생스러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곱게 치장하고 왕자를 위해 된장찌개를 끓일 것이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 오직 이것만이 고즈넉한 성의 고요를 꺨 것이다. 
그녀의 전부를 안아주기에 넉넉한 남자의 가슴에 그녀는 자기를 떠맡겨버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결혼에 인생을 걸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대신 남자가 자신을 
떠맡아 주기를 기대하는 것,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한 남자의 품으로 
도망가고자 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수많은 여성들이 앓고 있는 신데렐라 증후군이다. 
금전 결혼이 자본가 계급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면 신데렐라 컴프렉스는 쁘띠 
부르주아, 혹은 상층 노동자들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왕자는 어떤가?
  왕자는 신데렐라를 보자마자 "첫 눈에 반해 버렸다." 죽은 백설 공주에게도, 잠자고 
있던 공주에게도, 밤에만 춤을 추던 오데뜨에게도, 상사병이 나도록 반해 버렸다. 
공주는 매우 비참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힘으로는 그런 비참함을 뚫고 
나올 수 없었다. 왕자는 죽은 백설 공주와, 잠자는 공주와 말 한마디 할 새도 없었다. 
그러나 왕자는 공주에게 반해 버렸다. 왕자는 공주의 무엇에 반했을까?
  왕자가 공주에게 반한 것은 그녀의 미모 때문이다. 왕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과 
대등한 (아니 어떻게 그럴수가!) 한 인간이거나, 그녀의 내면 세계, 그녀의 능력, 그 
어느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녀의 비참함과 그녀의 외모였다. 왕자의 백마와 힘셈과 
용기가 그러했듯이 공주의 비참함(열등함)과 아름다움이 '사랑의 조건'이 된다.

  나는 신부감의 제일 조건으로 외모를 친다. 왜냐하면 여자는 뭐니뭐니 해도 얼굴이 
이뻐야 하기 때문이다. 흔히 여자는 꽃, 남자는 나비로 비유하는데 이는 여자가 주로 
남자에 의해 선택되고 사랑받으며 가정의 분위기를 밝게 가꾸는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자가 악세사리냐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회가 
대체적으로 그러니 어쩔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이쁜 것은 좋은 것, 미운 것은 나쁜 것이라는 사회 통념에 따라 여자는 
이뻐야 하고 이쁜 여자가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이쁜 여자를 얻는 
남자는 능력있다는 소리를 듣고, 어쩌다 부부 동반이라도 있어 함께 나갈 경우 남자 
체면도 서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얼굴만 이쁘면 됐지 능력있고 똑똑해봤자 남자 
알기 우습게 알고 따지기도 잘해 골치만 아프다. 좀 생각이 모자라고 마음이 잘 
안맞는다 해도 살다 보면 여자는 남자를 따라오게 되어 있고 차츰 맞추면서 살 수도 
있는 것이니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주14)

  여자가 자신과 대등하면 골치만 아프다.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그 외모, 장식적 
가치, 악세사리로서이지, 하나의 인격, 그것도 자신과 평등한 인격으로서는 결코(!) 
아니다. 여자의 인격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여자의 인간적 특성들은 골치 
아픈 문제를 야기할 뿐이다. 물건이 그렇듯이 여자도 자기 자신을 갖지 않는다. 
물건이 그렇듯이 여자도 그 소유자를 따라 오게 되어 잇다. 왕자에게 공주는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소유물과 같은 것이다. 그녀는 남자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과 마찬가지로 그가 '차지'하고 '정복'하고, 그럼으로써 남자로서의 위신을 완성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단, 필수품이다.
  만화나 영화, TV 드라마 등 현대의 대중 문화 매체들은 이런 남녀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현세의 출세적 '외인구단'의 엄지와 까치가 그렇다. 엄지에게는 
자신의 생이나 목표가 없다. 두 남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그녀의 
삶의 줄거리이다. 그녀의 사랑은 수컷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암사슴처럼 승자를 향해서 
끊임없이 동요한다. 그런데 이런 엄지를 까치는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까치의 사랑 속에서 순수한 헌신보다는 
광적인 집착과 소유욕을 본다. 그 소유욕은 너무나 커서 심지어는 정말로 엄지를 위해 
희생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희생이란 다른 형태의 소유다. 이런 집착은 상대와의 
조화를 추구하는 진실한 애정이 아니라, 그의 세상과 다른 모든 인간들과의 관계, 
소유와 승부욕의 집약적인 표현이다. 그에게 엄지는 정복해야 할 최후의 땅일 뿐이다. 
이 땅을 정복하는 데에 적용되는 논리는 양육강식이다.
  여성이 결혼 없이는 비참함과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의지가지 없는 
신세인 한, 남자가 여자에게서 단지 미모만을 취하려고 하는 것, 여자를 소유물로 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이 둘은 완벽한 한 쌍을 이루고 있다. 남자가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것에 반한 여자와, 여자가 자신보다 열등하다는 것에 마음이 놓이고 득의 양양한 남자. 
남자에게 자신을 온통 맡겨버린 여자와 여자를 소유물로 여기는 남자. 미모 외에 
아무런 생존 능력이 없는 여자와 다른 무엇보다 공주의 미모만을 중시하는 남자. 
동화책은 이렇게 끝난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만약 이들이 정말 행복하다면 그 관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완벽한 한 쌍조차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들의 성을 들여다 본 어떤 
사람은 이렇게 알려왔다. "왕자는 공주를 돌보느라 지쳐서 심장 마비에 걸리고, 공주는 
대리 인생을 사느라 우울증에 걸려서 각성제를 복용하고 있었다."(주15)
  현실의 신데렐라들은 불행히도 그 성이 모래성이었음을 발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척박한 모래성에서는 아름다운 꽃들은 피어나지 못하고 가시덤불만 자라난다. 
게다가 현실 생활의 자그마한 위협에도 이 모래성은 흔들리고 금이 가고 구멍이 
뚫리고 허물어진다.
  이 성을 모래성으로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이성이 사랑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이해 타산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함정은 바로 그들의 
사랑 그 자체에 있다. 공평하고 다행스럽게도(그러나 우리의 돈바라기 남자들과 
신데렐라에게는 불행하게도)진정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의 반대급부로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돈에 대한 사랑이지, 그 자신에 대한 사랑은 
아닌 것이다.
  뿐만 아니다. 현실의 왕자는 대개의 경우 임금 노동자에 불과하다. 현실의 왕자는 
백마 대신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게다가 공주는 불로초를 구하지 못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왕자와 아이 둘을 낳고 배가 축 처진 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게다가 왕자는 공주가 그를 통해서 대리 만족을 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도 우월하지도 않다.
  J. 버너드의 연구에 따르면 기혼 여성이 결혼으로 인해 갈등을 겪는 첫번째 요인은 
결혼 후 남성에 대한 기대와 실제 사이의 불일치를 겪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즉 
여성들은 남성에 대한 고정 관념에서 나오는 높은 기대를 거는데, 남편이 기대한 만큼 
강하지도 우월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충격을 받고 남편에 대해 환멸을 
느낀다는 것이다.
  남편이 모든 면에서 자신을 이끌어 주고, 자기 대신 험한 세상을 헤쳐 줄 것이라는 
기대는 결혼과 함께 헛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남자의 우월성이란 이 사회가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데서 오는 사회 경제적인 지위의 우월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돈이 많다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것과 인격이 훌륭하고 남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흔히 상반된다. 게다가 남편의 사회 
경제적 우월성조차도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점점 더 취약한 것이 되고 있다. 가련한 
임금 노동자인 남편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그리 확고하지 못하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을 책임질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여자는 마음 놓고 내디딘 발걸음이 
벼랑 끝이었음을 발견하고 당황하고 불안과 절망에 빠지는 것이다.
  한편 남자들 역시 가부장적 관념과 아내의 기대와, 가족을 부양하는 것조차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은 것으로 만드는 현실 사이에서 모순에 처한다. 우월해야 
한다, 혹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아내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관념과 
그렇지 못한 현실 사이에서 좌절과 낭패를 맛본다. 게다가 남자들도 변하고 있는 
세상과 함께(그보다 좀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변하고 있다. "나 하나만 믿어 온 
당신"보다는 "독립적이고 진취적이며 자기 일을 가진 여성"을 좋아하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남자들 중에서도 여자와 평등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보조자나 시중꾼보다는 
진정한 상호 협력자, 동반자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또 설사 평등하기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자기 혼자서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짐을 
나누어 지기를 바라는 남자들이 늘고 잇다. 이런 남자들은 가정 내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신데렐라는 자신의 의존심을 왕자가 언제나 받아주리라고 생각해 
왔다. 무기력하면서 얼굴만 예쁜 신데렐라뿐 아니라, 유능하고 어느 정도 자기 영역을 
개척한 여성들조차도 그런 유혹을 받고 있다. 신데렐라는 자신이 일을 그만두는 것을 
왕자가 싫어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데렐라가 성 안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며 살고 싶다고 했을 때 왕자는 어떻게 했을까?(주16)

  코머셜 아티스트인 로이스는 게일리와 함께 생활하게 된 이후부터 갑자기 어깨의 
짐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유롭게 살아 나가기 위하여 얼마나 이를 악물고 
살아왔던 것일까 하고 스스로도 놀랍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쨌든 젊은 시절 양친 곁을 
떠난 이래 생활비를 함께 벌어줄 사람과 지낸다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가령 
자기의 수입이 없더라도 먹고 사는 데 불편을 느끼지 않을 입장이 된 것도 역시 
이것이 처음이었다. 로이스는 게일리의 집에서도 자기의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그러나 
거기서 지내는 시간은 세월이 흐르는 데 따라 차츰 줄어들었다. 그대신 집안에서 
서성거리거나 게일리를 위해 정성이 담긴 요리를 만들면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정력적인 작업 습관으로 길든 과거의 그녀의 모습은 이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몇 개월이 지나자 로이스는 완전히 일을 중단해 버리고 온종일 책을 보거나 뜰의 
야채 밭을 돌보며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따금 어렴풋이 다시 한번 미술 학교에 
들어가 그림을 공부하고 화가가 되어 볼까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이스가 이와 같이 가정적으로 되어 가는 데 따라 게일리의 사랑은 
식어갔다. 그녀는 이미 과거 그를 열중케 했던 자유롭고 진취적인 여성이 아니었다. 
자기는 이 사람의 패트런이 되기 위하여, 또는 그녀의 일의 대용품이 되기 위하여 
함께 살고 있는 것은 아닌데 하고 생각했다. 결국 게일리는 속은 듯한 기분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이전의 그녀에게 있어서 일은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톰이라는 믿음직한 
남편을 얻은 지금은 그만두지 못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일에 대하여 이전과 같은 의욕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매일 아침 출근해야 
한다는 중압감과 무거운 책임에도 지쳐 있었다. 그녀는 톰에게 당분간 일을 쉬고 집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톰은 몹시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집에서 
단 한 사람의 일꾼이 되고 싶지는 않아. 일은 계속하지 않으면 안돼요."

  다이나를 좋아하게 된 것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매우 견실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래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마음이 들지 
어떨지, 어쨌든 1 년 정도만 함께 살아보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미용실을 
갖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우리는 근사한 
아파트를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래 그녀는 완전히 달라졌던 것입니다. 
이전의 그녀는 일주일에 서너번은 밤에도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아파트를 산 
뒤로는 전혀 일하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나의 저녁 식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중 자기가 근무하는 가게 주인의 험담을 이것저것 늘어놓는가 
햇더니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둔 겁니다. 요즈음은 빨리 결혼해 달라고 졸라댑니다. 
그리고 자기는 지금 일도 하지 않으면서 내가 설거지라든가 청소를 도와주지 않으면 
"남존 여비 사상"이라고 화를 냅니다. 결국 그녀는 무엇이든 보살펴 주기를 원하는 
아기와 다 큰 여자의 양쪽 자리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됩니다. 
저쪽은 좋은 면만을 취하고 나는 항상 최저의 역할을 맡을 뿐이지요.

  여자가 결혼으로 일생의 승부를 걸던 시기가 지나가고 있다. 그것은 물론 주체적인 
여성들 자신의 성장에 근본적으로 달려 있지만, 세상이 여성들로 하여금 주체적으로 
살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이제는 외모를 가꾸면서 참고 기다리는 대신, 
자기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문제는 단지 경제적인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사랑의 부조화에 있다.
  신데렐라들은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식으로 배워왔다. 유능한 여성들조차 일에 
자신을 쏟기보다는 결혼하기 전에 잠시 거쳐가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진정한 흥미를 
갖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첫 결혼에 실패한 한 인기 정상의 연예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기인으로서 인기얻고 사는 것도 기쁨은 있었지만 제겐 그 당시엔 일에 
대한 욕심이나 애착이 정말 없었어요. 여자의 행복이란 좋은 남자 만나 가정 꾸미는 
그 이상의 것은 없다는 생각이 확고했었거든요. 여자에게 있어서 '일'이란 건 '사랑'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 여겼어요." 그러나 반대로 남자들은 남자에게 사랑이란 
일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 배운다. 결과는 무엇인가? 서로 기대 수준이 
엄청나게 어긋나는 것이다. 남편과의 관계에 인생을 걸고 있는 여자와, 자기 삶에서 
짜투리만을 여자를 위해 남겨두고 아내를 자기 생활의 작은 공백을 메우는 수단쯤으로 
생각하는 남편. 결혼에 대한 기대에 가득차 있던 여자는 신혼 초부터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남자들은 자기 좋을 대로 움직일 줄 알았던 여자들이 
이것저것 요구를 하자 "잘못 걸렸다"고 생각한다. 결혼 생활이 삐끄덕거리는 것은 
당연하다. 결혼은 행복의 문이 아니라 갈등과 부조화에 찬 '지옥의 문'이 된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이해가 안가는' 존재가 된다.
    3) 가부장적 가족 관계
    (1) 가부장제의 기초
  자본주의 핵가족을 보편적인 가족 형태로 확립함으로써 전통적인 가부장권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봉건 시대에는 노동의 단위가 
가족이었으므로 주된 가족 형태는 대가족이었고, 남성이 지배하는 부계 사회에서 이 
대가족은 부권의 토대였다. 그러나 기계제 대공업은 노동자를 개별로 파악한다. 
노동자는 가족을 단위로 해서가 아니라, 각 개인별로 자본과 계약을 맺는다. 이에 따라 
가족은 종족의 번식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필요한 최소 단위로 축소되었다. 부부와 
부모의 양육과 보호가 필요한 미혼의 자녀들만이 이 가족에 속한다. 핵가족이 
성립함으로써 이제 결혼하는 남녀는 '장가'를 가거나 '시집'을 가지 않고, 각자 부모를 
떠나 독자적인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그 의의는 획기적인 것이다. 가부장제의 가장 
큰 기초의 하나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여자가 남자의 가계에 편입되는 결혼, 
시아버지에서 며느리까지의 위계적 가족 관계는 붕괴된다. 여자는 물론 남자도 자신과 
상대방의 가문, 가계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일 수 있게 되었다. 결혼은 가문이나 가업, 
가산의 유지 보존으로부터 훨씬 더 자유롭게 되었다.
  또한 자본주의는 전통적인 성별 분업을 폐지함으로써 가부장적인 가족 관계를 
붕괴시킨다. 자본주의는 여성을 사회적 노동에, 남성을 가사 노동에 참여시킴으로써 
가족 내에서의 남녀 평등의 기초를 점점 확대시키고 있다.
  그러나 또한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완전히 폐지하지 않는다 가부장제는 각 
계급마다 서로 다른 기초 위에서 재생산되고 있다.
  가족 관계의 내용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에서 판이하게 다르다. 핵가족이 
전형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에서다. 자본가 계급에서는 재산의 상속이 
부모로부터 자식의 독립을 해치고 있다. 유산 계급은 노동자 계급보다 훨씬 더 자식이 
부모, 특히 아버지에게 종속되어 있으며, 핵가족의 성립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후에도 
부모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다.(주17)
  뿐만 아니라 자본가 계급의 가족은 성별 분업이 보다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 이 
성별 분업은 재산 소유의 불평등으로 귀착된다. 남편과 아내는 법적으로 평등하고 
축첩은 폐지되었지만, 그 대신 자본가인 남편과 상속자를 낳아 기르는 역할에 매인 
아내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과 매춘이 그 자리를 메꾸었다.
  이에 비해 봉건 시대의 농노와는 달리 완전한 무산자인 노동자 계급에서는 남성 
지배의 기초는 무너졌으며,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가 늘어나고, 동일 노동의 분야가 
확대됨으로써 가족 내 남녀 평등의 기초가 확대되고 있다. 이 가족에서의 남녀 
불평등의 최후의 기초는 남녀의 고용 차별과 임금 격차, 여성의 가사 전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권이 사유 재산과 성별 분업에 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가부장적인 가족은 자본가 계급의 가족이다. 그 밑에는 남편은 
사회적 노동만을, 아내는 가사 노동만을 하는 중간층 가족이, 그리고 중산층 가족 
아래에는 남편과 아내 모두가 나가서 일을 하는 노동자 가족이 있다. 크든 작든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사회 가족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게 뿌리박혀 있고 봉건적인 가부장적 관습이 
훨씬 많이 남아 있어 문제를 더욱더 복잡하고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주18)
    * 영원한 어린아이
  가족은 인간의 성격, 정서, 인격이 형성되는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장이다. 태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이후 일생 동안의 성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점점 밝혀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성격의 기초가 
대략 3살 정도까지 거의 형성된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족 관계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가부장적인 가족이 인간의 심리와 심성, 인격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하다.
  가부장적인 가족은 인간의 불평등을 체화시킨다. 가부장적인 가족은 인간을 주체와 
대상, 주인과 종, 지배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 자기를 내세우는 자와 자기를 죽여야 
하는 자로 구분한다. 가부장적 가족의 중심은 남자들이다. 가부장제는 남성들을 자기 
중심적인 인간으로 만들고, 여자를 몰자아적인 존재로 만든다. 가부장제는 남성에게 
가학적인 심리를, 여성에게 피학적인 심리를 심는다.

  나는 4 남 1 녀 중 맏이이자 3 대 장손으로 태어났다. 할머니는 집안의 대를 잇는 
장손이라면서 나를 극진히 사랑하셨다. 5살 위였던 막내 고모가 나를 돌보아 주었는데 
나의 잘못으로 얼굴에 조그만 상처가 나도 막내 고모가 야단을 맞았다. 국민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할머니는 1주일에 한번씩 물을 데워서 나를 목욕시켜 주셨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탓으로 나는 할머니와 고모가 전적으로 나만을 돌보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찾아오시는 어머니마저 나를 지극히 편애했기 때문에 나는 
어려서부터 여자들은 남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만 여겼다. 비단 나뿐 아니라 이 
땅의 대부분의 남성들은 단지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특히 장남인 경우에는 
집안의 대를 잇는다는 것 때문에 집안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랐을 것이다.(주19)

  요즈음의 젊은 청년 중에는 엄마로부터 과잉 보호를 받고 맹목적으로 귀여움을 
받으며 양육되어지고, 공부만 하고 있으면 모든 것을 엄마가 대신 맡아 해준다는 
식으로, 엄마의 탯줄과 꼭 묶여 있어 이유가 늦어지고 있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육체적으로는 어른처럼 성장하고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어린아이이다. 자신이 취한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 남자가 대체로 여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 이러한 남자는 
자기 중심적으로 연인이나 아내를 엄마의 대리, 성의 도구, 허전할 때의 위안적인 
존재로밖에 보지 않는다. 여자의 인권을 짓밟아 뭉개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남자 
자신의 행복조차 상하게 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주20)

  가부장제는 기본적으로 남자를 과잉 보호 속에서 키운다. 더욱이 다른 여자 형제에 
대해 차별적으로 떠받들려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정신적으로 영원히 자기밖에 모르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은 가부장적 가족에서 자라는 남자들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가부장적 가족은 남성의 자아를 매우 취약하고 불안정하고 불건전하게 만든다. 언제나 
자기를 내세우고, 지배해야 하고, 우월해야 한다는 의식 때문에 남성의 자아는 오히려 
더 상처받기 쉽다. 이것은 남자들의 자아를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욱더 완고하고 
경직되게 만든다. 손 쉬운 방법은 여자를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아를 내세우는 데서 상처받기 쉬운 남성은 그러한 취약성을 방어해야만 
합니다. 여성을 성적 대상물로 만드는 건 쉬운 일입니다.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진짜 
인간에 의해 거부되는 것보다 대상물에 의해 거부되는 것이 훨씬 쉬우니까요. 내 
생각에는 이러한 과정은 여성과 남성 사이에 어떠한 형태의 진정한 커뮤니케이션도 
파괴시킵니다.(주21)

  상대방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주체이며, 자기 자신이 상대방과 마찬가지로 주체라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의 근원이다. 사랑은 단순한 화합이 아니며, 주체간의 
대립과 모순을 통한 화합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단한 투쟁이다. 
그러나 우월 의식으로 길들여진 상처받기 쉬운 자아는 상대를 대상으로 만드는 손쉬운 
방법으로 이 투쟁을 회피한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여자를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으며(왜냐하면 이것만으로도 그들의 자아가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여자는 별수 없다"는 생각 뒤로 숨어 버린다. 그들은 여자를 자신의 이러저러한 
욕망의 대상, 장식물, 심부름꾼, 자신의 찬미자, 자신의 마음대로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는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존재로 취급한다. 이들은 여자의 삶을 자신의 삶에 
일방적으로 통합시켜 버리려 하며, 상대야 어떻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며, 
일방적으로 여자가 자신에게 맞추어 살 것을 강요한다. 이런 남자들이 여자에게 
보이는 정열은 실상 여자에 대한 지배욕이나 소유욕에 지나지 않으며, 그 바탕은 
이기심과 자의식일 뿐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본성을 억압한다. 인간의 본성은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바란다. 
상대를 단순한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 속에서는 이러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 사랑 
속에서 자신이 향상되고 충만된다고 느끼는 것은 상대를 자신과 같은 인격체로 
받아들일 때이다. 그는 점점 더 허전해지고 사랑에 대한 갈망은 더 커진다. 그의 
깊숙한 내면에서는 그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으며, 그런 식으로는 결코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소리가 들려 온다. 그러나 이런 본성의 소리는 현실 제도의 물결에 
휩쓸려 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흔히 더욱더 비뚜로 나간다. 그는 사랑을 얻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며, 이를 숨기기 위해 의심많고 욕심 사납고 변덕스러워진다. 그는 
마치 어린애가 떼를 쓰듯 사랑을 요구한다. 그는 자신이 사랑을 쏟았다고 주장하며 
그에 대해 (그것의 자기 중심성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반대급부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자동 판매기에 동전을 넣고 스위치를 누르면 커피가 쏟아지듯이. 그는 
언제나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고 '애정을 쏟는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이런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희생적이고 헌신적이며 맹목적이고 비판 
능력과 자아가 없는 여자다. 그리하여 가부장제는 여성들을 이렇게 길들이기 위해 
수많은 채찍들을 개발해왔다.
  가부장제는 그것이 성립된 극 순간부터 취약한 자신을 수호하기 위해 더 많은 
억압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는 자연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남녀는 상호 
보완적으로 창조되었지,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을 지배하도록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억압들이 늘어나고 강해질수록 남녀는 그 자연적인 관계와는 멀어지고, 
사랑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남녀 모두의 불행은 심화된다. 두 사람 사이에서 
실현되는 애정은 진실로 상대방을 향한 것 뿐이다. 따라서 사랑은 평등을 전제로 하고, 
대상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주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사람과의 관계가 
사물과의 관계처럼 일방적이 되는 것, 소유와 지배의 관계가 되는 것, 이것이 사랑을 
소외된 것으로 만들고, 인간이 남녀 관계를 통해서 더 풍부해지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갉아먹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은 상호적인 기브 앤드 테이크다. 즉 사랑은 사랑의 줌이 거절되지 않을까 하는 
떨림이요, 사랑의 받음이 대립물을 이기지 못할까 하는 떨림이다. 사랑은 소망이 
자신을 기만하고 있지나 않은지, 또는 자신이 자신을 완전히 되찾을지 여부를 놓고 
노력한다. 받는 쪽은 받음으로 말미암아 타자보다 더 풍요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받는 쪽은 물론 풍요롭게 되지만 타자도 꼭 그만큼 풍요롭게 된다. 마찬가지로 주는 
쪽은 주는 것으로 말미암아 더 빈곤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타자에게 
줌으로써 그만큼 많이 자신의 보물을 늘리는 것이다. 로미오의 품 안에서 줄리엣은 
말한다. 내가 더 많이 줄수록 나는 더 많이 갖게 된다고.(주22)

  아무 것도 받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주기만 바라는 여자. 이것이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들의 희생을 양분으로 섭취하면서 자라난 남성들의 이상이다.
  남자들이 자기 중심적이 되도록 훈육된 이면에서 여성들은 언제나 타자 중심적이 
되도록 훈육되었다. 가부장적 가족 내에서 여자들은 언제나 객체가 되는 연습을 
해왔다. 여자들은 남자 중심적인 가족과 사회에서 늘상 시중꾼, 보조자, 엑스트라의 
역할을 떠맡도록 강요되었다. 그뿐 아니라, 여자들은 "여자는 남자 잘 만나는 게 
최고다"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라며,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는 식으로 배운다. 그런데 
그 전부인 사랑을 할 남자들은 대부분이 자기 중심적인 애정을 바란다. 즉 여자에게 
자신을 포기하고 그녀의 삶을 남자의 삶에 일치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여자들에게 사랑은 자아에 대한 배반으로서만, 자아의 포기로서만, 일방적인 
헌신으로서만 존재한다. 여성들은 누구나 자아와 남자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며, 어느 
하나를 포기할 것을 강요당한다. 남자들의 지배욕과 소유욕이 사랑의 허명을 쓰듯이 
여자들의 노^36^예적 예속과 의존이 여자의 길이며 참사랑이라고 미화되어 왔다. 그 
가운데 여자들의 자아상은 점차로 부정적인 것이 되고, 자아는 부정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이 자기 과장에 익숙하듯이 여자들은 자기 비하에 익숙해진다.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을 만나도 당당하게 자기를 주장하기보다는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리고 참고 주저앉는다. 남자들의 자아는 가부장제라는 철갑을 두르고 상처를 최대한 
방어하고 있지만, 무방비 상태인 여자들의 자아는 무수히 상처를 받는다. 중년 
여성들에게서 나타나는 우울증, 화병의 가장 주된 요인은 가부장제가 주는 여성의 
자아에 대한 상처에 있다.
  최근의 '화병에 관한 연구'를 보면, 화병환자 100 명 중 87 명이 여성인데, '자신의 
화병이 어떻게 해서 발생했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속상한 일 참고 
살다보니'(48 명), '속 끓는 것 참다가'(22 명), '화나는 것 참다가'(32 명), '억울하고 
분한 것 참다가'(38 명) 등으로 답했다. 가부장제는 여성들에게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억울하고 속상한 일들을 제공하며 그것을 참아야만 하도록 만든다. 
요컨대 가부장제는 여성들을 병들게 하고 이를 통해 유지된다. 그러나 그 숱한 
채찍들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자아는 길들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급증하고 있는 우울증은 단순히 여성이 병든다는 징표가 아니라,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이 채찍들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느끼기 시작했다는 징표다. 억압의 
부당함을 느끼지만 아직 그것을 깨치지 못한 과도기의 현상인 것이다.
  이제 가부장적인 가족이 여성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고, 남성의 인격과 
삶을 왜곡시키며, 남녀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을 가져다 주는지를 가부장적 가족의 
단적인 현상들인 아내 구타와 남편의 외도를 통해 살펴 보자.
    (2) 아내 구타
  김 여인은 29 년 전 24세에 두 살 위인 이씨와 결혼하였다. 남편의 구타 행위는 
결혼 1개월 후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김 여인의 처녀 시절 취미로 모아둔 예쁜 
지갑, 손  수건 등이 조금 있었는데, 남편은 고향 어른들에게 그것들을 선물로 갖고 
가자고 하여 다른 것이 어떻겠느냐고 이의를 제기했다가 남편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렇듯 처음 매를 맞게 된 것이다. 당시 친정에 임시로 기거하고 
있었으므로 김 여인은 친정 식구들에게 부끄럽고 창피해서 꾹 참았다. 남편이 여관 집 
여자와 가깝게 지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김 여인은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를 좀 
물었더니 대뜸 "계집 년이 강짜가 심하다"고 하면서 김 여인의 목을 조르고 머리를 
짓찧어 댔다. 김 여인은 그런 이야길 듣고 스스로 소화하지 못한 자신의 마음이 
좁다고 생각되어 다시는 남편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구타를 이렇다 할 특별한 이유없이 한 달에 한 두번씩 당했다. 결국 
1975 년경에는 남편의 구타로 인해 김 여인은 7개월 된 태아를 사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어떤 여자가 찾아 와 김 여인 남편의 정부라고 밝히고는 용서를 
빌면서 자기가 멀리 떠나려고 하니, 차비를 좀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때 김 여인은 
시집올 때 가지고 왔던 돈을 얼마 정도 그 여자에게 주었는데,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는 낮에 들어오더니 "네 년이 얼마나 잘났기에 남편 바깥 일에 참견이냐! 이런 
년은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한다"고 하며 갖은 폭언을 쓰면서 펌프 물을 푸고 있는 
김 여인의 배를 마구 차고 마당에 쓰러뜨린 후, 김 여인을 나무 절구대로 마구 
때려댔다. 나중에 병원으로 실려가 하루만에 죽은 사내 아이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김 여인은 자기가 참을성이 없고 정말 남편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닌가 
느꼈고, 어떻게 하면 남편의 나쁜 습관을 고쳐서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바램도 
가져보았다. 그래서 김 여인은 남편이 집에 있는 날이면 온갖 보살핌에 신경을 다 
썼다. 세숫물을 떠다 바쳤고 심지어 발을 씻어 준다든지, 손톱, 발톱까지 깎아주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큰 소리 안 나게 하고 살아야 
친정 어머니 말씀처럼 일부 종사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김 
여인의 건강은 펌프물도 길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나 이런 남편의 구타 행위는 점점 날이 갈수록 잔인해져서, 어떤 때는 약탕관을 
깨서 등을 찌르며 때리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다 뽑아놔서 파마도 할 수가 없게 
되기도 했다. 또 연탄집게로 심하게 두들겨 대서 온 몸이 멍투성이었고 아이들 앞에서 
옷을 벗기고 술병, 몽둥이, 가구, 골프채 등 닥치는대로 손에 들고 구타했다. 그런 
구타의 결과 늑골과 요추의 골절상을 입기까지 했다. 김 여인은 병원 치료도 가끔 
받으러 다녔는데 남편은 의사와 간호원 앞에서는 온갖 친절과 자상한 태도를 
보이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며 큰 걱정을 하는 척 하였다. 그러나, 남편의 구타는 점점 
심하여 과도를 목에다 대고 "네까진 년 죽이기는 식은 죽먹기야"라고 협박하는가 하면 
"만약 도망가거나 하면 어딜가든지 찾아내어 죽여 버리겠다"고까지 한 적도 있다. 
이러한 생활의 반복 속에서 김 여인은 정신이 혼미해졌고 헛소리를 지르고, 헛것이 
보이기까지 했다. 때로는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자살을 하면 편안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1978 년에는 이러한 증상으로 모 정신 병원에서 2개월 
동안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남편이 김 여인을 구타하는 이유는 남편의 외도에 
대해 어쩌다 얘기하거나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고, 반찬이 입맛에 안맞는다고, 방이 
따뜻하지 않다고, 바지 주름이 잘못 잡혔다고, 친정 어머니에게 여편네 멋대로 
스웨터를 사드렸다고 등등이었다. 남편은 한번 구타하기 시작하면 보통 자신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이삼십 분씩 구타를 계속했다. 이렇게 남편은 김 여인을 
규칙적으로 계속적으로 그리고 계획적으로 구타했다.
  그러나 김 여인이 더욱 모멸스럽고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은 남편이 구타 후에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김 여인을 붙들고 부부 관계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먹을 것, 속치마, 잠옷, 심지어 팬티까지 사들고 
들어와서는 다정스럽게 대해주기도 하며 지난 일들은 다 잊으라고 하며 말문을 막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처럼 김 여인을 치욕스럽게 한 적은 없다.
  또한 남편은 김 여인에게 구타뿐 아니라 일체의 금전 사용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렇듯 김 여인은 29 년 동안 결혼 생활에서 김 여인 자신이 가정 생활 용품을 
선택해서 사보거나 갖고 싶은 것을 단 한번도 구입해 본 적이 없다. 남편은 자녀들도 
구타하였는데, 5 남매가 모두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맞으면서 성장했다. 그래서 
자녀들은 항상 기를 펴지 못하고 성장했다. 남편은 평소에 여자라는 것은 집에서 
아이나 낳고 집안살림만 잘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여자와 바가지는 밖에 
내놓으면 버린다는 속담이 꼭 맞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딸 자식 공부는 적당히 
시켜서 시집만 잘 가면 그만 이라고 하면서 딸보다 아들 성적이 좋지 않으면 집안 꼴 
잘 되어 간다고 하며 아들을 때리기도 했다.(주23)
    * 은폐된 전쟁
  1983 년 2--3월 708 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결혼 후 
남편에게 구타당한 일이 있읍니까"라는 물음에 42.2%가 있다고 대답했다. 또 "지난 
1년 동안 남편에게 구타당힌 일이 있읍니까"라는 물음에 14%가 있다고 답했다(그런데 
이런 설문 조사에는 무응답자의 비율이 20--40%에 달하는 등 매우 높아 구타의 
비율이 실제보다 낮게 나타날 가능성이 많다). 한 달에 한번 이상, 일주일이 멀다고 
구타당하는 주부가 100 명 중 1 명이나 된다. 서울 인구 천 만 중 가정 주부를 300 
만으로 잡을 때 3 만 명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하면 서울에서 아내 구타가 하루에 
200 내지 1,200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추산이 나온다.(주24) 매일매일 가정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일방적인 전쟁이.
  미국에서는 살인의 20--50%가 가정 안에서 일어나고 살인의 40%는 부부의 
살인이며, 이들의 85%는 아내가 구타당해 살해된 경우라는 보고가 있고, 여자 
피살자의 40%는 남편이 살해한 경우라고 한다. 독일에서도 여성 피살자의 22%가 
남편의 폭행으로 죽었다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구타로 사망한 경우는 통계가 없어 알 수 없고, 아내 구타의 실상 
역시 많은 경우가 가려져 있어 정확한 파악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빙산의 일각인 
드러난 경우만 보아도 그 실상이 참으로 엄청나다. 여성의 전화의 1983 년의 분석을 
보면, 구타당한 여성의 56.9%가 병원 치료를 받을 정도였고 신체 여러 부위를 심하게 
맞아 골병이 들거나 멍이 들고 머리카락이 빠진 경우가 30.8%였으며, 노이로제 혹은 
정신병에 걸린 경우가 10.3%였다. 구타로 인해 코뼈나 이빨이 부러지고, 고막이 
파열되는 경우가 흔하다. 김광일의 조사에 따르면 구타당하는 아내의 61%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적이 있는데, 골절이 41%, 탈구 21%, 안구 탈출, 안구 파열이 6%, 칼 
등의 예리한 물건에 찔린 상처가 21%, 임신한 아내를 때려 유산한 경우가 29%나 
되었고, 두개 골절이 2 명, 안구 파열에 의해 안구가 튀어 나온 경우도 있었다.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받기도 하며,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화상(담뱃불로 지짐)을 입기도 
한다. 특히 뇌손상으로 인한 간질과 구타로 인한 후유증으로 일생을 불구가 되는 
경우도 있고,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김광일의 연구 대상 중 54%가 아내 구타 후 강간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는데, 
구타당한 후 공포와 모멸감 그리고 상처의 아픔 때문에 여성에게는 성교할 의사가 
전혀없는 상태에서 남편이 폭력으로 성교를 감행하는 것이다. 연구 대상 가운데는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타 후 강간하는 경우가 6%나 있었고 적어도 자녀들이 
눈치챌 수 있는 상황, 이를테면 옆 방이나 마루에 자녀들이 있는 상황에서 안방에서 
큰 소리로 성행위와 관련된 명령을 하거나 동작을 하는 경우가 20%였다. 81%가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구타하고 있었으며, 20%가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나체로 벗겨놓고 구타하고 있었다.
  93%는 구타 이외에 말로 협박하고 욕을 하는 것이 습관화되고 있었는데 상스러운 
욕에서부터 상대방의 체면과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는 말을 하고, 죽으라고 
저주하거나 죽인다고 협박하기도 한다. 욕설과 폭언은 정신적인 상해를 가하는 
것으로써 정신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구타로 인한 피해는 단순히 육체적 손상에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보다 치명적인 손상은 정신에 가해진다. 구타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구타당하는 아내는 지극히 자존심이 상해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는다. 구타를 당했다는 수치심, 남편에 대한 분노, 구타에 대한 공포와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 무기력 등으로 인해서 정신적 혼란과 다양한 정신, 
신체 증상이 나타난다. 반복적인 구타로 불안, 초조, 공포, 분노, 체념의 정서 반응과 
적절한 감정 표현을 못하여 불면증, 두통, 소화 불량, 가슴 답답증, 속열이 얼굴로 
치솟는 느낌 등 정신, 신체 장애 증상이 나타난다.
  더 나아가 구타가 오랜 동안 반복되면 자존심의 상처가 깊어져 주체성의 상실, 
자아의 파괴에 이르며, 정신병까지 걸린다. 그 중에는 자신은 맞을 만하니까 맞는다고 
막연히 믿고 이러한 결과로 자신이 매맞을 짓을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으며, 
남편에 대해 죄책감마저 갖는 죄업 망상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나름의 적응 방식의 하나이다. 아내 구타는 아내의 신체와 정신, 
인격 자체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미국의 통계를 보면 아주 심한 구타를 주기적, 
반복적으로 당하는 경우가 4--12%이다. 이 중 가장 낮은 비율인 4%를 우리나라에 
적용하더라도 부부를 800 만 쌍이라 가정하면 32 만 명의 아내가 심한 남편의 구타로 
노^36^예 상태에 빠져 있다는 추산이 나온다.
  강도나 강간범, 혹은 (강도나 잡아야 하는데 엉뚱한 사람을 잡는) 폭력 경찰이나 
하는 것으로 알려진 폭행, 강간, 살해 등이 가정에서 남편에 의해 더욱더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가정 파괴범은 바로 가정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는 어떤가?
  몇 해 전 남편에게 구타당한 부인이 남편을 경찰에 고발하여 구속된 사건이 
일어나자, 매스컴은 일제히 '부부 싸움 법정으로 가야 하나'라며 아내가 남편을 
고발하다니 세상 참 말세라는 식의 보도를 대서특필했다.(주25) 사법 기관은 폭행한 
남편에 대한 구속 영장 신청을 "폭행 동기에 정상을 참작할만한 사유"가 있음을 들어 
혹은 "부부간의 일이고 상해 정도가 심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했다.(주26) "남편이 
주먹을 휘두르는 버릇이 없어져야 하겠지만 남편을 처벌하려는 부인의 응징 풍조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 한 군데 호소할 곳도 없는 의지가지 없는 여성들이 가정의 '평화'의 
허울 아래 오늘도 '폭력' 남편의 희생 제물이 되고 있다.
    * 맞을 만하니까 맞는다?
  앞의 재판 사례에서도 나타났듯이 아내 폭행에 대한 흔한 통념의 하나는 "여자가 
맞을 만하니까 맞는다"는 것이다. 아내 구타자들도 대부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맞을 만한 짓"이란 어떤 것인가?
  앞에서 말한 김광일의 연구에 의하면 남편이 말하는 아내 구타의 이유를 보면 
의처증, 즉 부인의 품행을 탓하는 것이 36%, 남편의 외도를 부인이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31%, 아무 것이든 닥치는 대로 트집을 잡아 구타하는 경우가 80%나 
되었다(두 가지 이상을 들 수 있게 했기 때문에 합계가 100%가 넘는다).
  부인의 품행을 탓하는 것과 남편의 외도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탓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데, 이것이 동시에 같은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오히려 심하게 외도를 
하는 남편일수록 부인의 품행을 의심하는 경향도 있다. 어쨌든 이 세 가지가 모두 
때릴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될 수 없다. 실제로 아내에 대한 의심이 이유있는 것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남편의 외도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구타를 합리화할 수 
있는 명분이 아니라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남은 것은 아무거나 트집을 잡는 
것이다.
  앞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내 구타자들에게는 아내의 표정,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다 구타의 구실이 된다. 사실상 아내 구타자들은 구타의 명분을 찾기 위해 
아내의 행동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지켜보고, 물고 늘어진다. 시비를 거는 남편에게 
반박을 하면 말대꾸한다고 때리고, 참고 있으면 남편 말이 말같지 않냐고 때린다.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고, 국이 너무 뜨겁다고, 혹은 국이 너무 식었다고, 남편을 
화나게 했다고 때린다. 그런데 화나는 이유는 정말로 사소한 것이다. 맞을 만하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유가 불명확한 것이다.
  게다가 설사 정말로 아내에게 결함이 있거나 아내가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도 그것이 
구타의 명분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합리적인 대화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여자가 
맞을 만한 짓을 하면 맞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남자가 같은 잘못을 
했다고 해서 아내에게 맞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구타가 부부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왜 
여자에 대해서는 자명하지 않은가? 때려서 해결하려는 태도에는 아내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들어 있다.
  여자가 맞을 만한 일을 하니까 맞는다는 생각에는 이미,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관념이 깔려 있다. 맞을 만한 짓이라는 말에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아내의 불복종이다. 남편에게 대드는 것(남편의 말에 반박하는 것), 남편에게 말 
대답하는 것(남편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것)등등. 다시 말하면 여자가 남자와 
평등해지려고 하는 것 자체가 맞을 만한 이유가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여자를 소유물로 보는 가부장적인 태도이다.
  요컨대, 결코 맞을 만한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아내 구타에는 어떠한 합리적인 
이유도 있을 수 없다.
    * 폭력 권하는 사회
  그런데 왜 남편은 아내를 때리는가? 아내 구타자에 대한 사례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그 배경은 크게 두 가지이다. 지배와 피지배, 약육 강식, 경쟁이 지배한느 사회에서 각 
개인이 받는 억압과 그로 인해 쌓이는 분노, 좌절감, 억눌린 감정, 스트레스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가부장적인 사회 질서와 권위 의식이다. 물론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후자이다. 사회 생활이 주는 압박을 아내에게 푸는 것은 아내가 약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경쟁, 위계 질서, 감시와 감독, 상대적 빈곤, 이런 것들이 현대인들의 정서를 
억압한다. 누구나 이 사회가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강고하고 거대한 
사회 질서에 대해 각 개인은 무력하며,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되어 있는지 잘 알 수도 
없다. 해결할 수 없는 부조리에 매일 직면하면서 사람들은 가슴속에 무언가가 가득 
쌓이는 것을 느낀다. 한 남자 노동자는 "아침에 출근할 때 쓸개를 내가 아는 곳에 
떼어 놓고 온다"고 말했다. 쓸개를 떼어놓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비인간적인 상황들에 
수시로 부딪치면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파괴적이고 폭력적 충동이 어느 
정도는 일상적인 정서가 되었다. 폭력 영화, 만화, 비디오가 판을 치는 것은 단순히 
그런 것을 공급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한 수요를 낳게 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이런 파괴적 충동이 가정 내 폭력의 하나의 원인이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회에서 당한 것을 집에 와서 푸는 것이다. 부글부글 끓던 억눌린 감정은 용암이 
약한 지표면을 뚫고 나오듯 약자를 향해 분출된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요인은 
아내를 지배하려는 남편의 욕구이다.
    * 가부장적 권위 의식과 지배욕
  폭력 가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남편과 아내 모두가 가부장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의 대부분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며, 아내를 결코 자신과 대등하다고 인정하지 못하고, 종처럼 부리고 
완전히 지배하고자 한다.

  정신적 공감대 없이 왕과 시녀 사이로 봉사해야 해요. 왜 진실로 나를 대해주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인간이라는 것을 조금도 이해 안해줘요.

  아내 구타자들의 대부분에 있어서 남자의 우월성이라는 신념이 자아 정체성의 
중요한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실생활에서 이 신념이 조금이라도 위협을 
받으면 곧 그들은 자아에 상처를 받고 으르렁거리는 것이다. 아내 구타에 관한 연구는 
이를 뒷받침해 준다. 앨보우에 따르면 "학대자는 아내의 역할에 대한 개념에 집착하는 
강한 욕구를 갖고 있다. 아내가 남편의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격분하게 되고 부인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아내를 자기의 연장으로 생각한다." "그는 아내의 순종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하여 아내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내를 때리는 남편은 
실제적 권위를 잃었거나 권위를 잃었다고 감지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Whitehurst,1974).
  "남편들은 아내에 의해서 자기의 초서열적인 위치가 위협받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Faulk,1974). 폭력은 "가정의 우두머리로서 위치를 유지하려고 할 때에 
생긴다(Gelles,1972)." "아내 폭행과 가학적 성욕을 성적인 쾌감보다는 오히려 
지배욕과 관련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즉 완전히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 하려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를 움직이려는, 말하자면 그의 신이 되고자 하는, 절대자가 되려고 
하는 열망의 표현이다. 이러한 상태는 상대방을 육체적으로 초라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상해를 입히는 형태로 실현된다." 아내 
구타와 가부장적 권위 의식과의 상관 관계는 아내 구타자 중에서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정 출신의 비율이 높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많은 연구들이 아버지가 
폭력적이고 어머니가 수동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자란 남편 중에 구타자가 많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김광일의 연구에서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들의 73%가 폭력 가정에서 성장해 왔고, 
폭력 가정은 아니나 외형상으로 붕괴된 가정 출신이 15%나 되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구타당하며 지내 온 경우가 53%, 반대로 아버지가 어머니로부터 
구타당하며 지낸 경우가 18%이고 남편이 그의 어머니로부터 구타당하고 자라 온 
경우가 41%, 그의 아버지로부터 구타당하고 자라 온 경우가 37%였다.
  앞의 사례에서도 김 여인의 시아버지 역시 심한 아내 구타자였고 자녀 구타자였다. 
남편의 할아버지대로부터 시작해서 자식에 이르는 4 대에 걸쳐 결혼한 남자 21 명 중 
19 명(94.5%)이 전형적인 아내 구타자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부당하다고 느끼고, 아버지에 대해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자라난 
경우에도, 자신 역시 아내 구타, 아동 구타자가 되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가정은 인격이 형성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장이다. 이러한 가정이 왜곡되고 
폭력과 지배와 이기적 욕망이 횡행할 때, 아이들은 그것을 몸에 익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똑같이 지배적이고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리하여 
악순환이 형성된다.
  폭력 가정에서 남자 아이들은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 모순 때문에 
갈등하지만, 다른 모델을 보지도 체험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부장적 
지배 질서를 몸에 익히고, 그에 익숙해져 그것을 자신의 사고 방식과 생활 습관,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일부로 체화해 버린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부장의 위치에 서게 되면 
때로 모순과 갈등을 느끼면서도 사회가 워낙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명분 아래 
그토록 부당하다고 느꼈던 가부장의 위치에 안주하게 된다. 나아가 그는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자면 어쩔 수 없다"고까지 이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에게 어쩔 수 
없는 것은 사회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형성되어 버린 자기 자신이다. 이를 
자신에게 감추기 위해 자기 합리화가 필요한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 아버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군주였다. 특히 어머님에 대한 아버님 
말씀은 곧 법이었다. 가정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조그만 일에서부터 아버지는 
일방적인 명령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을 희생으로 대신했다. 어머니는 가정의 
편안을 위해서 참아야 된다고 했으며 여자의 미덕은 복종, 순종에 있다고 알게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살 아오셨다. 어떤 논쟁이든지간에 일방적인 아버지의 승리로 끝났다. 
어머니의 순종이 보여준 가정의 편안함, 그럼에도 아버지가 싫어졌다. 어린 나에게도. 
하지만 한편으로 어려운 가정을 이끌어 가시는 데에 단 한 가지 좋은 방법일 수 
있다고 느껴졌다. 가부장적인 단어를 알기 전에부터 눈으로 생각으로, 행동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일방적인 승리를 배워버렸다고 할 수 있다.(주27)

  그러나 가부장적 가족이 아동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것이 단지 가부장적 압제를 
배우고 익히게 하는 데만 있지 않다. 가부장적 가족은 아동의 인성 발달에 여러 가지 
장애를 초래하며, 특히 폭력 가정은 아동의 성장에서 여러 가지 인격 장애를 가져온다.
  폭력 가정에서 성장하는 어린이는 그 어머니가 당하는 고통의 많은 부분을 함께 
당한다. 어머니가 맞는 것을 울며 지켜보면서 아동은 폭력에 대한 공포, 구타자에 대한 
증오와 분논,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무력감과 자책 등 피구타자의 경험을 
공유한다. 피학대의 직,간접 경험은 가학의 충동을 낳고, 육친에 대한 증오는 잔인성을 
기르며, 분노는 격분(충동 조절의 장애)을, 자책과 무력감은 열등감과 자아에 대한 
부정적 의식을 심는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며,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바람직한 모델을 갖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리감과 생소함, 거북함, 억눌림을 느끼고, 나아가 증오를 품는다. 
이 억압감과 증오감은 그것이 육친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는 자에게 
더욱더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론 그들은 동시에 비판 의식과 자신은 결코 저렇게 되지 않겠다는 결의를 갖는다. 
어떤 경우에는 이 반발감과 비판 의식이 본인의 의지, 주변 상황, 배우자의 태도 등과 
결합하여 부정적 인성들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 자기 내부에서 자라고 있는 가학성과 잔인성, 열등감에 대한 비판 
의식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 의식과 반발이다. 이 두 가지 상반되는 요소의 
갈등은 자아의 불안정과 모순, 갈등을 초래하며, 더 나아가 정서적 불안정, 이중 인격, 
낮은 자존심과 의지 박약, 비관주의의 원인이 된다. 이것이 다시 부정적 인성을 
극복하는 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편, 구타당하는 아내들의 태도 역시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어떤 아내들은 자신이 
다시 자식을 구타함으로써 남편에게 당한 분풀이의 대상으로 삼거나, 자식을 미워하고, 
유기하고 무관심 속에 방치한다. 또 어떤 아내들은 남편에게 당하는 배신과 고통과 
억압에 비례해서 자식에게 매달리고, 오로지 자식만을 바라보며 희생하고 헌신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양자가 교묘히 결합된다. 어떤 경우든 아동의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환경은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며, 남을 사랑할 줄 모르고, 의심이 많고, 
정이 없고, 인색하며, 남에 대해 비판적이고, 비관적이며,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참을성이 없고, 의존적인 인성을 배양한다. 이러한 인격적 결함이야말로 남편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원인이다. 자기 자신의 결함으로 인해 남편들은 아내를 때리는 
것이다.
  김광일은 "아내 구타의 원인은 구타하는 남편에게 있다"고 말했다. 김광일의 연구에 
따르면 심한 아내 구타자의 70%가 인격 장애로 진단이 내려졌으며, 14%는 정신병적 
증상을 보였다(의처증을 위주로한 편집 장애가 11%, 정신분열증이 3%). 인격 장애로 
진단된 경우에는 편집성이 위주가 되는 경우가 35%, 반사회적 인격이 위주가 되는 
경우가 11%, 양자가 혼합되어 있는 경우가 16%, 폭발성 인격(주28)이 4%였다.
  특징적인 것은 아내 구타자들 중 많은 경우가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지 때문에 
때린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즉, 아내의 결점을 고쳐주기 위해, 버릇을 고치기 위해 
때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책임 회피와 자기 기만, 합리화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아내 구타자들의 우월 의식에서 나온다. 이는 특히 사회적으로 지위나 
부, 명예가 있는 남편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자신이 아내를 구제해 주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며, 때리는 것조차 아내를 위한 시혜라고 생각한다. 이런 
남편들은 죄책감이 없고 뻔뻔스러우며, 자신이 완벽하다는 망상에 빠져있다. 그런데 
이런 우월감이나 완벽하다는 망상은 사실은 열등감과 결핍감에 대한 보상 심리이며, 
아내를 구제한다는 생각은 사랑이 아니라 인색함과 애정 결핍에서 나오는 것이다.
  다른 경우에는 아내를 때리고 죄책감에 사로잡히며, 그것이 잘못인 줄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충동을 자제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번번히 아내를 
구타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그 역시 판단력을 잃고 책임을 아내에게 돌린다.
  한편 구타당하면서 참고 살아가는 아내의 대부분은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남편의 구타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무조건 자신이 참는 쪽을 택한다. 그런데 이 순종이 남편의 가부장적 의식을 
바로잡지 못하고 오히려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이들이 순종하는 편을 
택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화목한 가정'에 대한 집착, 
결혼 생활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자식을 부양할 능력의 결여가 이들에게 올바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참는 쪽을 택하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때리는 남편에게는 아내가 맞아도 자신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아내는 경제적 능력이 없고, 자식에 대한 미련 때문에 맞아서 
분하더라도 참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길 것이 뻔하다"고 믿기 때문에 
남편들은 아내를 때릴 수 있는 것이다. 구타를 하는 남편들 중에는 아내가 태도를 
바꿔 대항하기 시작하면 크게 당황하고, 갑자기 비굴해지거나 더 이상 구타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스웨덴에서는 아내 구타가 많았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일단 구타가 일어나면 경찰에 보고되고 경찰에 보고되면 법정에 서야 하고 법정에 
서면 무조건 3개월을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하므로 구타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도 
구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 구타는 결코 잘 잘못의 문제가 아니며, 단순히 남자가 육체적으로 
강하다는 사실의 문제는 더 더욱 아니다. 남편의 폭력의 배후에 깔려 있는 것은 
남자의 일방적인 승리를 보장해 주는 가부장제라는 확고한 사호제도인 것이다. 다음 
사례는 가정 내 폭력을 퇴치하기 위해 사회적 수단들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미국에서 3개월쯤 살았을 때였다. 또 폭언과 폭행이 시작되길래 그 동안 사귀었던 
미국인 여성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였다. 그랬더니 쉼터를 소개해 주었다.
  쉼터는 초라했지만 밤낮 없이 24시간 무료로 운영되고 있었다. 쉼터 팜플렛을 
남편에게 주어 나도 남편의 폭행시 갈 수 있는 데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이혼 
서약서의 내용을 내가 불러주어 받아쓰게 한 후 사인도 하게 했다. 조금 지나자 
남편이 저녁 먹으러 와서는 자기는 이혼할 의사가 없다고 하면서 이혼하느니 
차라리 아이들과 다 같이 죽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부엌 바닥에 나를 쓰러뜨리고는 목을 조르면서 내가 한 행동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말하라고 하여 나는 목숨을 살려야겠기에 잘못했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이들의 생명도 위험했기에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아이들과 함께 그 쉼터를 또 
찾았다. 다음날 아침 전문 상담원으로부터 상담을 받았는데 바로 고소를 하라면서 
프린트된 고소장을 주었다. 그것은 중간 중간 밑줄 그어진 곳에 나의 이름, 남편의 
이름을 적어 넣기만 하면 되고 비용도 필요 없었다. 나는 그때 취직도 할 수 없는 
부인 비자를 갖고 있던 터라 거의 무일푼이었다. 그런 가난한 사람은 무료로 법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판결 받은 후에 남편이 소송 비용을 후불로 치러야 했다. 
지금 기억하기에 약 50불 정도였던 것 같다. 상담소에서 작성한 고소장을 들고 법원에 
갔더니 나이든 남자 경찰관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어 서류를 먼저 심사하는 판사 
앞으로 갔는데 그는 내 말을 들어본 후 진지한 표정이 되어서 못 믿겠다는 듯이 
남편이 이빨로 물은 팔의 상처를 보자고 하였다. 그 상처와 목에 난 상처 등을 보고는 
바로 접수시키면서 그때 당시 아이들을 누가 돌보고 있는가를 물어 내가 쉼터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하자 아무런 재산도 직장도 없었던 나를 친권자로 인정해 
주면서 열흘 후에 판결을 받으러 오라고 하였다. 그곳에서는 의사의 진단서도 필요 
없었다. 판사가 판결한 법에 따라 내 남편은 집에서 2개월 간 쫓겨나게 되었다. 2개월 
간 나와 아이들의 생활비를 대주면서도 나의 허락없이 집에 들어왔을 때 내가 경찰에 
전화를 걸면 남편이 구속될 처지가 된 것이다.(주29) 그날 밤 남편은 모텔에서 잠을 
자면서 내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나를 손에 너무 꽉쥐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는데 그런 
자신을 반성한다고 했다. 또 자기 머리에 무슨 빛이 비치는 것도 같다며 내게 
고맙다고까지 하였다. 다시 폭력과 폭언이 나와서 나는 미국에서의 이혼에 희망을 
걸었다. 남편의 폭행을 이유로 이혼 소송을 제기하여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구원이었다. 2백^36,36^3백 달러만 가지고 변호사에게 가서 사정을 얘기했더니 그 
돈만으로도 사건을 맡아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소송을 제기해 놓고부터 나는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어 미국 의사 고시 준비에 정신을 쏟아 차분히 공부할 수 있었다. 좋은 
법 제도가 불안으로 어지럽던 나의 머리를 그렇게까지 맑게 하여 내가 능력을 힘껏 
발휘하게 도와주는 데에 신비함마저 느꼈다. 변호사가 법원에 이혼 서류를 접수시키기 
바로 전날 남편은 만약 내가 정말로 이혼하면 자기는 미국에서 자살해 버리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무척 큰 충격을 받고 고민 끝에 남편을 살리기 위해 이혼을 
하지않기로 했다. 남편은 분명히 조금 변했다. 그전에는 온식구가 같이 죽자고 했으나 
그때는 자신이 죽는다고만 했기 때문이다. 나와 자식들의 생명이 자기의 소유물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 순간이었나 보다. 나는 그 뒤로 10개월 정도를 열심히 공부해서 
기초 의학인 1차 시험, 임상 의학인 2차 시험을 6개월 간격으로 합격하고 난 다음에 
한국에 돌아왔다. 그렇게 어려웠던 생활 속에서 내가 폭행하는 남편을 미워하지 않고 
그 성질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남편 역시 우리나라 여성 비하 문화의 
희생자라고 인식했던 데 기인한다. 나는 나를 살려주었던 이 법 제도의 혜택을 
우리나라의 여성들이 받을 수 있도록 이 일을 위한 여성 운동에 나의 수입의 많은 
부분을 써야할 의무를 느낀다. 지금은 남편이 상당히 변해서 가정 생활이 행복한 
편이다.(주30)
    (3) 남편의 외도
  올해로 결혼 생활 10 년째를 맞는 두 아이의 어머니. 남편은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럭저럭 사는 축에 드는 편이다. 허리띠를 제대로 풀고 살 수 없을 만큼 
빠듯했던 사업이 2--3 년 전부터 눈에 띠게 호전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살 만하게 되면 딴 마음 먹게 마련인 것이 남자들의 속성인가? 외박이 거듭되면서 
한부인은 남편의 신상에 뭔가 심상치 않은 변화가 있음을 눈치챘다. 그래서 그의 뒤를 
캐기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편에게는 숨겨둔 여자가 있었다.
  처음 남편은 그런 사실을 딱 잡아뗐다. 한마디로 "있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사람잡을 여편네"라는 것이었지만 한부인이 구체적인 증거를 들이대니까 이번에는 
아주 터놓고 "그래, 그렇다면 어쩔테냐?"는 식으로 막 나오더라고 했다. 그때부터 
불화가 일기 시작한 집안은 두 사람의 싸움 소리로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아내는 
분한 마음에 악을 쓰며 대들었고 그때마다 남편은 으레 손찌검으로 나왔다. 한부인은 
그렇듯 툭툭 내뱉는 남편의 말이 뼈아프게 가슴을 저려왔다고 했다.
  남편의 사설을 정리해 보면 대충 이렇다.
  "사내가 바람 좀 피운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여자가 교양 없이 난리를 
치느냐", "바람 은 피웠지만 남편 구실이며 가장 구실 못한게 뭐 있느냐. 밖에서 
벌어다 주면 여자는 안에서 아이들 거들면서 살림이나 잘 하면 될 일이지 웬말이 
그리도 많으냐", "허리는 절구통같이 해가지고 어디 하나 매력있는 구석이 있어야 
남자가 한눈을 안 팔지", "남자를 제대로 이해할 줄 모르는 맹꽁이 같은 여편네", "그 
여잔 진짜 여자야. 적어도 당신과는 비교가 안 돼."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것은 남편이 자신의 부정을 뉘우치기는커녕 그것을 일종의 
사내다움으로 분칠하면서 아내의 힐난에 고압과 폭력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주31)
    * 정신적 폭력
  남편의 외도는 여성을 괴롭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다. 여성의 전화의 1986 년 
5월 1일부터 1987 년 4월 30일까지의 상담 사례 분석에 따르면 남편의 외도가 
21.79%로 1위였다. 또 주부들의 전화의 통계에 따르면 1989 년 6월 1일부터 1990 년 
5월 31일까지의 전화 상담 1천 4백 64건 중 부부 문제 상담이 61.3%로 가장 높은데, 
그 중 남편의 외도가 37%로 가장 많았다.(주32)
  MBC 여성 살롱 인생 상담에 접수된 문제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혼에 
관한 상담인데, 이혼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배우자의 부정(33.1%)이다. 대법원이 
1985 년 한 해 동안 이혼 사건에 대해 집계한 통계에서도 이혼의 원인으로 배우자의 
부정 행위가 48%로 단연 많다. 남편의 외도는 여성의 정신 지로한의 가장 큰 원인일 
정도로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다. 고려 병원 신경 정신과 이시형, 홍종화 
박사팀이 1973 년부터 1983 년까지 이 병원에서 정신 질환으로 확인된 주부 291 
명을 대상으로 '주부 환자의 정서적 갈등에 대한 원인 및 패턴'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 중 90%가 가정 문제 때문에 병이 났으며, 62%가 남편 문제로 정신 질환을 
일으켰음이 밝혀졌다. 그 중 가장 많은 32%가 남편의 외도로 인한 것이었다. 2위인 
자녀 문제와 관련된 환자 16%, 시부모와의 갈등 12%에 비해 월등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주부들의 정신 질환은 심리 증상으로 불안(28.4%), 우울(11.2%), 
신체 증상으로 두통(8.6%), 위장 장애, 불면증 등을 낳는다. 이동원은 배우자의 부정 
문제는 부부간의 갈등을 야기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배우자에 대한 정신적 폭력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정신적 폭력이 우리 가정에 
비일비재하게 횡행하고 있다. 이근후가 대도시 부부 700쌍을 대상으로 한 1984 년의 
조사에 따르면 남편의 34%, 아내의 5% 정도가 혼외 정사의 경험이 있었다. 이는 
이동원의 조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 남자의 33.2%, 여자의 6.6%가 혼외 관계의 
경험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남편의 바람에 의해 배반당하는 여인의 사랑은 
우리 시대의 또 하나의 사랑의 테마다. 1970 년대에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이 국산 
영화로서 보기 드문 관객 동원을 한 것이나, 최근 연극 '위기의 여자'가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은 이것이 많은 여성들에게 여전히 '내 얘기'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직도 
여성들에게는 '눈물의 씨앗'이다.
  남편의 첫 번째 배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상의 거의 모든 아내들은 '이 세상 
남자가 전부 바람을 피워도 내 남편만은'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신뢰는 결혼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이러한 신뢰가 깨진다면 결혼을 유지하는 
것은 그녀에게 치욕이 될 뿐이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정조를 지키는 것은 
결혼 관계의 일차적인 요건이다. 이런 신뢰를 짓밟고 결혼의 약속을 깨는 것은 일종의 
범죄 행위다. 그러나 자기 아내는 결혼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이를 배반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많다.
    * 일부 일처제
  우리 사회에는 인간, 특히 남성의 본성이 일부 일처제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암암리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일부 일처의 단혼이 우리의 지식이 
미치는 한 원시 사회에서부터 지금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보편적인 가족 
형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부 일처제의 
보편성은 그것이 매우 깊은 뿌리를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 가장 중요한 근거는 
일부 일처제가 인간이 가장 안정되고 바람직하게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가족 
형태라는 점에 있다. 우리는 동물에 있어서도 암수의 지속적인 관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대개 새끼의 부양과 관련된 것이다. 즉 발정기가 끝난 뒤, 다른 수컷들이 
더 이상 그 암컷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 후에도 그 암컷과 관계를 맺은 수컷은 
계속해서 그 암컷과 함께 있으면서 암컷을 보호하고, 돕고 먹을 것을 공급하며, 새끼를 
낳아 독립할 때까지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
  한 명의 인간이 자립적으로 살아가기까지는 그 어느 동물보다도 오랜 기간에 걸친 
부모의 수고가 필요하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능의 하나인 모성애와 부성애는 이에 
대한 자연의 배려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어린이에게는 자기 부모에 대한 강렬한 
애착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강력한 경제적, 정서적 유대가 
형성되는데, 부모에게 있어서 자기 자식을 갖고, 자신이 그들을 기르고자 하는 
소망보다 일차적인 것은 없으며, 자식에게 있어서 자기 부모에게 양육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따라서 자신들의 자식과 자기를 낳은 부모로 구성된 가족이 가장 
이상적이다. 가족은 경제적 단위일 뿐 아니라 정서적 단위이며, 정서적 관계는 경제적 
관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자식의 성장에는 부모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성인 남녀에게는 자녀에 대한 사랑과 부양의 의무가 
삶의 중요한 동력과 동기를 부여한다. 안정된 가족 관계는 인간의 정서적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러한 안정은 일부 일처의 가족에서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다.
  아이의 부모에 대한 전적인 의존은 부모의 무한한 헌신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전적인 헌신과 베품은 오직 배타성 속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만약 대상이 
무수히 흩어져 있다면, 그 하나하나에 대해 무한한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모성애와 부성애는 본능적으로는 자기 자식에 대한 배타적인 애정이다. 
애정의 강렬함과 깊이는 오직 제한된 대상에 대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모 자식 
관계의 배타성과 강력한 유대는 부부 관계의 배타성과 강력한 유대의 기초다.
  일부 일처제의 또다른 기초는 남녀 관계의 배타성이다. 이러한 배타성은 남녀의 
관계 그 자체의 성질에서 오는 것이다. 우선 남녀간의 육체적인 결합 자체가 배타성을 
요구한다. 근원적으로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행동인 이 육체적인 결합은 상대의 
단일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는 본능적인 것이다. 따라서 질투심의 뿌리는 매우 
깊다. 사회 제도가 아무리 남편의 외도를 용인하더라도 여성들에게는 그것은 언제나 
참기 어려운 본성의 거역, 배반으로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첩을 두는 것이 
공공연히 용인되었던 봉건 시대에도 "시앗하고는 하품도 옮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런 배타성은 고등한 동물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발정기의 동물 중 많은 수가 1대 1로만 관계를 맺는다.
  남녀 관계의 배타성의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는 남녀간의 결합이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 육체의 통일적인 관계이며, 이 관계가 두 사람의 개체간의 상호 
원조와 공동 생활이라는 전면적인 관계라는 데에 있다. 우선 남녀간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는 서로가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받기를 원하고, 상대방을 특별하고 특수한 
한 개인으로서 사랑한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자신이 한 사람의 
개체로서 사랑받을 만하고, 사랑받고 있으며,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개인의 자아 
정체성과 정신적, 정서적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부부는 생활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남녀간, 부부간의 관계는 인간이 맺는 가장 
전면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직업적인 관계나 친구 관계와는 다르다. 부부는 
자식으로 묶여 있는 생활 공동체다. 이러한 전면적인 관계는 상호간의 성실성을 
요구하며, 제3자가 이 관계에 개입하는 것은 관계 자체를 붕괴시킨다. 친구와는 
육체적인 관계가 없으며 하나의 생활 단위를 이루지도 않고 그와 함께 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부부 관계의 책임의 정도는 친구 관계와 비할 수 없다. 
우정은 여러 대상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수적으로 많은 친구는 
질적으로 깊이 있는 관계를 어느 정도는 희생한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에 비해 생활 
공동체로서의 부부 관계의 성실성과 책임은 전적인 배타성을 요구한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행복할 때난 어려울 때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겠다는 결혼 서약은 그것을 표현해 준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서로를 보살피는 강력한 유대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배타적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남녀간의 애정이 상대방에 대한 몰두를 거쳐 
지속성과 일관성에 대한 바람으로 나가는 것은 이러한 본성의 요구이다.
  인간의 성욕 역시 처음부터 부부와 부모 자식의 이러한 관계에 부응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인간의 성욕은 처음부터 다른 동물과는 다르다. 동물의 성욕은 
보다 직접적으로 생리적인 성적 본능과 결부되어 있다. 원숭이의 구애는 암컷의 몸에 
변화가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이런 변화는 생리적인 요인들에 의한 것이고, 이는 
자동적으로 수컷의 성적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수컷은 이에 따라 구애 행위를 
계속하는데, 암컷의 발정에 영향을 받는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수컷들이 구애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암컷의 상태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에 비해 좀더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인간의 성욕은 동물과 같이 
직접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통제를 받을 수 있는 
유연하고 적응성이 있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인간에게서 특별히 
발달한 두뇌의 피질이 이성적 판단을 통해 성욕을 조절하고 통제한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영역이며, 그가 본능적인 성욕을 어떤 방향으로 쓸 것인가는 
그 판단과 조절 능력에 달려 있다. 이 판단과 조절 능력은 교육과 훈련에 의해서 
형성된다. 두뇌 피질이 발달하지 않은 동물들은 생리적인 변화와 외계의 자극에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인간의 성욕은 본능적인 충동에 더하여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작용하도록 처음부터 마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행위는 언제나 본능적 
충동과 이성적 판단의 통일적이고 복합적인 작용의 결과다. 이성적 판단이 본능적인 
성욕에 미치는 영향은 흔히 가정하는 것처럼 반드시 억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조화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본능 자체가 이를 통해서만 실현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자를 군혼적 욕망과 행동으로 몰아가는 것은 자연적인 충동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부장제라는 인위적인 제도다. 가부장제는 남자의 뇌를 군혼적인 욕망과 
그것을 합리화하고 강변하는 논리로 길들인다. 가부장제는 남성의 뇌에 성욕을 
조절하고 통제할 이성적인 훈련을 시키지 않으며, 나아가 이성적인 판단을 가부장적인 
기준에 의해 하도록 만든다.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는 군혼적 욕구 자체를 생산한다. 
그것은 가부장제가 부부간의 사랑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사랑을 
소외시킨 대신 남성에게 그에 대한 보상으로 군혼적 욕망을 제공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계급 제도와 가부장제는 사랑이 없는 결혼을 일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서로를 사랑하기를 원하지만, 가부장제는 이를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가부장제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높은 담을 쌓으며,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고, 남자는 여자를 멸시하고, 여자는 남자를 소원하고 억압적인 존재로 
느끼게 한다. 서로에게 낯설고 불평등한 존재들 사이에 정신적인 사랑 같은 것이 싹틀 
수 없다. 그리하여 남녀 모두가 부부 관계에서 그들이 바라는 것을 충족시킬 수 없다. 
여자는 그러한 불만을 자식에 대한 애정으로 해소하지만, 가부장제 의해 
자식으로부터조차 체계적으로 배제당하는 남성들은 그것을 결혼 바깥의 관계에서 
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남자를 외도로 몰아가는 것조차도 순전히 
본능적인 육체적 욕구라기 보다는 정신적인 욕구다.
    * 외도의 배경
  혼외 관계의 가장 큰 원인은 사랑이 없는 결혼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결혼이 인간의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감정과 유리되어 계급적 질서, 신분이나 금전에 의해 
좌우되면서부터 결혼 이외의 관계에서 애정을 구하려는 시도는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결혼에서 애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을수록 애정이 결혼 밖으로 흘러나갈 가능성은 
높아진다.
  따라서 금전적 고려가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는 유산 계급의 
결혼에서 외도가 가장 빈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본가 계급에서 남편의 외도가 
가장 빈발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여자들의 사랑(?)을 살 수 
있는 능력(돈)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외도는 결혼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비싸게 
치인다. 또 하나의 이유는 사회적 지위와 명예 때문에 이혼보다는 껍데기뿐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을 택하는 것도 이들 계급 편이 훨씬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랑 없이는 결혼이 반드시 금전 결혼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일시적인 충동에 몸을 맡기고, 이것이 임신과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리하여 애정이 식어 버린 결혼의 보상으로 다시 일시적인 충동에 몸을 
맡기려는 충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 일시적인 충동은 '남자로서' 
한번쯤 그럴 수 있다는 무책임하고 치기어린 속셈에서 노안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 
결혼한 경우에도, 그리고 결혼 생활을 파괴할 만한 불만이 없는 경우에도 종종 
남자들은 바람을 피운다. 자신의 '남자다움'을 확인하고 싶어서, 또는 가족이라는 
무거운 부담과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관계에 대한 망상에서, 아니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에 대한 신선한 자극을 찾아서,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확인하고 
싶어서. 이 모든 경우에 외도의 충동은 가부장제가 보장해 주는 남자의 유리한 위치와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남자다움은 완전히 가부장제가 규정한 것이다. 이혼을 원하는 
것도 아니면서 외도를 하는 것은 이중으로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무책임은 종종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다. 그러나 아내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고, 
가정에 불행을 초래하며, 또 다른 여자의 삶을 왜곡시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이라고 불릴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이기적인 욕망과 무분별한 충동에 지나지 
않으며, 사랑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사실, 외도의 경력이 많은 남자들이 사랑이 
가득한 심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흔히 그 반대인 것은 어떤 경우에도 외도는 
기본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심지어 자식까자)을 짓밟으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고, 상대의 약점을 악용하는 것이며, 타인의 감정적, 정서적 
요구와 고통에 대한 불감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이렇게 순수하게 
자기 중심적인 욕구를 배양한다.
  '남자다움'과 '사랑'의 가면 뒤에는 여자를 자신과 대등한 인격으로 보지않고 
소유물로 보는 가부장적 사고, 가부장적 우월성과 특권을 누리려는 욕구, 아내가 
경제적 무능력과 자녀 문제, 사회적 인식 등으로 인해 이혼하려 들지는 못할 것이라는 
계산, 이런 것들이 자리잡고 있다. 외도는 결코 부부사이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아내 구타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깔려 
있으며, 이를 지지해 주는 사회 체제가 깔려 있다.
  거의 모든 남자들은 아내가 바람이 난다면 당장 끝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성들은 참혹하게 짓밟히는 모멸감과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분노와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무능력, 이혼한 여자에 대한 편견, 이혼한 부모를 가진 자식들이 
겪어야 하는 갖가지 어려움과 고통에 대한 고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눌러 참고 사는 
것이다.
  외도는 남편의 우위와 지배를 뒷받침해 주는 가부장제를 등에 업고 남편들이 
아내에게 휘두르는 정신적 폭력이다.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들이 그렇듯이 외도를 하는 
남편들도 대개 남자가 우월하다는 가부장적 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신이 외도를 
하더라도 아내가 참는 수밖에 없을 거라고 믿고 그런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구타하는 남편들이 그렇듯이 외도를 하는 남편들도 외도를 자신의 가부장적 지배를 
확립하고, 이를 행사하며, 확인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삼고 있다. 외도가 남자다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우월자의 지위 확인이라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내 구타와 마찬가지로 외도 역시 자식들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외도는 이미 결혼과 가족 관계에 치명적인 손상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식들은 내용적으로 붕괴된 가정에서 자라나게 되며, 그로 인해 정서적,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게 된다. 일부 일처제에 충실한 것은 곧 자기 자식에게 충실한 것이며 반대로 
외도는 배우자뿐 아니라 그 자식에 대한 배반이다. 대개의 경우 아버지가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식들의 자아에 커다란 상처를 입힌다. 
외도는(그가 의도하든 안하든)자녀의 출생에 대한 저주이며, 그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다. 어린이들은 막연히 아버지가 외도를 하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고 
죄책감을 가지며,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식었다고 느끼거나 아버지가 자신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고 느낌으로써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자녀들이 입는 이런 상처는 
그것이 어린 시기에 일어나기 때문에 더욱더 치명적인 것이다. 이런 상처로 인하여 
많은 인격상, 인간 관계상의 장애와 곤란이 생겨난다. 이런 어린이들은 난폭하고 
무자비하고 산만하게 되거나 반대로 수동적이고 자신감이 없고 내성적이 되기 쉽다. 
그리고 자신과 세상에 대해 비관적이고 부정적으로 된다. 특히 남자 아이의 경우는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태도를 무의식중에 닮게 되고, 여자 아이의 경우에는 남자에 
대한 피해 의식과 불신을 갖게 된다. 아내 구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외도를 
한 가정의 자식이 자라서 다시 외도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들이 긍정적인 
자아 동일시의 대상을 갖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인격적인 결함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가부장제가 얼마나 인간의 심성을 황폐하게 
하는가를 확인하게 된다.
  여자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결혼이 사랑의 또하나의 출발점이 
아니라 사랑의 골인 지점, 종점을 의미한다. 물건을 차지하기 위한 열렬한 노력은 이제 
끝났다. 목표는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그의 할 일은 끝났다. 그는 그의 집에 아내를 
가져다 놓았다. 이로써 아내와의 지지한 관계를 위한 노력은 막을 내린다. 아내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흥미를 잃는 것이다. 소유로서의 사랑은 결혼하는 순간(혹은 
보다 나쁜 경우, 단지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에 모두 달성된다.
  그리고 이제 그는 다른 대상을 향한다. 아내와의 관계를 보다 깊이 있게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안중에 없다. 끊임없이 목표를 바꾸어 나가는 정열, 거기에 있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 단지 소유욕, 이기적인 탐욕이다. 앞의 사례에서 나이들어 
배가 나왔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매력이 없고, 따라서 남자가 바람피우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의 사고를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여성을 자신과 평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물건으로 보는 태도에서 나온다.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데 외모와 성적인 매력은 
하나의 요소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도, 가장 중요한 요인일 수도 없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인 애정은 언제나 상대방의 정신을 무시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기 자신의 정신도 무시된다. 상대에게서 육체적 욕구만을 추구함으로써 그 자신 
역시 단지 육체적인 존재가 된다. 그는 상대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신도 황폐하게 
하며, 그러므로 그의 사랑은 자신에게나 상대에게나 정신과 정서를 풍부하게 하는 
대신 이를 파괴한다. 이런 파괴로서의 사랑의 극한이 바로 매춘이다.
    (4) 매춘
    * 매춘의 천국
  이대 앞에서 아현동 고개를 넘어가다 보면 매우 아이러니칼한 풍경을 보게 된다. 
'첫발자욱', '새색시' 등의 간판 아래 순결을 상징한다는 순백색 웨딩드레스의 눈부신 
행렬이 끝나는 바로 그 옆에 붉은 빛 조명이 새어나오는 '유혹'이니 '여왕벌'이니 하는 
술집이 붙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결혼 제도의 단면이고, "신성한 결혼", 
"혼인의 순결"의 실질적인 의미다.
  매춘의 역사는 길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만큼 번성하고, 모든 남성을 타락으로 
이끌었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역사상 최초로 일부 일처제를 법으로 확립한 
자본주의 시대만큼 일부 일처제에 대한 배반이 일상화된 적도 없었다.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 일부 일처제는 축첩과 공창의 폐지라는 명백히 여자쪽 
권리의 신장으로서 보다 확고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곧 남성의 일부다처 권리의 
자동적인 포기를 뜻하지는 않았다. 부르주아 사회는 신분의 권리 대신 돈의 권리를 
대치했다. 축첩을 할 권리는 없어졌지만, 그대신 무소불능의 돈의 권리가 법률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한편에는 그 사회의 대다수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돈을 가진 
소수의 부르주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절대적,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 그 어떤 법적인 뒷받침이 없더라도(아니 법으로 금하더라도) 매춘이 
극성스럽게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매춘이 많이 행해진다. 외국 
남성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나서 가장 놀라는 것 중의 하나는 상품화된 성을 마음껏 
즐기는 남자의 모습이라고 한다. 서구 사회와 비교해 볼 때는 물론이고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도 우리 사회의 성 매매 조직은 대단히 놀라울 정도로 번창해 있다. 
성 매매에 관련되는 여성의 수와 빈도에 관한 비교적 보수적인 추측에 근거한 통계를 
보면 20세 이상의 남성은 한 달에 1.1 회의 상품화된 성행위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서구 사회의 0.032 회에 비해 무려 40배가 높다.(주33)
  이는 우리나라에서 성이 개방되고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여성에게만 순결의 의무를 부과하는 잘못된 성윤리가 널리 퍼져 있고, 남녀의 
자유롭고 바람직한 교제가 가로막혀 있으며, 성이 억압되고 보다 심하게 남녀 관계가 
왜곡되어 있다는 표시다. 아울러 선진국에 비해 특히 심각한 우리나라의 남녀 차별과 
상대적 빈곤, 실업 문제를 드러내 주며, 황금 만능과 인권 경시의 풍조가 만연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 성적, 도덕적 타락은 우리 사회의 매우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되었다. "매춘의 
천국"이라는 국제적 명성에 걸맞게 우리나라 도시의 거리는 가는 곳마다 호텔, 여관, 
룸 살롱, 요정, 술집으로 가득 차 있고, 심지어 다방과 이발소, 사우나탕까지 오염이 
되었다.
  타락과 부패는 거의 일상사로서 우리의 주변에 널려 있다. 1988 년 12월 23일 
하루의 신문 사회면만 봐도 자기 동생이나 자식과 같은 미성년자들에게 음란 비디오를 
보여주거나 국민학교 여학생에게 윤락 행위를 시켜 돈을 버는 사람들, 퇴폐 영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가 잇따라 실려 있다. 이들이 "재수없게도" "연말연시 일제 
단속"이라는 연례 행사에 맛뵈기로 걸렸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고, 
"전면 단속"이라는 것도 도망갈 구멍을 터주고 소란만 피우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상식이다. 이런 소란으로는 그 잔뿌리도 다칠수 없을 만큼 도덕적 타락의 뿌리는 
매우 깊을 뿐 아니라, 이 사회의 근간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타락상 또한 
엄청나다.
    * 현대판 노^36^예 사냥
  우리 사회의 도덕적 위기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최근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는 소동을 빚고 있는 인신 매매다. 인신 매매는 이미 6,70 년대부터 행해졌는데 
최근에 와서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일간 신문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인신 매매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길가는 
소녀 때려 실신시킨 뒤 매매, 전매", "역, 터미널 심야 다방서 여고생, 여공 등에 접근, 
취직시켜 주겠다며 유인, 말 안들으면 흉기 협박", "공원에서 10 대 소녀 등 모두 18 
명을 유인해 지방 도시의 윤락가에 팔아넘겨",(주34) "20 대 청년 등 속칭 '빠리꾼' 2 
명이 취직시켜 주겠다며 여관으로 유인한 후 폭행하고 다음 날 서울 강동구 
천호동 속칭 텍사스 골목의 송하 식당에 76 만원을 받고 팔아 넘겨."(주35)

  60 년대 말부터 70 년대 초반까지 많았던 수법으로 일명 '탕치기'라는 강제 납치가 
아직도 행해지고 있는데, 그 수법은 30 내지 40 대의 아주머니가 중고등 학생 정도의 
소녀에게 "서울역이 어디냐, 거기까지 데려다 주면 사례비를 주겠다"고 유인해 
따라오면 바로 기둥 서방에게 팔아 넘기는 방법이다. 기둥 서방에게 넘겨지면 제일 
먼저 성적 학대를 당하게 되는데, 하루 10 명 내지 15 명 정도가 드나들며 강간을 
하는 것이다. 20여일 동안 그렇게 하면서 그 동안에 일부러 도망갈 기회를 주고 
어김없이 다시 잡혀 오게 만든다.
  그러는 과정에서 도저히 탈출할 수 없다고 느끼도록 만든다. 그래서 매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강제 납치에는 나이 어린 소녀의 희생이 많은데, 그것은 '영계 
백숙'이라고 해서 어린 소녀를 찾는 손님들의 식욕을 돋구기 위해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데로 한번 팔리면 아편, 히로뽕, 대마초 등을 이용하여 발을 뺄 수 없도록 
만든다. 이런 조직의 인신 매매꾼이나 기둥 서방들은 경찰의 범인 검거에 정보원 
역할을 해주고 있어 은밀히 공생하는 측면이 있다. 이들 경찰의 단손을 피하느라 
뜯기는 게 많아서 하룻밤에 3 만 내지 35,000원에서 방값, 포주, 식비 등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7,000 내지 8,000원 정도로 도대체 돈을 벌 수가 없다. 그나마도 기둥 
서방에게 다 빨리는데 기둥 서방들이 그들을 보호해 주기 때문에 그들이 없으면 
영업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매춘에서 벗어날 수 없다.(주36)
    * 개만도 못한 팔자
  이놈의 생활 지긋지긋해서 그만 두려고 해도 마음대로 할 수도 없어요. 고향의 
부모님께 죄진 것하고 거짓말이 탄로날까봐 당장 그만둘 수도 없어요. 부모님은 제가 
좋은 직장에서 잘 있는 줄 알고 돈도 공장에 다닐 때보다 많이 부쳐드렸어요. 낙태를 
세 번씩이나 했는데 피임약을 먹으면 속이 이상하고 안좋더라구요. 체질에 안맞는 
모양이어요. 가끔 마이신을 먹지만 속이 안좋아요. 콘돔을 사용하는 남자들과 마구 
관계를 하고 나면 쓰라리고 따끔따끔해요. 여기 오는 손님은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데 
그 중에는 배운 사람이 더 많은데 꼭 정신 이상자들 같아요. 공장 다닐 때 친구도 
창피해서 찾아가지 못해요. 여기서 있는 날까지 있다가 적당히 그만둬야 하는데 
시집가서 애낳고 살긴 글렀어요. 성질은 나빠만 지는데 마음은 더 넓어지는 것 
같아요. 실은 마음이 넓어진 게 아니라 모든 게 귀찮고 재미가 없는 거지요. 같이 
있는 언니 얘기론 가축 병원에서 진돗개 교미 붙이는 데도 몇 십만원 받는대요. 긴 밤 
자고 나도 겨우 손에는 7,8천원 들어오는 우리 팔자보다 개팔자가 더 낫다고요. 나는 
개보다 못한 처지지요. 그래도 옛날 공장 다닐 때보다야 백번 좋은 대우지요. 
한마디로 개 같은 세상이고 개가 살기 좋은 세상이지요.(주37)

  매춘 여성은 부르주아 사회의 인간 소외의 극한을 보여 준다. 그것은 매춘 여성이 
어떤 점에서도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춘 여성은 인간이 아닌 존재, 
단지 물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마치 빵이 그렇듯이 욕구를 채워주는 대상일 
뿐이다. 노동자가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이 노동을 하고,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없다. 이들의 삶 전체가 소외 자체다. 
이들은 자신을 단순한 도구로 삼는 인간들과 자신이 단순한 도구가 되는 관계만을 
맺는다.
  이들은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존재지만 우리 사회에서 버려진 존재이고, 이 
사회의 밖에 존재한다. 그들에게는 이 사회의 도덕적 시민권이 없다. 따라서 거의 
아무런 권리도 없다. 공적인 사회 체제 그 어느 것의 보호나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이 사회는 이들을 있어선 안될 
존재로 규정했다. 그들은 매일매일 그 존재가 부정당하면서 살고 있다. 매춘 여성은 
자본주의 사회의 빈곤과 실업, 돈의 지배, 그리고 잘못된 성윤리와 가부장적인 가족의 
희생물이다. 이들 여성이 매춘을 하게 되는 가장 큰 동기는 빈곤이고, 그 다음은 강간 
등의 성폭행 경험과 가정 불화로 인한 가출이며, 세번째는 실연 등 남녀 관계에서의 
상처다(대개는 육체 관계로까지 발전했거나 임신까지 한 뒤 버림받은 경우). 지금도 
공단 게시판이나 공단 주변의 전봇대를 비롯하여 유수한 일간 신문에 이르기까지 
"침식 제공 월수 ^456,356,356,123^만원 초보자 환영"이라는 살롱 광고를 흔히 볼 수 
있다. 실직, 저임금에 중노동, 가족 부양의 부담 등으로 허덕이는 막다른 골목의 젊은 
여성들, 노동력을 파는 것조차 거부당한 여성들이 이제 자기 몸을 파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련한 희생물 위에서 타락한 포주들, 기둥 서방들, 인신 매매꾼들뿐 
아니라 그보다 조금도 덜 타락하지 않은 경찰을 비롯한 공적인 체제가 그 피를 빨고 
있으며, 나아가 타락과 인간 소외를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하고 있는 부르주아 사회 
체제 자체가 의존하고 있다.
    * 하늘을 찌르는 악취
  엥겔스가 말했듯이 매춘은 여자보다는 남자를 타락시키며, 그것도 거의 모든 남자를 
타락시킨다.

  그러나 전통적인 난혼이 우리 시대에 와서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의 영향을 받아 이 
생산에 적응하게 되면 될수록, 즉 매춘이 공공연해질수록 난혼은 더욱더 퇴폐적인 
작용을 한다. 더욱이 그것은 여자보다도 남자를 훨씬 더 타락시킨다. 매춘은 여자들 
중 불행히도 그런 길에 빠지게 된 사람들만을 타락시키며, 그것도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남자의 경우에 매춘은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그들 전체를 타락시킨다.(주38)

  매춘을 낳는 타락의 근원은 부르주아다. 금전적인 목적에 의한 결혼의 바깥에서 
성적인 만족을 찾으려는 부르주아의 향락욕은 그들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산으로 
뒷받침되어 끝을 알 수 없이 커져간다. 부르주아의 이러한 향락욕과 향락력에 
부응하여 향락이 하나의 산업으로 번성하고 있다. 부르주아는 매춘을 만들어 내고, 
소비하는 근원지다. YMCA가 1989 년 7월 1일 조사 발표한 바에 따르면 룸 살롱에서 
한 사람이 한 번에 쓰는 돈은 평균 12만 4천 4백 원으로 도시 근로자 평균 임금 63 
만 1,450원(88 년 12월 현재)의 약 20%에 해당한다. 5 명이 모여 앉으면 최소한 
노동자 한 사람의 한달 월급을 하루에 쓰는 셈이다. 이런 향락을 누리는 것이 소수의 
부유층에 한정되어 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환락의 중심지라는 강남 신시가지의 O와 H 룸 살롱의 경우는 수십억대의 투자로 
바닥 자체가 수족관이며, 수입 가구와 수입 대리석과 수입 조명 시설을 갖추어 방 
하나 꾸미는 데 서민 아파트 몇 채 값을 상회한 걸로 알려졌다. 그런 룸 살롱의 
시가는 생산 공장 한 개 시설비와 맞먹는다는 계산이다. 1 만 6천 원짜리 양주 한 
병이 이런 자리에서 뚜껑만 따도 일금 10 만원, 우유 한 잔에 5천 원, 그래서 쉽게 
1백만원 한 장이 된다. 대형 업소의 1일 매출액이 최하 1천만원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살롱의 호스티스였다가 지금은 살롱을 자영하고 있는 모씨는 "공직자와 
대기업의 간부, 중소 기업 경영자와 특정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주종을 
이루죠"라고 말했다.(주39)

  그들이 뿌리는 돈의 액수만큼이나 그 타락상 또한 엄청나다. 한 호스티스는 이들의 
도덕적 타락을 죽음으로 고발했다.

  죽음 부른 '벌주 먹이기' 호스티스 심장 마비 사망

  술집 호스티스가 외국인 바이어를 접대하는 손님방에서 '옷벗기기 게임'의 벌주로 
손님들이 강제로 권해 마신 술에 만취돼 심장 마비로 숨져. 정양은 17일 밤 8시 
40분경부터 이 요정 특실에서 손님 김모씨(48세, 덕유 상사 대표)가 데려온 일본인 4 
명 등 손님 5 명을 동료 호스티스 5 명과 함께 접대했는데 손님들이 강제로 권한 국산 
양주를 무리하게 마셨다는 것이다.
  정양과 함께 술자리에 있었던 이미례 양(27세, 가명)에 따르면 이날 술자리에서 
두세 잔씩의 술잔이 오간 뒤 김씨의 제안으로 과일에 꽂힌 과일꽂이 중 짧은 것을 
뽑은 사람이 벌로 옷을 하나씩 벗는 '옷벗기 게임'을 시작했다는 것.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정양이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많이 벌칙에 걸렸으나 정양은 
옷벗기를 매우 꺼려했다는 것이다.
  이때 김씨가 정양에게 "옷을 벗기 싫으면 그대신 벌주를 들어라"고 요구했고 정양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옷을 벗는 대신 양주 한 잔씩 모두 다섯 잔을 비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씨 등은 이에 그치지 않고 술에 취한 정양에게 재차 옷벗기를 요구, 
정양이 이를 거부하자 벌주잔을 양주잔에서 맥주컵으로 바꾸도록 강요. 정양은 이 
잔으로 국산 양주 세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는 것.
  이 후 정양이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에 빠지자 보다 못한 일본 손님이 "술을 토하게 
하고 쉬게 하는 게 좋겠다"고 제의했으나 김씨 등이 계속 술을 강요하다 "재수없다. 
끌어내라"고 소리쳤고 종업원들이 정양을 데리고 나와 안방에 뉘었다는 것이다. 
정양의 시체는 영등포 한강 성심 병원에 안치됐다가 지난 20일 화장됐다.
  이날 정양의 고향인 전남 광주에서 연락받고 급히 올라온 정양의 가족들은 
"서울에서 백화점에 근무한다며 매달 꼬박꼬박 동생들의 학비를 송금해 주더니 딸이 
요식 업소에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며 통곡했다.(주40)

  일간지들은 앞을 다투어 이 사건을 대서 특필하고 목청을 높여 이 사회의 도덕성을 
한탄했다.

  아무리 험하고 짖궂은 술 손님 시중의 직업을 가진 여성이라 하더라도, 수치심의 
본능은 있는 법이거늘, 술과 옷벗기의 양자 택일을 돈의 위력을 빌어 강요하는 것은 
술먹는 개 이상의 악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술자리라는 게 흥청망청의 지경으로 
'발전'하다 보면 정상적인 눈으로는 보아주기 힘든 상황을 연출하게 마련이라는 상식을 
내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황 중에서도 마지막 한계는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도덕군자일 수는 
없고, 말은 그럴듯 하면서도 행동은 어림없이 퇴폐성을 탐하는 짓거리를 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니취 상태에서 깨어나는 순간 부끄러움을 
회복하는 게 인간이고 그런 인간들의 집단이 사회를 형성한다면, 이 사회도 이제는 
'취해있는 모럴'을 두들겨 깨워야 한다.(주41)

  그가 한탄하는 것은 험하고 짖궂은 술 손님 시중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이 생겨나야 
하는 사회 구조나 그런 여성들을 잠시의 희롱 상대로 삼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그는 
정상적인 눈으로 보아주기 힘든 상황이 생기는 것까지도 상식으로 눈감아 준다. 술 
손님이 험하고 짖궂은 짓을 하는 것은 당연한 전제이기까지 하다. 그가 한탄하는 것은 
단지 '마지막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이 마지막 한계에 
직면해서야 비로서 도덕성의 파국을 느낀다는 점에서 거의 도덕성이 얼마나 무디고 
불철저하며, "퇴폐를 탐하는 짓거리"에 이미 철저히 물들어 있는가를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우리 사회 많은 남성들의 도덕성의 현주소다. 매춘과 타락은 
자본가들만의 특권은 아니다. 여자의 순결에 대해 열을 올리는 남자들일수록 그 
자신은 이미 순결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각계 각층의 
남성들이 각양 각색의 성 매매와 접하고 있으며 타락에 물들고 있다. 그리고 
"길거리의 여자들이 다 그렇게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타락한 것은 길거리의 
여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그런 눈으로밖에 볼 수 없게 된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는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여자를 술자리나 하룻밤의 희롱물로 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잘못인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남성들이 많다. 게다가 더 나아가서 
이런 도덕적 타락이 남자다움의 징표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남자들이 모여 룸 
살롱에 가자고 하는데 싫다고 하면 따돌림을 받고 남자답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므로 이 타락의 시대에 남자다움이란 약자의 편에 서서 불의한 사회 구조나 
도덕적 부패와 맞서는 진정한 용기, 한 여성에게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성실하고 
순수한 애정과는 반대로 강자의 지위를 이용하여 약자의 불행에 편승하고, 인간을 
돈의 힘을 빌어 희롱하고, 자신의 이기적이고 추악한 욕망을 사회 구조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비겁함의 대명사가 되었다.(주42) 그리하여 진정으로 용기있는 자가 
비겁한 무리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여기서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름도 잃어버린 한 호스티스의 생명을 건 항의는 범람하는 타락의 물결에 
흔적도 없이 쓸려가 버렸고, 타락의 "마지막 한계"는 계속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세익스피어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악취를 풍기는" 도덕적 부패를 한탄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남성들은 너무 심한 악취에 코가 문드러져 버려서 악취를 악취로 
느끼지조차 못하게 되어 버렸다. 타락을 타락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더한 
타락은 없다.

    * 매춘 권하는 사회
  무엇이 매춘을 이렇게 광범위한 사회 현상으로 만드는가?
  매춘에서의 성관계는 인간적인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더구나 그것은 
자연적인 것도 아니다. 남자들 중에서도 매춘을 통해 자신이 고양되고, 인간다워지고, 
사랑이 풍부해진다고 느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그들은(설사 
명료한 의식 속에서가 아닐지라도) 자신이 저열해지고, 추악한 욕구에 몸을 맡기고 
있으며, 타락하고 있다고 느낀다. 매춘 행위는 남을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의 도구로 
삼는 것이고, 이는 상대방의 인간적 본성을 부정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런 비인간적인 
관계에서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비인간적으로 되었다는 표시다.
  매춘에는 성관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가장 큰 즐거움의 근원인 정신적인 
요소가 없다. 아니 없는 것이 아니라, 비뚤어지고 뒤틀리고 사악해진 형태로 있다. 
사실, 매춘이 광범해지는 것은 이렇게 비뚤어지고 뒤틀린 정신, 사악한 욕구를 이 
사회가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성은 원래 상호적인 것이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여성의 성을 억압한다. 상호적인 
성의 한 편이 소외되자, 성 그 자체가 소외된다. 성은 남녀간의 사랑의 표현이며, 그럴 
때만이 남녀 모두에게 삶의 동력이 된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남녀의 관계를 주인과 
노^36^예, 인간과 사물의 관계로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가부장제는 사랑을 억압한다. 
또 성을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사랑이 없는 성을 일반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사랑과 성과 출산을 분리시켰다. 사랑과 출산과 분리된 성은 인간 사회에서 그 
정당하고 정상적이고 건강한 자리를 잃고 무언가 수치스럽고 저열하고 인간답지 못한 
것, 따라서 감추어야 하고, 마치 없는 듯이 행동해야 하는 은밀한 것이 되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그것은 마치 공인된 범죄 행위와도 같은 것이다.
  여성의 성을 억압한 대가는 남성의 성도 왜곡되는 것이다. 남성의 성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 자유는 사랑할 자유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대신 타락과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하여 성은 뒤틀어졌다.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 되는 대신, 지배와 
소유의 표현, 다른 한 편에게 있어서는 피지배와 파괴, 자기 부정의 표현이 되었다. 
성이 왜곡되어 수치스러운 범죄와도 같이 숨겨야 하는 것이 되자, 이번에는 성에 대한 
인식 부족과 왜곡된 인식이 다시 보다 심한 성의 왜곡을 낳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에서 억압된 성은 다른 한편에서 비정상적이고 불건강한 형태로 과장되고 
부풀려져 재생산되었다. 결혼 관계의 외부에서 성적인 만족을 구하는 타락한 
부르주아야말로 매춘에 대한 수요의 근원지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자신이 매춘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이를 
생산한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여자들을 실업으로 몰아넣어 몸을 팔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여성의 성이 상품이 되자 자본은 이것을 다시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다. 섹스 산업의 성장은 가부장제 속에서 소외된 성과 자본의 
후안무치한 탐욕과 황금 숭배의 합작품이다.
  오늘날 우리는 외설물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거리의 가판대는 유수한 신문사와 
잡지사가 발행하는 외설 신문, 외설 잡지로 가득 차 있고 외설 영화, 외설 비디오, 
외설 쇼, 외설 만화, 심지어 TV에 이르기까지 눈길 가는 곳마다 외설물들이 넘쳐 
흐른다.
  자본주의적 상혼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성은 인생의 구원이다. 그것은 자극적일수록 
좋다. 일회적이고, 복잡하지 않고, 더 나아가 폭력적이고 한마디로 비인간적일수록 
좋다. 이런 외설물들은 성을 사랑의 동력으로가 아니라 타락과 추함과 소외의 
근원으로 만들며, 구원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망치는 근원으로 만든다.
  이런 외설물의 범람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성이 억압되고 소외되어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어디를 가나 성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흐르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은 성이 수치스럽고 비밀스러우며, 건강하지 못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넘쳐흐르는 성은 그것이 가진 좋은 요소는 모조리 제거해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의 범람은 성의 억압의 표시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성교육은 우리 나라 
학교의 정규적인 교과 내용에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정상적인 통로는 거의 전무하다. 그리하여 여성들 사이에서 성에 관한 놀랄 
만한 무지가 널리 존재하며, 남성들 사이에서는 놀랄 만한 오해가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지식은 거의 대부분이 성을 왜곡시키는 외설물에서 얻어진 것이거나 이를 
구전으로 전해들은 것들이다. 성이 인간에게 가지는 중요성뿐 아니라, 그것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으키고 있는 문제들을 생각한다면 성에 대한 이런 무지는 거의 
야만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바로 이런 야만적인 태도가 우리 사회의 성에 대한 
태도인 것이다. 이런 외설물과 향락 산업은 성에 대한 수요와 그에 대한 태도와 
의식을 생산한다.
  "생산은 생산에 의해 비로소 대상으로서 창조되는 생산물을 소비자에게 
욕망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소비를 생산한다. 그 때문에 생산은 소비의 대상, 소비의 
방식, 소비의 충동을 생산하는 것이다." 매춘을 향하는 성적 욕망은 사실 
자연적이라기보다는 이런 충동질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매춘에 
대한 수요를 만드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매춘은 인간 소외의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다른 한편 인간 소외에 의해 요구되고 있다.

  성의 사회적 기능이란 즐거움 없는 노동과 희망 없는 생활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보상하는 것으로써 소용되는 것은 아닐까? 부르주아 성 문화는 마치 "산업 재해 
수당"과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는 성과 그 '기쁨'(그러나 실제로 어떤 기쁨이고 누구의 
기쁨일까?)을 괴로움의 대가로, 심심풀이로 만들면서 동시에 그것을 급여의 일부로 
만들었다. 종군 위안부는 우리들 여성에게 있어서 영원한 추문이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즉 그것이 '여성의 서비스'(즉 '물건'으로서의 여성)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수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백질과 의식과 TV와 교육과 여가와 똑같이 노동력의 
재생산에 첨가되는 생활 필수품이다.
  사람들의 대다수가 창조의 권리를 빼앗기고 있는 사회, 노동이 이미 급여 가치 
이외의 의미를 갖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자유 시간 속의 성이란, 개인 사이의 
관계가 갖는 특별한 내용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각 개인이 사회로부터 성적 소비 
속으로 도피하는 수단이 된다. 이 도피는 분명 환상일 수밖에 없다. 도피한 사람은 
다시 거기서 이 사회의 모든 흉악한 특징을 다른 형태로 발견한다.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 상품 가치, 이기주의 소비를 위한 소비 등등.(주43)

  그러므로 가부장제에 의한 성의 소외와 자본에 의한 인간 소외는 정말 
천생연분이다. 돈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금전적 가치로 평가받는 사회에서, 성이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하나의 단순한 소비, 욕망의 충족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이다. 또 이것이야말로 성의 소외의 극한적인 표현이다. 여기서는 쌍방이 모두 
하나의 물질, 동물의 차원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줌으로써 
자신이 더욱 풍부해지는 것이라면 이 이기적인 소비로서의 성이 사랑과는 정반대에 
선다는 것도 명백하다.
  뿐만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의 위계 구조(사회와 가족 모두의)는 사회 성원에게 
가학적인 충동을 심는다. 모든 인간 관계는 투쟁이며 한판 승부며 이를 통해서 
상대방을 멋지게 때려 눕히지 않으면 안되는 결전장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상대방이 굴복하면 그에게서 완전히 관심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가학적인 충동에 
가장 적합한 상대는 창녀다.
  창녀는 학대받기 위해 존재한다. 가장 저열한 남자도 창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가장 비천한 남자도 창녀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또 다른 하나의 주체와의 
관계를 맺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없다. 필요한 것은 돈 뿐이다. 돈으로 다른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한 자본가들은 그들의 돈의 위력을 행사하고, 지배를 확인하고, 
가정에는 없는 사랑(?)을 얻기 위해서 매춘부를 산다. 사회의 다른 곳에서 학대받고 
지배당하는 남자들, 돈의 위력 때문에 쓸개 빠진 듯이 행동해야 하는 남자들은 
자신들이 당한 분풀이를 하기 위해서, 자기 위안을 위해서, 자기 확인을 위해서, 돈 
앞에 무너진 자신의 자존심을 돈의 힘을 빌어 회복하기 위해서 창녀를 산다. 창녀의 
효용은 그녀가 만만한 존재라는 데 있다. 창녀에 대한 우위는 완벽하게 확립되어 
있다. 창녀는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녀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다. 그녀의 효용은 저주를 받는 데 있다. 창녀를 사면서 
남자들은 그녀에게 저주를 보탠다. 이 사회에 대한 저주, 지배자에 대한 저주, 돈에 
대한 저주를 모두 창녀에게 보낸다. 도스토옙스끼가 그의 여러 소설들에서 창녀를 
대지에 비유한 것은 의미가 깊다.
  그 구성원의 일부를 동물만도 못한 삶에 처박고, 이를 인구의 절반이 일상사로서 
받아들이고 이에 가담하고 있는 사회,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 사회의 위선적인 
실상이다.
    4) 새로운 가족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가부장적인 가족은 커다란 불행의 근원이다. 가정불화의 
대부분은 가부장제에 의해 생긴다. 이는 여성에게 보다 더 큰 불행을 가져오지만 
남자들 역시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 가부장제는 가족을 병들게 하고 병든 가족 관계는 
인간을 그 인격이 형성되는 어린 시절부터, 그리고 가장 내면적인 감정과 성격에 
이르기까지 병들게 한다. 가부장적 횡포는 이 질병의 증상일 뿐이다.
  인간이 자신을 동물과 구분하여 인간이 되기 위해 치른 수업료는 엄청난 것이다. 
인구의 대다수를 비인간적인 억압과 고통에 몰아넣는 것을 대가로 치뤄야했기 
때문이다. 노동에서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가족에서의 진보도 그 대가를 요구하는 지도 
모른다. 원래 야만적인 상태에 있었던 인간이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야만적인 수단, 
노^36^예제가 필요했듯이 인류의 절반이 타락하고 나머지 절반이 억압에 신음하는 
야만적인 시기를 경과하는 것은 가족과 사랑이 야만적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필요 
조건인 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눈 앞에서 가부장제가 급속히 무너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수천 년간 여성을 생지옥으로 몰아넣었던 가부장제는 생겨난 모든 것이 
그렇듯이 사라져 가고 있다. 가족과 남녀 관계는 최근 백여 년 간에 지금껏 수천 년 
동안의 변화보다 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그리고 이 새로 생겨나는 가족은 
남녀가 평등한 가족이 될 것이다. 원시 시대의 가족을 연구한 모오간은 다음과 같이 
썼다.

  가족이 네 가지의 형태를 차례로 밟아 오다가 지금은 다섯 번째의 형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형태가 장래에도 지속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나올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뿐이다. 즉 가족은 바로 과거에도 그랬듯이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발전할 것이며, 사회가 변함에 따라 변할 것이라는 것이다. 가족은 사회 제도의 한 
산물이므로 그 문화 발전 상태를 반영한다. 일부 일처제 가족은 문명 초기 이래 
개선되어 왔으며, 또 특히 최근에 와서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가일층 
완성되어 드디어 양성의 평등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다.

  원시 시대의 남녀 평등은 인류의 야만적인 상태에 기초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문명이 새로운 차원에서의 남녀 평등의 기초가 될 것이다. 가부장제는 자신을 낳은 
문명에 의해 소멸될 것이다.
  이러한 미래의 가족은 이미 노동자 계급의 가족 속에서 그 싹이 트고 있다. 사회적 
노동과 가사 노동을 함께 하며 사회의 진보와 가정의 행복을 위해 서로 협력해서 
살아가는 삶의 동반자로서의 부부 관계가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여성들의 자각과 투쟁 속에서 자라나지만, 남성들의 각성과 알을 깨고 나오려는 노력 
속에서도 자라나고 있다.

  나의 처는 내가 "당신은 나의 동지이자 연인이다" 라고 말하면 "내가 무슨 당신 
동지냐 딱까리지"라면서 면박을 준다. 나는 한때 여자는 동지이기 전에 여자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처를 대해 왔었다. 밥 짓고 맛있는 반찬 만들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그리고 그 다음에 노동 조합 활동을 하든지 뭘하든지. 그런데, 몇 년 전 나는 
노동 조합 운동과 관련되어 감옥에 갔던 적이 있다. 그때 나의 처는 '구속자 가족 
협의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는 주변 동료들을 보면서, 
또 다른 집 남편과 자기 남편을 비교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나에 
대해서도 '가정에서는 평균 이하의 나쁜 남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은 실행에 옮겨졌다. 즉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다. 나에 
대해서도 함께 가사일을 분담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그러나 처의 그러한 
노력은 나의 적극적인 배려와 나 자신의 충분한 반성이 없음으로 해서 커다란 진척을 
보지 못하고 정체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자에 대한 생각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진정한 노동 운동은 가정 내에서의 평등한 부부 관계, 동지적 관계와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 처가 여자이자 동지라면 참 좋겠다. 그래서 나의 고민을 진지하게 토론도 하고, 
서로의 부조간 부분은 함께 극복하도록 도와주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부의 동지적 관계를 그렇게 원했던 우리 처가 서서히 그러한 노력을 포기해 가는 
바로 그 시점에 나는 오히려 동지적 관계의 정당성에 대해 눈을 떠 나가기 시작했으나 
이미 때가 많이 늦었음이 피부적으로 느껴진다.
  동지는 무슨 얼어죽을 동지냐 그냥 이렇게 살다 죽으면 됐지. 운동은 너나 열심히 
해라 나는 집에서 애기보고 빨래하고 밥지을테니까.
  노동 해방, 인간 해방, 그리하여 여성 해방을 이루어내기 위해 운동한다는 놈의 
처께서 이렇게 나오시니 아찔하기도 하고 죽을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번쩍번쩍 드는 
것이다.
  한 사람은 '노동 운동'하고 한 사람은 '가사 노동' 하는 상태로는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서로 대화도 잘 안되며 집안 일들에도 상호 협조 체제가 안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부부 간의 참된 사랑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처가 동지였으면 아주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부터 나는 
처와 함께 가사 노동에서부터 노동 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같이 해나가도록 
더욱더 노력하겠다.(주44)

  나에겐 사랑스럽고 소중하고 똑똑한 딸 아이가 있다. 그런 내 딸에게 누가 순종과 
복종만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굳이 법을 들추지 않더라도, 한과 눈물의 세월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참아와야 했던 어제의 어머니 이제 다함께 이 땅에 
진정한 여성 해방이 되기까지 우리네 어머니들이 당해야 했던 한의 세월이 환희와 
기쁨이 넘치는 세상으로 되기까지 나의 작은 마음에서, 그리고 실제 행동에서 
실천적으로 보여 주리라 다짐해 본다.(주45)

  미래의 가족과 새로운 세대가 이러한 각성과 노력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 
가부장제의 역사는 엄격한 성별 분업과 사회 생활과 가정 생활, 일과 사랑, 공생활과 
사생활의 분리의 역사였다. 남자의 사회적 활동이 그의 가정적 무책임뿐만 아니라 
가정의 파괴와 사생활의 방종을 합리화시키고, 여자의 가정 내 역할이 그의 사회적 
활동의 희생을 요구하던 역사였다. 남자는 일을 위해 사랑 따위는 사소한 것이라 
배웠고, 여자는 사랑만이 자신을 바칠 유일한 것이라고 배워야 했다. 인간다운 
삶 그것은 노동과 인간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유적인 본질을 
실현하고 발전시키는 삶이다.
  새로운 가족은 사회 생활과 가정 생활, 일과 사랑, 공생활과 사생활을 통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우선, 모든 가족을 서로 대립하게 하고, 가족과 사회, 
공생활과 사생활을 대립시키는 적대 관계의 해소를 필요로 한다. 또한 남녀를 각각 
사회와 가정으로 분리시키는 분업 체계의 붕괴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남녀 관계는 
사회적 책임과 가정적 책임을 공유하고,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키도록 배우며, 일과 
사랑을 모두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는 남녀 사이에서 진정한 
동반자 관계로서 자라날 것이다.

    (주)
  1. 다른 일체의 것이 봉사해야 한는 어떤 목적이 있을 경우, 이 목적과 투쟁하는 그 
어떤 것도 이와 동드아한 권리를 갖지 못한다.(헤겔,'사랑에 대하여', 황태연 편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지양사, 1983, p, 207)
  2. 김숙경( 서산 팔봉중학교 2 학년, 여), 전인순 엮음, '생강 캐는 날', 온누리, 
1986, pp.22--23.
  3. 박노해, '노동의 새벽', p.20.
  4. 홍승아, '여성 노동의 사회적 존재 형태 및 그 성격에 관한 연구', p.87.
  5. 홍승아, 위의 글, p.87.
  6. 홍승아, 위의 글, p. 87.
  7. 현대종합목재 노동조합설립위원회가 1987 년 7,8월 대투쟁 당시 낸 유인물.
  8. '새마을 부녀회 전북지부 상담 사례', '조선일보', 1990. 10. 27.
  9. 윤재걸, '서울 공화국', 나남출판사, 1984.
  10. 마르크스, 엥겔스, '경제학 철학수고', 이론과 실천, 1985, p 193.
  11. '신랑감 제일 조건 학벌인가', 인천여성노동자회, '인천 여성 노동자', 1990. 
p.14.
  12.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푼짜리 가극', 임한순 역, '사천의 선인', 한마당, 1988, 
p.44.
  13. 줄리아 프레윗 브라운, 박오복, 이경순 역, '19세기 영국 사회와 소설', 열음사, 
1990. p.105.
  14. '신부감 제일 조건 외모인가', 인천여성노동자회, 앞의 책, p.15.
  15. 게일 킴벌, 평등한 부부', 한국여성개발원, 1988, p.68.
  16. 이하의 사례는 코완 킨더, 이희구 역, '현명한 여성의 어리석은 선택', 한마음사, 
1987, pp.62--66참조
  17. 그러나 핵가족은 노인 문제를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가부장제가 
폐지된다면 가장 좋은 형태는 딸이든 아들이든 자식이 늙은 부모를 모시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의 가부장적인 가족 구조에서는 이것이 흔히 억압과 불행의 
근원이다. 핵가족의 역할은 가부장적 관계를 폐지하는 과도적인 데에 있을 것이다.
  18. 한국여성개발원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부인은 남편을 따라야 한다"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이 도시 남성의 89.1%, 도시 여성의 76.3%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반대하는 사람은 도시 여성은 21.9%로 의식 변화를 보이고 있지만 도시 남성의 
경우는 9.7%에 불과하다. 한국여성개발우너, '여성 문제에 관한 국민 여론 조사', 
1985, p.48.
  19. 김종일, 앞의 글, 한국여성연구회, 앞의 책, p. 23.
  20. 다나까 미찌고, 김희은 역, '미혼의 당신에게', 백산서당 1983, p.23.
  21. 케일 킴벌, 앞의 책, p. 75.
  22. 헤겔, 황태연 편저, 앞의 책, p.213.
  23. 여성의 전화, '여성의 전화 개원 2주년 사례 연구 보고서', 1985, p.5--11.
  24. 이하 김광일 편저, '가정폭력', 탐구당, 1988 참조.
  25. '한국일보' 1983. 7. 16.
  26. '한국일보' 1983. 7. 26.
  27. '맥박 3 호', p.21.
  28. 폭발성 인격이란 충동 조절에 장애를 갖는 것을 말한다.
  29. 부인보호명령이 내려지면 남편은 쫓겨나 살면서 이혼, 별거, 혹은 부인에게 
용서를 받든지 다음 일을 결정해야 한다.
  30. '여성 신문', 1990. 8.31. p. 7.
  31. 이현숙, '가정 폭력을 보는 시각', 김광일 편저, 위의 책, p.242.
  32. '한겨레 신문', 1990. 7. 15.
  33. 장수입, '한국 사회의 성 매매와 남성 이데올로기', '또 하나의 문화', 제4집, 
p.87.
  34. '조선일보', 1988. 12.15.
  35. '조선일보', 1988. 12. 13.
  36. 여성의 전화, '인신 매매와 매춘 여성, 여서의 전화 성폭력 자료1'.
  37. 위의 책.
  38. 엥겔스, 김대웅 역, '가족의 기원', 아침, p.83.
  39. '조선일보', 1984. 6. 6.
  40. '동아일보', 1986. 11. 22.
  41. '동아일보', 1986. 11. 24. 사설.
  42. 한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집사람이 같은 직장에 있다가 결혼했기 때문에 나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네가 모르는 남자들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집사람의 기를 꺾기 위해서 일부러 술 마시고 고스톱 치며 늦게 들어가고 
기회가 있는 대로 며칠씩 집에도 안 들어갔다"(김효선, 허순희, '한국 남자, 낮에도 
뛰고 밤에도 뛴다', '또 하나의 문화', 제4 호, p.108). 술 마시고 고스톱 치고, 아내의 
기를 꺾기 위해 외박하는 "남자의 세계"는, 없는 편이 있는 것보다 휠씬 나을 것이다. 
사실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아주 졸렬하고 유치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으며, 이는 얼마 안있어 역사 박물관에서 먼지를 뒤집어 쓸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다.
  43. 클로디 브로이엘, '하늘의 절반', 동녘, 1985, p.194.
  44. 박성철(해고 노동자, 용접공), '아내와 동지', '인천 여성 노동자' 1990. 3. 11.
  45. 최학진(선미 산업 노조 조사통계부장), '맥박 3 호' 
      (맺음말)

  지금까지 여성들이 당하는 고통들에 대해 살펴 보았다. 그러나 이 고통의 무게를 
이기고 일어서는 여성들의 모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 한 면만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여성들은 그들이 당하는 이 모든 고통보다 위대하며, 자신을 
억누르는 모든 억압보다 강하다. 여성들은 그들이 짊어지는 짐의 무게만큼 당당해지고 
강해지고 성숙해지고 있다.

  난 노동자입니다. 전 공순이란 말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 라인에서 내가 
빠져 버린다면 우리 라인은 큰 지장을 가져 옵니다. 나 한 사람이 빠져도 그런데, 만일 
모든 라인 사람들이 빠진다면 회사는 운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힘이 있습니다. 비록 각 개인의 힘은 약할지라도 
우리 하나하나가 모여 커다란 힘이 이룩될 때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능히 
헤쳐나갈 수가 있습니다(작자 미상,'난 공순이입니다', 김경숙 외,'그러나 이제는 
어제의 우리가 아니다'. 돌베개, 1986, p.114).

  노조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대부분의 U.S.여성 노동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노동자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노조가 만들어지고 임금 인상 투쟁을 
거치면서 조합원들의 의식은 과거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제 U.S.조합원 
모두는 당당히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투쟁에 임하고 있다.
  5차에 걸친 노동청 항의 방문과 경찰서 연행 과정에서 보여준 억척스런 투쟁 모습은 
과거의 나약하고 순진하기만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힘차고 건강한 여성 노동자! 
여성 투사!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기필코 승리하리라!', 인천 여성 노동자회,'인천 
여성 노동자', 준비호, p.18).

  여성들은 사회와 역사의 주인으로 나서고 있으며, 그에 맞는 강함과 슬기와 용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공로는 세상에 강함을 더해 주는 데만 있지 않다. 
여성들은 그들이 당하는 고통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더욱더 깊이 이해하는 
마음의 눈을 갖게 된다. 여성들은 억압과 냉대 속에서도 쓰라린 고통을 감싸기에 
충분한 부드러운 심성과 세상의 냉대를 녹일 따뜻한 마음씨를 간직하고 키워 나가고 
있다. 물질 만능과 약육 강식의 논리와 폭력으로 물든 사회에서 바로 그것에 의해 
가장 소외되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이를 이길 만한 힘인 
인간적인 가치,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나 자신도 불행하지만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싶고 나의 
친구들과 같이 토론하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좀 더 
키워가면서 그들과 같이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박정화, 
'하지만 나는 바른 말을 했어', 한윤수 편,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청년사, 1980, 
pp.204--205).

  그리고 나 혼자만을 생각하지 않고 항상 내 주위에 고생하고 있는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보람있는 일을 하리라(최순희, '가로등 밑에서 공부할까', 한윤수 편,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p.54).

  향순아, 옥련아, 나는 너희들이 일하는 모습, 진지하게 살려고 애쓰는 순박하고 
꾸밈없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지는지 몰라. 착한 우리들의 웃음을 보며 
삶의 진가가 무엇이며 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것 
같다(장남수, '빼앗긴 일터', 창작과 비평사, 1984, p.27).

  아들아, 이제 엄마가 선봉에 선다

  아들아 너는 지금쯤 잠이 들었을까
  밥은 제 때 차려먹었을까
  막내 상진이는 이번 주에 소풍을 간다는데
  집에 들어가지 못한 요 며칠 째 엄마 가슴은 이렇게 미어지는구나
  직장 폐쇄 철회 투쟁이 한달 째 접어드는 밤 11시
  싸늘한 시멘트 바닥 위에 지친 몸을 쓰러뜨려 보지만
  그저 아득하기만 한 우리들의 내일처럼
  쉬이 잠은 와줄 것 같지가 않구나
  아들아, 그러나 사장이 누운 침대가 이보다 더 포근할까
  외진 구석에 잠이 들거나 밤내 규찰을 도는 젊은 노동자들
  언제나 듬직하고 다정한 네가
  엄마가 싸우는 농성장엔 이리도 많이 있구나

  파업 찬반 투표를 할 때만 해도 엄마는 무척 망설였단다
  마흔이 다 된 이 나이에 무얼 하겠는가라고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 남은 목숨 살아가면 그만이지라고.
  그러나 우리 앞에 떨어진 청천벽력 같은 직장 폐쇄
  이젠 엄마도 어제의 엄마일 수는 없었단다
  눈치만 봐왔던 중주임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지 않을 수 없었단다

  아들아 엄마는 똑똑히 보았다
  돈많은 사장놈들의 더러운 본질을
  그리고 알았다 독재의 힘을 빌려
  4월과 5월 우리 천만 노동자의 목을 내리쳤음을
  이곳 케이디케이에서뿐만 아니라 남성, 남지에 내려진
  직장 폐쇄에 대해 법을 집행한다는 검판사는 박수를 보냈고
  국민을 위한다는 야당은 뒤돌아 섰으며
  진실을 말한다는 언론은 끝내 입다물었다
  그러나 지역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임투를 마치고도
  기꺼이 투쟁에 함께 나섰으며 쟁의 기금 마련 연대 지원으로
  학생들과 더욱 힘껏 끌어 안았다
  (KDK 파업 농성 때 아줌마 노동자들이 공동 창작한 시,'손땀',1989.11.20.p.1)

  어머니 투사들의 시에서 우리는 인류의 미래를 밝히는 빛을 본다. 어머니의 
가슴속에서 우리는 소풍 도시락을 싸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사랑과 이 세상의 거대한 
불의와 맞서 싸우는 불굴의 용기와 투지가 결합하는 것을 본다. 그들의 투쟁은 그것이 
섬세하고 깊은 애정과 결합됨으로써 더욱더 강해진다. 그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사회적 불의와의 대결을 통해 더욱더 풍부해진다. 미래는 현재의 가장 압박받는 
자들의 가슴속에서 자라고 있다.
  여성들은 모성과 그들이 가정에서 맡아왔던 역할들을 통해서 많은 미덕들을 키우고 
간직해 왔다. 여성들은 모성을 통해 인간과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사랑을 체험한다. 이는 여성의 헌신성과 부드러움뿐만 
아니라, 생명의 옹호자로서의 강함과 끈기와 억척스러움의 기초이다. 여성들의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중요한 토대였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문명 사회는 여성들의 
이런 미덕을 그들의 감옥으로 만들어 왔다. 여성들은 미덕에 의해 억압을 받았다. 
여성들은 생명을 낳는다는 사실로 인해 억압받았으며, 그들의 헌신성과 부드러움과 
강함과 끈기, 이 모든 것이 억압과 착취의 미끼가 되어 왔다.
  여성들이 간직해 온 미덕은 이제 여성이 사회의 주인이 됨으로써 제 값을 발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사회의 주인으로 맞이함으로써 우리 사회는 단순히 
미덕을 늘릴 뿐 아니라, 분열된 미덕과 덕성을 조화시키고 통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강함과 부드러움,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회와 가정, 이성과 감성, 본성과 
문화, 나아가 물질과 인간 사이의 갈등을 조화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인류의 미래는 여성들의 미덕을 얼마나 발휘하게끔 하는가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곧 여성들이 이 책무를 훌륭히 완수하기 위해 얼마나 자신들을 단련하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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