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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마음

16. 인생에 대하여

by Frais Feeling 2020. 5. 12.

"나를 택하든지 농구를 택하든지 하세요."
  - 미키 크루지제프스키
  나는 이렇게 질문하곤 합니다.
  "이 명청아, 네 할 일이 무어냐? 인생에서 사랑하는 것들과 균형을 맞추고 있느냐?
  "농구 감독은 내 인생, 그 긴 여행을 하는 데 필요한 방편입니다."
  - K감독

  1995년 1월, 정기 씨즌의 3분의 1이 끝날 무렵, 우리는 카메론 실내 경기장에서 클램
슨 팀에게 75대 70으로 지고, 승률이 9승 3패로 떨어졌습니다. 우리 총 전적은 9승 3패
였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나와  코치들은 여느 때처럼 실패한  원인을 검토하고 좀더 
잘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다들 앉게."
  나는 마이크 브레이, 피트 고뎃, 타미 아메커에게 말했습니다. 아내 미키도 함께 있었
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내일 은퇴하겠네. 나는 항상 팀이 어느 한 사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네. 듀
크는 최고의 팀이지. 그런데 이제 나는 최선을 다 할 수가  없어. 보통조차 할 수가 없
어."
  모두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습니다. 타미 아메커가  미키의 반응을 살폈습니다. 나중
에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는 그때 사모님이 머리를 감싸며 '오,  마이크!' 하고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K감독님이 게임에 진 것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뭔가 다른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얼마 전부터 나는 몸무게가 많이 줄었고, 열정도 에너지도 없었습니다. 나는 지칠 대
로 지쳤기 때문에, 계속해서 팀을 이끌어 간다는 것은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만두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 더 나은 사람이 맡
아야 한다는 문제였습니다. 나는 듀크, 우리의 프로그램, 그리고 선수들을 돌보아야  했
습니다. 그것은 내가 웨스트 포인트에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싸움에 임하여 그들을 이끌 수 없을 때는 물러나서 다른 사람이 이끌도록 하라."
  그것이 내 생각이었습니다. 아메커, 고뎃, 브레이는 모두 나를 지지하면서 그렇게  서
두르지 말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거기에 대해 좀 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라고 그들은 
충고했습니다.
  "내가 감독 생활을 계속하고 싶은지조차 모르겠네"
  하고 내가 말하자, 타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K감독님, 당신은 누구보다도 개선시킬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감독님과 함께 선수 생활을 하고 경기를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듯, 나도 존경심을 
가지고 말씀드리는 건데, 나는 감독님이 더 이상 감독을 안하고 싶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자 미키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저도 그래요. 당신이 이런 식으로 그만두는 것은 보고 싶지 않군요."

    역경
  이 문제는 지난 여름 내 왼쪽다리에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부터 비롯되었던 일
입니다. 나는 의사들에게 아마 슬와근(오금)이 늘어나서 그럴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
서 나는 석 달 동안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9월이 되어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미키는 오금이 늘어난 것 
때문에 그렇게 오래 앓을 리는 없다면서 다시 검사를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의사들은 내 허리에 디스크가 있다는 것과, 여태까지 한 운동으로 더 악화되었기 때
문에 새로운 운동 요법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몇 주 후 캔사스로 선수 모
집 여행을 하는 중에 디스크가 심해져 비행기에서 내릴 때 거의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사들이 고통을 없애는 처방을 해주었고,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부기를 가라
앉히기 위해 주사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래도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다리는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
다. 그래서 다시 검사를 받기  위해 신경외과로 갔습니다. 의사는  나에게 오른쪽 발에 
체중을 싣고 발끝으로 해보자 바닥에 넘어졌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이게 무슨 의미입
니까?" 라  물었습니다. 
  "왼쪽 장딴지 근육이 약해졌습니다. 수술을 받아야겠습니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이틀 후인 1994년 10월 23일, 농구  연습이 시작된 지 겨우 8일
이 지났을 때, 심한 디스크를  고치기 위해 수술을 받았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지 상쾌한 기분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좀 나아졌으므로 팀
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사들은 회복 시기를 10주 정도로  잡고, 아주 기본적인 동작말고는 몸을  움직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아닙니다. 저 아주 좋습니다. 일주일  안에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의사들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시다면 그
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아마 특별한 의자가 필요할 겁니다."  라고 말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생각대로 10일 안에  코트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후 두 달  동안 
증세가 몹시 악화되어 체중이 줄고, 몸이 쇠약해지더니 등에 고통이 심하게 느껴졌습니
다. 나는 내내 탈진되어 있었습니다. 
  아내 미키는 나와 의사들 모두에게 화가 나 있었습니다. 아내는 내가 의사들의 충고
를 무시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겼지요. 그리고 의사들이 나에게 단호하게  지시하
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수술을 받은 사람이 그렇게 의사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미키가 말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옳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해서  내 생각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우리 팀은 하와이로 원정 경기를 가서 레인보 클래식에 참가했고, 다
행히 두세 경기를 이겼습니다. 그런데 8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데 무척 힘이 
들더군요. 어떤 자세를 취해도 불편했고, 허리가 끊어지게 아팠습니다. 그리고 그  토너
먼트 내내 한잠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나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주 탈진해 버렸습니다. 거의  먹지
도 못했지요.
  그후 클램슨과의 경기에서 75대 70으로 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은퇴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틀 후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거의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
어나서 샤워를 하고, 그리고 나서는 비틀거리며 침대에 누웠습니다. 잠시 후 다시 일어
나서 면도를 하고, 다시 침대로 가서 비틀비틀 누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운동복
을 입다가 또다시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미키는 내 건강이 엉망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눈을 움푹 들어가고 허리는 꾸부정
했습니다. 아내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의사와 약속을 해놓겠어요. 당신은 오기만 하세요."
  "그럴 순 없소. 나는 연습하러 가야 하오. 선수들과 약속이 있어요. 조지아 테크 경기
를 하러 떠나야 해요. 나에게는 시간이 없소."
  "당신은 일어날 힘도 없잖아요?"
  미키는 의사에게 전화를 하러 잠시 방을 나갔다가 돌아와 그날  오후 2시 30분에 약
속을 해놓았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2시 30분에 연습이 있다고 했잖소?"
  "마이크, 나는 한번도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말해야
겠어요. 나와 농구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2시 30분에 병원에서 만나요.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는지 어디 봅시다."
  미키가 이렇게 최후의 통첩을 해오자, 처음에는 화가 났습니다. '왜 저렇게 부담을 주
는 걸까?'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문득 '미키가 왜 저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나는 사무실로 차를 몰고 가면서 미키가 그런 말을 하는 데는 내가 보지 못한 그 무
엇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니면 내가 보고 싶어하지 않은 구 무엇을 보았기 때문
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미키를 신뢰할  뿐 아니라 사랑합니다. '그 약속에  가는 
게 낫겠다' 마침내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그래서 코치들에게 연습을 진행시키라고 부탁하고 2시 30분에 병원에 갔습니다. 감독 
생활 15년 동안 연습에 가지 않은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전에는 한 번도 연습
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의사의 말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씨즌이 끝나다
  내가 존 피진 박사의 진료실에 들어가자, 그는 나를 한번 보더니 "여러  가지 검사를 
통해 상태가 어떤지 살펴봐야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진찰조차 하지 않았습
니다. 내가 그 정도로 나빠 보였던 겁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잠시 사무실에 갈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스탭진에게 내가 조지아 
테크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서두르셔야 합니다."
  나는 스탭진에게 경기에 참가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맥이 빠졌습니다. 나는 "마치 
자네들을 버리는 것 같네. 정말 미안하네." 라고 말했습니다.
  그건 정말이지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탭진들은 진심으로 나를 지원해 주
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병원에 가서 의사들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우리는  괜찮을 겁
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받았습니다. 걱정이 되었습
니다. 짐 발바노가 생각났습니다. 나도 혹시 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입
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 비참한 심정은 처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검사 결과를 보니, 내가 허리 수술을 하고 너무 빨리 움직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
어졌다고 합니다. 너무 빨리 무리하게 나 자신을 운동장으로 내몰았던 거지요. 나는 좀 
쉬어야 했습니다.
  나는 암에 걸리지 않았고, 디스크가 생겼다든지 하는 끔찍한 소식이 아닌 것에 일단 
마음이 놓였습니다.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내가 물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얼마 동안 입원해야 합니까? 우리는 목요일에 경기가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가야겠는데, 괜찮겠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들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팀을 구성해서 나에게 말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다섯 명이었습니다. 농구팀에 선수를 이루는 데 필요한 수였지요. 
주먹을 쥐는 데 필요한 수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먹을 쥐고 나에게 왔습니다. 
  한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두 명이 한 명보다 났다는 말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다섯 명이 하나로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후로도 여러번 만나 서로  상의하고 
난 다음 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크게 나무랐습니다.
  "우리가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이 아니구요. 앞으로 2주 동안 코치를 하면 안 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제대로 회복되기 위해서 시간을 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우
리가 그 상황을 재평가할 겁니다."
  2주 동안 나는 쉬어가면서 하루에 두 번씩 물리치료를 받았습니다. 농구 경기에도 참
석하지 못했고 연습장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우리 선수들이나 스탭들과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습니다.  
  그 2주일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팀이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집에 앉아
서 그들이 한 게임 하나 게임 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어찌
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팀은  동요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카메론에서  버지니아 팀과 
경기를 할 때 25점 앞서 있었습니다.  '좋아, 이제 이기고 있군.'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
다. '염려할 필요가 없겠어.' 그런데 중간 휴식시간과 게임 종료때 모두 지는 것으로 끝
이 났습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선수들은 거기서 그렇게 고전을 하고 있는데, 
나는 그냥 집에 앉아서 "돌아가야겠어,  아무래도 돌아가야겠어."라고 중얼거리며 초조
해할 수밖에 없었지요.
  2주일이 지났습니다. 물리치료사는 내 병세가 하나도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더 나빠
졌다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의사들이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당신은 나으려고 애를 쓰지 않는군요. 코트로  돌아가려고만 애쓰고 있어요. 그러니 
점점 더 나빠질 수밖에요. 이 치료를 보류해야겠습니다. 다른 조처를 취해야겠어요.  당
신은 일년 동안 감독 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내년까지 코트로 돌아가는 것은 꿈도 꾸
지 마십시오. 이해하시겠습니까?"
  충격! 내가 일년 동안이나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니요?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
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지요. 그런데 그 의사 팀은 그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와서 단호한 어조로 그 말을 전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미
키도 그들 편이었고, 내 친구들과 친척들도 그들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아마도 그때 나에게는 그렇게 말해줄  사
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연습이나 경기에 빠지면 안된다고 하는  약속이라든
지 나 자신의 감정에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마치 감독 주위에도 충고해 
줄 사람이 항상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듀크 대학의 스포츠 담당자인 탐 버터즈에게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의사들이 나보고 1년 동안 쉬라고 하는군요. 그 전에는 더 나아질 수도 없고 감독도 
할 수 없다는 거요. 그러니 은퇴를 하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이해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죄책감이 느껴질 겁니다"
  탐은 내 말을 듣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이크, 돌아올 준비가 되면 언제라도 돌아와요. 내일도 좋고, 여섯 달 후도 좋고, 1
년 후도 좋습니다 .이건 당신 일이요. 당신이 듀크 농구팀 감독입니다. 다른 누구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 긴장이 확 풀렸습니다. 마침내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만 투신할 수 있게 되었
습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했지요.
  나는 나 자신을 보살펴야 했습니다. 이제 그렇게 할 시간입니다.

    교훈
  1994년에서 95년 씨즌 동안, 나는 경기나 연습에 참가하지 않고 쉬면서 많은 시간 생
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좀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반성하고 재평가하기 시작했습
니다.
  사람들은 이겼을 때보다 졌을 때 모든 것을 훨씬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것 같
습니다. 잘 나갈 때는 정작 중요한 것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장애에 부딪쳐
서 어려움을 겪을 때는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싶어하면서 상황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시
작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나는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했습니다. 성공으로 인해 참으로 많은 것들이 생겼지요. 
그런데 기가 막히게 좋은 것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우리를 진정한 목표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도 있었지요. 원래 나는 감독으로서 출발했습
니다. 그런데 해가 거듭하면서 나는 우리 팀을 지도할 시간을 갖기가 점점 힘들어졌습
니다.
  우리는 미친 사람처럼 일했습니다. 우리가 다섯 번 연속 4강전까지 가서 두 번 연속 
국가 챔피언쉽을 획득했기 때문에, 나는 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대단
한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상에 올랐을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정상적인 리듬에서 빠져나와 자기 자신만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나는 다시 해야 한다. 4강에  다시 가야 해. 전미 대학  선수권 대회에서 이겨야 한
다."라고 계속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나'라는 단수 대명사만 있었습니다. 나는 항상 복수 대명사가 기준이  되어
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코치를 해왔는데도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기차
는 항상 만원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급행열차는 멈출 새가 없었습니다. 그 기차의 기관
사인 나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서서히 파괴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저기 참석하라는 초대를 수없이 받았습니다 대개는  기분좋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30여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제는 몇 상자씩 받습
니다. 그리고 만찬에 와서 강연을 해달라는 초청도 많이 받았습니다.
  "USA 농구 협회에 와서 한마다 해주십시오."
  "전미 농구 코치 협회에 와서 좀 도와주십시오."
  "K감독, 우리가 큰 기금을 모으려고 하는데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1년은 365일밖에 안됩니다. 나는 그 모든 일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그런데 나는 모든 것을 해내려고 애썼습니다. 그것이 내 문제였습니다. 
  나는 자주 내가 쉬카고의 아우구스타 불르바드 출신이라는  사실로 돌아가곤 했습니
다. 이렇게 성공했으니, 뭔가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온 
몸과 마음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문제는 최우선으로  삼는 것에 탈이 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지난 30년 동안 누가 나에게 우선으로 생각하는 게 무어
냐고 물어봤다면, 그때마다 나는 똑같은 순서로 대답했을 겁니다. 
  오히려 나는 그 우선 순위에 시간을 잘못 배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너
무나 바쁜 나머지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배운 
교훈은 시간을 좀더 현명하게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 관리는 프리 씨즌에  듀크 
선수들에게 가르쳐 준 첫번째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단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면 주위에 바른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신문과 방송의 시선을 받을 경우에  말입니다. 우리가 정기적인 기반에서 
챔피언쉽을 획득할 때 나는 감독 이상이 됩니다. 나는 관념이 됩니다.
  "자, K감독이 이것을 하게 합시다. 우리가 행사를 열고 K감독이 이끌어가게 합시다. 
5만 달러를 거두어 들입시다."
  "그거 참 좋은 생각입니다. K감독한테 물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대단한 생각을 가지고 나에게 왔는데, 내가 거절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
어질지 모릅니다. 순식간에 환호의 대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K감독이 왜 저래? 변했어. 내가 생각하던 그 사람이 아니야. 성공하더니 사람이 달
라졌군. 그 사람이 이렇게 사소한 것도 못하다니 누가 그걸 믿어?"
  듀크의 스포츠 정보 담당인 마이크 그랙과 내 수행 보조원 게위 브라운이 나에게 오
는 부탁의 많은 부분을 검토합니다. 그들은 내 스케줄을 알고 있어 내 대신 즉시 거절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놓칠 수 있는 요청을 상기시켜 줄 수도 있습니다.
  게위 브라운은 처음에는 나 대신 그런 결정을 해주기를 꺼렸습니다. 실수를 해서 나
에게 폐를 끼칠까 봐서였지요. 그래서 미키가 게위 브라운은 나와 아주 훌륭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대체로 판단을 잘 할 거라고 격려해 주어야 했습니다. 물론 게위 브라운은 
실수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아지겠지요. 나도 마찬가지
입니다.
  물론 모든 청을 거절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명분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나에게 도
움을 청해 오는데, 될 수 있으면 많은 청을 들어주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린이와 관련 있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나는 선수들이  경기에 
져서 침체되어 있을 때, 그들을 듀크 메디컬썬터로 데리고 가서 어린이들을 만나게 합
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즉시 우리의 관점이 회복됩니다. 우리  팀 선수들이 지역 사회
의 학교들을 찾아가서 청소년들에게 독서를 권장하고 마약 같은  것은 입에도 대지 말
라고 충고해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미키와 나는 듀크 어린이 병원을 위해 일을 많이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 
병원의 자문위원의 의장직을 맡고 있고, 15년 동안 어린이 기적 네트웍의 의장직을 맡
아 왔습니다. 나는 암 종합 쎈터와 '지미 V재단'을 위해서도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조직들 안에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실은 내가 뭔가를 해주었
다기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명성과 성공을 얻게 되면, 거기에 따라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
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됩니다. 그럴 때 그 힘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
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을 돕고,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희망의 촛불을 켜
주고, 사랑과 연민이 허울 좋은 말만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
다.
  우리는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편지를 받습니다. 거의가 팬들에게서 온  것으
로, 우리가 이기기를 바란다는 내용과 이긴것에 대해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은 농구경기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감동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중 몇 가지만 언급해 보기로 합시다. 
  언젠가 암과 싸우고 있는 한  소년의 할아버지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소년은 
화학요법을 받는데, 머리가 다 빠지고 활동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족을 위해 경기장 입장권과 함께 격려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할아버지가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그후 나는 그애가 불평하는 소리를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손자를 
비롯한 많은 어린이들에게 그렇게 친절한 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ESPN(미국의 오락, 스포츠 전문의 유료 유선 텔레비전망)에서 '지미 V 재단'에 
대한 인터뷰를 했을 때, 그것을 본 12살 된 소년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무척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문배달을 해서 번 돈을 보내드
리고 싶어요. 얼마 되지 않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제 마음에서 우러나온 거예요. 이 돈
을 암을 앓고 있는 사람이나 '지미 V재단'에 기부해 주세요.  살아가면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그리고 어느 해인가, 나는 우리 팀에서 함께 지내던 선수로부터 편지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70년대 초 그는 허파 이식수술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사들이 그가 살
아남은 이유는 의지와 결단력 때문이었다고  하더랍니다. 그는 그게 다 내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지요. 언젠가 경기 중에 내가 그에게 아주 커다
란 역할을 맡겼는데, 그는 잘못 알고 점프슛을 했습니다.  나는 재빨리 그를 불러 그의 
가장 큰 장점은 패스에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씨즌의 마지막 경기가 끝날 무렵, 나는 
그를 라인업에 복귀시켰고, 그 경기에서 우리는 큰 점수 차로 이겼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감독님이 제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며 "20년이 지난 후에야 감사의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
합니다." 라고 덧붙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편지를 많이 보내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요. 나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 스탭진의 도움을 받아 나에게 온 편
지에 모두 답장을 해주려고 애씁니다.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편지를 선수들과 함께 읽을 때가 많습니다. 그들이 인생관을 확립하는 데 도움
을 주고, 또 올바르게 행동하고 고귀한 일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를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휴가에서 돌아온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너무 많은 일을 혼자 하려고 하지 마라.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모두 함께이다.
가끔씩 여행을 즐기기 위해 '성공 급행열차'를 멈추어라. 
시간을 지혜롭게 관리해라.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보살펴라."

    가장 중요한 것을 명심하기
  내가 팀을 떠나 있을 때, 우리 팀은 동요되어  결국 13승 18패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다시 짜야 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팀이 저조해졌다는 사실, 그
리고 나도 육체적으로 쇠약해져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성공하는 데 너무 급급한 나머지,  왜 그것을 하고 있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성공하도록 도움을 준 그 기본 전제를 어겼습니다. 이제 나는 그것을 다시 
지켜야 합니다.
  나는 퀸 슈나이더가 졸업 연설 때 했던 비디오 테입을  다시 꺼내 그가 언급한 말들
을 적었습니다. 헌신, 고결함, 강인함,  정직, 집단 책임, 긍지,  사랑 그리고 우정, 나는 
그것을 메모해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팀으로서 그 목록에 있는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 원칙으로 돌
아가게 되면 우리는 ACC 정규  씨즌에서 이기게 되고, 토너먼트에서 이기게  되고, 빅 
댄스로 가게 되고, 4강전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코치를 시작하던 어렸을 때 쉬카고  운동장에서 놀던 시절까지 거
슬러 갑니다. 우리에게는 조직된 리그도 없었고, 트로피도 없었습니다. 단지 경기를  위
한 경기를 했고, 경기 자체를 즐겼습니다. 우리는 친구이기 때문에 경기를 했습니다 .아
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경기를 했습니다. 
  나는 그 역기가 친구들과 관계를 맺게 해주는 수단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농구를 감독하는 것도 인간관계와 우정을 맺는 방편입니다. 사실 농
구 감독을 하는 것은 인생이란 긴 여정을 위한 한 방편입니다. 
  내가 경기에 이기기 위해서만 지도를 했다면, 나의 인생은 정말 허무했을 겁니다. 나
는 지도하는 것을 사랑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젊은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그 일을 좋아했습니다.
  모든 씨즌의 막바지에 나는 우리가 몇 게임을 이겼는지, 국가 챔피언쉽에 이르는 길
목 어디쯤까지 왔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우리 팀 선수
들이 그해에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나는 크리스 컬린스, 토니 랭, 제프 
캐펠, 체로키 파크스, 제이 빌라스, 그리고 전에 몇 년 동안 우리 팀에서 함께 뛴  선수
들의 득점을 생각합니다. 그중 한 사람을  직접 혹은 텔레비전에서 볼 때 나는  미소를 
짓습니다. 내가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빈다.  그들 역시 나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는 우리가 이기지 못한 전미 대학 선수권 대회에 대해 생각하며 밤을 새우지는 않
습니다. 나는 내 인생을 여태까지 경기에 얼마나 이겼는지로 가지고 평가하지는 않습니
다. 그리고 득점 수를 가지고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하곤 합니다.
  "이 멍청아, 네 할 일이 무어냐? 인생에서 사랑하는 것들과 균형을 맞추고 있기는 한 
거냐?"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듀크 대학 농구 감독이다 내가 할 일은 우리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이고, 우리 
가족들의 남편이요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마이크, 네 할 일을 해라."
  사람은 자기 인생의 핵심을 보살펴야 합니다. 나의 핵심은 나의 가족을 돌보고, 우리 
팀을 지도하는 것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실 나는 쉬카고에서 함
께 놀던 아이들 중 자기 꿈을 이룬 유일한 컬럼보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운이 좋았습니
다. 나는 나의 꿈을 살고 있습니다. 사실 현실이 꿈보다 훨씬 맛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들과 균형을 맞추려 애쓰고 있습니다. 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춤도 추어야 하고, 피아노도 쳐야 하고,  응원도 해야 합니다. 나는 일차원적
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건강으로 인해 어렵고 힘든 나날을  보내며 나는 빛과 새로움
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나에게 그 시간은 잃어버린 씨즌이 아니라 새로 찾은 씨즌입니다.
  내가 다시 돌아온 1995년과 96년 씨즌은 아마도 내 감독 생활에서 최대의 위기의 시
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해 우리는  심각하게 실패했고, 나약해졌고, 선수들은  자신감을 
잃고 있었습니다. 나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NCAA 토너먼트에 참가할 필요가 있
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2월 중순은 정말로 냉혹했습니다.  특히 컨퍼런스 플레이에서 우리는  웨이크 
포레스트에 진 후 4승 7패가 되었습니다. 나는 토너먼트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8
승 8패의 기록을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우리는 아래로 치닫고 있었지만, 아직 5번의 
ACC 경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스탭들을 모아놓고 이길 수 있도록 밀어붙여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우리는 토너먼트에 참가할 수 없네. 크리스 컬린스가 뭔가를 
해야 해. 지금부터 우리는 그의 마음을 따라야할 걸세."
  그해에 크리스는 4학년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주장이요 핵심이었습니다 .그는 발목을 
다쳐 핀을 박고 있었는데, 모든 선수들이 그의 인내와 용기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연습이 끝난 후 나는 크리스를 불러 함께 비디오를 보면서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방
법을 상의했습니다.
  "크리스, 부탁할 게 있다. 나머지 씨즌 동안 머리를 사용하지 말고  경기하기 바란다. 
자네 직감을 따르게. 하프코트를 가로지르다가 슛을 할 기회가 오면  그렇게 해. 골 밑
으로 돌진할 틈이 보이면 몰고 가게. 아주 자유롭게 경기를  펼치란 말이네. 실패를 두
려워하지 말게. 실패할 리가 없다는 것처럼 행동하게. 나는 이 말을 다른 선수들에게도 
할 걸세. 크리스,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가 뒤를  봐주겠다. 지금부터 우리는 
자네와 함께 이기고 자네와 함께 질 걸세. 너무 부담이 되나?" 
  "아닙니다."
  "자네, 내 말 이해하겠나? 나는 지금 자네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걸세. 
뭐든지."
  "이해합니다, 감독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후 5게임 동안 크리스는 신들린  사람처럼 경기를 했고, 우리는  모두 이겼습니다. 
그는 버지니아 팀에게 23득점,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과의  경기에서 12점, 를로리다 
주립대학과의 경기에서 27점, UCLA 팀과의 경기에서 27점, 그리고 메릴랜드 대학과의 
경기에서 27점을 따냈습니다.
  그저 놀랍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플로리다 주립대학과의 경기 동안, 몇 분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크리스가 달려 들어와 3점 슛라인 뒤에서 3점 슛을 두 개나 터뜨렸
습니다.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이 크리스가 신이 들렸나보다고 크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저런 볼을 날릴 수가 있지? 두 번째 슛은 코트 중간 조금 넘어서 던졌는데!"
  크리스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과의 경기에서 처음 25분 동안  18점을 득점한 후 
다시 다리를 다쳤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퇴장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마
지막 경기에서 지기는 했지만, 8승 8패라는 연맹이  요구하는 득점을 얻었습니다. 그리
고 빅 댄스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지요.
  다음 주 우리는 NCAA 토너먼트의 첫 번째 경기에서 이스턴  미쉬건 팀에게 졌습니
다. 경기가 끝나자, 크리스는 다리를 절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린  것은 
부상 때문도 아니고 우리가 졌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듀크 유니폼을 입
고 한 마지막 경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 때문
입니다.
  그가 벤치에 왔을 때 나는 그를 감싸 안아주었습니다.
  "고맙다, 크리스. 정말 잘했다!"
  내가 휴가를 보낸 전해에 우리는 13승 18패를 기록했는데, 그해에는 18승 13패였습니
다. 그렇게 달라질 수 있었던 핵심에는 크리스 컬린스가 있었습니다.
  크리스는 듀크 농구팀이 다시 일어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우리 
팀에 열정과 배짱 그리고 영감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NCAA 토너먼트
에 가도록 해주었고, 바로 다음 씨즌 리그 챔피언쉽에서 이길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는 졸업을 했지만, 후배 두 명이 그가  보여준 놀라운 모범을 따랐기 때
문이지요. 스티브 우르시조프스키와 트레이전 랭돈이 바로 그들입니다. 둘은 다음해 우
리 팀을 이끌어 나가는 기둥 역할을 했습니다.

    K감독의 조언
  - 자기 감정이나 입장에 눈이 멀어 있을 때는 주위 사람에게 조언을 청하는 것이 좋
습니다.
  - 자기 자신에게만 헌신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 잘 나갈 때보다 실패했을 때 모든 것을 훨씬 투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 거듭 승리를 거둘 때,  조심하십시오. 그러한 극단은 정상적인  리듬에서 벗어나게 
하며, '우리'가 아닌 '나'라는 단수 대명사만 생각하게 합니다.
  - 가끔씩 '성공 급행열차'에서 내려 경치를 즐기십시오.
  - 바른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주위에  두십시오.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야말로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 자기 자신이나 팀이 뭔가 잘못되어 갈 때는 책임을 지십시오. 자기 실수를 인정하
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 가끔씩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십시오.
"이 바보야, 네가 할 일이 무엇이냐?"
  - 자신의 기본 원칙을 항상 상기하십시오.
  - 의사들의 말을 들으십시오. 
   
    나는 매순간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1995년 초 어느 날, 나는 사무실에 앉아 우리와 상대할 팀의 경기 장면을 녹화해 놓
은 비디오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얘야, 너를 귀찮게 하고 싶지도 않고 네 시간을 빼앗고 싶지도 않다마는..."
  "아니요, 어머니. 어머니가 하루종일 말씀하셔도 저는 귀찮지 않아요. 그리고 좀 귀찮
으면 어떻습니까? 언제라도 귀찮게 하십시오."
  하지만 어머니는 저를 귀찮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음에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나
는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이 바보야, 어머니 연세가 여든 셋이시다. 네가  어떻게 했길래 어머니가 그런 말씀
을 하시니?"
  나는 사람들을 예민하게 관찰하면서도 나 자신을 관찰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뭔가를 
이루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들을 쫓아버렸습니다 .나는 혼자였습니다. 바보였습니
다. 
  쉰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어머니는 인생에서 가장 값진 교훈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머
니는 "너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별로 없구나." 라고 말씀하시는 대신, 그저 "귀
찮게 하고 싶지 않다마는..."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 한마디에  나는 정신이 번쩍 난 것
입니다.
  짐 발바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나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너무 바짝 조이지 마, 마이크"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너무나 바짝 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경기가 끝날 때마다 선수들을 불러놓고,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합니
다.
  "좋아, 여기 내일 일정표가 있다. 쉬는 시간에 팬들에게 달려가는 것도  좋겠지. 그런
데 그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가능하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찾아
가게. 어머니를 찾아가 한 번 안아드려. 어머니가 여기 계시지 않으면 전화라도 하라구. 
아버지도 좋고, 아내도 좋고, 형제도 좋아. 자기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인 가족들과 
시간을 보낵를 바라네."
  그것은 정말 엄청난 교훈이지요. 나는  그런 교훈을 깨닫게 해주는 어머니가  계셔서 
좋았습니다. 그 이후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픕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마지막  교훈이었
거든요.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형 빌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누구든 언젠가는 받게 
될 그런 전화였지요. 암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뒤독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나는 쉬카고행 비행기를 타고 어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어머니  머리
맡에서 마지막 1주일을 함께 보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내내 주무셨지만, 깨어 계
실 때는 우리와 대화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울었습니다.
  나는 한시도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어머니는 인생을 즐길 줄  아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농담을  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많은 돈이 없었습니다. 승용차도  없었고, 좋은 집도 없었지요.  그렇지만 
어머니는 행복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위대한 삶을 사셨습니다.  어머니에게는 긍지가 있
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분을 사랑했지요. 그게 성공이  아니라고는 누구도 말하지 못
할 겁니다. 
  우리는 어릴 때나 자라면서 부모님이 베푸는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
습니다. 부모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표현할  생각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지만 감사하게도 어머니
는 내가 이런 말을 해드릴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라 때까지 오래 사셨습니다. 
  내가 듀크 대학에서 여름 농구 캠프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우리집에서 우리와 몇 
주일을 보내신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현관에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아주 어렸던 제이미는 할머니 무릎에 앉아 있었지요.
  "그래, 좀 어떠니? 일은 잘 돼가니?"
  "네, 잘 돼가요, 어머니."
  "어떻게 네가 듀크의 감독이  되고 텔레비전에 나올 수가  있니? 어떻게?" 어머니는 
뜻밖에도 그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요.
  "다 어머니 덕분입니다."
  "에이, 그런 소리 마라."
  "정말이에요. 제가 어머니처럼만 살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성공 했을 거예요."
  "마이크, 그만 하라니까."
  "어머니는 형과 나,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셨어요. 그렇지만 저는 어머니
만큼 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사람들이 그런 걸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보면 저는 어머니
께 배웠다고 말합니다. 내가 조건 없이 지원을 해준다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물어보거나, 어떻게 그렇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물어오면, 나는  다 어머니께 
배웠다고 말합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거 알고 계시지요? 어머니가 우리에게 어떻게 해 
주셨는지 저는 잘 압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
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어머니의 눈이 촉촉이 젖어  있었습니
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 얼마 후 나는 형으로부터 소포를 받았습니다. 형은 어머
니 아파트에 있는 물건을 정리하다가  유품 중에서 수첩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나에게 
보내는 게 좋겠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가 20년 헤드 감독으로 있는 동안 우
리 팀이 펼친 경기를 모두 적어놓은 목록이 있었습니다. 내가 웨스트 포인트에서 처음 
시작할 때부터 듀크에서 한 마지막 경기까지 말입니다. 각 목록에는 날짜, 상대편 선수
의 이름, 최종 득점, 승패 등이 모두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일일이 기
억하고 계시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포에는 어머니의 묵주도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경기를 하기 전에 그 묵주를 꼭 챙깁니다. 그리고 우리 팀이 열띤 경기를 벌이
고 있을 때 벤치에 앉아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제가 뢰선을 다하게 해주십시오. 내 자신이 되게 해주십시오. 온  마음을 다
해 팀을 이끌어 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감사의 말
  우리는 워너 북스사의 래리 커슈바움과  릭 볼프의 통찰력과 격려와  지원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머리 속에서 구상만 해오던 것을 책으로 만들어 내느라 애쓰
신 우리 대행자인 밥 바넷과 럽어바에게 감사 드립니다.
  원고를 쓸 때는 게위 브라운, 자니 도킨스, 데이빗 핸더슨, 그랜트 힐, 스티브 우르시
조프스키, 귄 슈나이더, 타미 아메커, 제이  빌라스 등 모든 사람이 적극적으로  시간을 
내주고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친절과 관용에도 감사 드립니다.
  특히 아내 미키 크루지제프스키와 마이크 크랙은 글을 쓰고 편집하는 과정에 참여했
습니다. 독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 책을 만드는  데 정말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이 해준 중요한 역활을 고맙게 여깁니다.
  - 마이크 크루지제프스키/도날드 T. 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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