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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 모음/몰입

1. 일상의 구조

by Frais Feeling 2020. 5. 12.

  참다운 삶을 바라는 사람은 주저 말고 나서라. 
싫으면 그뿐이지만, 그럼 묘자리나 보러 다니든가. 
                                         -오든
 
  오든의 시는 이 책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지금 이 순간과, 언젠가 불가피하게 맞이할 임종의 순간 사이에서, 살아가는 길을 택하든가 죽어가는 길을 택하든가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제대로 공급되는 한 삶은 끊어지지 않지만, 여기서 오든이 말하는 삶은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삶을 방해하는 힘은 사방에 널려 있다. 자칫 마음을 놓았다가는 거기에 놀아나기 십상이다. 생물은 몸에 박힌 유전 물질을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서든 퍼뜨리려고 애쓴다. 문화는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과 제도를 널리 전파하려고 한다. 타인들은 자꾸 나를 누르고 주도권을 쥐려고 한다. 나야 어떻게 되건 말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삶의 길은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분명히 한낱 생물체로서의 생존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까운 시간과 재능을 허비하지 않고 나만의 개성을 한껏 발휘하면서 복잡다단한 이 세상과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충만한 생활을 뜻하는 말이리라. 나는 이 책에서 현대 심리학이 알아낸 성과와 내가 연구한 내용에 바탕을 두면서도, 선인들이 후세에 남긴 뜻 깊은 지혜를 고루 동원하여 바람직한 삶의 길을 찾아나설 작정이다. 
  "바람직한 삶은 어떤 것이가?" 나는 다시 한 번 겸허하게 묻고 싶다. 그러나 예언자나 신비주의자처럼 말할 생각은 없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평범한 사건들, 즉 일상 생활에 초점을 맞추면서 구체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예를 들기 위해 애쓰고 싶다.
  바람직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구체적인 데서 출발하는 게 좋을 듯하다. 여러 해 전에 나는 학생들을 데리고 기관차 공장을 견학했다. 격납고처럼 거대한 중앙 공장은 어찌나 먼지가 많고 시끄럽던지 고래고래 악을 써야 겨우 말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곳에서 일하는 용접공들의 대다수는 자기가 하는 일에 애정이 없었고 시계만 보면서 빨리 퇴근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일단 공장 문을 나서면 근처 술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좀더 적극적인 행동파들은 아예 자동차를 몰고 드라이브에 나섰다.
  그런데 안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조라는 이름의 60대 초반 남자였는데, 크레인이면 크레인, 컴퓨터 모니터면 모니터, 그 공장 안에 있는 기계 설비의 구조를 모조리 독학으로 꿰뚫은 사람이었다. 그는 못 고치는 기계가 없었다. 고장난 기계를 붙들고 말썽의 원인을 밝혀내어 기어이 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집에서도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집 부근에 있는 자투리땅에다 부인과 함께 멋진 분수를 만들었다. 분수에서 뿜어나오는 뽀얀 물보라는 밤마다 장관을 연출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용접공들은 희한한 양반이라고 혀를 차면서도 모두들 조를 존경했다. 문제가 생기면 누구나 조에게 먼저 달려갔다. 직원들은 구가 없으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나는 그동안 대기업 총수, 유력 정치인, 노벨상 수상자처럼 자기 분야에서 한가락한다는 인물을 수없이 만났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조다. 무엇이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을 이토록 값지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그 답을 알아내고 싶었다. 이 책에는 중요한 전제가 세 가지 깔려 있다. 첫째, 중요한 진리는 이미 오래 전에 뛰어난 예언자, 시인, 철학자가 말했고 그것은 지금도 우리네 인생의 지침으로서 요긴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선각자들이 깨달은 진리는 옛날 식으로 표현되었으므로 후대의 시각으로 그 안에 깃든 의미를 늘 재음미하고 재해석해야 생명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의 성전에는 선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사유의 결실이 풍부하게 담겨 있으므로, 이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과거의 글은 절대 불변의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맹신하는 자세에도 문제는 있다. 
  이 책에 깔린 또 하나의 전제는 지금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가 주로 과학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에서 통용되는 진리는 어차피 당대의 세계관이 반영된 언어로 표현되기 마련이어서 세월이 흐르면 그 뜻이 달라지고 결국은 폐기되는 일도 적지 않다. 고대의 신화처럼 현대의 과학에도 숱한 오해와 미신이 스며들어 있지만, 그것을 간파하기에는 우리는 현대의 과학과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다.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건 복잡한 이론이나 실험이 아니라 초능력이나 심령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름길은 위험하다. 우리가 도달한 지식의 높이를 과장한 나머지 착각에 빠져서는 곤란하다. 좋은 싫든 간에 현재로서는 과학이 현실을 담아내는 가장 신뢰할 만한 거울이다. 과학을 무시하려는 발상은 위험천만하다.
  마지막 전제는 '삶'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선인들의 지혜에 귀기울이는 한편 그 지혜를 과학이 꾸준히 축적해 온 앎과 접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부르짖음은 훗날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내용과 일맥상통하지만, 이런 구호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희망은 과거에서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재에서 솟아오르는 것도 아니다. 또 가상의 미래로 뛰어본들 우리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과거의 사실과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의 시점에서 이해하려고 꾸준히 노력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길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말하는 '삶'은 아침부터 밤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운이 좋으면 칠십 년, 아주 행운아라면 그보다 더 긴 세월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모두를 뜻한다. 우리에게 낯익은 신화와 종교의 장대한 구도와 비교할 때 이것은 옹색한 발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파스칼의 유명한 잠언대로, 의심스러울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칠십 평생이 우리가 우주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라고 가정하고, 그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고 허송세월만 할 경우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반대로 우리의 예상이 빗나가 죽음 너머에 또다른 삶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로서는 전혀 잃을 것이 없다.
  모름지기 삶이란 우리 몸 안에서 벌어지는 화학 작용, 신체 기관 사이의 상호 작용, 뇌의 신경세포 사이를 오가는 미세한 전류, 문화가 우리의 정신에 부과하는 정보 체계에 의해 주로 규정된다. 그러나 삶의 구체적 질감, 즉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에 대하여 어떤 느낌을 갖게 되느냐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따라서, 화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과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철학의 한 갈래인 현상학은 마음을 가로지르는 의식의 흐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그리고 이것보다 한층 절박하게 다가오는 질문,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나는 지난 삼십 년 동안 주로 심리학, 사회학 같은 사회과학을 수단으로 삼아 체계적 현상학을 발전시키는 데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런 물음에 답하기 전에 선결되어야 하는 과제는 우리의 경험에 틀을 부여하는 힘이 과연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모두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행동하고 느낄 수 있다. 이 한계선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국 좌초하고 만다.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부담스럽고 암울해 보일지라도 먼저 일상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고대 신화를 보라. 행복, 사랑, 영생의 길을 갈망하는 사람은 먼저 저승 세계를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테는 지옥의 소름 끼치는 세계를 구석구석 거치면서 인간이 천당의 문으로 왜 못 들어가는지를 절절히 깨달은 연후에야 비로소 천국의 휘황찬란한 세계를 누릴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부터 다루려는 세속적인 물음에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아프리카 평원에서 사는 개코원숭이는 일생의 삼 분의 일을 잠자는 데 쏟아붓는다. 깨어 있는 시간은 돌아다니기, 먹이를 구하고 먹기, 자유롭게 놀기로 삼등분된다. 놀이라고 해야 장난을 치거나 털을 고르거나 서로 이를 잡아주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엔 참으로 무미건조한 생활이지만 인간이 공통의 유인원 조상으로부터 진화해 온 수백만 년 동안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삶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방식도 아프리카의 개코원숭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사람에 따라서는 두어 시간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우리는 하루의 삼 분의 일을 잠자는 데 쓰고 개코원숭이처럼 나머지 시간을 쪼개서 일하고 돌아다니고 쉰다. 역사가 르 로이 라뒤리의 보고에 따르면 13세기에 당시로선 가장 앞선 축에 들어갔다는 프랑스 마을에서도 가장 흔한 소일거리는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앉아 서로의 머리카락에서 이를 잡아주는 일이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물론 텔레비전이 있지만 말이다.
  휴식, 생산, 소비, 교제의 순환처럼 우리네 삶의 경험 세계를 이루는 또 하나의 영역이 있다. 그것은 보기, 듣기 같은 감각의 장이다. 사람의 신경계는 한 순간에 아주 적은 양의 정보만을 처리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외부의 사건을 하나씩 순차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부자도 바지를 벗을 때는 한 다리씩 빼는 법"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한 번에 한 입을 베어먹고, 한 번에 한 노래를 듣고, 한 번에 한 신문을 읽고, 한 번에 한 사람하고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접할 때 쏟아부을 수 있는 정력의 포화점, 곧 주의 집중의 절대적 상한선 안에서만 우리의 인생은 전개된다. 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사람들이 시간을 어디에 얼마나 쓰는지는 놀라우리만큼 비슷하다.
  앞에서 모든 삶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비슷하다고 말했지만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뉴욕의 주식중개인, 중국의 농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원주민이 살아가는 방식은 언뜻 보면 공통점이 전혀 없는 듯하다. 역사가 나탈리 즈몽 다비와 아를렌트 파주는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유럽사를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영속적인 성적, 사회적 위계 질서의 틀 안에서 전개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회 집단에도 이 말은 들어맞는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대체로 성, 연령, 신분에 좌우된다.
  우연한 출생으로 사람은 일평생 겪을 수 있는 경험이 제각각 다른 구멍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이백 년 전, 영국의 공장 지대에 있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예닐곱 살 먹은 소년은 아침 다섯시면 일어나 공장으로 달려가서 해질녘까지 일주일에 꼬박 엿새를 철커덕거리는 직조기 앞에 붙어 있어야 할 확률이 높았다. 그런 아이는 사춘기로 접어들기도 전에 과로로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의 견직공장 지대에서 살던 열두 살바기 소녀는 온종일 커다란 물통을 앞에 두고 실을 엉기게 하는 끈적끈적한 물질을 녹이기 위하여 뜨거운 물에다 누에고치를 담는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물에 흥건히 젖은 옷을 입고 지내다 보면 호흡기 질환에 걸리기 일쑤였고, 손가락 끝을 하도 뜨거운 물에 넣었다 뺐다 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감각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그 시각에 귀족 자녀는 무도회에서 사교춤을 배우고 외국어를 공부했다.
  인생에서 부여받은 기회의 차이는 아직도 엄연히 존재한다. 미국의 대도시 빈민가에서 태어난 아이가 평생 살아가면서 과연 어떤 경험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미국 교외의 넉넉한 가정이나 스웨덴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기대할 수 있는 삶의 질과 빈민가에서 태어난 아이가 기대할 수 있는 삶의 질은 얼마나 다를까? 불행하게도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정에서 설상가상으로 선천성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집에서 준수한 외모에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다.
  엇비슷한 제한 요소들이 만인의 삶을 규정하는 것도 사실이고, 누구나 쉬고 먹고 어울리며 최소한의 노동을 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경험의 내용을 판이하게 만드는 사회적 범주로 인간이 구분된다는 것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은 사람마다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창 밖을 바라보면 흩날리는 눈송이가 모두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돋보기로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면 눈송이가 저마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하나의 눈송이는 어떤 눈송이와도 모양이 같지 않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한 사람이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 지 대충은 예상할 수 있다. 만일 그가 미국 어느 지역의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지 알면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은 더 많아진다. 하지만 모든 정보를 알고 있고 모든 외적 변수를 파악했다 하더라도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다. 우연히 터진 사건이 한 사람의 진로를 엉뚱한 방향으로 바꾸어놓는 경우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은 모처럼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차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반대로 불우한 환경을 극복할 수도 있는데, 바로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마음이고 그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의식에 유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사가 인간 공통의 조건, 사회적, 문화적 범주라든가 우연성에 의해 결정된다면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성찰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노릇이리라. 다행히도 개인이 주도적으로 선택하여 현실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운명의 굴레를 박차고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다.

  삶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이다. 그런데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시간은 아주 귀중한 자산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경험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할당하고 투자할 것인가를 지혜롭게 결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물론 시간 투자는 우리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인류의 일원이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문화나 사회의 성원이기에 반드시 따르지 않으면 안 될 엄격한 제약 조건이 있다. 그러나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은 어느 정도 열려 있고 그 속에서 시간을 분배할 수 있다. 역사가 E. P. 톰슨이 지적한 대로, 산업혁명의 폭압성이 극에 달하여 노동자들이 일주일에 여든 시간을 광산이나 공장에서 노예처럼 죽도록 일해야 했던 시대에도, 어떤 노동자들은 동료들처럼 선술집으로 몰려가지 않고 금싸라기 같은 휴식 시간을 문학 작품을 읽거나 정치 활동을 하는 데 썼다.
  우리가 시간을 묘사할 때 쓰는 예산, 투자, 할당, 지출 같은 용어는 재무 분야에서 빌려온 것이다. 혹자는 그래서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는 편협한 자본주의의 색채가 짙게 배어 있다고 주장한다. "시간은 돈"이라고 즐겨 말한 사람이 자본주의의 위대한 변호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이긴 하지만, 돈과 시간을 같게 보는 관점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문화만이 아니라 인류 공동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돈이 시간의 가치를 낳는 것인 아니라 시간이 돈의 가치를 낳는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가. 무엇을 하거나 만드는 데 들어가는 시간을 측정하는 잣대 노릇을 하는 것이 바로 돈이다. 우리가 돈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을 주어 삶의 제약에서 우리를 어느 정도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표 1>은 우리가 눈을 뜨고 깨어 있는 동안 하루 열여섯 시간 안팎의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그 대강의 윤곽을 보여준다. 여기에 인용된 수치는 근사치일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청년인가 노인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부자인가 가난한가에 따라 시간을 쓰는 방식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표에 나오는 숫자는 우리 사회에서 우리 사회에서 평범한 개인이 보내는 하루의 일상을 보여주는 밑그림 역할을 웬만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선진 공업국에서 나온 시간 배분에 대한 통계 수치 역시 <표 1>의 결과와 여러 가지 점에서 아주 유사하다.
  하루에 우리가 보통 하는 일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중요하고 비중이 큰 일은 생존과 안전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기 위하여 하는 활동이다. 오늘날 이것은 '돈벌이'와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돈이 웬만한 물건은 모두 구입할 수 있는 교환의 매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학교에 다니는 연령층에게는 공부가 성인의 취업 활동에 해당한다. 공부는 취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표 1> 시간은 어디로 가는가?
이 표는 최근 미국에서 성인과 10대를 대상으로 하루 일과를 연구 조사한 결과다. 연령과 남녀, 사회적 지위와 개인적 취향에 따라 백분율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 표에 나타난 수치는 최소치와 최대치며, 1퍼센트는 일주일에 한 시간을 뜻한다.

생산 활동                                                              합계: 24-60%
근무나 공부                         20-45%
담소, 식사, 몽상                      4-15%

유지 활동                                                              합계: 20-42%
가사(요리, 설거지, 장보기)            8-22%
식사                                 3-5%
몸단장(씻기, 옷입기)                  3-6%
운전, 출퇴근                          6-9%

여가 활동                                                              합계: 20-43%
TV, 독서                            9-13%
취미, 운동, 영화, 외식                4-13%
담소, 교제                           4-12%
휴식, 빈둥거리기                     3-5%

출처 : 칙센트미하이와 그래프(1980), 커비와 칙센트미하이(1990), 라슨과 리처즈(1994).

  직업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고 전일제 근무인가 시간제 근무인가에 따라서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력의 사 분의 일에서 절반 남짓은 이런 생산 활동에 투입된다. 전일제 근무를 하는 직장인은 보통 일주일에 마흔 시간을 일한다. 이것은 일주일 동안 깨어 있는 112시간 중에서 35퍼센트에 해당하지만, 이 수치는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지는 못한다. 마흔 시간 중에서 직장인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서른 시간 가량이면 나머지는 담소, 몽상, 그리고 직무와 관계없는 자질구레한 활동에 소모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적다고 보아야 할까 많다고 보아야 할까? 그것은 비교의 대상을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류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브라질의 밀림이나 아프리카의 사막에 거주하는 부족처럼 기술적으로 아주 낙후한 사회에서는 생계를 위하여 성인 한 사람이 투자하는 시간이 하루에 불과 네 시간을 넘지 않는다. 남은 시간에는 쉬거나 잡담을 나누고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춘다. 반면에 서구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던 백 년 동안 아직 노조가 노동 시간을 규제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노동자가 하루 열두 시간 이상 일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현재의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은 양극단의 중간점이라고 할 수 있다.
  생산 활동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야 하지만, 육체와 육체의 부속물을 잘 간수하는 데도 우리는 엄청난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하루의 사 분의 일이라는 시간을 우리는 이런 저런 유지 활동에 투입한다. 식사, 휴식, 세면으로 몸을 돌보고 청소, 요리, 장보기와 각종 집안일로 생활의 여건을 유지한다. 전통적으로 유지 작업의 부담은 여성이 져야 했고 남성은 생산자 역할을 맡았다. 이런 구별 의식은 지금도 미국에 강하게 남아 있다. 식사에 들어가는 시간은 남녀가 엇비슷하지만(약 5퍼센트), 그 밖의 유지 활동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을 투자한다.
  가사노동의 남녀 차별은 다른 나라에서는 더 심하다. 남녀 평등을 이념적 구호로 내걸었던 옛 소련에서조차 결혼한 여의사와 여성 엔지니어가 직장에서 일하고 돌아와 집에서 가사노동을 전담하였다. 웬만한 나라에서는 집에서 밥상 차리고 설거지하는 남자를 우습게 보고 남자 자신들도 그걸 부끄럽게 여긴다.
  남녀간의 노동 분담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현상인 듯하다. 옛날 여자들은 집안 살림을 꾸리느라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한 역사가는 사백 년 전 유럽의 실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여자들은 물이 귀한 가파른 산비탈의 다락밭으로 물을 길어 날랐다. 풀을 베어 말리고    장작을 팼으며, 해초를 거두고 길가 잡초를 뜯어 먹였다. 여자들은 소젖과 염소젖을 짜고    채소를 가꾸며, 밤을 줍고 약초를 캤다. 영국과 아일랜드 일부 지역과 네덜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난방 연료는 동물의 똥이었다. 여자들은 그것을 손으로 주워다가 말려서 화덕에     넣었다.

  기술의 발달로 생산 현장의 노동량이 크게 줄어든 것처럼 상수도 시설과 가전 제품의 보급으로 가사노동의 부담도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다시 말해 전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아직도 여자들이 가정의 물질적, 정서적 뼈대를 간신히 유지하는 데 가용 시간을 모조리 쏟아붓다시피 한다.
  생산과 유지 활동에 들어가고 남은 시간이 자유 시간, 곧 여가 시간인데, 사람들은 여기에 전체 시간의 사 분의 일을 쏟는다. 사람은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비로소 자신의 잠재력을 깨달을 수 있다고 고대의 사상가들은 주장하였다.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학문, 예술, 정치 같은 자기 개발 활동에 시간을 투여할 수 있을 때만 우리는 진정한 인간이 된다. 실제로 학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school'은 여가를 뜻하는 그리스어 'scholea'에서 나온 것이다. 여가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 곧 학문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인상은 좀처럼 실현되기 어렵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 시간은 세 가지 주요 활동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그리스 학자들이 염두에 둔 이상과는 하나같이 거리가 멀다. 첫째는 대중 매체다. 대부분은 TV 시청이고 극히 일부가 신문과 잡지 읽기다. 둘째는 담소이며, 셋째는 자유 시간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어서 고대인의 이상에 그나마 근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음악, 운동, 외식, 영화 감상 같은 취미 활동이다. 이 세 가지 주요 여가 활동에 들어가는 시간이 일주일에 적게는 네 시간, 많게는 열두 시간이다.
  모든 여가 활동 중에서 사람의 정력을 가장 많이 흡수하는 TV시청은 인류가 경험한 가장 새로운 활동 형태이기도 하다. 인간이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하면서 만들어낸 발명품 가운데 TV처럼 중독성이 강하고 흡인력 있는 물건도 없다. 넋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거나 꾸벅꾸벅 졸거나 발리 사람들처럼 무아경에 빠지는 경우를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말이다. TV라는 매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TV야말로 온갖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해 준다고 주장한다. 그 말도 옳긴 하지만 시청자를 성숙시키는 프로보다는 자극시키는 프로가 많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청하는 프로는 자아 개발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산, 유지, 여가라는 세 가지 주요 기능이 우리의 정력을 빨아들인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의 정신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정보도 이런 것들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삶의 성격은 우리가 직업적으로 하는 일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애쓰는 노력에, 그리고 남는 시간에 벌이는 활동에 좌우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삶은 이러한 기본 좌표 안에서 펼쳐지며, 우리가 보낸 하루하루를 모두 더하였을 때 그것이 형체 없는 안개로 사라지느냐 아니면 예술 작품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형상화되느냐는 바로 우리가 어떤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에 달려 있다.

  나날의 삶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뿐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과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우리의 행위와 감정은 당사자가 그 자리에 있건 없건 언제나 타인의 영향을 받는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육체적, 심리적으로 우리는 남과 함께 있는 데 길들여져 있다. 개인이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 정도와 혼자 있을 때 내면화한 타인의 견해에 영향받는 정도는 문화에 따라 다르다. 가령 전통 힌두교 사회에서는 사람을 뚜렷이 구분되는 개체로서가 아니라 확장된 사회적 연결망의 교점으로서 이해하였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만이 가진 생각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가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의 아내이며, 누구의 사촌이고 누구의 부모인가로 결정되었다. 아시아계 학생은 혼자 있을 때도 부모의 기대나 의견을 의식하는 정도가 백인 학생에 비하여 훨씬 높다.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아시아계 학생의 초자아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문화가 아무리 개인주의 방향으로 흐른다 하더라도 개인이 누리는 삶의 질은 타인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세 가지 유형의 사회적 활동 영역에 시간을 엇비슷하게 투입한다. 첫째 영역은 안면이 없는 사람, 동료, 급우로 채워진다. 이 '공적' 영역에서는 한 사람의 행위가 남들의 평가를 받게 되고, 또한 한정된 자원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든가 아니면 협조적 공생 관계가 맺어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이 공적 행위 영역이라고 사람들은 흔히 강조한다. 위험 부담도 크지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도 많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둘째 영역은 가족이다. 아이에게는 부모와 형제이며 어른에게는 배우자와 자식이다. 요즘 들어서는 뚜렷한 사회적 단위로서의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도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고 사실 가족의 정의를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구성 형태로 못박기도 어려운 노릇이지만, 사람에게는 유달리 끈끈한 정을 느끼고 같이 있으면 편안하며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강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집단이 있다는 것 또한 부인 못할 사실이다.
  셋째는 타인의 부재로 정의할 수 있는 공간, 다시 말하면 고독의 공간이다. 산업기술 사회에서 사람은 하루의 삼 분의 일을 혼자서 보내는데, 이것은 대부분의 부족 사회와 비교하면 아주 높은 비율이다. 부족 사회에서는 고독을 매우 위험스럽게 여긴다. 그 점은 현대인도 마찬가지여서 고독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고독을 향유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은 아주 드물다. 우리는 크고 작은 사회적 책무 때문에 좋든 싫든 혼자 지내야 할 때가 많다. 아이는 혼자서 공부하거나 연습해야 하고, 주부는 혼자서 집안 살림을 꾸려야 한다. 적어도 하루에 몇 시간은 혼자서 일해야 하는 직업도 상당수에 이른다. 그러므로 고독을 향유하는 수준은 못 되더라도 고독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는다.

  이 장과 다음 장에서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사용하는지, 혼자서 보내는 시간과 여럿이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자기가 하는 일에 어떤 느낌을 갖는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내가 어떤 증거를 가지고 그러한 주장을 펼쳐나갈지 궁금히 여길 분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를 알고 싶을 때 연구자들은 보통 설문조사를 한다. 잠들기 전이나 주말에 일정한 양식의 응답지를 채우도록 요구하는 이 방법은 간편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회상에 의존하다 보니 정확도가 떨어진다. 경험추출법(Experience Sampling Method), 줄여서 ESM이라고 부르는 방법도 있는데, 이것은 칠십 연대 초반에 내가 시카고 대학에서 개발한 것이다. ESM은 호출기나 프로그램이 입력된 시계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미리 배부한 소책자에 해당 사항을 적어넣도록 요구하는 방법이다. 하루를 두 시간 단위의 토막으로 쪼갠 다음, 아침 일찍부터 밤 열한시 넘어까지, 신호를 한 토막 안에서 예고없이 불시에 보낸다. 신호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기입하고, 그 순간 자기의 심리 상태를 점수로 평가한다. 가령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어떤 충동을 느끼고 있는지, 얼마나 자신감을 갖고 있는지 따위를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다.
  주말이 되면 한 사람이 기입한 소책자의 분량이 56쪽까지 채워지는데, 여기에는 그 사람이 하루하루 무슨 일을 했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가 마치 영화 필름처럼 생생히 수록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이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어떤 활동을 했는지 추적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해서 혹은 같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 그가 느꼈던 감정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여러 해 동안 시카고대학연구소는 2,300명 가량의 사람으로부터 칠만 장이 넘는 응답지를 받았다. 다른 대학들이 모아놓은 자료까지 합치면 그 양은 세 배가 넘는다. 응답지는 많을수록 좋다. 사람들이 보내는 일상의 무늬와 결을 아주 자세하고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컨대 사람들이 얼마나 식사를 자주 하는지, 식사를 하면서 어떤 느낌을 갖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나아가 청소년, 성인, 노인이 식사를 하면서 가지는 느낌이 비슷한지 다른지, 혼자 식사할 때와 여럿이 식사할 때 어떤 차이가 나는지도 알 수 있다. 또 이 방법을 쓰면 미국인, 유럽인, 아시아인 등을 문화적으로 비교하는 작업도 가능하다. 다음에 이어지는 장들에서 나는 ESM으로 확보한 자료와 여타 설문조사에서 얻은 자료를 두루 활용할 것이다. 자료 출처는 책 말미에 밝혀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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