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질은 칠십여 년 동안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사람이 저마다 하는 행동은 경험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우울한 일만 하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았을 리 만무하다. 하나의 행동에는 바람직한 특성과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가령 식사를 할 때 우리는 보통 때보다 바람직한 감정을 쉽게 느낀다. 하루 동안에 사람이 느끼는 행복지수를 그래프로 나타내면 가운데가 불룩 솟아오르는데, 그때가 바로 점심 시간이다. 하지만 식사 중에는 정신의 집중도가 떨어지는 편이므로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행동이 마음에 미치는 효과는 단선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모든 활동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하루 종일 먹기만 한다고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식사는 행복감을 높이지만 깨어있는 시간 중에서 5퍼센트만을 거기에 투입할 때만 그렇다. 일과를 몽땅 식사에만 투자한다면 음식이 오히려 우리에게 고역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다른 활동도 이와 같다. 섹스, 휴식, TV 시청은 정도가 심하지 않을 때는 일상 생활의 질을 끌어올리지만 그 효과가 누적되지는 않는다. 수익체감의 원리는 여기서도 적용된다.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동안 사람이 어떤 느낌을 받는지 <표 2>에 간단히 소개하였다.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성인의 경우 일을 할 때(어린이는 공부를 할 때) 행복의 체감 수준은 평균치보다 떨어지며 의욕의 수준 또한 평균치를 크게 밑돈다. 그러나 집중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어서 다른 활동을 할 때보다 정신 작용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듯하다. 놀라운 것은 일을 하면서 자주 몰입 경험을 한다는 사실이다. 일은 과제의 난이도와 요구되는 실력의 수준이 비교적 높을 뿐 아니라 목표 또한 명확하고 효과도 즉시 나타나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일'의 범주는 아주 넓어서 일의 개념을 정교하게 일반화하기란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일에서 얻는 경험의 질이 일의 종류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항공관계사에게 요구되는 집중도는 야간경비원보다 훨씬 높다. 자영업자의 성취 의욕은 관공서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보다 훨씬 높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이 가지는 공통성은 분명히 있다. 예컨대 사무직 사원이 직장에서 하는 경험은 그가 집에 있을 때 하는 경험보다 생산직 사원이 근무 중에 갖는 경험과 더 비슷하다.
<표 2> 일상 생활과 경험의 질
이 표는 최근 미국에서 성인과 10대를 대상으로 하루 일과를 연구 조사한 결과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얻는 경험의 질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 부정적, - - 아주 부정적, O 평균 또는 중간, + 긍정적, + + 아주 긍정적).
생산 활동 행복감 의욕 집중력 몰입
근무나 공부 - - - + + +
유지 활동
가사 - - O -
식사 + + + + - O
몸단장 O O O O
운전, 출퇴근 O O + +
여가 활동
TV 시청이나 독서 O + + - -
취미, 운동, 영화 + + + + + +
담소, 교제, 섹스 + + + + O +
휴식, 빈둥거리기 O + - - -
출처 : 칙센트미하이와 칙센트미하이(1988), 칙센트미하이와 그래프(1980), 칙센트미하이와 르페브르(1989), 칙센트미하이, 라순드, 훼일런(1993), 커비와 칙센트미하이(1990), 라슨과 리처즈(1994).
일을 지나치게 일반화할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같은 일이라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체험되는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무직 사원은 회의실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기획서를 놓고 씨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고, 생산직 사원은 재고품을 조사하는 것보다는 기계를 돌리는 일에 더 애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일을 통해 얻는 경험은 다른 보통의 활동 범주와 명확히 구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는 일이 몰입 활동에 가까울수록 우리는 그 일에 깊숙이 빠져들고 우리의 경험은 더욱 긍정적으로 변한다. 만약 어떤 일이 명확한 목표, 뚜렷한 결과, 자신감, 힘에 부치지 않은 난이도, 정돈된 분위기를 줄 수 있다면, 그 일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운동을 하거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맛보는 희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지 활동은 경험의 질이 아주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사노동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체로 부정적 반응이나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파고들면 같은 가사노동이라도 집안 청소보다는 요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엿보인다. 세수나 옷입기 같은 개개인의 몸단장은 긍정적 반응을 낳지도 부정적 반응을 낳지도 않는다. 앞서 보았듯이 식사는 영향력이나 의욕에서 하루 중 가장 긍정적 반응을 낳는 행위지만, 거기에 요구되는 인지 활동의 수준이 낮아서 몰입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운전도 유지 활동이라는 범주에서 만만찮은 비중을 차지하며,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 반응을 낳는다. 운전은 행복지수나 동기 유발 차원에서는 중간 수준에 머물지만 기술과 집중력을 요구하므로 유독 운전을 할 때만 몰입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루 중에서 비교적 긍정적 경험이 많이 나타나는 쪽은 여가 시간이다. 여가 시간에 우리는 강한 의욕을 가지고 하고픈 일을 마음대로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뜻밖의 사실이 눈길을 끈다.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그냥 쉬면서 보내는 수동적 여가는 그런 대로 즐거움을 주기는 하지만 정신 집중이 요구되지 않는 활동이라서 몰입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이렇다 할 목적 없이 사람들과 만나서 노닥거리고 어울리는 행위는 특별히 정신 집중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낳는다. 연애나 섹스에서 가장 황홀한 경험을 맛본다는 건 부인 못할 사실이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기회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연애와 섹스는 정서적, 지적 보상이 동시에 주어지는 안정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삶의 질 전체에서 뚜렷한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다.
능동적 여가도 아주 긍정적인 경험을 낳는다. 운동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외식을 하거나 영화를 보러 갈 때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사람들은 더 행복해하고 의욕이 넘치며 집중력이 높아져서 그 어느 때보다도 몰입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바로 이 순간에 경험의 다양한 차원이 가장 밀도 있게 집약되면서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한 사람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 중에서 능동적 여가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사 분의 일에서 오 분의 일이라는 데 유념할 필요가 있다. 나머지 시간을 사람들은 텔레비전 시청 같은 수동적 여가 활동으로 보낸다.
<표 2>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다. 어떤 활동이 가장 행복한가, 어떤 활동이 사람을 가장 의욕적으로 만드는가 하고 물어보라. 답은 대체로 이렇게 나온다. 사람들은 먹을 때, 여가를 능동적으로 즐길 때, 남들과 대화를 나눌 때 가장 큰 행복을 맛보며 직장에서 일을 하거나 집안일을 할 때는 별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의욕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한 가지 다르다면 사람들은 수동적 여가에서 별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집중력은 근무를 할 때, 운전을 할 때, 능동적으로 여가 활동에 임할 때 가장 높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삶의 질을 끌어올리려면 먼저 가장 보람찬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루의 활동을 설계해야 한다. 말은 쉽다. 그러나 습관과 사회적 관성의 압력이 워낙 크게 작용하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고 스트레스를 주는지, 어떤 일이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지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밤에 일기를 적거나 하루의 일과를 반성하는 버릇을 들이면 내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과연 무엇인지를 차분히 추려낼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활동이 명확히 드러나면, 바람직한 활동은 빈도를 늘리고 그렇지 못한 활동은 빈도를 줄이는 새로운 실험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아주 규모가 큰 지역정신건강센터의 책임자로 있는 정신의학자 마르텐 데브리스는 그러한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사례를 보고하였다. 병원 당국은 ESM을 통하여 환자들이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받는지를 알아냈다. 십 년이 넘게 그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 여인은 정신분열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보통 그런 것처럼 그 여자도 머리가 아주 산만하고 감정도 무디기 이를 데 없었다. ESM 조사를 받은 두 주일 동안에 그 여자가 아주 만족스러운 느낌을 보고한 것은 딱 두 번이었다. 두 번 다 손톱을 다듬고 있을 동안이었다. 의료진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그 여자가 아예 손톱 다듬기를 화장 전문가에게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환자는 강의를 열심히 듣더니 얼마 안 가서 병원 환자들의 손톱을 도맡아서 다듬었다. 그 여자는 새 사람이 되어 전문가의 관찰을 받으며 다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는 개업을 하였고 일 년도 못 되어 생활의 기반을 잡았다. 왜 이 여자가 손톱 다듬기에 매료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사례를 정신분석학으로 그럴 듯하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석의 내용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여자가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손톱 다듬은 일을 하면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몰입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 밀라노대학에서 파우스트 마시미니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ESM을 변형하여 괜찮은 진단 수단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개개인의 특성에 맞추어 개입을 시도했다. 그런 개입으로 활동의 틀을 바꾸면 환자가 더 행복해지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환자가 늘 외톨이로 지내면 연구자들은 일이나 자원 봉사 활동에 그 사람을 자꾸만 끌어들여 남들과 어울릴 수 있게 했다. 대인공포증에 걸려 있는 사람이면 번잡한 도심을 함께 거닐거나 시끌벅적한 춤판이 벌어지는 곳으로 데려갔다. 환자는 안전한 병원과는 달리 불안한 상황에서도 의사가 옆에 있으면 다소 마음을 놓았고, 자기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활동에 조금이나마 뛰어들 수 있었다.
창조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언제 누구와 같이 해야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거기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엮어나가는 데 남달리 뛰어나다. 자연스러움과 무질서가 필요하다면 그들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소설가 리처드 스턴이 묘사하는 하루 일과의 '리듬'은 그래서 귀기울일 만하다.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다른 사람도 나와 리듬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일을 하는 사람 이라면 누구나 틀이 있어서 혼자 있는 시간과 남들과 머리를 맞대는 시간을 정해 놓는다. 말하자면 일종의 스케줄을 짜는 셈인데, 이것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을 뜻하지 는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오히려 생리 기능과 호르몬 기능을 가진 유기체인 자아가 외부 세계와 맺는 관련의 문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조간 신문을 예로 들자.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아침에 신문을 읽는 버릇이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 오전에 신문을 읽지 않기로 했다. 몇 해를 그렇게 하니까 하루의 리듬이 바뀌었다. 왜, 저녁이 되어 혈당이 떨 어지면 와인 한잔 생각이 간절해지지 않는가. 일에도 당연히 그런 리듬이 있는 법이다.
하루의 리듬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고독으로 들어가기와 고독에서 빠져나오기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우울하다가도 여럿이 모인 곳에 가면 다시 생기가 감돈다는 건 수많은 연구에서 확인된 결과다. 고립되어 지내는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의욕이 떨어지고 집중력도 저하되며 무기력해진다. 수동성, 외로움, 고립감, 열등감처럼 좋지 않은 감정의 상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 가난한 사람,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이혼한 사람같이 기댈 만한 언덕이 별로 없는 사람일수록 혼자 있으면 약해진다. 남들과 같이 있으면 크게 드러나지 않는 병리 증세도 혼자 있으면 불거진다. 심각한 우울증이나 식욕 장애가 있다는 진단을 받은 사람이 만일 남들과 같이 지내고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을 한다면 건강인의 심리 상태와 구별하기 어렵다. 하지만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은 우울한 상념에 점령당하기 시작하고, 의식 또한 혼돈스러워진다. 정도는 덜하지만 이것은 누구에게나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도 남과 어울릴 때 우리의 주의력은 외부의 요구에 의해 구조화된다. 타인인 눈앞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목표를 제공하고 행동의 결과를 곧바로 알려주는 효과를 낳는다. 남에게 시간을 물어보는 아주 간단한 교섭도 어느 정도의 사교술이 동원되어야 하는 결코 만만찮은 행위다. 거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느냐 못 남기느냐는 목소리, 웃음, 몸짓에 크게 좌우된다. 친밀한 사이일수록 우리가 느끼는 어려움은 더욱 커질 수 있고 더 많은 정성이 필요할 수 있다. 이렇게 타인과의 교제에는 집중이 필요하다. 반면에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혼자 있을 때는 정신력을 집중할 필요가 없어서 마음이 서서히 무너지고 무언가 걱정거리를 찾게된다.
보통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 가장 긍정적인 경험을 한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고, 빠릿빠릿하고, 붙임성 있고, 명랑하며 의욕적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10대에서 특히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70대나 80대의 은퇴한 노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우정의 중요성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기의 고민에 귀기울여 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의 질은 이만저만 달라지지 않는다. 어떤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요한 문제를 상의할 수 있는 친구가 다섯 명 이상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주 행복하다"고 말할 확률은 60퍼센트를 넘는다고 한다.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경우 경험의 질은 중간 정도다. 친구들과 있을 때처럼 즐겁지는 않지만 혼자 있을 때처럼 죽을 맛도 아니다. 결과적으론 중간값이 나왔지만 여기에도 적지 않은 편차가 있다. 집에 처박혀 있는 것이 고역처럼 여겨지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 싶게 가정이 천국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성인은 일을 할 때 다른 때보다 더 집중을 하고 머리를 쓰지만 집에 있을 때처럼 의욕을 느끼거나 행복감을 맛보지는 못한다. 아이들도 비슷하다. 학교에 있을 때와 집에 있을 때의 마음가짐이 어른처럼 다르게 나온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자식과 같이 있으면 대개 즐거워한다. 아이들도 초등학교 5학년까지는 대체로 그렇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가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아이들이 많아진다(적어도 중학교 2학년까지는 그렇다. 그 이상 학년에 대해서는 조사된 바가 없다).
여럿이 함께 있는 것이 경험의 질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대인 관계에 정력을 쏟는 것이 삶의 질은 끌어올리는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동네 술집에서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때우는 것도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데는 확실히 효과가 있지만, 정말로 성숙해지려면 대화를 통해 자극을 얻을 수 있는 참신한 사고를 가진 상대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긴요한 것은 결국 고독을 견디는 능력, 아니, 고독을 즐기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하루의 삶은 집, 자동차, 직장, 길거리, 식당 같은 다양한 공간에서 펼쳐진다. 어떤 활동을 하느냐, 누구와 함께 있느냐 못지 않게,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도 우리가 갖는 경험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10대 청소년은 어른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공원 같은 장소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해한다. 반면 학교나 교회처럼 남들의 기대에 맞추어 행동해야 하는 곳에서는 답답해한다. 어른들도 친구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마음놓고 지낼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하는 편이다. 여자들은 특히 더 그렇다. 오랜만에 가사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남자들은 사람을 만나도 직무와 관련된 일이 많아서인지 여자만큼 홀가분함을 못 느끼는 듯하다.
자동차를 몰면 자유로움을 느끼고 자신감이 생긴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자동차를 '사색의 기계'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운전을 하는 동안 자기의 문제에만 몰두할 수 있고 아늑한 고치처럼 그 안에서 감정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카고의 한 제철소 직원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퇴근길에 차를 몰고 곧바로 미시시피 강으로 달려가 강둑의 야영장에서 두어 시간 머물면서 흐르는 강물을 말없이 지켜본다. 그리고는 차를 몰고 돌아오는데, 도착할 무렵이면 미시간 호에 동녘 햇살이 비치고,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자동차가 화합의 장소로 쓰이는 가정도 적지 않다. 집에서는 부모와 아이들이 이방 저 방 뿔뿔이 흩어져서 갖자 다른 일을 하지만 일단 자동차에 오르면 함께 대화하고 노래 부르고 즐거운 놀이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방이라도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그 안에서 이루러지는 활동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자가 집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은 욕실과 주방이다. 욕실은 집안 식구들에게 시달리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이며, 주방은 가장 자신 있고 또 그런 대로 즐거움도 주는 요리의 공간이기 때문이다(사실은 남자가 여자보다 요리하기를 훨씬 더 좋아하는 듯한데, 이것은 아마 남자가 요리를 하는 시간이 여자의 십 분의 일도 안 되고 또 기분 내킬 때만 요리를 해도 무방하기 때문이 아닐까).
살아가는 환경이 한 사람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글로 쓴 사람은 많지만 그런 주제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나온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 오래 전부터 예술가, 학자, 신비주의자는 평정과 영감을 낳을 수 있는 공간을 세심하게 골랐다. 불교 승려들은 갠지스 강 상류를 터전으로 삼았고, 중국의 학자들은 그림 같은 섬에 지은 정자에서 들을 썼으며, 기독교의 수도원은 전망 좋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웬만한 기업의 연구소는 물오리가 노니는 호수를 끼고 있거나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탁 트인 언덕 위에 서 있다.
뛰어난 창조적 재능을 보여준 사상가와 예술가의 말을 믿어보자면, 마음에 드는 경관이야말로 영감과 창조력의 샘이다. 코모 호수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프란츠 리스트의 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를 둘러싼 자연의 다채로운 모습이 영혼 깊숙한 곳에 정감을 불러일으킨 듯했고... 나는 그걸 음악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1967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만프레드 아이겐은 전세계 과학자들을 초대하여 함께 스키를 타고 과학적 토론을 나누던 스위스 알프스의 겨울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을 얻은 적이 많았노라고 술회한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찬드라셰카르, 베테 같은 물리학자의 전기를 읽으면 만약 등산이란 거의 없고 밤하늘을 볼 수 없었다면 그들의 과학도 무르익지 못했으리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경험의 질에 창조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누구와 하느냐 못지않게 어떤 여건에서 하느냐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산책과 휴가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관점을 바꾸며 자기의 상황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버리고 자기의 취향을 살려 집이나 사무실의 분위기를 안락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타성에 젖은 삶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가장 먼저 시도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바이오리듬이 중요하다, 월요일은 특히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는 날이다, 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루의 질감은 아침부터 밤까지 시시각각으로 달라진다. 이른 아침과 밤늦은 시간은 바람직한 감정이 깃들기 어렵다. 반면 점심 시간과 오후에는 바람직한 감정이 가장 활발해진다. 가장 큰 변화는 아이가 학교 교문을 나서거나 어른이 퇴근할 때 나타난다. 의식을 구성하는 모든 내용이 동일한 방향으로 변하는 건 아니다. 저녁 시간을 밖에서 보내는 청소년은 시간이 흐를수록 신이 나는 반면 스스로에 대한 통제감은 점점 사라진다고 실토한다. 여기서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전반적 추세가 그렇다는 것이고, 개개인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가령 아침잠이 없는 사람과 밤잠이 없는 사람은 시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극명하게 다르다.
같은 일주일 안에서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요일이 있다고 하지만 대체로 사람들이 요일별로 느끼는 감정의 차이는 그리 크다고 볼 수 없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겠지만 금요일 오후와 토요일은 일요일 저녁과 월요일 아침보다 조금 낫다. 하지만 그 차이는 예상 외로 크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설계하느냐다. 무위도식하는 사람에게는 일요일 오전이 괴롭게 다가오겠지만, 미리 약속한 일이 있거나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가는 낯익은 행사가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일주일에서 가장 즐거운 날이 그날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주말에 그리고 때로는 공부나 일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두통이나 요통 같은 몸의 이상을 호소하는 빈도가 확연히 늘어난다는 점이다. 암에 걸린 여성도 친구들과 같이 있거나 무슨 일인가에 빠져 있으면 고통을 견디지만 아무 일 없이 혼자 있는 시간에는 살인적인 통증을 느낀다. 정신이 구체적 과업에 쏠려 있지 않을 때 몸은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몰입 경험과 같은 맥락이다. 박빙의 승부를 펼치는 체스의 고수들은 배가 고프거나 머리가 아파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시합에 나선 선수들은 시합이 끝나기 전까지 통증과 피로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정신이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을 때는 사소한 아픔 따위는 의식에 기록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이 경우에도 역시 어떤 리듬이 나 자신한테 가장 맞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좋은 요일이나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반성 시간을 가지면 자신의 취향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 더 일찍 일어난다든가 오후에 낮잠을 잔다든가 식사시간을 바꾼다든가 하는 식의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는 것도 최선의 리듬을 파악하는 데 유익하다.
이제까지 든 예에서 우리는 마치 사람은 무엇을 하고 누구와 같이 있고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그 내면이 영향을 받는 수동적 대상인 것처럼 말했다. 일면 타당한 구석도 없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용하는가다. 집에서 혼자 살림을 하면서도 행복을 느끼고, 직장에서 의욕적으로 일하고, 아기와 대화에 몰입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바꾸어 말하면 눈부신 일상 생활은 결국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머리에 담긴 정보를 바꿈으로써 경험의 질을 곧바로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찰하기 전에 장소, 사람, 활동, 시간대 같은 일상의 환경이 가지는 영향력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탈속을 하여 아무리 내공을 깊이 쌓은 수도자에게도 유독 마음이 끌리는 나무가 있고, 유달리 맛있는 음식이 있으며, 왠지 가까이 가고픈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하물며 보통 사람인데,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상황에 얼마나 많이 좌우되겠는가.
그러므로 삶의 질은 끌어올리려면 먼저 우리가 매일 하는 것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어떤 활동,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사람 옆에서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를 포착해야 한다. 식사시간에 행복을 느낀다든가 여가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동안 곧잘 몰입 경험에 이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확인되는 성향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의외의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우리는 실은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뜻밖에도 일하기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데서 더 큰 즐거움을 맛보았는지도 모르며 혹은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생은 이런 식으로 살라고 누가 정해 놓은 규칙이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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