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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 모음/몰입

4. 일의 역설

by FraisGout 2020. 5. 12.

사람은 살아가면서 쓸 수 있는 시간  중 삼 분의 일을 일하며 보낸다. 일은 우리에게 퍽 묘한 경험을 안긴다. 가장 강렬하고 만족스러운 순간을 일에서 경험하고 자부심과 자기 정체성 또한 그것에서 얻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일을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려고 드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나온 조사에서 미국 남성의 84퍼센트와 미국 여성의 77퍼센트는 부모로부터 유산을 많이 물려받아 굳이 일할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계속 일하겠노라고 응답하였다. 그런가 하면 누차에 걸쳐 조사된 ESM의 집계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설문지에다 지금의 감정 상태를 기재하라는 연락을 받은 응답자들은 "다른 걸 했으면 좋겠다"에 동그라미를 치는 비율이 하루 중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이 모순된 태도는 두 사람의 저명한 독일 사회과학자가 연구한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그들은 같은 조사 결과를 놓고 상반된 결론을 내렸다. 한 사람은 독일의 직장인은 일하기를 싫어하는데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 전체적으로 더 행복을 느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또 한 연구자는 직장인들이 일을 싫어하는 이유는 언론의 이념적 세뇌를 받았기 때문이며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풍요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응수하였다. 문제는 두 사람의 결혼을 모두 뒷받침하는 합리적 증거가 있다는 점이다.
  투입되는 시간의 양이나 우리의 의식에 남기는 여파 강도로 보아 일이 그토록 막중한 의미를 갖는다면 삶의 질을 끌어올리려는 사람은 일의 이와 같은 이중성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일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간단히 살피고, 지금도 우리의 태도와 경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에 부여되고 있는 그 모순된 가치의 정체를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으로서의 일은 역사적으로 아주 최근에 등장한 것으로, 약 만이천 년 전 대규모 경작의 물꼬를 튼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없었던 현상이다. 그전까지 수백만 년 진화해 오는 동안 인간은 자기 자신과 가족의 먹거리만 조달하였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한다는 개념은 애당초 없었다. 수렵 채취인에게 일은 삶의 나머지 영역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서구 문명의 모태가 된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들은 일은 안 할수록 좋은 것이라고 강조하였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반영한 말이었다. 게으름이 미덕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오직 일하지 않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었다. 로마의 철학자들도 " 품삯을 받는 일은 천해서 자유민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며 수공업자의 일도 천하기는 마찬가지고 장사치의 일 역시 그렇다"면서 선배 철학자들의 견해에 동조하였다. 기름진 땅을 정복하거나 사들인 다음 관리인을 고용하여 노예나 소작농의 경작을 감독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제정 로마 시대에는 성인 남자의 20퍼센트가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가로운 삶을 더없이 뿌듯하게 여겼다. 공화정으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믿음에 약간의 내실이 갖춰졌다. 지배층은 남아도는 시간을 죽일 겸 군인이나 행정관리로 지원하고 나섰는데, 이것은 사회적 공헌도 적지 않았지만 개인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몇 세기를 무사안일하게 보내다 보니 유한 계급은 공적 활동에서 차츰 물러나 앉아 남아도는 시간을 사치와 도락에 쏟아부었다.
  유럽에서 일의 성격이 확 바뀐 것은 지금으로부터 오백 년 전이다. 그러다가 이백 년 전에 또 한 차례 획기적 변화가 일어났고 지금도 빠른 속도로 변모를 거듭하고 있다. 13세기까지만 해도 일에 필요한 에너지는 거의 사람이나 가축의 근육에 의존하였다. 물레방아 같은 원시적 도구 몇 가지가 다소 부담을 덜어주었을 따름이다. 그러다가 다종다양한 기어를 단 풍차가 서서히 보급되어 곡식을 빻고, 물을 긷고, 쇠를 벼리는 용광로에 바람을 불어넣는 일을 맡기 시작하였다. 증기기관이 개발되고 뒤이어 전기가 발명되면서 우리가 에너지를 변환하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방식에 혁명이 일어났다.
  육체적 노력으로 이해되었던 일이 숙련된 활동으로, 인간의 독창성과 창조성을 구현하는 활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기술 혁신의 부산물 덕이었다. 칼뱅이 활동하던 시대에 이미 '노동 윤리'는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었다. 훗날 마르크스가 고전적 노동관을 뒤집어, 오직 생산 활동을 통해서만 인간의 잠재력을 구현할 수 있다고 부르짖은 것도 바로 그런 맥락이었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오직 여가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19세기에 들어와서 일에 창조의 기능이 강화되었을 따름이다.
  2차대전 이후로 풍요를 구가하던 수십 년 동안 미국인이 가졌던 일자리는 대부분 따분하고 재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은 보수와 안정도니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면서 일의 성격이 바뀌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예측이 무성했는데, 예를 들어 일이 깡그리 없어지거나 일주일에 몇 시간 근무하는 감독 업무가 주가 될 것이란 소리도 나왔다. 이러한 전망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범 지구 차원에서 전개되는 경쟁으로 아시아와 남미의 저임 인구가 노동 시장에 가세하면서 미국의 일자리는 다시금 불안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사회가 짜놓은 안전망이 찢겨나갈 지경에 이르면 사람들은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 상태에서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며 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지금도 일의 뿌리깊은 이중성 앞에서 고민하고 있다. 일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는 걸 알면서도 정작 일을 하는 동안엔 거기에서 벗어나고픈 유혹에 시달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듯 모순된 태도가 자리잡게 되었을까? 성인으로서의 직업 활동에 필요한 실력과 규율을 요즘 자라나는 세대는 어떻게 배우는 것일까? 결코 우습게 보아넘길 물음이 아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일은 점점 복잡해지기 마련이어서, 자라나는 세대는 자신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으며 그 일자리를 얻기 위하여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종잡기 어렵다.
  우리는 예전에 세계 전역에서 일관되게 나타났던 모습을 알래스카와 멜라네시아의 수렵 사회나 어로 사회에서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그곳 아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가 하는 일을 도와 주다가 어느새 어른 못지않은 실력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이누이트족 남자아이는 두 살 때부터 장난감 활을 가지고 놀면서 활쏘기를 익힌다. 네 살이 되면 새를 잡을 줄 알아야 하고, 여섯 살이 되면 토끼 한 마리는 거뜬히 쏘아 맞추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순록이나 바다표범에 도전해야 한다. 여자아이는 어른들을 도와 생가죽을 다듬고, 요리와 바느질을 하고, 어린 동생을 보살피는 일을 하면서 사내아이와 비슷한 성숙의 길을 밟는다. 이 다음에 크면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물음은 애초부터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고 어른이 되어 할 수 있는 생산 활동의 길은 단 하나뿐이다.
  만 년 전 농업혁명으로도 도시가 탄생하자 차츰 전문 직종이 생겨났고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선택의 폭이 다소 넓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젊은이는 부모가 하던 일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불과 몇 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주종은 농사였다. 16세기에서 17세기로 접어들자 수많은 젊은이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어 막 싹이 돋아난 도시 경제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느 자료에 따르면 유럽의 어느 지역에서는 열두 살 이하의 시골 소녀 중에서 80퍼센트가 농사짓는 부모의 곁을 떠났고 소년은 그보다 평균 이 년 늦게 부모 곁을 떠났다고 한다. 런던이나 파리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일자리는 가정부, 마부, 짐꾼, 세탁부 같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서비스 직종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사정이 확 달라졌다. 얼마 전에 우리는 미국의 10대 청소년 몇천 명에게 이 다음에 커서 무슨 직업을 갖고 싶은지 물었다. 그 결과는 <표 3>에 나와 있다. 응답 결과를 보면 청소년들이 전문 직종에 대해 터무니없이 높은 기대를 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응답자 가운데 15퍼센트가 의사나 변호사를 지망하였는데, 1990년도 미국 인구조사 통계에 따르면 변호사와 의사가 노동 인구에서 실제로 차지하는 비율은 1퍼센트 안팎에 머물고 있다. 프로 선수를 꿈꾸는 244명의 청소년들도 실망을 면할 길이 없겠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올 수 있는 기회를 오백 배나 부풀려 보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빈민가의 아이들과 넉넉한 교외의 중산층 아이들이 전문 직종을 지망하는 비율은 엇비슷하지만, 미국의 일부 도시에서는 흑인 젊은이의 실업률이 50퍼센트에 육박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청소년들이 장래 직업에 현실 감각이 없는 것은 어른들의 직업 성격 자체가 빠르게 변하는 데도 원인이 있지만, 의미 있는 직업 선택의 기회라든가 보고 배울 만한 직업인을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예상과는 달리, 집안이 넉넉한 10대 청소년들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보다 아르바이트를 더 많이 한다. 뿐만 아니라 부유하고 안정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집안에서, 동네에서, 지역 사회에서 보람 있는 직업을 접할 기회가 훨씬 많다. 실제로 장래 건축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진 열다섯 살 먹은 학생이 친척이 경영하는 건축사무소에서 설계를 배우거나 이웃집의 증축 설계를 돕거나 인근의 건설회사에서 견습 사원으로 일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빈민가의 고등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비공식 구직 알선자는 바로 학교 수위다. 똘똘한 남학생을 깡패 조직에 연결시켜 주고 예쁘장한 여학생을 모델업계에 소개하는 식이다.

  <표 3> 미국의 10대가 희망하는 장래의 직업
미국 청소년 3,89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면접조사에서 나온 10대 희망직업.

  직종                       순위                       백분율
  의사                         1                          10
  기업가                       2                           7
  변호사                       3                           7
  교사                         4                           7
  운동 선수                    5                           6
  엔지니어                     6                           5
  간호사                       7                           4
  회계사                       8                           3
  심리학자                     9                           3
  건축가                      10                           3    
  기타                         -                          45  

출처 : 바드웰, 칙센트미하이, 헤지스, 슈나이더(1997) 참고.

  ESM 조사 결과를 보면 청소년들은 기성 세대가 일에 대해 갖고 있는 이중적 태도를 아주 일찍부터 배우는 것으로 나타난다. 열한두 살이 되면 벌써 아이들은 일반 사회인이 전형적으로 보이는 사고 방식을 내면화시킨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일'처럼 생각되느냐 '놀이'처럼 생각되느냐 물어보면, 6학년 아이들은 학교 공부는 일 같고 운동 시합은 놀이 같다고 약속이나 한 듯이 대답한다. 재미있는 건, 청소년들은 대체로 자신이 일로 여기는 활동을 할 때 이 일이 자신의 앞날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것이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고 자부심을 높여준다고 대답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막상 일 같은 활동을 할 때는 의욕이나 만족의 수준이 평균치를 밑돈다. 놀이처럼 여겨지는 활동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지만, 그때는 의욕이나 만족감이 올라간다. 달리 말하자면,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면 필요하지만 내키지 않는 일과 쓸모 없지만 즐거운 일을 확연히 구분할 줄 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그 골은 한층 깊어진다.
  이런 학생들이 나중에 직장에서도 똑같은 체험을 한다. 미국의 청소년은 열에 아홉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많든 적든 직장 경험을 한다. 이것은 미국처럼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다른 선진국, 가령 독일이나 일본과 비교할 때 매우 높은 비율이다. 독일과 일본의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장래 직업과는 무관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정력을 분산시키기보다는 될 수 있는 대로 학업에 전념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실시한 조사에서 미국 고등학교 1학년생의 57퍼센트, 고등학교 3학년생의 86퍼센트가 봉급을 받고 일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하였다. 대개는 패스트푸드점 종업원이나 점원, 영업사원, 아이 보는 일이었다. 일을 하는 청소년들을 추적해 보면 자부심이 아주 높게 나타났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하는 시간은 수업 시간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을지라도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일에 대하여 갖는 애매모호한 태도는 사회 생활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이미 굳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건 그런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일 같지도 않고 놀이 같지도 않은 걸 할 때 가장 괴로워한다. 이를테면 평범한 유지 활동, 수동적 여가 행위, 그렇고 그런 만남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그때 이들의 자부심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자기가 하는 행동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탓이다. 자연히 만족감이나 의욕도 평균치 아래로 떨어진다. 청소년은 하루 시간의 35퍼센트를 '일 같지도 않고 놀이 같지도 않은 행동'을 하면서 보낸다. 특히 부모의 교육 수준이 낮은 집안의 아이들은 자기가 하는 행동의 절반 이상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즐겁지도 않은 일로 소일하면서 자란 사람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인생에서 이렇다할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린 시절의 태도는 우리가 나중에 커서 일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두고두고 큰 영향을 미친다. 직장일에 몸과 마음을 쏟아붓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 일을 하는 동안은 스스로 만족스러워한다. 그러나 그들은 집에 있을 때만큼 의욕이 없으며 감정의 질도 좋지 못하다. 기업체의 간부들은 월급도 훨씬 많이 받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도 높고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반드시 훨씬 창조적이며 적극적으로 직무에 임하는 것도 아니고, 하위직 사원이나 생산직보다 불만을 덜 느끼는 것도 아니다.
  집 밖에서 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도 남녀 차이가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남자의 정체성과 자부심은 자신과 가족이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주위에서 어떻게 구해 오느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남자가 필요한 일을 해서 얻는 만족감이 부분적으로 유전에 뿌리를 둔 것이든 아니면 몽땅 문화로부터 배운 것이든, 중요한 것은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세계 어디를 가건 가족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남자는 무능력자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여자의 자긍심은 전통적으로 자식을 키우고 가족에게 쾌적한 물질적, 정서적 환경을 제공하는 데서 나왔다. 성별 차이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뜨리기 위해 사람들이 부단히 노력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편견은 여전히 남아 있다. 10대 소년들은 아직도 경찰관, 조종사, 기술자가 되고 싶어하며, 소녀들은 주부, 간호사, 교사가 되고 싶어한다. 물론 요즘에는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을 희망하는 소녀의 비율이 또래의 소년에 비해 훨씬 높아졌지만 말이다.
  유급 노동이 남자와 여자의 심리 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이처럼 다르기 때문에 일에 대하여 남녀가 보이는 반응도 대체로 다르게 나타난다. 오직 일을 위해서 살아가는, 수적으로는 그렇게 많지 않은 맹렬 직장 여성을 제외하고라도, 서비스 직종이나 사무 직종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여성은 바깥일을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성들에게 일은 마치 놀이와도 같아서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대다수 여자들은 직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며, 그래서 역설적으로 일을 즐길 수 있다. 설령 일이 잘 안 풀려서 직장에서 해고된다 해도 크게 자존심 상해하지 않는다.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가족에게 어떤 일이 생기느냐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운다. 부모가 가난하다거나 아이가 학교에서 말썽을 부리는 것이 직장에서 생기는 문제보다 여자에게는 더 큰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런 차이가 있는데다 가사노동과의 비교 의식도 작용해서인지 여자들은 대체로 실직을 남자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부부가 다 직장에 다니는 커플을 상대로 실시한 ESM 조사에서 리드 라슨은 사무 업무, 컴퓨터 작업, 판매, 회의, 전화 업무, 자료 읽기 등을 여자가 남자보다 비교적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직무와 관련하여 여자가 남자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유일한 경우는 직장에서 가져온 일을 집에서 해야 할 때였다. 이것은 여자들이 집에서 가사에 그만큼 부담을 느끼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가정과 직장에서 맞닥뜨리는 이중의 어려움은 여자의 자부심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어린아이를 둔 정규직 여성, 시간제 근무직 여성, 또는 일주일에 몇 시간만 일하는 여성을 비교 조사한 연구에서 앤 웰스는 일을 가장 적게 하는 여성이 자부심이 가장 높고 일을 가장 많이 하는 여성이 자부심이 가장 낮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집에서 가사를 돌보는 것보다 밖에서 보수를 받고 일하는 게 더 즐겁다는 반응에는 물론 차이가 없었다. 이 연구 결과는 자부심의 의미가 애매모호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가정을 가지고 정규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이 자부심이 낮은 것은 일을 잘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힘에 부치는 과도한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문제들은 또 돈을 받고 하는 일과 전통적으로 가족을 위해서 여자들이 해야 한다고 믿어온 가사노동 사이의 구분이 얼마나 자의적인가를 드러낸다. 엘리스 불딩을 비롯한 사회경제학자들이 지적한 대로, 유지 활동은 생산물은 없을지 모르지만 만일 그것을 서비스 활동으로 보고 응분의 대가를 지불할 경우 그 총액은 한 나라의 GNP에 육박할 것이다. 자식을 기르고 병든 식구를 보살피고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는 여자의 일을 시장가격으로 보상하자면 국가 예산의 두 배가 있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우리는 조금 더 인간적인 경제를 꾸려가야 할 것이다. 집안일이 결혼한 여자의 자부심을 뒷받침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서적으로 크게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니다. 요리, 장보기, 자녀 뒷바라지에는 그런 대로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집안 청소, 설거지, 빨래, 가계부 쓰기는 주부가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에 들어간다.
  일에는 안 좋은 점도 따르지만 일이 아예 없는 것은 더 끔찍하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한가로움을 더없이 좋게 이야기했지만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수많은 농노와 노예를 거느린 지주의 한가로움이었다. 이렇다 할 수입도 없이 한가로움만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 참담함에 젖는다. 맨체스터대학의 심리학자 존 헤이워스는 직장을 못 구한 젊은이들이 실업 수당을 웬만큼 받아도 자신의 삶에 좀처럼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로널드 일겔하르트가 열여섯 나라에서 17만 명의 근로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무직 근로자의 83퍼센트, 생산직 근로자의 77퍼센트가 자기의 인생에 만족한 반면 실업자는 불과 61퍼센트만이 만족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인간은 힘겨운 노동 없이도 창조의 은혜를 향유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성경의 말씀은 사실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직업에서 얻을 수 있는 목표 의식과 도전 의식이 없이는, 자기 절제가 아주 뛰어난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의미 있는 삶을 누리기에 충분할 만큼 마음을 한군데로 모으기가 어렵다.
  성인이 일상 생활에서 몰입 경험을 언제 하는가를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여가 시간보다는 근무 시간에 그런 일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ESM 조사 결과가 처음에는 무척 놀라운 것이었다. 아주 뛰어난 실력이 요구되는 까다로운 상황에서 집중력과 창조성, 만족감이 높아지는 현상은 집보다는 직장에서 더 자주 보고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우리가 하는 활동 중에서 게임에 가장 가까운 성격을 가진 것이 일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곧잘 간과한다. 일에는 명확한 목표와 규칙이 있다. 무사히 과업을 마무리했거나, 괄목할 만한 판매 신장을 이루었거나, 상급자의 칭찬을 들었거나, 아무튼 일을 하면 대체로 어김없이 보상이 뒤따른다. 일은 산만함을 누르고 집중력을 살린다. 이상적인 경우는 일의 난이도가 일을 하는 사람의 실력과 엇비슷할 때다. 일은 게임, 운동, 음악, 예술처럼 몰입할 수 있고 보상이 따르는 활동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이런 구조를 지닌 요소를 찾기랄 쉽지 않다. 집에서 혼자 있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낼 때는 명확한 목표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자기가 일을 제대로 했는지, 산만하지는 않은지, 자신의 실력이 달리는 건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다 보니 따분해지기 마련이고 때로는 불안마저 느낀다.
  그러므로 일을 통해 느끼는 경험의 질이 예상 밖으로 긍정적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기회만 있으면 우리는 일을 줄이려고 한다. 왜 그럴까?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첫째로 들 수 있는 이유는 일의 객관적 조건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한 이는 자기가 부리는 사람의 복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하 천오백 미터가 넘는 남아프리카의 탄광에서 땅을 파거나 숨막히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사탕수수 줄기를 베면서 노동에 몰입하기란 초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인적 자원'을 유달리 강조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도 경영진은 직원들이 일을 통해 얻는 체험의 질에 무관심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러니 많은 근로자들이 삶의 본질적 보상을 일에서 기대하지 않고 공장 문이나 사무실 문을 나서야 비로소 행복한 시간을 맛볼 수 있다-사실은 그렇지도 않지만-고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둘째 이유는, 첫째 이유와 맞물려 있지만, 오늘의 현실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역사적으로 일을 천시해 온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의식은 문화에 의해 전승되고 개인이 성장하면서 학습된다. 두 세기 반 전 산업혁명기에 공장 노동자들이 비인간적 조건 아래 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여가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유 시간만 많아지면 저절로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노동조합은 주당 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하여 영웅적 투쟁을 벌였고 그들이 이루어낸 성공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여가 시간이 행복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지만 불행하게도 여가시간 그 자체가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여가 시간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법을 터득하기란 예상보다 쉽지 않다. 좋은 물건이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더 좋은 건 아니다. 적을 때는 삶을 풍요롭게 하던 것이 많아지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사례는 비단 여가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금세기 중엽에 정신의학자와 사회학자들이 지나치게 여가가 많으면 사회적 재난을 부를 수 있다고 경고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객관적 작업 환경과 우리의 주관적 태도,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일이 즐겁다는 생각을 좀처럼 갖기 어렵다. 하지만 문화적 편견에 좌우되지 않고 일을 개인적으로 의미 있게 만들고 싶다는 단호한 의지를 갖고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아무리 범속한 일이라 하더라도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일에서 얻는 본질적 보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물론 전문 직종이다. 전문 직종은 개인이 자신의 목표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고, 과제의 난이도도 조정할 수 있으며, 개성이 깃들일 여지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아주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예술가, 기업가, 정치가, 과학자는 사냥을 하던 선조들처럼 일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삶과 일이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창조적인 지도급 인사들과 내가 백여 차례 가까이 만나면서 가장 흔히 들을 수 있었던 비유는 가령 이런 것이다. "내가 일평생 단 일분도 쉬지 않고 일했다는 말도 옳고, 내가 단 하루도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 적이 없다는 말도 옳다." 역사가 존 호프 프랭클린은 일과 여가가 하나로 녹아든 상태를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기다리던 금요일이 왔구나'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것은 금요일이 되면 이틀 동안 방해받지 않고 꼬박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몰입은 새삼스러운 경험이 아니다. 지식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보면 어려움도 많고 내면의 갈등도 심할 수밖에 없지만 미지의 영역으로 정신을 넓히는 데서 느끼는 희열은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은퇴하고도 남았을 노령의 연구자들마저도 항상 느끼는 즐거움이다. 자기 이름으로 딴 특허가 이백 건도 넘는 발명가 제이콥 래비노는 여든세 살의 나이에도 자신의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호기심이 있으면 당연히 아이디어를 끌어내야 한다. 나 같은 사람은 그게 즐겁다. 아이디어를 떠올린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가.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무언가 색다른 걸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으니까."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생물학자 라이너스 폴링은 여든아홉의 나이에도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이제 무얼 하면서 살아가지? 나는 자리에 앉아서 한 번도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없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무작정 밀고 나갔을 뿐이다." 저명한 심리학자 도널드 캠벨은 젊은 후학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돈에 관심이 있거들랑 과학에 뛰어들지 말라. 어떻게든 이름을 날려야 보람을 얻을 수 있겠다는 사람도 과학에 뛰어들지 말라. 명예란 것은 주어지면 고맙게 받을 일이지만 여러분을 즐겁게 하는 건 일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미국의 시인 마크 스트랜드는 일을 찾아서 몰입하는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일을 하다 보면 시간 감각을 잊고 황홀경에 빠져 지금 하는 일에 온통 사로잡힌다. 시를 쓰고 있는데 그 시가 순조롭게 씌어지면 지금 내가 쓰는 말이 더없이 적확한 표현이라는 느낌이 온다."
  물론 이 사람들은 영광스럽게도 전문 분야의 정상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복이 많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어 이름을 떨친 사람들 중에서도 자기 일을 혐오하는 이가 있는 반면, 회사원, 배관공, 목부, 생산직 근로자 중에서도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묘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값지게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 조건이 아니다. 문제는 일을 어떻게 하고 일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에서 어떤 경험을 끌어내는 가에 달려 있다.
  아무리 일에서 만족을 얻는다 하더라도 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내가 만났던 뛰어난 사람들의 대다수는 자신에게는 일보다 가정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바쁜 일과 때문에 그런 마음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말이다. 그들은 대체로 정서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인생에서 이룬 것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답변은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의 다음과 같은 발언과 대동소이한 내용이었다. "자식 여섯을 낳아서 누가 보아도 괜찮은 재목으로 키웠다는 점 하나라고 할까. 정말이지 나는 그게 제일 자랑스럽다." 시티코프사의 총수 존 리드는 자기가 이제까지 한 것 중에서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일 년이었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돈을 벌며 얻는 만족감은 아이들을 키우며 얻는 만족감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악기를 연주하거나 희귀한 해양지도를 수집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요리책을 쓰거나 저개발 국가의 파견 교사로 자원하거나 하면서 보람 있게 시간을 쓰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직업에 애정을 기울이고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일벌레'로 보기는 어렵다. 일벌레는 일에만 미쳐서 다른 목표나 책임은 안중에 없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표현이다. 일벌레는 직무와 관련 있는 도전에만 응하고 일에 관계된 기술만을 배우려 드는 편협성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는 일이 아닌 다른 활동에서는 몰입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 발로 차고 인생을 초라하게 마감하곤 한다. 일에만 미쳐 살아온 그에겐 이제 뾰족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일에 전념하면서도 인생을 다채롭게 꾸려간 사람의 예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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