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무엇이 나를 가장 기쁘게 만들고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가를 생각할 때, 십중
팔구 우리는 타인을 떠올릴 것이다. 연인이나 배우자는 나의 감정을 붕 띄워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짜증과 울적함을 주기도 한다. 아이는 축복이지만 동시에 골칫거리다. 상사가 던
지는 말 한마디에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한다. 우리가 평상시에 하는 행동 중에서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남들과의 교제다. 몰입 경험을 하다가 다음 순간에 냉담, 불안,
이완, 권태가 찾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인간 관계가 우리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잘 아는 임상심리학자들은 타인과의 유쾌한 만남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심리요법을 발전시켰다. 행복이 인간 관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타인으로부터
얻는 피드백에 우리의 의식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건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ESM 방식으로 조사한 사라라는 여성은 일요일 아침 아홉시 십분에 주
방에 혼자 앉아 아침 식사를 하면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때 우리가 호출기를 울리자 그
여자는 자신의 행복지수를 5로 매겼다. 이것은 절망감을 1로 보고 날아갈듯한 기쁨을 7로
보았을 때 수치다. 열한시 삼십분에 다시 신호를 보냈을 때 사라는 아직도 혼자였고 담배를
피우면서 아들이 다른 도시로 이사간다는 소식에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행복지수는
3으로 떨어졌다. 오후 한시에 사라는 여전히 혼자서 집안 청소를 하고 있었고 행복지수는 1
이었다. 그러던 것이 뒷마당에서 손자들과 수영을 한 오후 두시 삼십분에는 행복지수가 7로
최고치를 나타냈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채 못 지났을 때 사라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책
을 읽고 있는데 손자들이 자꾸 물을 튀겨대는 바람에 행복지수가 2로 곤두박칠졌다. "이 망
나니들을 시어미한테 떠넘기는 며느리가 원망스럽다"고 그녀는 ESM 응답지에다 적어넣었
다. 단 하루 동안에도 우리는 타인에 대한 평가와 교제의 양상이 수시로 바뀌며 그것이 감
정에 여지없이 반영된다.
산업화가 일찍 이루러진 서구 사회는 개인이 사회로부터 느끼는 압력이 상대적으로 미약
한 편이다. 서구인은 개개인의 잠재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권리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
기며, 사회가 개인의 자기 실현을 가로막는 걸림돌 역할을 한다는 의식이 적어도 루소 이후
로는 굳게 뿌리내렸다. 반면에 아시아의 전통적 사고 방식에 따르자면 개인은 타인과 어울
림을 통해 조형되고 정제도기 전까지는 있으나마나한 존재다. 이런 원칙은 인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통 힌두 문화에서는 사회성원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이상적이고 모범
적인 행동상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힌두적 인간은 집단적 사건이라
고 하는 일련의 주도면밀하고 의식적인 과정을 거쳐서 탄생한다. 이 사건들을 일러 '삼스카
라'라고 하는데, 이는 힌두교도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주기적 의식"이라고 린하트는
설명한다. '삼스카라'는 인생의 단계단계마다 따라야 할 새로운 행동 수칙을 제공하면서 아
이와 어른에게 삶의 틀을 두루 잡아준다.
인도의 정신분석학자 사디르 카카르는 '삼스카라'를 시기적으로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
는 절묘한 의식이라고 농반 진반으로 말한다.
인간의 생활을 일련의 단계가 펼쳐지는 주기로 개념화하여, 각각의 단계마다 '고유한'
과업이 있고, 이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인도인의 전통적
관념이었다. 이런 의식을 강력하게 밀고 나갔던 이유의 하나는 아이를 점진적으로 사회에
통합시키기 위해서였다. '삼스카라'는, 시간을 절도 있는 템포에 맞추어 두드려서 어머니
품으로부터 아이를 떼어내 공동체의 어엿한 성원으로 성숙시키는 기능을 맡았다.
그러나 사회화는 행동의 틀을 잡아주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의 기대나 요구에 맞게끔 사
람의 의식을 조형한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실수를 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고 남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내면화한 공동체의 기대
수준에 개인이 얼마나 깊이 의존하는가는 문화마다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가령 일본인은
신세, 은혜, 책임의 미묘한 뉘앙스를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는 수많은 단어를 곧잘 사용하는
데, 그런 감정을 그 정도로까지 섬세하게 느껴본 경험이 없는 외국인들은 그런 말들을 자국
어로 옮기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일본의 예리한 저널리스트 류 신타로는 보통 일본인
은 "다른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묻어서 간다. 해수욕을 가더라도 한적한 해변은 피하고 그
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해변으로만 몰려간다."고 지적했다.
정신적으로건 육체적으로건 왜 우리가 사회적 환경에 이토록 얽매여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아프리카의 밀림과 초원 지대에 사는 원숭이도 자기가 무리에 끼지 못하면 오
래 못 버틴다는 걸 잘 안다. 외톨이 개코원숭이는 금세 표범이나 하이에나에게 잡아먹힌다.
우리의 조상들은 자신이 사회적 동물이며, 단지 보호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생활의 즐거움
을 익히기 위해서라도 무리를 이루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터득하고 있었다. 멍텅
구리를 뜻하는 영어 단어 'idiot'는 혼자 사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다. 공
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사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발상이 스며들어 있다.
현대의 무문자 사회에도 이런 의식이 깊숙이 뿌리박혀 있어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개인
은 마귀 취급을 당한다. 때문에 정상인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으려 한다.
마음의 균형을 잡는 데 남들과의 어울림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타인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
을 미치는지를 직시하고, 그 영향을 어떻게 하면 긍정적 경험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를 고
민해야 한다. 만사가 그렇듯이 인간 관계도 공짜로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 관계에서
득을 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정성을 먼저 기울여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우리는 타인
은 지옥이라고 결론짓는 사르트르의 작품 속 주인공과 같은 운명에 처할 위험에 봉착한다.
사람 관계에서 마음이 무질서에 빠지지 않고 바람직한 질서를 유지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우리의 목표와 다른 사람의 목표 사이에서 어떤 합치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사람들끼리 어울리다 보면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므로 어
떤 합치점을 발견하기란 원칙적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을 기울이면 대부분의
경우 아주 작은 합치점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 성공적인 어울림을 가능케 하는 또 하나의
조건은 다른 사람의 목표에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의 정력이 남아돌지 않는 다음에야 이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면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긍정적 결과를 끌어낼 수 있고, 적절한 어울림에서 맛볼 수 있
는 몰입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친구와 같이 있을 때의 경험을 가장 긍정적으로 보고한다. 특히 10대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그림 3> 참조) 노년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건 친구와 함께 있을 때 더욱 행복을 느끼고 의욕도 올라간다. 공부나 가
사노동도 혼자 하거나 식구와 하는 경우에는 마지못해서 하지만 친구들과 같이 하면 신이
나서 한다. 여기에는 미루어 짐작할 만한 이유가 있다. 친구들과 같이 있으면 적절히 어울릴
수 있는 조건이 이상적으로 갖추어진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친구로 선택한 것은 그와 나의
목표에 합치점이 있어서이며 서로 평등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우정은 서로에게 득을 준
다. 이쪽이 저쪽을 착취하는 외적 강제 관계가 아니다. 이상적 우정은 결코 한 자리에 고여
있지 않다. 우정은 늘 새로이 정서적, 지적 자극을 주어 권태나 무감각이 스며들 여지를 남
겨두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대상, 활동, 모험을 추구하고 새로운 태도, 관념, 가치를 개발
하면서 친구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다. 많은 경우 몰입 경험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은 활
동의 내용이 금방 시시해지기 때문이지만, 친구는 일평생을 가도 끊임없이 자극을 줄 수 있
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우리의 정서적, 지적 기량을 갈고 닦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이런 이상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다.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지 않는
자아상을 담아두기만 하는 고치의 역할을 하는 우정도 있다. 10대의 동년배 집단, 클럽이나
다방에서 잡담으로 소일하는 이들, 직업으로 얽힌 상조회, 술친구들은 이렇다 할 부담을 주
지 않으면서도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는 위안감을 준다. 이러한 모임의
성격은 <그림 3>에서 알 수 있는데, 혼자 있을 때보다 이런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집중도
가 현저히 떨어진다. 친구들과 같이 어울릴 때는 대체로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는 예가 드물
다.
달리 깊이 사귈 만한 대상이 없는 사람은 자기처럼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게 의존하여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데, 이 경우 우정은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도시의
깡패 조직, 10대 폭력 조직, 테러리스트 조직은 본인의 잘못이든 불우한 환경 탓이든 어떤
공동체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면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개인들로 이루어
져 있다. 그런 관계에서도 성장은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대다수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악질
적 성장이다.
사회적 조건의 다른 특성들과 비교할 때 우정은, 가깝게는 가장 정서적 보상이 큰 상황을
제공하고 멀게는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가져다준다. 그러나 현대
인의 생활은 우정을 지켜나가는 데 불리한 쪽으로 작용한다. 전통 사회로 갈수록 개인은 어
렸을 때 사귄 친구들과 일평생 만날 기회가 많다. 그러나 미국처럼 땅이 넓고 사회적 이동
범위도 큰 사회에서 이것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중학교 친구와 고등학교 친구가 다르고
대학교에 들어가면 또 바뀌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직장을 옮기는 경우도 잦고 이 도시에
서 저 도시로 전근을 갈 때도 많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와의 사귐이 일시적이고 피상적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정서적 위기를 맞이한 성인들이 자주 토로하는 고백의 하나가 바로 참
다운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 자주 듣는 이야기는 만족스러운 성적 관계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20세기가
이룩한 문화적 성취의 하나가 바로 삶에서 '좋은 섹스'의 중요성을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그
러나 늘 그렇듯이 이 문제를 너무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섹스가 삶의 나머지 경험으로부터
유리되면서 사람들은 성의 자유로운 만끽을 통하여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그릇된 관념에
빠지게 되었다. 성적 접촉의 다양성과 빈도가 그 성적 접촉의 바탕이 되는 인간 관계의 깊
이와 강도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내용
이 요즘 일반인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믿음보다 과학적 사실에 더 가깝다는 것이 퍽 흥미롭
다. 진화론에서는 성행위의 원래 목적이 아이를 낳고 부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데 있다고 보
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기능들이 성행위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가령 미각의 일차적 기능은 신선한 음식과 부패한 음식을 구별하는 것이었지만 시간
이 흐르면서 우리는 맛의 섬세한 차이에 바탕을 둔 복잡한 조리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그
러므로 성적 쾌락은 그 유래가 무엇이었든 간에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언제
든지 열어줄 수 있다. 그러나 허기와 관계없는 폭식이 부자연스러운 것과 마찬가지고 상대
방의 애정, 관심, 일체감과 동떨어진 성행위에 집착하는 것은 빗나간 자세다.
본능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앞장서서 외치며 사회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로
서 프리 섹스를 들고 나왔던 선구자들은 반 세기 뒤에 섹스가 방취제나 청량음료를 파는 데
이용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르쿠제 등이 서글프게 인정하듯이 에로스는 이런저
런 방식으로 악용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교회나 국가 권력, 그리고 나중에는 광
고 산업이 에로스의 막강한 에너지를 어떤 방식으로든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성
이 억압되었던 것은 성에 실린 강력한 에너지를 생산적 목표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가능성 때
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성적 자기 실현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어 성의 에너지를 소비 행위
로 끌어모으기 위해 성욕의 발산이 권장된다. 어느 경우에든 삶의 가장 깊고 내밀한 희열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이 바깥 세계의 이익에 의해 뒤엎어지고 농락당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살아가면서 자주 경험하는 일이지만 여기서도 스스로 결정을 내
리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문제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의 성을 지배
하려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간파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얼마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존
재인가를 하루 빨리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아주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어렸을 때 나
는 코요테라는 동물이 발정한 암컷을 보내 어리숙한 농장의 개를 자기들이 매복하고 있는
곳으로 끌어들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우리가 얼마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가를 깨달
은 사람 중에는 아예 극단의 길을 치달아 섹스에만 몰입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금욕도
방종도 우리에게 결코 보탬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삶의 틀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가
지는 것이며, 그 틀 안에서 성이 어떤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가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취하
는 것이다.
좋은 친구를 사귀기가 워낙 어려워서인지 미국에서는 부모, 배우자, 자식이 친구처럼 지내
는 새로운 가능성이 모색되고 있다. 사랑에도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전통 유럽인의 시각에서
보면 남편이나 아내한테서 우정을 느낀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경제적, 정치적 결속의 강
화에 혼인이 크게 기여하고 지식이 부모로부터 유산과 직위를 세습받던 시절에는 우정의 밑
바탕이 되는 평등과 호혜의 조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지난 몇 세대 사이에 가정은 필수 불
가결한 경제적 역할이 크게 축소되었다. 물질적 혜택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면서 가정이
주는 정서적 보상의 의미가 한층 부각되었다. 그러므로 현대의 가정은 숱한 문제점에도 불
구하고 전에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최적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맞이하고 있
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우리는 적어도 빅토리아 시대 이후로 우리가 소중히 여겨왔던 가정상
이 수많은 대안 중의 하나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역사학자 르 로이 라뒤리에
따르면 중세의 프랑스 농촌 가정은 같은 지붕 아래 살면서 식사를 함께 하는 사람들로 이루
어져 있었다.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은 당연히 여기에 포함되었고 농사일을 거드는 일꾼이나
잠시 묵었다 가는 외지인도 가족의 울타리 안에 들어갔다. 개인과 개인을 가르는 구분선이
없었다. 피로 맺어졌건 안 맺어졌건 돌과 회반죽으로 지어진 집에서 함께 거주하면 모두 가
족이었다. 중요한 것은 공간적 일체감이지 생물학적 일체감이 아니었다. 그보다 천 년 앞선
로마 시대 가정의 사회적 배열 또한 지금과는 판이하였다. 가장에게는 마음에 안 드는 자식
을 죽일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었으며, 훗날 19세기 귀족 가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혈연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문화적 전통이 같다고 해서 이러한 편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 덕
분에 우리는 가족의 형태가 무척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령 가족의 범위가 엄청
나게 넓은 하와이에서는 가장 나이 많은 여성을 그 집안의 '어머니'로 여긴다. 일부다처제를
운용하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일처다부제를 수용하는 사회도 있다. 이런 다양성에 익숙해져
서인지 미국은 이혼율이 50퍼센트를 넘고 아이들의 상당수가 편모 슬하나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 집안에서 살면서도 가정이 와해되는 현실을 비극이라기보다는 달라지는 사회적, 경
제적 조건에 걸맞은 새로운 형태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나는 정상적 모습으로 기꺼이 받
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가정은 무용지물이며 종국에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반동
적 제도라는 극단론까지 들려온다.
그런가 하면 '가정의 가치'를 옹호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몇십 년 전의 TV 드라마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전통적 가족 구조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누가 옳은가? 분명
히 양측의 주장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편협
한 시각 안에 가두어 이해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다. 먼저, 고정 불변의 이
상적 가족상이 존재하며 사회적 조건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이런 환상을 고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자세다. 그렇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부모만이 줄 수 있는
정서적 뒷받침과 보살핌 없이도 한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위
험천만한 논리다. 가정의 형태가 아무리 변화무쌍하게 펼쳐져 왔다고는 하지만 한 가지 변
하지 않는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곧 성이 다른 두 어른이 결합하여 서로의 행복을 위해 노
력하면서 자식에 대해 책임을 함께 나누어 가진다는 사실이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모든 사회에서 아주 복잡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신
부의 지참금이나 몸값을 시시콜콜 따지는 관행이 생겨난 것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사회에 부담을 주는 것을 막아보려는 의도에서였다. 모든 사회에선 신랑과 신부의 부모와
친척은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뒷바라지하고 가르쳐야 할 책임을 진다. 그것은 물
질적 지원의 형태일 수도 있고 공동체의 가치 규범을 아이의 머리에 불어넣어 주는 사회화
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소련, 이스라엘, 중국, 그 어떤 사회에서도 가정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다른 골격의 사회제도를 밀어넣는 데 실패했다. 그런데 자유주의를 앞세운 현대 자
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족 관계가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력은 너무나 막중해서 만일 그런 주제를 글로 엮는다
면 그야말로 무궁무진하게 나올 것이다. <햄릿>에서 <보바리 부인>, <느릅나무 밑의 욕망
>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문학 작품의 상당수가 바로 가족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한 가족
안에서도 처한 입장에 따라 경험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같은 사건을 앞에 놓고도 상황을 어
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또 과거의 가족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따라 아버지, 어
머니, 자식의 반응에 차이가 난다. 아주 일반화시켜서 말하자면 사람이 하루 중에 느끼는 감
정의 기복에서 조절판 역할을 하는 것이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에서는 친구들과 어울
릴 때처럼 희열을 맛보는 경우는 드물지만 혼자 있을 때처럼 푹 가라앉는 경우도 드물다.
자신의 억눌린 감정을 이렇다 할 부담 없이 쏟아낼 수 있는 곳도 가정이다. 불행한 일이지
만 적잖은 가정에서 학대와 폭력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만 봐도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
다.
리드 라슨과 마리즈 리처즈가 ESM 방식으로 가정의 역학 관계를 폭넓게 조사한 연구에
서 몇 가지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가령 부부가 모두 직장에 다닐 경우 남자는 직장에선
기분이 별로였다가 집에 돌아오면 풀리는 반면, 아내는 퇴근하면 해치워야 하는 집안일 때
문에 기분이 가라앉아 서로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우애가 돈독한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피하기에 급급하다. 오늘날 가정에서도 배우자간 성차는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아버지의 기분은 가족 모두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고 아이들의 기
분은 어머니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반면, 어머니의 기분은 식구들에게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약 40퍼센트의 아버지와 10퍼센트 미만의 어머니가 자식이 어떤 일을 해냈
을 때 기분이 좋아진다고 대답한 반면, 45퍼센트의 어머니와 20퍼센트의 아버지가 자식들이
기분 좋아하면 자신들도 기분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남자는
아직도 아이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관심을 두는 반면, 여자는 아이들이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가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남편과 아내의 전통적 역할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원만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한 글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내용은,
식구 하나하나의 정서적 안정과 성장을 뒷받침하는 가정에는 두 개의 거의 상반된 특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원칙과 자발성, 규율과 자유, 높은 기대와 무조건적 사랑의
공존이다. 좋은 가정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을 북돋우면서도 애정의 울타리 안에
묶어들이는 복합적인 구조 속에서 움직인다. 언제까지 집에 들어와야 하고 숙제는 언제 하
고 그릇을 누가 씻는가처럼 허용 가능한 것과 허용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놓고 옥신
각신하느라 불필요하게 기운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원칙과 규율은 있어야 한다. 정력
을 입씨름과 말다툼에 허비하지 않으면 각자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건설적으로 투자된다.
그러면서도 식구들은 필요할 때는 가족 전체로부터 정신적 후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복합적인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실력을 닦고 과제를 깨닫는 기회
를 갖게 되어, 살아가면서 몰입 경험을 남보다 많이 할 확률이 높다.
보통 사람은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의 삼 분의 일을 혼자서 보낸다. 너무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내는 사람도 문제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적은 사람도 문제가 있다. 또래들과
어울려 다닐 생각만 하는 청소년은 학교 생활을 잘 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도무
지 배우려 들지 않는다. 반면 외톨이로 지내는 아이는 우울증과 소외감에 시달리기 쉽다. 오
지의 벌목공이나 정신과 의사처럼 물리적, 정서적으로 고립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인 상대적
으로 자살할 확률이 높다. 하루의 일과가 꽉 짜여져 있어 심리적 무질서를 낳는 기운이 사
람의 의식을 사로잡기 어려운 경우는 예외지만 말이다.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수사들은 격리
된 방에서 평생을 살면서도 이렇다 할 부작용을 보이지 않는다. 잠수함 승무원들은 사생활
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몇 달을 끄떡없이 지낸다.
무문자 사회에서는 적정 수준으로 요구되는 고립의 시간마저 아예 없는 경우가 많다. 인
류학자 리오 포춘의 보고에 따르면 멜라네시아의 도부적은 혼자 있는 걸 기를 쓰고 피하려
한다. 용변을 보러 수풀로 들어갈 때도 혼자 가면 마귀에게 봉변을 당할까봐 꼭 다른 사람
을 데리고 간다. 혼자 있는 사람이 마귀에게 취약하다는 것은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
니다. 설명이 너무 비유 일변도로 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구체적 현실을 묘사하
고 있다. 고립된 개인은 망상이나 비현실적 공포에 빠져들기 쉽다는 점을 많은 사회과학자
들도 지적한다. 날씨나 어제 저녁의 야구 경기처럼 아무리 하찮은 주제일지라도 다른 사람
과 나누는 대화는 우리 의식 안에 공동의 현실감을 만들어낸다. "조심해서 가세요." 같은 인
사 한마디를 통해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고 나의 안위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므로 밥 먹듯이 자주 이루어지는 만
남에도 '현실의 유지'라는 중요한 기능이 있는 것이다. 의식이 무질서로 와해되지 않기 위해
서는 이러한 기능이 필요하다.
그 점을 웅변하듯이 남들과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울적하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
다. 혼자 있으면 별로 신이 안 나고 즐겁지도 않으며 기운이 떨어지고 무력감과 권태감, 외
로움에 휩싸인다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 유일하게 올라가는 경험의 요소는 집중력이다. 이
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사색을 즐기는 사람들은 얼른 수긍하지 못한다. "그럴 리가 없다. 나
는 혼자 있는 게 좋아서 일부러 고독을 찾아나서는 편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물론 고독
을 즐기는 법을 배울 수야 있지만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만약 그 사람이 화가나 작가라
면, 과학자라면, 혹은 취미에 푹 빠져 있거나 내적으로 풍부한 사람이라면, 혼자 있는 것이
즐거울 뿐 아니라 필요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정신적 바탕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고독을 견디는 능력이 있다고 과신하는 경향이 강하다. 엘리자베스 노엘
레 노이만이 독일에서 실시한 조사결과는 우리가 그 점에 있어서 얼마나 자기 기만적인가를
잘 보여준다. 노이만은 수천 명의 응답자에게 산을 찍은 두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한 장
은 사람들로 붐볐고 또 한 장은 같은 배경에 사람이 몇 되지 않았다. 그리고는 두 가지 질
문을 던졌다. 첫째 질문은 "이 둘 중에 휴가를 보내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였다. 한적한 곳
을 선택한 사람이 60퍼센트였고 붐비는 곳을 고른 사람이 34퍼센트였다. 다음 질문은 "대부
분의 사람들이 휴가를 보낼 것이라고 생각되는 곳은 둘 중 어디인가?"였다. 이 질문에는 61
퍼센트가 붐비는 곳을 지목했고 23퍼센트가 한적한 곳을 짚었다. 그 사람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아내려면 본인의 선택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선택에 대해서 그 사람이 내리는
판단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고독을 즐기건 즐기지 않건 어느 정도의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가
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다. 수학 공부, 피아노 연습, 컴퓨터 프로그램 짜기, 삶의 의미에 대
한 사색은 다른 사람들 속에서는 아무래도 하기 어려운 활동이다. 생각을 모으려면 집중력
이 필요한데 주변의 불필요한 말 한마디에, 다른 사람에게 주목해야 할 피치 못할 사정 때
문에 좀체 집중할 수가 없다. 항상 친구들과 붙어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학생은-대체로 가
정에서 소원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복잡한 학습에 요구되는 정신적 에너지가 턱없이
부족하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혼자 있는 걸 싫어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개발할
수가 없다.
외로움이 인간의 발전을 부단히 위협해 왔다면 이방인들 역시 그에 못지않은 문젯거리였
다. 보통 우리는 혈연이나 인종, 언어나 종교, 교육 수준이나 사회적 지위 등의 잣대를 가지
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목표와는 상치되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고대의 인간 집단은 자기들만이 참다운 인간이라고 믿었고 자기들과
문화를 공유하지 않는 집단은 인간이 아니라고 보았다. 유전적으로 인간은 모두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차이가 대립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해왔다.
다른 집단끼리 마주쳤을 때 그들은 상대가 인간임을 망각하고 '타자'를 적으로 취급하면
서 필요하다면 양심의 가책 없이 몰살시키곤 했다. 뉴기니의 식인종만 그런 것이 아니라 보
스니아의 세르비아계와 회교계, 아일랜드의 구교도와 신교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인종과 교리의 차이에서 비롯된 수많은 갈등이 문명의 껍데기 바로 밑에서 부글부글 끓어오
르고 있다.
다양한 부족 집단이 처음으로 만나 어울린 곳은 지금부터 팔천 년 전 중국, 인도, 이집트
같은 세계 각지에 생겨난 거대한 도시들이었다. 상이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서 처음
으로 화합을 배우고 생소한 풍습을 용인하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국제성을 자랑하는 대도
시에서도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는데는 실패하였다. 중세의 파리에서는 일곱 살밖
에 안 된 아이도 성당 부속학교와 집을 오갈 때 유괴범과 강도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단도를 품에 지니고 다녀야 했다. 17세기만 하더라도 부녀자가 도시의 거리를 걷다가 부랑
자 패거리에게 강간을 당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지금도 도심의 정글에서는 다른 피
부색에 다른 옷을 입고 다른 행동거지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당할 가
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차이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우리는
낯선 것과 이국적인 것에 매력을 느낀다는 점이다. 국제 도시가 매력적인 것은 다양한 문화
가 충돌하면서, 고립되고 동질적인 문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흥미롭고 자유로우며 창조
적인 분위기가 나타난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원, 거리, 식당, 극장, 클럽, 해변
처럼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공적 공간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경험을 한다고 말한다. '타
자'들이 기본적으로 우리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한계 안에
서 행동하리라고 가정할 수만 있다면, 타인이라는 존재는 삶의 질을 높이는 조미료 구실을
톡톡히 한다.
현재의 다원주의 추세는 이방인의 낯섦을 줄이는 한 가지 활로가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활로는 공동체의 '회복'이다. 앞의 말에다 따옴표를 붙인 이유는 이상적 공동체가 이상적 가
정처럼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일상 생활의 역사
를 서술한 책들을 읽어보면 사람들이 공동체 안이나 바깥의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를
도우면서 평화롭게 생업에 종사하였던 시절은 그 어느 지역에서건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
는 걸 알게 된다. 중국, 인도, 유럽의 작은 도시에는 차별받는 소수민족도 없고 조직 범죄도
없었을지 모르지만 부적응자, 일탈자, 이단자, 비천한 신분은 어디에나 있었고 정치적, 종교
적 적대감은 내전으로 번번이 폭발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초기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상당한 응집력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지만 마녀 사냥, 인디언과의 전쟁, 영국 왕을 인정할 것
이냐의 여부, 노예제에 대한 견해에서는 심한 내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바꿔 말하면 화가 노먼 록월이 묘사한 미국의 이상적 소도시 상은 그가 그린 추수감사절
저녁 식탁에 모여앉아 미소를 지으며 기도를 올리고 있는 혈색 좋은 가족의 자태처럼 현실
속에서는 오히려 예외적인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건전한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시도하
는 것이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안전하면서도 생기가 감도는 사회 환경은 과거에서
본보기를 찾기는 어려우며 우리가 앞으로 고민하며 건설해야 할 세계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
을 따름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서양 철학은 인간의 잠재력을 두 가지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
다. 하나는 행동력, 이를테면 공공의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관심을 갖고 정치에 참여하여 결정을 내린다거나 생활의 불
편과 명예의 실추를 감수하고라도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 등이 그 좋은 예다. 이
것이 바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인간 본질의 궁극적 실현이라고 보았던 내
용이다. 그러다가 후대에 와서 기독교 철학이 영향을 미치면서 명상이 삶을 영위하는 최선
의 방식으로 전면에 부각되었다. 가장 충만한 삶은 고독한 성찰, 기도, 거룩한 존재와의 합
일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두 전략은 상호 배타적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
다. 사색과 행동을 동시에 추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아직도 우리는 인간의 행동을 이분법으로 이해한다. 칼 융은 처음으로 인간의 정신을 내
향형과 외향형이라는 개념으로 구분하였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즈먼은 인간의 성격이 역
사적으로 내부지향형에서 외부지향형으로 변해 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오늘날 심리학 연구
에서도 외향형과 내향형은 사람들의 유형을 쉽고 명확하게 구분짓는 가장 안정된 성격 특성
으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는 그 둘 가운데 하나에 들어가는 편인데, 가령 다른 이들과 어울
리기를 좋아해서 혼자 있으면 울적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독을 만끽하면서 남과는 관
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과연 어느 유형이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
이 될까?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활달하고 외향적인 사람이 내향적인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명랑하
며, 스트레스를 덜 받고,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간다는 결과가 나오
고 있다. 따라서 천성이 외향적인 사람은 모든 면에서 삶을 더욱 알차게 살아간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법하다. 그런데 여기서 자료를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 다소 짚고 넘어갈 필요
가 있다. 외향적 인간은 세상사에 대해 거침없이 토로하는 점이 두드러지는 반면 내향적 인
간은 여간해서는 자기의 속마음이 어떻다고 밝히려 들지 않는다. 따라서 두 집단이 겪는 경
험의 질은 같은데 보고되는 내용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창조성이 뛰어난 개인을 연구하면 더욱 바람직한 해결을 얻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들은
무조건 외향적인 것도 무조건 내향적인 것도 아니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두 가지 특성을 다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에게는 '고독한 천재'라는 고정 관념이 강하게 박혀 있는 게 사실이
고, 또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연구소에서 실험을
하려면 혼자 보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창조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만나 이
야기를 듣고 의견을 나누며 서로의 작업에 대해 이해를 넓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낙오되기 십상이다. 남의 도움 없이 큰 인물이 될 수 없다는 것
이 나의 지론이다."
휠러 못지않게 이름나 과학자 프리먼 다이슨도 자기의 연구 활동에서 이 이원적 대립 구
도의 미묘한 전개를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그는 자기 연구실 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과학은 군집성이 강한 영역이다. 과학의 골간을 이루는 것은 언제 연구실 문을 열고 언
제 문을 닫느냐다. 연구를 할 때 나는 문을 열러둔다.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과 대화를 하
려고 애쓴다. 그렇게 자꾸 어울려야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공동 작업이다. 새로운 것들이 시시각각 쏟아져 나오므로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잠
시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항상 대화를 주고받아야 한다. 하지만 집필은 전혀 다르
다. 글을 쓸 때 나는 문을 닫는다. 그래도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오면 아예 도서관에 가서
파묻혀 버릴 때가 많다. 집필은 고독한 작업이다.
격랑을 헤치고 시티코프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경영인 존리드의 하루 일과에는 내면
지향적 성찰과 강도 높은 사회적 활동이 모두 들어 있다.
나는 아침잠이 없는 사람이다. 언제나 새벽 다섯시면 눈을 떠서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시각이 다섯시 반. 그때부터 집이나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그날 일의 경중을 정한다. 아
홉시 반이나 열시까지는 그렇게 나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 다음부터
는 수많은 면담이 이어진다. 기업의 총수는 부족의 추장과도 같다. 집무실로 찾아와서 나
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개인성이 강한 예술 영역에서도 교제 능력은 중요하다. 조각가 니나 홀턴은 자신의 작업
에서 교제가 차지하는 비중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방 안에 혼자 틀어박혀 가지고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없다. 이따금 찾아오는 동
료 예술가로부터 "당신 생각은 어때?"이런 질문도 받아가면서 일을 해야 한다. 일종의 피
드백이 있어야 한단 소리다. 죽어라고 한자리에 붙어 있는다고 해서 일이 잘되는 게 아니
다. 나중에 가서 자기를 드러내야 할 때는 연고라는 것도 있어야 한다. 화랑 사람들도 알
아야 하고 내 분야에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아야 한다. 거기에 속하고 싶건
속하고 싶지 않건 간에 어떤 동질적 세계의 일원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
다. 그렇지 않은가?
이 창조적인 개인들이 삶을 헤쳐나가는 방식에서 우리는 사람이 외향적이면서 동시에 내
향적일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읽는다. 어쩌면 내향성 일변도에서 외향성 일변도에 이르
는 전 범위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운 모습인지도 모른다. 죽 이어진
스펙트럼에서 양쪽 끝의 한 자락에만 갇혀 삶을 집단성 아니면 개인성 어느 하나로만 경험
하는 것이야말로 비정상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우리는 타고난 기질이나 자라온 환경
의 탓으로 두 극단성 가운데 어느 하나에 치우치기 쉬우며 세월이 흐르면 어느새 그것이 몸
에 익어 활발한 어울림 아니면 쓸쓸한 고독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
람의 다양한 경험 영역을 축소하고 삶을 향유하는 수많은 가능성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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