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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 모음/몰입

8.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

by Frais Feeling 2020. 5. 12.

다른 조건들이 동일하다면, 복잡한 몰입 활동으로 가득 찬  삶은 수동적 오락에만 몰두하
는 삶보다 가치 있는 삶이다. 한 여성은 일이 자기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이렇게 설명
한다. "내가 하는 일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서 그것을 즐기는  동안은 다른 걸 하고 싶은 생
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지  않을까." 아니면 
미국 남부인의 심리적 역학 구조를 이해하는 데 심혈을 바쳐온 역사학자 반 우드워드의 말
을 들어보자.

    흥미롭지 않은가. 그것은 내 만족의 원천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일을 이루어내  
  는 것. 그런 의식이랄까 의욕이 없으면 인생은 무료하고 허망할 것 같다. 난  그런 식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 가치 있다고 느낄 만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는 것만 밝히는  
  그런 인생을 나는 죽기보다 싫어한다.

  우리는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삶에 뛰어드는 사람의 성격을  자기목적성으로 
충만해 있다고 말한다.

  자기목적성을 뜻하는 영어  'autotelic'은 그리스어 'auto(자기)'와  'telos(목적)'가 결합한 
말이다. 그 일 자체가 좋아서 할 때 그 일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때를 우리는 자
기목적이라고 한다. 가령 그저 놀이 자체가 좋아서 두는  체스나 나에게 자기목적적 경험이 
되겠지만 만일 내가 돈을 걸고 체스를 두거나 그 세계에서 순위에 오르기 위해 체스를 둔다
면 똑같이 두는 체스라도 자기 외부의 목적을 실현하려는 행위가 되어 외재적 목적성을 강
하게 띨 수밖에 없다. 외부의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보다는 일  자체가 좋아서 하는 
사람이 자기목적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일에 자기목적성을 가지고  임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의무감에서건 
혹은 필요에 의해서건 내키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무시하지 
못한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이 하등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은 대부분이 중요하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있다. 자
기목적성이라는 말은 물론 후자에 속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은 원하는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보상이 되기에 물질적 수혜
라든가 재미, 쾌감, 권력, 명예 같은  별도의 보상이 필요하지 않다. 일에서, 가정  생활에서, 
남들과 어울리면서, 먹으면서, 심지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을 때도 몰입을  경험하
므로 외부적 보상이 없어도 무방하다. 이런 사람은 더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다. 외부의  보상
이나 위협에 쉽사리 농락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에 관여
한다. 삶의 흐름에 깊숙이 빠져들 줄 안다는 소리다.
  어떤 사람이 자기목적성을 가진 인간형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장
기간에 걸쳐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가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애용하는 단기 '테스트'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몰입이 워낙 주관적인 경험이라서 거짓 반
응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오래 들여서 하는 인터뷰나 설문조사도 도움은 되겠지
만 나는 그것보다는 간접적인 방법을 선호한다.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서 과
제의 난이도가 높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이 있을  때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
로 어떤 사람이 자기목적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방법으로  가령 일주일 동안 ESM
을 통해 그 사람이 그런 상황에 얼마나 자주 직면하는가를 계량적으로 확인해 보면 좋을 것
이다. 어떤 사람은 70퍼센트 이상 그런 상황에 있다고 보고한  반면 어떤 사람은 그 수치가 
10퍼센트를 밑돌기도 했다. 몰론 전자가  후자보다 더 자기목적성이 강한  유형이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이 방법을 쓰면 자기목적적인 경험을 자주 하는 사람과 그런 상태를 좀처럼 경험하지 못
하는 사람이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예컨대 한 실험에서 우리는 
아주 똑똑한 이백 명의 청소년을 골라서 두 집단으로 나뉘었다. 자기목적성이 있는 상위 오
십 명의 집단은 고난도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고, 자기목적
성이 없는 하위 오십 명의  집단은 그와는 정반대되는 성향을 가졌다.  우리가 알고 싶었던 
것은 이 두 집단의 청소년들이 시간을 어떤 식으로 보내는가  하는 점이었다. 두 집단의 가
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그림 4-1>과 <그림 4-2>에 나와  있다. 자기목적성이 있는 집단에 
속한 청소년은 평균적으로 깨어 있는 시간의 11퍼센트를 공부에  투자했다. 이 비율은 다른 
집단에 속한 청소년보다 5퍼센트 높은 수치였다. 1퍼센트는 약  한 시간에 해당하므로 전자
가 일주일에 열한 시간을 공부했다면 후자는 여섯 시간밖에 공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두 집단은 취미에서도 확연히 달랐다. 취미 활동에 들이는 시간은 전자와 후자가 6퍼센트 
대 1퍼센트였다. 후자가 유일하게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쪽은 TV 시청이었다. 자기목적
성이 없는 집단은 TV를 보는 시간이  15.2퍼센트로 자기목적성이 있는 집단의 8.5퍼센트보
다 두 배나 많았다. 자기목적성이 강한 202명의 청소년과 그렇지 못한 202명의 청소년을 비
교한 또다른 연구에서도 아주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자기목적성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바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수동적으로 여가와 오락을  즐기는 사람은 자신의 실
력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별로 얻지  못한다. 사람은 몰입을 낳기에 좋은 활동, 곧  정신 
노동이나 능동적 여가 활동을 할 때 비로소 몰입을 경험한다.
  자기목적성이 강한 청소년은 자기목적성이 약한 청소년보다 경험의 질도 우수한가?  자기
목적성의 정의 자체가 고난도의 과제를 함축하고 있으므로 자기목적성이 강한 청소년일수록 
어려운 일을 떠맡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몰입 상황에  자주 빠졌을 때 실제로 주관
적 경험을 끌어올리느냐 하는 것이다. 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이 결과를 나타낸 것이 <그림 
5-1>인데, 이것은 미국의 고등학생  가운데 자기목적성이 있는  집단과 자기목적성이 없는 
집단을 각각 202명 선정해 공부할 때와 아르바이트할 때 나타낸 반응을 일주일에 걸쳐 추적 
집계한 것이다. 결과를 보면, 전자는 생산 활동을 할 때 집중력이 상당히 올라가고 자부심도 
눈에 띄게 강해지며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도 무척 중요할 거라고 생각
하는 비율이 높다. 그러나 행복감이나 즐거움에서는 두 집단 사이에 의미 있는 차이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여가 활동을 하면  경험의 질이 어떻게 달라질까?  <그림 5-2>는 그 차이를 
보여준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청소년들은 자기목적성이 있든 없든 생산적 활동을 할 때보다
는 여가 활동을 할 때 더 즐거워하고 행복해한다. 그러나 집중력은 떨어지는 편이어서 여가 
활동이 미래의 목표를 이루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하고 생각한다. 두 집단을 비교
해보면 행복감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항목에서 의미 있는 차이가 나타난다. 자기목적성이 
있는 청소년들은 집중을 더 잘하고 즐거움도 많이 느끼며 자긍심도 높고 자기가 하는 일이 
미래의 목표 달성과 관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모두 우리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내용
이지만 이해 못할 사실이 하나 있다. 왜 그들은 더 행복해하지 않을까?
  ESM 방식으로 수십 년 동안  연구해 오면서 나는 본인의 입으로  털어놓는 행복감은 그 
사람의 삶의 질을 썩 잘 반영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직장 생활
에 넌더리를 내고 가정 생활도 화목하지 않으며 무의미한 일에만 시간을 온통 쏟아붓다시피
하면서도 입으로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원래 어두운 걸 싫어하는 동물이라서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어도 슬픈 감정에 빠져들지 않는 요령을 웬만큼 터득하고 있다고 혹
자는 말하기도 한다. 행복하다는 말이라고 할 수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아가겠느냐는 것이
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더 행복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복잡한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자신에 대한 만족감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행복을 느낀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
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력을  높이고 우리의 가능성을 채워 우
리를 성장시키면서 행복을 맛보는 일이다.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이 점이 특히 중요하다.  무
위도식하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청소년이 어른이 되어서도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라고
는 기대하기 어렵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자기목적성을 가진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 유달리 많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주일에 평균 네 시간을 더 가족과 함께 보낸다.  그
들이 어째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요령을 더  많이 터득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여기서 
슬슬 풀리기 시작한다. 가정이라는 보호막 안에서 아이는 구태여  자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
고 방어 의식이나 경쟁심을 느낄 이유도 없이  편안하게 이런저런 실험을 할 수 있는 것이
다. 미국 사회는 가급적 일찍부터 독립심을  키워주는 것을 교육의 지상 과제로 삼고  있다. 
여기에는 부모의 품에서 정서적으로건 물질적으로건 빨리 벗어날수록 그만큼 더 빨리  성숙
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조숙하다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너무 일찍부터 독립
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젊은이는 그만큼 심리가 불안하고 방어 의식에 젖기 쉽다. 성인
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생살이가 복잡하면 할수록 청소년은 거기에 대비할 수 있도록 가정에 
의존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반론이 오히려 설득력을 가진다.  물론 그 가정이 
보호막과 함께 적절한 자극도 주는 상당히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만 이러한 '사회적 
미숙' 기간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가 있는 가정에 아무리 오래 기대어 
보았자 아이에게 무슨 큰 도움이 되겠는가.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
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남들보다 마음의 여유가 많은 건 아닐 터인데도, 그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남들보다 더 많은 걸 알아차리며 눈앞의 이익을 생
각하지 않고 자기가 그저 좋아서  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의 
관심을 아껴두었다가 심각한 일, 중요한 일에만 조금씩 배당한다. 나를 풍요롭게 만드는  일
에만 관심을 쏟는다. 내가 정력을 쏟아부을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은 나 자신, 또 나에게 물
질적, 정신적 도움을 약간이라도 줄 수  있는 주변 사람이나 일거리다. 나와 직접  관계없는 
세상사에 관여하거나 새로운 현상에 호기심을 가지거나 타인에게 공감을 느끼거나 자기  중
심적 의식이 설정한 테두리를 뛰어넘는 데 마음 쓰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자기목적성을 중시하는 사람은 나라는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어 삶 자체를 향유할 수 있
는 정신적 여유를 가지고 있다. 내가 ESM 추적 방식으로 연구한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 가
운데 켈리라는 학생은 또래의 친구들과는 달리 남자 친구나 쇼핑에 별로 관심이 없고 시험 
성적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신화에 흠뻑 빠져들어  '켈트 신화학자'로 자처했다. 일
주일에 사흘은 오후에 박물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유물을 간수하고 분류하는 일을  거
들었다. 벽장 안에다 잡동사니를 쓸어넣는 아주 단순한 일도 켈리는 즐겁게 해치웠다.  항상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호기심을 가지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배우려고 애썼다. 가까운 친구
들과는 종교나 앞으로의 진로를 놓고 진지한 토론도 곧잘 벌였다. 그렇다고 해서 켈리는 이
타주의자도 아니었고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소극적 성격도  아니었다. 켈리는 자신의 독
특한 개성을 솔직하게 드러냈고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일 줄 아는 지혜를 가
지고 있었다. 
  창조적인 사람은 대체로 자기목적성을 중요시한다. 획기적인  업적이 그들의 머리에서 나
오는 이유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에도 정력을 쏟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리심리학자인 브렌다 밀러는 자기 분야에서  누구보다도 두각을 나타내는 과학
자나 예술가 특유의 작업 태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무엇이 중요하고 위대한 발견인가에 대
해 나는 비교적 편견이 없는 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사소한 발견이라도 발견을 하는 
순간엔 몹시 가슴이 뛴다." 역사학자 나탈리 데이비스에게는 연구 주제를 고르는 나름의 기
준이 있다. "어떤 문제는 정말이지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갈고리에 푹  꿰였다고나 할
까... 그럴 땐 다른 일은 눈에 통  안 들어온다. 나의 호기심과 희열을 충족시키는  것말고는 
다른 보상이 없지만 아무튼 거기에 모든 걸 쏟아붓는다."
  제트 엔진과 뇌파측정기를 발명한 프랭크 오프너는 여든한 살의 나이에 머리카락  세포의 
생리 구조에 흥미를 가졌다.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생명의  신비 하나도 가볍게 넘기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겸허하게 노력하는 인간형을 여기서 만날 수 있다.

    난 문제를 푸는 게 좋다. 고장난 식기세척기건 말을 안  듣는 자동차건 신경 구조건 간  
  에 말이다. 지금은 머리카락 세포의 구조를 연구하고 있는데 아주 흥미진진하다.  나는 문  
  제의 유형을 따지지 않는다. 문제를 푼다는 것 자체가 즐겁다. 문제를 푸는 것처럼 재미난  
  일이 또 있을까? 인생에서 이처럼 흥미진진한 일이 또 있을까?

  마지막 인용문은 자기목적성을 중시하는 사람의 관심사가 수동적이거나 관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이해하려는 의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관심을 사심 없이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인의  이
해 관계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기울이는 관심의 내용이 당사자의 
목표나 야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을 때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할 기회를 잡게 된
다.
  어떤 사람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호기심이 많았던 것 같다. 발명가 제이콥 래비노
는 일곱 살 나던 해 중국의 한 지방 도시에서 처음으로 자동차를 보았던 모양이다. 그는 당
장 차 밑으로 기어 들어가 엔진이 바퀴를 어떻게 굴리는지를 관찰한 다음 집에 가서 나무로 
뚝딱뚝딱 차축과 기어를 만들었다. 라이너스 폴링도 어린 시절에  이미 범상치 않은 창조력
을 보여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독서의 재미를 알게 된 것은 열한 살 때였다. 나는 책을 많이 읽었다. 아  
  홉 살이 막 되었을 때 벌써 성경과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었다. 열두 살 때는 고등학  
  교 1학년 고대사 교과서가 너무 재미있어서 몇 주일 만에 독파해 버리고 고대사  관련 서  
  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곤충을 수집하고 곤충학 분야의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열  
  한 살 때부터였다. 열두 살 때부터는 광물을 모았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광물이래야 마  
  노밖에 없었지만 광물학 서적을 뒤져 책에 나오는  광물들의 속성, 색깔, 경도, 줄무늬 같  
  은 것을 표로 정리했다. 그러다가 열세 살 때부터 화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화학  
  자들이 특정 물질을 전혀 속성이  다른 물질로 변환시킨다는 걸 알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서 물이 되고 나트륨과 염소가 결합하여 염화나트륨이 된다는  
  게 꿈처럼 들렸다. 같은 원소라도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복합물이 만들  
  어졌다. 그후로 나는 화학을 이해하는 데 전심 전력을 기울였다.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길이었고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는 길이었다.

  폴링은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특출한 머리를 가진 신동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여
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폴링은 별로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스스로 자기 미래를 개척하였다. 그를 창조의 세계로 이끈 힘은 자기 주변에서 벌
어지는 일에 철저히 몰입할 줄  알았던 능력이었다. 맑은 공기를 원하는  시민의 모임 같은 
환경 보호 단체를 조직하는 데 일평생을 바쳐온 헤이즐 핸더슨 같은 활동가는 환경 운동가
들이 공유하는 풍부한 호기심을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한다.

    다섯 살 무렵인가, 잠에서 막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입에서  이런 말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야, 참 근사한 세상이다.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난 여기서 무슨  
  일을 해야하는 거지?" 난 평생 그런 질문을 던지며 살아왔다. 난 그럴  때가 좋다. 하루하  
  루가 새로워진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이 나에게는 창조의 새벽이었다.

  그러나 폴링이나 핸더슨처럼 마음의 여유를 가진 행복한 사람은  많지 않다. 생활에 부대
끼다 보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당면한  목표를 이루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우주의 본질이나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 등의 문제에는 신경을 쏟을 겨를이 없
다. 하지만 관심을 사심 없이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삭막한가. 그런  사람은 
경이를 느낄 줄도 모르고 놀랄 줄도 모르고 감탄할 줄도  모르며, 인간의 공포와 편견이 정
해 놓은 울타리를 감히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과 관심을 키우는 연
습을 해오지 않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이 점
에 신경을 써야 한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사실 그 원칙을 옮기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시도할 만한 가치는 분
명히 있다. 먼저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건성으로 임할 게 아니라 정신을 집중하여 처리
하는 습관부터 몸에 익히도록 하자.  설거지, 옷입기, 청소처럼 단순한  일도 충분한 정성을 
기울이면 응분의 보상을 얻을 수 있다. 그 다음에는 하기 싫은 일, 수동적 여가에 들였던 시
간과 관심을 끌어다가 보람은 있지만 적잖은 부담이 따라서 자주 하지 못했던 일에다 투자
하자. 이 세상에는 볼 만한 것, 할 만한 것, 들을 만한 것이 얼마든지 널려 있다. 그러나  우
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정말로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런 말은 하면 어떤 사람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소리라고 비웃는다. 지금 하는 일
도 제대로 못하는데 어느 세월에 그런 한가한 놀음이나 하고 있겠는가 하고. 하기야 시간이 
부족하다고 다들 아우성이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사실은 자기 관리를 제대
로 하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 우리에게 정말 꼭 필요한 일이 얼마
나 될까? 우리의 관심을 흐트려놓는 판에 박힌 일들을 잘 추려서 우선 순위를 배긴다면 지
금처럼 시간이 없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올까?  빠져나가는 시간을 수수방관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늘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시간을 잘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먼 
훗날 재산을 불리고 안정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삶을 즐기기 위해서라
도.

  삶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면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마음을 통제하는 힘이다. 바깥에서 오는 자극이나  도전이 나의 관심을 앗아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흥미도 
자연스럽게 늘어나서 둘 사이에는 피드백 관계가 형성된다. 어떤  대상에 흥미를 가지면 당
연히 관심도 더 쏟게 되고, 거꾸로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지면 자연히 흥미도 높아지기 마
련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흥미를 느끼는 건 그만큼 거기에 공을 들였기 때문이지 저절로 그렇
게 되는 건 아니다. 벌레나 광물은 그것을 수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사
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생활이나 생각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스쳐 지나가
는 남일 뿐이다. 마라톤, 암벽 등반, 카드 놀이, 라신의 연극은 충분한 관심을 기울여  그 세
계의 복잡하고 섬세한 구조를 터득한 사람에게만 지루하지 않게  다가온다. 현실 어디에 눈
을 주더라도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행위를 촉박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대상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지루하다는 넋두리는 절대로 먹혀들지 않는다.
  관심을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은 경험을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삶의 질로  직
결된다. 정보는 우리가 그것에 관심을 기울일 때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기울이는  관
심은 바깥의 사건과 우리의 경험 사이에서 필터 구실을  한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느끼는가
는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보다는  우리가 관심을 다스리는 방식에  좌우된다. 신체적 
고통, 경제적 손실, 사회적 고립의 파급 효과는 우리의 관심도에 따라 달라진다. 고통스러운 
사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 그것이 더욱 아프게 다가오며 우리의 의식은 그만큼 더 어
수선해진다. 그런 사건을 부정하거나 왜곡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의 
사건에 대한 정보가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마음에 에너지가 다른 영역으
로 뻗어나가지 못하게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여 그 현실성을 인
정한 다음, 우리가 선택한 다른 대상으로 하루빨리 관심을 돌릴 때만 우리는 고통의 사슬에
서 벗어날 수 있다.
  질병이나 사고로 심각한 신체 장애를 입은 사람들을 연구한 파우스토 마시미니 교수는 자
신의 비극에 놀랄 만큼 잘 적응한 장애자가 의외로 많으며 장애를 입고 나서 삶이 더  풍요
로워졌다고 응답하는 사람마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 사람의 특징은 마음을 초인적
으로 잘 다스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옷입기, 산책, 운전 
같은 아주 단순한 일을 할 때도  몰입을 할 줄 안다. 이런 단순한  일만이 아니라 엄청나게 
힘든 일에 도전하여 성취해 낸 이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수영 강사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회계사가 되었으며 어떤 사람은 체스 선수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휠체어에 앉아서 활을 쏘
는 양궁 선수가 되었다.
  비극적 상황을 그런 대로 견딜 만한 상황으로 바꿀 줄 아는 능력은 갇혀 지내던 감방이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바깥의 '현
실' 상황이 워낙 비인간적이고 삭막해서 대부분  절망에 빠진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외부의 
상황을 선별하여 무시할 건 무시하고 자신의 유일한 현실인  내면으로 관심을 돌린다. 시나 
수학 같은 상징 체계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보조물 없이도 정신 작업
에 집중할 수 있어서 한결 유리하다.
  이런 사례들은 우리가 관심을 다스리기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기술이나 원리를 익히는 건 별로 어려울 게 없다. 명상과 기도를 할 수도 있고, 
육체 활동을 즐기는 사람은 체조, 에어로빅, 격투기를 익힐  수도 있다. 즐거움을 주고 시간
이 흐름에 따라 실력이 쌓이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관계없다. 그러나 중요한 건 우리의 태도
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자가 되기 위해 기도를 하고  훌륭한 이두박근을 얻기 위해 운동을 
한다면 활동의 의미는 반감된다. 활동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결과는 대수롭지  않
으며 나의 관심을 다스리는 데서 희열을 맛보면 그만이라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관심의 방향을 좌우하는 힘은 유전 명령과  사회 관습, 우리가 어릴 적에 익힌  버릇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고 우리 의식에 어떤 정보가 들어올 것인가를 결정하는 주
역은 나 자신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프로그래밍된 것
이다. 우리는 봐야 하는 대로 보는 타성, 기억해야 하는 대로 기억하는 타성,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신을 숭배하는 사람에 대해서나 박쥐나  국기에 대해서 느껴야 하는 대로  느끼는 
타성에 젖어 있다. 인생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도 그런 타성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생물학과 문화가 정해 
놓은 교본을 점점 더 그대로 따라간다는 점이다. 삶의 지배권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
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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