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팁 모음/몰입

9. 운명애

by Frais Feeling 2020. 5. 12.

우리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삶은 우주에 흔적을 남긴다. 한  사람의 탄생은 사회라는 공간 
속으로 물결을 일으킨다. 그 탄생은 부모, 짝, 친척, 친구에게 영향을 미친다. 성장하는 과정
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세한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그중에는 의도
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소비자가 내리는 결정은 경제에 작은 변화
를 낳고 정치적 결정은 국가의 앞날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사람의 따뜻한 행동 하나,  비열
한 행동 하나는 그가 속한 공동체가 얼마나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가에 영향을 끼친다. 
자기목적성이 뚜렷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의식에서 무질서를 크게 줄인다.  많이 가지려 
하고 자기 영토를 넓히는 데 혈안이 된 사람은 사회 전반을 무질서하게 만든다.
  자신보다 더 위대하고 항구적인 무언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 사람은 진정
으로 충실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이것은 장구한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를 가
져다준 다채로운 종교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과학 기술
이 가져온 놀라운 진보가 위세를 떨치는 시대라서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하기가 쉽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 산업 국가에서는 개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가 공동체 의식과 정신적 가치를 완
전히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2차대전 이후 무려 두 세대 동안  독특한 육아 이론으로 부모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벤저민 스포크 박사가 노년에 이르러 아이들을 철두철미 독립된 인격체로 키울 것을 강조한 
자신의 예전 입장을 재검토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스포크 박사
는 이제 공동의 선을 위해 일하는 법을 가르치고 종교와 예술도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
라는 사실을 자녀에게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자신에게 너무 빠져 있다는  걸 알리는 위험 신호가 도처에서  울리고 있다. 가령 
우리는 남들과 어울려 사는 데 극도로 무능해졌다. 그 결과  선진국 도시 인구의 절반은 혼
자서 살고 있고 치솟은 이혼율은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모른다. 여론조사를 통해 거듭 확인되
는 또 하나의 징후는 사람들이 전에 없이  제도를 불신하고 그 제도를 이끄는 자들에 대해 
공공연히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듣기 거북한 소리를 안 들으려고 머리를 모래더미에 푹 파묻고 자기만의 세계로 은둔하려
는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미 갈파한 바 있고 최근까지 독재
자 밑에서 모진 고생을 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썩은 사회를 등지고 초연하게 혼 
자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자기 한 몸만 간수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야 얼마나 편하겠는
가. 불행하게도 세상은 사람을 편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남들에게 적극적으로 책임감을 느끼
고 우리가 속한 세상을 외면하지 않는 자세는 바람직한 삶에서 절대고 빼놓을 수 없는 요소
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자기 의식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어수선한 주변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느냐다. 불가에서는 그 비결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의 미래가 내 한 손에 달려 있다
는 생각을 한시도 접지 말되,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그
걸 비웃어라." 이처럼 진지한 유희의  정신이 살아 있고 근심과  겸손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사람은 어딘가에 전념하면서도 무심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지혜를 익힌 사람은 반드
시 이기지 않아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성패와는  무관하게 우주의 질서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는 시도 자체가 그에게는 보상으로 다가온다. 그런 사람만이 뻔히 질 줄 알면서도 선
의를 위한 싸움에서 희열을 맛보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런 자아상이 
없이는 멀리 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자아상에는 맹점이 있다. 어린 시절에 처음 모습을 드러
내는 순간부터 이 자아상은 곧바로 의식 전체를 지배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경직된 자
아상에 자기를 비끄러맨 나머지 자아는 의식의 여러 내용 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라는 인식
에 머물지 않고, 관심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대상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머릿속으로 지어낸 가공의 대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온 정력을 쏟아붓
는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만든 자아가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될 건 없다.  그러나 
응석받이로 자란 아이들은 터무니없이 일방적이고 자기 주장에 급급한 자아를 공고히  굳히
면서 큰다. 사랑 없이 자란 아이들이 키우는 자아는 자기애로 빠져들기 십상이다. 고삐 풀린 
탐욕의 노예가 되어버린 자아, 턱없이 과대망상증에 걸려든 자아가  엄연히 우리 현실 속에 
존재한다. 그런 비뚤어진 자아를 가진 사람은 자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급급하면서 살
아간다. 자아가 권력, 돈, 사랑, 모험을 요구한다 싶으면 그들은 궁극적으로 자기에게 무엇이 
더 좋은지는 염두에 두지 않고 눈앞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이처
럼 빗나간 자아의 요구에 정력이 놀아나면 의식만이 아니라 주변 상황도 어지럽히게 마련이
다. 
  자아 감각이 없는 동물은 생물학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그 선에서 멈춘다. 먹이감
을 덮치고 영토를 지키고 짝짓기 싸움을 벌이지만 당장의  욕구가 충족되면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권력이나 재산에 뿌리를 둔 자아상을 발전시킨 인간은 끝없이 이익을 탐한다. 그 과
정에서 본인의 건강이 상하고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아가 
설정한 목표를 무자비하게 추구한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인간 불행의 씨앗을 아집에서 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자
아가 욕망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자아를  중화시키라는 과격한 처방을 내리는 이들도  있
다. 음식, 섹스, 그리고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는 헛된 욕구들을 잠재운다면 에고는 발언권을 
얻지 못하고 결국 시들시들 사그라들고 말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에고를 완전히 뿌리뽑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좀더 완화된  처방으로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아를 직시하고 자아의 미묘한 특성을 이해하는 길이다. 그래야만 인생을  살
아가는 데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욕구와 우리의 삶을 초라하게 만드는 사악한 욕구를 구별
할 수 있는 안목이 트인다.
  이제까지 가장 어려운 장애물이 무엇이었느냐는 물음에 소설가 리처드 스턴은 이렇게  대
답한다.

    그것은 내 안의 쓰레기 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허영심, 자만심, 우월감, 비교  의식   
  같은 말로 묘사되는 부분이다. 나는 그런 부분을 다스리려고 무척 고생했다.  나보다 천성  
  이 좋은 동료나 친구가 짜증과 원한의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지만  그  
  점에서 나는 행운아였다. 내 안에 있는 긍정적 요소에  힘입어 그런 좋지 못한 감정을 극  
  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안 좋은 감정을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그걸 이겨내는 요  
  령을 터득했다. 
    가장 큰 장애물은 나 자신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지만 이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나 자신
이다. 그러나 나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따라서 율리시스처럼 우리도 자아가  불러일으키는 
헛된 욕망에 현혹되지 않아야 하고 자아가 벗이 될 수 있으며 도움이 될 수 있고 충만한 삶
의 단단한 반석이 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스턴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비 풀린 에고를 
어떻게 다스려 창조적 작업에 이용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물론 내 안에는 못되고 치졸하고 비뚤어지고 우유부단한 면이 수없이 도사리고 있지만,  
  난 거기서 힘을 끌어낸다. 난 그것들을 바꿀 수 있다. 그것들은 힘의 원천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작가가 휘어잡을 수 있을 때 그것들은 작가의 재료가 된다.

  자아의 '쓰레기 같은 부분'을 인간 조건의 심오한 통찰로 끌어올릴  수 있는 건 작가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있고 그  욕망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건설
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 내부에 깃든 어둠의  정체를 깨달았으면 그것을 
더 이상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 어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우리의 환상에서 비롯
된 그 어둠의 오만 무쌍함 앞에서 웃을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우리가 바라는 조건에 부
합하지 않는 한 그 게걸스러운 욕망을 살려주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가치 있
는 일을 성취할 수 있다.
  말은 쉬어도 행동에 옮기기란 당연히 쉽지 않다. 그리스의  현자는 지금으로부터 벌써 삼
천 년 전에 "너 자신을 알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 문제를 깊이 성찰한 사람들은 행복한 
삶의 첫걸음은 역시 나를 알고 다스릴 줄 아는 지혜에서 비롯된다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이해는 그동안 별로 발전하지 못한 듯하다.  자아의 힘을 소리 높여 극
찬한 사람일수록 실은 탐욕과 야심에 휘둘렸음을 입증하는 예가 너무도 많다.
  자기를 깨닫는 작업의 중요성은 금세기에 들어와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강조되
었다. 양차대전 사이의 냉소적 시대 정신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정신분석학은 거창한 목표
를 내세우지 않았다. 정신분석학은 자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할 뿐 그 지식으로 무엇을 어떻
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정신분석학이  자아의 심오한 이해에 도달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아가 전형적으로 걸려드는 덫의 일부분, 즉 가족 안의 삼각 관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유
발된 앙심과 성욕의 억압만을 드러내는 데 그쳤을 뿐이다. 그러한 통찰이 중요하다는 건 부
인 못할 사실이지만 정신분석학의 강령은 어린  시절의 외상만 쫓아내 버리면 그  다음에는 
순탄한 삶이 전개되리라는 턱없이 단순한 기대를 사람들에게 불어넣는 결과를 낳았다. 유감
스럽게도 자아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것보다 훨씬 교활하고 복잡한데도 말이다.
  심리 치료에서는 환자의 회상과, 숙련된 분석가가 그것을 듣고  환자의 과거 경험을 공유
하는 작업을 중요시한다. 이 반성의 과정은 매우 유익하며 너 자신을 알라는 현자의 가르침
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유형의 치료가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반추하면 갈등은 저절로  해소되리라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렌즈를 통해 과거를 보지만 그 렌즈 자체가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로 인
해 일그러져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저절로 갈등이 해결되겠는가.  회상을 통해 유익한 결과
를 얻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며 노련한 분석가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더욱이 자기 도취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사회가  부추기는 과거 회상의 습관은 일을  더욱 
꼬이게 만들기 쉽다. ESM 조사를 보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할 때 사람들은 대체로 침울해
진다. 아무런 준비 없이 과거를 회상하는 경우 그 사람의  의식에 처음 떠오르는 건 우울한 
생각뿐이다. 몰입 순간에는 스스로를 잊게  되지만 무관심, 근심, 권태에  휩싸여 있을 때는 
자아가 무대 중앙으로 나온다. 회상에도 노하우가 필요하다. 노하우 없이 무작정 문제만  되
씹고 있어서는 갈등이 줄어들긴커녕 오히려 악화되기 십상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상념의 무게 중심은 자기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되면 
현재의 불안이 과거를 채색하고 다시 그  고통스러운 기억이 현재를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 이 고리를 깨부수는 한 가지 묘책은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자기 
기분이 상승세에 있을 때 삶을 반추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도 있
는데 그것은 보다 간접적으로 자아에 조화를 가져다 주는 목표와 인간 관계에 정력을 쏟는 
것이다.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는 게 좋다.  목표를 달성하는 게 중요해서
라기보다는 목표가 없으면 한곳으로 정신을 집중하기가 어렵고 그만큼 산만해지기 쉽기  때
문이다. 등반가가 정상에 오르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내거는 이유는 꼭대기에  못 올라가서 
환장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목표가 있어야 등반에서 충실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
다. 정상이 없는 등반은 무의미한 발놀림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을 불안과 무기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자기가 세운 목표에 합당한 일을 하는 동안에는 설령 몰입은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이 
개운해진다는 걸 입증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가령 친구들과 있으면 더욱더 그렇다.  그러
나 일을 해야한다는 심적 부담이 있으면 아무리 가까운 친구들과 있어도 마음이 무겁다. 반
면에 아무리 하기 싫은 일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라는 생각이 들면 
덜 괴롭다.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가장 손쉬운 길은  주인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의무감 
때문에 하는 일, 혹은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하는 일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실 가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느끼고 살아간다. 그런  입장에 놓이면 아까운 정력을 
탕진하고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자진해서 원하는 일을 늘려야  한
다. 무엇을 원한다는 사소한 마음의 움직임이 집중력을 높이고  의식을 명료하게 만들며 내
면의 조화를 이루어 낸다.
  살다 보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많이 있다. 회의에 참석하는 일,  쓰레기를 내
다 버리는 일, 공과금을 내는 일, 아무리 면해 보려고 잔머리를 굴려도 피치 못하게 해야 하
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툴툴거리며 마지못해서 할 것인가 아니면 
즐거운 마음으로 해치울 것인가. 둘 다 의무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지만 후자가 더 긍정적인 
경험을 낳는다. 청소처럼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일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치운다는 
목표를 정해 놓고 하면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다. 목표를  설정해 놓으면 일하는 괴로움이 
상당히 줄어든다.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니체 철학의 중심 개념이라 할 '운명애'에서 잘 드러난
다.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를 논의하는  대목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
한다. "운명애를 가진 사람은 위대하다는 게 나의  신조다. 운명애는 살아갈 날에서도, 살아
온 날에서도, 달라지지 않기를, 아니 영원히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자세다. 불가피한 것을 
견디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랑할 줄 아는 태도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 "나는 피치 
못할 일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법을 자꾸자꾸 배우고 싶다. 그럼 나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
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에이브러햄의 매슬로의 연구도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임상적 관찰과 자기 실현에 이르
렀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의 면접을 통해 그는 성장의 과정이 절정감으로 귀결된다는  결론
에 도달했다. 절정감은 자아와 환경의 일치를 뜻한다. 그것은 '내적 필요성'과 '외적 필요성
',혹은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안 하면 안 되는 것' 사이의 조화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매
슬로는 말한다. 그 경지에 이른  사람은 "자유롭고 행복한 마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자기 의지대로 선택한다."
  심리학자인 칼 로저스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는 심신이 건강한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
이 말한다. "그는 내적 자극에 대해서건 외적 자극에  대해서건 가장 경제성이 높은 방향으
로 행동 방침을 정하고 그쪽을 따르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깊은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로저스의 말은 이어진다. "심신이 건강한 사람은 확고하게 결정된  것을 자유 의
지로,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추구할 때 가장 확실한 자유를 경험할 뿐 아니라 그
것을 선용한다." 그러므로 니체와 매슬로의 말대로 운명애는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
한 것이든 자기 행동의 주인 의식을 가지려는 자세에 다름아니다. 진정한 희열과 인격의 성
장은 무질서한 일상 생활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때만이 기대할 수 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사랑할 줄 알 때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한 니체의 말은 
백번 옳다. 그러나 매슬로와 로저스가 들고 나온 '인본주의 심리학'에도 따지고 보면 한계점
이 없지 않다. 사회가 번영을 구가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지배하던 금세기 중엽에는 자아 
실현이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는 대전제를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자아  실현을 한답시고 
세부 방법론을 따지거나 이런저런 목표들 사이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중
요한 것은 자기 나름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었다. 낙관적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감싸고 돌
았고, 유일한 악덕은 자기의 잠재력을 실현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는 믿음을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악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차츰 즐겨하면서  문제가 
싹텄다. 약탈과 파괴를 일삼는 청소년들은 차를 훔치거나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하는 데서 쾌
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 다른 이유는 없다. 군인들은  전선에서 기관총을 앞에 
놓고 있을 때만큼 강한 몰입감을 느낄 때가 없다고  말한다. 물리학작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는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동안 자기가 풀어야 할 '매혹적 문제'를 시정 어린 글 속에 담았다. 
아돌프 아이흐만이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복잡한 수송 문제를 처리하면서  희열을 
맛보았으리라는 건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예들이 암시하는 윤
리적 의미는 분명히 판이하게 다르지만,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긴다고  해서 그 일을 해도 좋
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관심을 모으고 행동을 일으키는 몰입은 정신력의 원천이다. 다른 형태의 힘과 마찬가지로 
정신력도 중립적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건설적 목적으로도 파괴적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불은 몸을 녹여 추위를 견디는 데도 쓰이지만 집을 태워 없애기도 한다. 전기와  원자
력도 마찬가지다. 가용 에너지가 있다는 건 분명히 좋은  일이지만 에너지를 슬기롭게 쓰는 
방법도 무척이나 중요하다. 같은 이치로 즐거움을 주는 목표를 찾아나서는 것만으로는 충분
하지 않으며 세상 전체의 무질서를 줄일 수 있는 목표를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목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인간 세상에 나타나는 무질서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예로부터 종교의 몫이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죄'로 보았다. 죄는 개인과 공동체,  또는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사회가  도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들
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긍정적 목표를 내걸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의 힘을 효과
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모세, 모하메드 같은  특출한 인물의 예지, 환영, 말씀을 
모은 선악의 판단 지침이었다. 이러한 목표들을 속세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정당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가 한 행위의  결과라는 것이 고작해야 이 세상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난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쾌락과 물질적 이익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는 
것이 남는 장사라는 것을 모를 바보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 쫓아서 행
동한다면 공동체는 와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이기심에 눈이 먼 사람의 말로
를 보여주는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했다. 내세에서 비천한 동물로 태어난다든가 까맣게 잊혀
진다든가 지옥의 불길로 떨어진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오늘의 시대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는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하여 알고 있는 내용의  틀
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초월성을 가진 목표들의 새로운 터전을  발굴하는 것이다. 즉 삶
에 의미를 주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신화는 고대의 신화들이 이미지
와 비유와 사실을 통해 우리의 선조에게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가 현실을, 가까운 미래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고대인들이 신화를  진심
으로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율법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에는 예언자가 신화를 만들어 공동체의 믿음에 힘을 실었다.  초월적 존재가 어떤 행
동을 요구하고 있으며 감각 너머에 있는 저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예언자는 친숙
한 비유로 설명하면서 사람들에게 겁을 주었다.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예언자는 앞으
로도 여전히 나타나겠지만 그 영향력은 예전보다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과학을 통해 물질
적 과제를 해결하고 민주주의를 통해 정치적 갈등을 풀어가는 전통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아무리 현란한 용어를 구사해도 개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진리는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개인 숭배에 가까운 사교 집단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지만 건강한 회의 정신
이 살아 있어서 그 집단이 위세를 부리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적 진리와 민주적 
의사 결정의 상식선에서 벗어나지 않는 계시만이 우리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다. 
  예언자를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는 과학자와 사상가가 꾸준히 쌓아올리고 있는 지식에서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우주에 대해 이미 밝혀진 지식만으로도 우리
는 어떤 행동이 복잡성과 질서를 높이고 어떤 행동이 파괴를  낳는지 너무나 잘 안다. 우리
는 모든 생명체 상호간의, 또 환경과의 긴밀한 유대 관계를 재발견하고 있다. 작용과 반작용
이 맞물려 있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다. 질서와 에너지를 창조하기  어려운 반면 무질서는 
한순간에 도래한다는 걸 알았다. 만물은 긴밀하게 얽혀 있으므로  어떤 행동의 결과가 당장
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먼 곳에서 파급 효과를 낳는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은 삶을 
사려 깊게 관찰한 북미 인디언,  불교, 조로아스터교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아득한  옛날부터 
이미 강조한 바 있는 가르침이다.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설득력 있는 언어로 체계적으로 표
현하는 것이 오늘의 과학이 풀어야 할 숙제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더욱 흥미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상대성 원리는 지난 이
천 년 동안 세계를 지배해 온 단일신 교리와 그것에  밀려났던, 더 분화되고 개성화된 다신
교의 간극을 메우는 실마리를 제시할지도 모른다. 다신교의  부작용은 무엇일까. 성령, 조물
주, 악마, 신이 고유한 개성과 권한을  가지고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받들어야 할 대상이 많다 보니 그만큼 혼란에 휩싸이기 쉽고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도 심해
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유대교에 모태를 두었건 기독교나 이슬람교에 뿌리를 두었건 단일
신은 신자들의 의식을 강력한 통일성 아래  묶었고 그것은 다른 종교들을 압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단일신의 문제점은 초월적 존재를 단 하나로 못박음으로써 지나치게 독단
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상대성 원리나 최근의 프랙탈 기하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같은 현실이지만 
그것을 상이한 다발로 묶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관찰자의 시점, 보는 각도, 시간대, 렌즈
의 배율에 따라서 동일한 밑바닥의 진리가 아주 판이한  모습으로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어
린 시절부터 우리에게 주입된 믿음과는 판이한 세계관이나 인생에 대한 발언을 이단으로 몰
아붙여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은 바로 그래서다. 현실의 저변에서 진행되는 복잡한 과정은 국
지적으로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마련인 것이다.
  수많은 가닥이 진화라는 하나의 과정으로 수렴된다. 기독교의 원리주의 세력은 다윈의 진
화론을 위협으로 받아들였지만 과학자들은 아주 기나긴 시간의 단위로 보면 생태계와  생명
의 구조가 점점 복잡해지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에서 얄궂게도 종교의 가능성을 보았다. 
거기서 혼돈이 지배하는 우주가 아니라 의미  있는 줄거리를 가진 우주를 감지했기  때문이
다. 그 점을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이 프랑스의 신부이며  고 생물학자였던 테야르 드 샤르
댕이다. 그는 <인간 현상>이라는 저서에서 수십억 년 전의 원자 알갱이로부터 장대한 진화
의 드라마를 서정적으로-다소 지나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그려냈다. 오메가  포인트는 
샤르댕이 지어낸 말로서 영혼과 우주 안의 초월적 존재가 합일되는 점을 뜻한다.
  대다수 과학자들은 샤르댕의 생각을 비웃었지만 C. H. 워딩턴, 줄리언 헉슬리, 디오도시어
스 도브잔스키 같은 혁신적 사고를 가진 과학자들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복잡성의 
진화라는 신화는 사람들을 매료시킬 만큼 단단한 토대 위에 서 있었다. 가령 소아마비 백신
을 만들었지만 자신은 과학자면서 동시에 예술가, 인문주의자라는 자부심에 차 있었던 조너
스 설크는 만년을 전생이 어떻게 내세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데 바쳤
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뭐라고 할까. 나는 좀더 근원적인 물음에...  창조성 그 자체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   
  다. 우리는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창조적 진화라고 해도 좋다. 이제 우  
  리는 과정 자체가, 아니 과정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까 우주적 진화가 새삼  
  다가왔다. 우주적 진화를 크게 나누자면 먼저 내가  소위 전생물학적 진화라고 부르는 물  
  리적, 화학적 진화가 있고, 그 다음에는 생물학적  진화, 그리고 뇌와 정신의 메타 생물학  
  적 진화가 있다. 여기에다 덧붙이고 싶은 것이 이른바 신학적 진화, 즉 목적을  가진 진화  
  다. 내 목표는 진화와 창조성을 목적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이제 막 윤곽이 드러나는 지평선을 넘어서  그 배후의 전체상을 일거에 파악하려는  것은 
좀 섣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와 과학자들은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될 세계상을 짜맞추
느라 오늘도 부심하고 있다. 개중에는 좀 황당한 느낌을 주어서 상상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
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도 있다.  가령 소설가 마들렌 랑글은 인체의  세포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사람들 사이에서 전개되는 역사적 투쟁과 평행선을 달리며 이것이 다시 초자연적 존재
들 사이의 우주적 갈등을 반영한다는 줄거리로 아동용 장편소설을  썼다. 이 소설가는 자기
가 쓰는 공상과학 소설이 어떤 윤리적 의미를 갖는지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소
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무리 고생을 하고 악의 힘에 휘말려들기 일보 직전에 있어도 
독자를 절망에 빠뜨리지 않는다.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주인공을 살려내야 한다.  난 희망
이 담겨 있지 않은 책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읽고 나면 '인생은 살아봤자다'라는 느낌이 드
는 그런 책 말이다. 힘겹긴 하지만 그래도 인생은 견딜  만하며 결국엔 보람이 있다는 확신
을 갖게 만드는 그런 책을 쓰고 싶다."
  금세기의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존 아치볼드 휠러는  우리와는 
무관하게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물질 세계가 사실은 얼마나 우리의 적
극적 개입 덕분에 존립할 수  있는가를 규명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명한 소아과 
의사인 벤저민 스포크 박사는 우리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언어로 정신적 발전에 관한 자신
의 이론을 재정립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리고  경제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인 헤이즐 핸더슨처
럼 면면히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을 그때그때 집약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독
특한 철학의 소유자도 있다.

    내 마음 한구석에서 느끼는 나의 모습은 외계인이다. 나는 지구를 잠시 방문하러  왔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라는 종에 유독 마음이 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빌린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는 무한성이 있다. 나에게는  이것들이 너무나  
  친숙한 관념이다. 경박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내 나름의 수행이요 정진이니 어쩌겠는  
  가.

  육신의 부활, 외계인의 납치, 초감각  지각을 연상시키는 이런 해괴망측한 주장에  과거의 
미신으로 돌아가자는 소리냐고 흥분할 사람들도 필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을 문
자 그대로 신봉하는 뉴에이지 계열의 사람들과 지금 내가  거론한 사람들은 분명히 다르다. 
이들은 믿음은 가지만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는 근본적 현실에 조금이라도 다가서기 위해서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들은 자신의 주장을 절대 액면 그대
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자신한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 자체가 진화 과정에 
있으며 몇 년이 지나면 그것은 전혀 다른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리란 걸 너무도 잘 아는  사
람들이기 때문이다.

  진화는 과거와의 연속선에서 미래를 볼 수 있게 해주지만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삶의 길
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기존 종교들이 인간의  의식에 그토록 막강한 힘을 발
휘할 수 있었던 건, 예컨대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우리 인간을 창조했다는 주장과 함께 
수많은 화가들이 하느님을 자애로운 아버지로 묘사한  데서 엿볼 수 있듯이 종교가  우주적 
힘을 인격화한 데 크게 힘입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가 개개인의 삶에 위엄을 부
여하고 영생을 약속했다는 점이다. 종교가 강한 흡인력을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우리
가 현재까지 이해하고 있는 진화는 통계적으로 다수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며  거기에 
개인이 끼여들 여지는 별로 없다. 그것은 목적이나 자유 의지가 아니라 우연과 필연이 지배
하는 과정이다. 그러니 진화를 염두에  두면서 삶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구호가 사람들에게 
먹혀들 리 없다.
  하지만 과학이 알아낸 사실을 통해  우리도 개인적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닐까. 
먼저, 과학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고유한 생명체인가를 절절히 깨닫게 한다.  유
전자 암호의 성분들이 결합하여 매번 신체적, 정신적 특성이 다른 인간을 만들어내는 그 특
이성은 차치하고하도 이 구체적 생명체가 출현하는 시간과 공간의 일회성을 보아도 그렇다. 
한 개체는 물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만 개인이 될 수 있으며 우리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는가 하는 것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삶의 유일무이한 좌표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유전 명령과 사회적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측면이 있지만, 한
편으로 우리는 자유라는 관념을 고안했으므로 우리가 일부분으로 살고 있는 전체  네트워크
의 미래를 결정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어떤 화장품을  쓰느냐가 미래에 우리가 어떤 공기
를 마시고 살아갈지를 결정하고,  교사들과 얼마나 오랜 시간  대화하느냐가 아이들의 학습 
내용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어떤 프로를 시청하느냐가 상업  방송의 성격을 바꾸어놓을 
것이다.
  현대 과학이 알아낸 물질과 에너지의 성격은 선과 악을 이해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다.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는 악은 물질계에서 나타나는 엔트로피(무질서)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영혼이나 공동체를 어지럽히고 괴롭게 만드는 원인물을 악이라고 부른다. 
악은 대체로 가장 손쉬운 길을  택하며 저급한 수준의 원리를 좇아  움직인다. 의식을 가진 
인간이 본능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것, 또는 협력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사회적 존재가 타산
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좋은 예다. 만일 과학자들이 파괴의 수단을 완성하는 데 전력 투구
한다면, 그들은 아무리 최첨단의 지식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결국 엔트로피에 굴복하는 셈이 
되고 만다. 엔트로피와 악에 저항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모든  체계는 엔트로피와 
악으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거기에 맞서는 것이 우리가 '선'이라고 부르는 힘이다. 선은 경직성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질서를 지켜나가려는 행위, 가장 발달된 체계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행위를 말한다.  선은 
미래, 공동의 선,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행위를 뜻한다. 선은 타성을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힘이요, 인간의 의식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새로운 조직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건  항
상 어려운 일이고 더 많은 노력과 에너지의 투입을 요구한다. 그것을 이루어내는 능력을 우
리는 덕이라고 부른다.
  엔트로피가 지배하도록 놓아두는 쪽이 훨씬 편한데  왜 우리는 굳이 덕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영생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진화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영생을 좀 더 거시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행동은 오
래도록 울려퍼지면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상에 영향을 미친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개인 
의식이 죽고 난 뒤 어딘가에 보존되든 아니면 깡그리 사그라지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
나 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전체 현실을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의 일부분으로서 영원히 
남으리란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미래에 더 많은 정력을 투자할수록 우리는 그 생명의 일부
분으로 확고히 자리잡을 수 있게  된다. 거대한 진화의 틀 속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사람의 
의식은 작은 개울이 거대한 강물로 합류하듯이 우주와 하나가 된다.
  생명의 흐름과 개인을 갈라놓는 것은 과거와 자아에 연연하고,  타성이 주는 안일함에 매
달리는 태도다. 악마를  뜻하는 'devil'이란  단어의 어원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devil'은 떼어내다, 동강내다란 뜻을 가진 그리스어 'diabollein'에서 온 말이다. 복잡성을 억
눌려서 자꾸 단순한 것으로 토막내는 게 악마의 주특기다.
  물론 과학이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상만 안겨준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세상에서 무의미한 
우연성만 보고 절망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러기가 더 쉬운지도 모른다. 쉽
고 단순한 길로 움직이는 엔트로피의 법칙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
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남들에 대한 책임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삶을 즐겁게 만드는 목표
를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장을 이런 질문과 함께 시작했다. 과학이 제공하는 낙관적 
미래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화
의 큰 틀 안에서 일상 생활의 의무에 집중할 때 맛보는 충실한 몰입 경험은 우주의  미래를 
엮어나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팁 모음 > 몰입' 카테고리의 다른 글

8.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  (0) 2020.05.12
7. 삶의 패턴을 바꾼다  (0) 2020.05.12
6. 인간 관계와 삶의 질  (0) 2020.05.12
5. 여가는 기회이며 동시에 함정  (0) 2020.05.12
4. 일의 역설  (0) 2020.05.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