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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 모음/몰입

2. 경험의 내용

by Frais Feeling 2020. 5. 12.

앞에서 보았듯이, 사람은 자신의 정력을 대부분 생산, 유지, 여가 활동에 쏟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일이라면 질색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노는 걸 좋아하지만 어떤 사람은 일이 없으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는 우리가 하는 일과도 관계가 있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하는 일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경험의 내용과 더 관계가 깊다.
  사랑, 부끄러움, 고마움, 행복을 정말로 느끼는지 판가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점에서 감정은 의식의 주관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은 의식을 가장 객관적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사랑에 빠질 때, 수치심을 느낄 때, 겁을 먹을 때, 행복에 겨울  때 우리를 강타하는 '실감'은, 우리가 외부세계에서 관찰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혹은 우리가 과학이나 논리학으로 깨우치는 그 어떤 지식보다도 생생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은 한 귀로 흘려듣고 오직 그의 행동에만 무게를 두면서 행동주의 심리학처럼 구는 반면, 스스로를 돌아볼 때는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나 행동보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더 중시하면서 마치 현상학자처럼 구는 모순된 자세를 종종 보이곤 한다.
  심리학자들은 아주 판이하게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바탕으로 하여 아홉 개의 기본적 감정을 추려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으로 말할 수 있고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감정 상태도 일정한 공분모를 추릴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을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자면 모든 감정은 근본적으로 이원론의 바탕 위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감정은 긍정적이어서 호감을 주든가 부정적이어서 반감을 낳든가 둘 중의 하나다.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를 판단할 때 우리가 감정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런 기본적 특성 덕분이다. 아기는 사람의 얼굴에 이끌리며 엄마의 얼굴을 보면 환하게 웃는다. 웃으면서 아기와 보호자의 유대도 강화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식사를 하거나 이성과 같이 있을 때 즐거움을 느끼는데, 만일 우리가 음식과 성에 초연하다면 인간이라는 종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뱀, 벌레, 악취, 암흑에 우리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는 진화 과정에서 이것들이 인간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리라.
  인간은 유전적으로 마련된 기본 감정말고도 더 미묘하고 섬세하며 때로는 저열하기까지 한 감정도 허다하게 만들어냈다. 자기를 반성하는 의식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있게 되었다. 감정을 날조하고 조작하는 능력을 가진 동물은 인간뿐이다. 우리 조상들은 노래, 무용, 가면 등을 이용해 공포, 경이, 희열, 도취의 감정을 유발하였다. 요즘은 공포영화, 마약, 음악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조상이 외부 세계를 가리키는 하나의 신호로서 감정을 받아들였다면, 요즘 사람은 현실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온 감정 그 자체에 빠져든다는 점이 다르다.
  긍정적 감정의 전형이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다. 우리가 일을 하는 궁극적 목표는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한 사상가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도 한두 명이 아니다. 우리가 재산, 건강, 명예를 바라는 것은 그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 이러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기에 우리의 추구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인생의 노른자위라고 일컫는 이 행복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금세기 중엽까지도 심리학자들은 행복을 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당시 사회과학을 지배한 행동주의 패러다임은 행복과 같은 주관적 감정은 너무 가변적이므로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되기 어렵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학계를 휩쓸었던 '경험주의 회오리바람'이 몇십 년에 걸쳐 서서히 걷히고 난 뒤 주관적 경험의 중요성이 다시금 강조되었고 행복에 대한 연구도 자연히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동안 축적된 연구는 일견 수긍이 가면서도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온갖 문제와 비극에 부딪히면서도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기보다는 행복한 것으로 묘사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응답자 가운데 삼 분의 일이 "아주 행복하다"고 했고, 열 명 가운데 한 명만이 "불행한 편"이라고 응답하였다. 대다수 응답자는 자신의 행복지수를 중간 이상으로 평가하였다. 다른 몇십 개국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보고되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유한성과 고통을 강조하면서 이 세상은 눈물의 골짜기요 인생은 고라고 설파한 철학자가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예언자와 철학자는 대체로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서 삶의 불완전서이 이들의 눈에는 못마땅해 보였고, 이것이 그런 불일치를 낳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아무리 불완전할지언정 살아 있음을 기쁘게 여긴다.
  물론 비관주의자의 시각으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들은 설문조사를 하는 연구자를 속이거나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어떤 공장 노동자가 행복에 겨워할 수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의 노동을 착취하는 체제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으므로 그런 주관적 행복감은 자기 기만이라고 못박은 마르크스의 해석은 우리의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장 폴 사르트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위 의식', 즉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라는 의식 속에서 살아간다고 꼬집었다. 좀더 최근에 와서는 미셸 푸코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실제 사건을 반영하지 않으며 이야기 자체만을 겨누는 말하기의 한 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자기 기만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지만, 대중이 피부로 겪는 경험보다는 자기 류의 현실 해석이 우월하다고 보는 학자들 특유의 오만으로부터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마르크스, 사르트르, 푸코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지만, 나는 어떤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할 때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무시하거나 정반대의 뜻으로 해석할 권리가 없다고 본다.
  수긍이 가면서도 놀라운 연구 결과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와 행복의 상관 관계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행복해한다는 것(가령 스위스인과 노르웨이인은 그리스인과 포르투갈인보다 행복체감도가 높다)은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지만 예외도 있다(가령 그리 넉넉하지 못한  아일랜드인이 넉넉한 일본인보다 만족해한다). 놀라운 것은 한 나라 안에서 개인의 경제력과 삶에서 느끼는 만족감 사이에는 아주 미미한 상관 관계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미국의 억만장자는 평균 소득을 가진 사람보다 아주 조금 더 행복할 뿐이다. 또 1960년부터 1990년대까지 미국인의 실질 소득은 두 배 이상으로 늘었지만 자신이 무척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비율은 여전히 30퍼센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기서 한가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빈곤의 문턱을 일단 넘어서면 재산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특성도 개인의 행복 체감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건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고 있고 신앙을 가진 외향적 인물은, 만성 질환을 앓고 있고 자신감이 부족하면 이혼을 한 내성적 무신론자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특성을 이렇게 묶어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비판적 회의주의에도 일견 수긍할 만한 점이 있다. 가령 건강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실제 체험한 것과는 상관없이 건강하지 않고 신앙심이 없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담론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이라는 필터를 통할지언정 '가공되지 않은' 체험 자료와 늘상 만나므로 자신의 느낌에 대한 이야기는 자기 감정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장을 두 군데나 다니지만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여자가 한 직장도 지겨워하면서 다니는 여자보다 실제로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행복이 우리가 따져볼 만한 가치가 있는 감정의 전부는 아니다. 하루하루 삶의 질을 끌어올리고 싶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행복은 출발점으로서는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하다. 행복의 느낌은 다른 감정처럼 사람마다 편차가 크지 않은 편이다. 아무리 공허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자기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여간해서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게다가 행복을 얼마나 느끼느냐는 주어진 상황보다는 개인의 성향에 좌우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사람은 외부 여건과는 상관없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반면 어떤 사람은 아무리 즐거운 일이 생겨도 자꾸만 불행하다는 의식에 젖어든다는 뜻이다. 행복의 느낌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누구와 같이 있고 어떤 장소에 있는가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다. 다른 감정은 상황이 달라지면 쉽게 바뀐다. 그러나 그런 감정도 행복의 느낌에 이어져 있으므로 결국은 우리가 느끼는 행복감을 끌어올릴 수 있다.
  이를테면 자신이 얼마나 능동적이고 강인하며 민첩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지는 어떤 일을 하는가에 따라 그 도가 크게 달라진다. 어려운 일을 할 때는 그런 감정도 강해지며, 일을 하다가 실패를 맛보거나 아예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는 그런 감정 또한 약해진다. 이러한 감정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자신이 능동적이고 강인하다는 느낌이 들면 그만큼 거기서 맛보는 행복감도 커지기 마련이어서, 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선택한 일이 행복감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같은 이치로 보통 사람은 혼자 있을 때보다 남과 같이 있을 때 자기가 명랑하고 사교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쉽게 가진다. 대체로 외향적인 사람이 내성적인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는 이유도 명랑성과 사교성이 이처럼 행복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행복감만은 아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가도 삶의 질을 좌우한다.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주는 목표를 개발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정력을 충분히 써먹지 못할 경우, 우리는 좋은 감정의 극히 일부만을 맛보게 된다.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의 주인공처럼 "나만의 정원을 가꾸겠노라."면서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훌륭한 삶을 산다고 말하기 어렵다. 꿈이 없고 위험이 따르지 않는 삶은 옹색하기 짝이 없다.

  감정은 의식 안의 상태를 말한다. 슬픔, 두려움, 떨림, 지루함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은 마음속에 '심리적 엔트로피'를 조성한다. 무질서도를 뜻하는 엔트로피 상태에 빠지면 우리는 바깥일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내부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데 온통 신경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 과단성, 민첩성 같은 바람직한 감정은 '심리적 반엔트로피'의 상태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거나 추스르는 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으므로 아무 걸림돌 없이 정력을 우리가 선택한 과제로 온전히 투입할 수 있다.
  우리는 주어진 과제에 관심을 쏟는 것을 지향점 또는 목표를 설정했다고 표현한다. 목표를 얼마나 끈질기고 일관되게 추구하느냐는 동기 부여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의도, 목표, 동기 부여는 심리적 반엔트로피를 조성한다. 정신력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작업의 우선 순위를 조정하면서 의식 안에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질서가 없으면 정신적 과정은 두서가 없어지고 감정의 질은 급격히 저하된다.
  우리가 말하는 목표 중에는 길모퉁이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오는 사소한 일도 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중차대한 사명도 있다. 우리는 하루의 삼 분의 일은 좋아서 하는 일을 하고 삼 분의 일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하며 나머지 삼분의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을 한다. 연령, 남녀, 활동량에 따라서 이 비율은 조금씩 달라진다. 가령 아이는 어른보다, 남자는 여자보다 자신의 선택 폭이 크다고 생각한다. 집에서 하는 일은  직장에서 하는 일보다 자발서이 큰 것으로 이해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자발적일 때 가장 만족스러워하지만 의무감 때문에 하는 일 역시 크게 불만스러워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많이 있다. 심리적 엔트로피는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하는 일에서 가장 높이 나타났다. 결국 내적 동기 부여(이것을 하고 싶다)든 외적 동기 부여(이것을 해야 한다)든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집중을 해야 할 어떤 목표도 갖지 못하고 마지못해 일을 하는 상태보다는 삶의 질을 끌어올려 준다. 동기 부여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우리에게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의도의 경우는 정력이 단기간에 투입되는 반면, 목표는 좀더 장기적으로 투입된다. 우리가 도달하려는 자아의 모습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다. 테레사 수녀와 마돈나라는 가수의 삶이 판이하게 다른 것은 두 사람이 평생토록 자신의 주의를 투입하는 목표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일관된 목표의 추구 없이 일관된 자아를 만들어 나가기는 어렵다.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정력을 제대로 투입해야 한 사람의 경험에 질서가 생긴다. 예측이 가능한 행동, 감정, 선택에서 드러나는 이 질서는 시간이 흐르면 개성 있는 '자아'로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한 사람이 세우는 목표는 그의 자부심에도 영향을 미친다. 백여 년 전에 이미 윌리엄 제임스가 지적한 대로 자부심은 기대와 성공의 비율에 좌우된다. 어떤 사람이 자부심이 낮다면, 그것은 그가 목표를 너무 높이 두었거나 성공한 경험이 몇 번 안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가장 많이 성공한 사람이 반드시 가장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리란 법은 없다. 일반인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아시아계 학생의 자부심은 그보다 못한 성적을 거둔 다른 소수 민족계 학생보다 낮다. 아시아계 학생은 웬만한 성공으로는 만족하기 어려운 높은 목표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니는 어머니는 그렇지 않은 어머니보다 스스로를 평가하는 점수가 높지 않다. 자신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자부심을 키워줄수록 좋다고 세상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진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기대치를 낮추는 데서 얻는 자부심은 자랑할 것이 못 된다.
  의도와 목표를 두고 사람들이 흔히 품는 오해가 있다. 가령 힌두교나 불교처럼 갈래가 다양한 동양의 종교들은 행복에 이르려면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모든 욕망을 포기하여 더 이상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야만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 영향을 받은 적잖은 수의 유럽과 미국 청년들이 철저히 자동적이며 우연히 이루어지는 행위만이 삶의 깨달음으로 이어진다는 믿음 아래 일체의 목표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보기로는 동양 종교를 이런 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다. 따지고 보면 욕망을 뿌리뽑겠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유전적, 문화적 욕망이 철저히 뿌리내리고 있으므로 이것들을 잠재우려면 거의 초인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 마음가는 대로 살면 목표를 정해야 하는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저 본능과 교육이 자신들에게 던진 목표를 맹목적으로 좇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훌륭한 스님도 넌더리를 낼 만큼 저속하고 비뚤어진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고 만다.
  내가 보기에 동양의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은 목표를 덮어놓고 부정하리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속에 저절로 생겨나는 의도는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궁핍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우리의 유전자는 부득불 탐욕스러워지고 남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힘을 갈망하게 되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가 속한 사회 집단도 같은 언어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밖에는 신뢰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관성은 무시 못하는 것이어서 우리가 가진 목표의 대부분은 유전과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불교가 우리에게 억눌러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런 목표다. 하지만 그러려면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하다. 타성에 젖은 목표를 근절한다는 역설적 목표는 한 사람이 자신의 정신력을 이십사 시간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이루기 벅찬 과업이다. 요가 수행자나 승려는 타성에 젖은 목표가 의식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느라 전력 투구하는 사람들이므로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이 거의 없다. 동양 종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서구인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과는 정반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목표를 다스리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은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첫걸음이다. 그것은 자연발생적 욕망에 몸을 맡기는 것과도 다르고 욕망을 무조건 억압하는 것과도 다르다. 최선의 방안은 자기 욕망의 뿌리를 이해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편견을 인식하면서, 사회적, 물질적 여건을 지나치게 흩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의식에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목표를 겸허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이보다 덜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며, 이보다 과도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좌절을 자초하는 셈이다. 

  의식의 내용으로 감정, 목표에 버금가게 중요한 것은 사고의 인지적 과정이다. 사고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므로 짧은 지면에서 체계적으로 다루기는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주제를 단순화하여 일상 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는 게 좋겠다. 우리가 사고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력에 질서가 갖추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감정은 유기체를 접근이나 회피의 태세로 움직여서 주의를 집중시키며, 목표는 욕망하는 대상의 모습을 제시하여 주의를 집중시킨다. 사고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 이미지의 연쇄를 낳아 유기체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가장 기본적인 정신 작용은 원인과 결과를 잇는 것이다. 손을 움직여 침대에 걸린 방울을 딸랑딸랑 울릴 수 있다는 것을 어린아이가 처음 깨달은 때가 바로 한 사람의 인생에서 원인과 결과가 처음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훗날 우리가 하게 되는 사고의 대부분은 이런 단순한 연합에 토대를 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원인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단계들은 점점 추상화되러 구체적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전기기사, 작곡가, 주식 중개인은 와트와 옴, 음과 박자, 주식의 매입과 매도 등 자기 머리에서 운용되는 상징들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연합의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작업한다.
  감정, 목표, 사고가 따로 떨어진 경험의 가닥들로 의식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늘 교섭하면서 서로 변화시킨다는 점이 이제는 어느 정도 분명해졌으리라고 본다.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 청년은 사랑이라는 말에 담겨 있는 모든 감정을 겪는다. 청년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애쓰면서 어떻게 하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새 차를 사면 여자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제 새 차를 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목표가 구애라는 목표 안으로 끼여든다. 그러나 일을 더 하면 좋아하는 낚시도 못 가게 될 거라는 실망의 감정을 느낀다. 이것은 다시 새로운 생각을 낳고, 청년은 자신의 감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목표를 조정한다. 이처럼 경험의 흐름은 수많은 정보를 끊임없이 실어나른다.
  정신의 작용을 깊이 있게 파고들려면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집중하지 못하면 의식은 혼돈에 빠진다. 마음은 평상시에는 정보의 무질서 상태에 놓여 있다. 생각은 논리적 인과 관계에 따라서 가지런히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두서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얽혀 있다. 집중하는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서 노력을 한곳으로 모으지 못하면 사고는 아무런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지리멸렬해진다. 공상은 마음에 드는 이미지들을 따붙여 마음의 내부에서 일종의 영화를 만드는 것인데, 이런 공상에 빠지는 데도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집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공상에도 제대로 못 빠지는 아이들이 요즘 한둘이 아니다.
  감정의 흐름을 거슬러야 할 경우엔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수학을 싫어하는 학생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교과서에 실린 정보를 흡수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극(시험에 붙어야 한다든가 하는)이 필요하다. 정신적 과업이 어려울수록 집중하기도 그만큼 어려워진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그 일을 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을 때는 객관적 어려움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별다른 갈등 없이 마음을 집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고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뜸 지능부터 떠올린다. "내 IQ가 얼마더라?", "그애는 수학의 천재야."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사고력의 개인차에 관심이 깊다. 지능은 이를테면 수를 머리로 얼마나 능숙하게 그려내고 처리할 수 있는가, 단어에 담긴 정보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가처럼 정신 과정의 다양한 측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하워드 가드너가 보여주듯이 우리는 지능의 개념을 확장하여 그 안에 근육 감각, 소리, 느낌, 모습 같은 갖가지 종류의 정보를 구분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얼마든지 포함시킬 수 있다. 어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리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리 뛰어나다. 음정을 잘 구분하며 화음도 또래보다 잘 넣는다. 태어날 때의 미세한 차이가 시간이 흐를수록 시각, 운동, 수학 능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낳는다.
  그러나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집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성숙한 지능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재능의 개발에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정신력을 모을 수 있어야만 음악적 재능을 가진 아이는 음악가가 될 수 있고 수학적 재능을 가진 아이는 공학자나 물리학자가 될 수 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전문가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실력과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모차르트는 신동이었지만 만약 그의 아버지가 아들이 기저귀를 떼자마자 강제로 음악 연습을 시키지 않았더라면 그의 재능이 꽃을 피웠을지 나로서는 의심스럽다. 집중력이야말로 모든 사고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경험의 내용이 서로 다르면 일상 생활에서 조화를 이루기가 어렵다. 내가 근무를 하면서 집중하는 것은 고용주가 나에게 집중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딱히 원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동기 부여는 그다지 높다고 볼 수 없다. 한편으로는 나는 사춘기를 맞이한 아들 녀석의 비뚤어진 행동 때문에 자꾸만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책상 앞에 앉아는 있지만 완전히 일에 몰두하지는 못한다. 내 마음이 극심한 혼돈을 겪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의식의 엔트로피가 높아서 그렇다. 감정, 목표, 사고가 초점에 들어왔다 사라지며, 상반된 충동을 낳으면서 나의 관심을 여러 방향으로 흩뜨려놓는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나는 퇴근 후에 친구와 만나 즐겁게 술을 마시면서도 가족에게 곧바로 가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별로 생소하지가 않다. 하루하루의 삶이 그런 모순으로 차 있다. 가슴, 의지, 정신이 일치할 때의 뿌듯함을 우리는 좀처럼 맛보기 어렵다. 감정, 목표, 사고가 일치하지 않고 의식 안에서 격투를 벌이며, 우리는 그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는지 생각해 보자. 가련 스키를 타고 산비탈을 질주할 때 우리는 몸의 움직임, 스키의 위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는 공기, 눈 덮인 나무에 주의를 집중한다. 갈등이나 모순을 의식할 짬이 없다. 조금이라고 마음을 놓았다간 눈 속에 고꾸라진다. 그러니 누가 딴 생각을 하겠는가? 활강이 너무도 완벽하여 우리는 그것이 한없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순간의 경험에 완전히 몰입한다.
  당신에게 스키가 별볼일없는 것이라면 그 장면에 당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넣어보라. 그것은 성가대에서 부르는 합창일 수도 있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는 일일 수도 있고, 춤이나 카드 놀이, 독서일 수도 있다. 혹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당신도 일을 좋아한다면 까다로운 외과 수술이나 피가 마르는 상담에 몰입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또는 좋아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엄마가 아기와 놀 때처럼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순간에 완전히 빠져드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순간의 공통점은 의식이 경험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이다. 이때 각각의 경험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 일상 생활에서는 좀처럼 그런 경험을 맛보기가 어렵지만 그 순간에는 느끼는 것, 바라는 것, 생각하는 것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이 순간을 나는 '몰입 경험'이라고 부르고 싶다. '몰입'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것은 운동선수가 말하는 '몰아 일체의 상태', 신비주의자가 말하는 '무아경', 화가와 음악가가 말하는 미적 황홀경에 다름아니다. 운동선수, 신비주의자, 예술가는 각각 다른 활동을 하면서 몰입 상태에 도달하지만, 그들이 그 순간의 경험을 묘사하는 방식은 놀라우리만큼 우리와 비슷하다.
  우리는 적절한 대응을 요구하는 일련의 명확한 목표가 앞에 있을 때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 체스, 테니스, 포커 같은 게임을 할 때 몰입하기 쉬운 이유는 목표와 규칙이 명확히 설정되어 있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선수는 모든 것이 흑백으로 선명하게 표현된 소우주 안에 있다. 종교 의식에 참여하거나 음악을 연주하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거나 산을 오르거나 수술을 할 때도 명확한 목표가 주어진다. 몰입을 유발하는 활동을 '몰입 활동'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일상 생활과는 달리 몰입 활동은 명확하고 모순되지 않은 목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준다.
  몰입 활동의 또 하나 특징은 되먹임, 곧 피드백의 효과가 빨리 나타난다는 것이다. 몰입 활동은 작업이 얼마나 순조롭게 이루어지는지를 말해 준다. 우리는 체스를 두면서 말 하나를 움직일 때마다 형세가 유리해졌는지 불리해졌는지를 안다. 등반가는 걸음을 한 보 내디딜 때마다 그만큼 높이 올라섰다는 것을 안다. 성악가는 노래의 한 소절이 끝날 때마다 자기가 부른 노래가 악보와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알 수 있다. 뜨개질하는 사람은 한 땀 한 땀이 자기가 의도하는 무늬와 맞아떨어지는지를 곧바로 알 수 있다. 외과의는 칼이 동맥을 잘 피했는지 아니면 갑자기 출혈이 시작되었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우리는 단서가 주어지지 않으면 지금 하는 일이 잘 되는지 못되는지 한참을 모르고 지낼 때가 많지만 몰입 상태에서는 대체로 그걸 알 수 있다. 
  몰입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버겁지도 않은 과제를 극복하는 데 한 사람이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행동력과 기회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바람직한 경험을 하게 된다(<그림 1>). 과제가 너무 힘겨우면 사람은 불안과 두려움에 젖다가 제풀에 포기하고 만다. 과제와 실력의 수준이 둘 다 낮으면 아무리 경험을 해도 미적지근할 뿐이다. 그러나 힘겨운 과제가 수준 높은 실력과 결합하면 일상 생활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심도 있는 참여와 몰입이 이루어진다. 등반가라면 산에 오르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짜내야 할 때, 성악가라면 높고 낮은 성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어야 하는 까다로운 노래를 불러야 할 때, 뜨개질하는 사람이라면 자수의 무늬가 이제까지 시도했던 그 어떤 무늬보다 복잡할 때, 외과의라면 순발력 있는 대응을 요구하는 수술이나 새로운 기법을 도입한 수술을 할 때, 바로 그런 경험을 한다. 보통 사람은 하루가 불안과 권태로 가득하지만 몰입 경험은 이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강렬한 삶을 선사한다.

  목표가 명확하고 활동 결과가 바로 나타나며 과제와 실력이 균형을 이루면 사람은 정신을 체계적으로 집중할 수 있다. 몰입은 정신력을 모조리 요구하므로 몰입 상태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몰두한다. 잡념이나 불필요한 감정이 끼여들 여지는 티끌만큼도 없다. 자의식은 사라지지만 자신감은 평소보다 커진다. 시간 감각에도 변화가 온다. 한 시간이 일분처럼 금방 흘러간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여한 없이 쓸 때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일 자체에서 가치를 발견한다. 삶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게 된다. 체력과 정신력이 조화롭게 집중될 때 삶은 마침내 제 스스로 힘을 얻는다.
  삶은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다. 몰입해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을 느끼려면 내면의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정작 눈앞의 일을 소홀히 다루기 때문이다. 암벽을 타는 산악인이 고난도의 동작을 하면서 짬을 내어 행복감에 젖는다면 추락할지도 모른다. 까다로운 수술을 하는 외과의나 고난도의 작품을 연주하는 음악가는 행복을 느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비로소 지난 일을 돌아볼 만한 여유를 가지면서 자신이 한 체험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했는가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되돌아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물론 몰입하지 않고도 행복을 맛볼 수는 있다. 고단한 몸을 눕혔을 때의 편안함과 따사로운 햇살은 행복을 불러일으킨다. 모두 소중한 감정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런 유형의 행복감은 형편이 안 좋아지면 눈 녹듯 사라지기에 외부 상황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몰입에 뒤이어 오는 행복감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것이어서 우리의 의식을 그만큼 고양시키고 성숙시킨다.
  <그림1>에서 우리는 왜 몰입이 개인을 성숙시키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그림에서 '각성' 상태에 있다고 가정하자. 각성은 별로 나쁜 상태는 아니다. 각성 상태에 놓인 사람은 정신을 상당히 집중하고 능동적이며 대상에 밀착되어 있다. 문제는 그 정도가 높지 않아 몰입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좀더 신바람 나는 몰입의 상태로 넘어갈 수 있을까? 답은 자명하다. 실력 연마에 좀더 힘을 쏟아야 한다. 이번에는 '자신감'이라는 범주로 넘어가 보자. 이것 역시 행복감, 만족감을 웬만큼 가질 수 있는 바람직한 경험의 상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 집중도, 밀착도가 떨어지며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 또한 강하지 않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해야 몰입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이 경우에는 과제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이렇듯 각성과 자신감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상태다. 그 밖의 상태에서 몰입으로 넘어가기는 이보다 어렵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불안이나 걱정에 휩싸여 있을 때는 몰입 상태가 너무나 요원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기보다는 지금보다 덜 부담스러운 상황으로 물러나려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몰입 경험은 배움으로 이끄는 힘이다. 새로운 수준의 과제와 실력으로 올라가게 만드는 힘이다. 이상적으로 보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면서도 꾸준한 성장의 길을 걸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몰입의 단계로 넘어가기에는 권태와 무력감이 너무 강하여 비디오처럼 이미 나와있는 규격화된 자극으로 우리의 정신을 채우거나, 필요한 실력을 닦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고 마약이나 술 같은 인위적 이완제가 가져다  주는 몽롱한 상태로 가라앉는다. 최적의 경험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첫발을 내디딜 기운조차 없는 경우가 흔하다.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몰입을 경험할까? 가령 평범한 미국인에게 "일을 하다가 거기에 푹 빠져들어 시간 감각조차 잃어버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다섯 명  중에 대략 한 명꼴로 그런 경험을 자주 한다고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도 여러 번 그런 경험을 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반면 15퍼센트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가별로도 이 비율을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최근에 6,469명의 독일인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런 경험을 자주 한다가 23퍼센트, 가끔 한다가 40퍼센트, 거의 못한다가 25퍼센트, 전혀 못한다가 12퍼센트였다. 물론 가장 강렬했던 몰입의 경험만 들도록 요구하면 긍정적 응답의 비율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화초 가꾸기건, 음악 감상이건, 볼링이건, 요리건, 대체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몰입을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운전을 할 때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혹은 일을 할 때도 의외로 자주 나타난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휴식을 취할 때처럼 수동적으로 임하는 여가 활동에서는 좀처럼 그런 체험이 보고되지 않는다. 명확한 목표가 주어져 있고, 활동의 효과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으며, 과제의 난이도와 실력이 알맞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사람은 어떤 활동에서도 몰입을 맛보면서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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