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에 뿌리를 둔 사랑...
그대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활활 타올라 재가 되고 말리.
비제(카르멘)
우리는 종종 고독할뿐더러 고독을 앓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밖에서 보면 그들은 언뜻 매력적으
로 보이기 쉬우며,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왜 홀로 지내는지, 그 때문에 불행한지 어떤지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조금 더 그들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어떤 운명적인 것이 그들의 삶을 결정지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이 갈망하며 또 함께 있길 원하는 대상을 사랑할 수 없다. 그들은 일정 거리에 있는
상대에게만 헌신적이며 최선을 다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그 상대방과의 미래는 단
지 모호한 약속으로, 혹은 지나친 공상 정도로 간주한다. 이들은 현실에서는 어떤 확고한 관계도 원하지
않는다. 마치 고전 발레에서 무용수들 간의 완벽한 조화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신체적 접촉이 이루어지
지 않았던 것처럼, 이와 같은 관계에서도 일정한 '거리'가 어떤 비밀스런 합의에 의해 늘 유지되는 것처
럼 보인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가 있는 여자와 유부남인 남자가 있다. 이 두 사람은 제삼자를 내세워 둘 사
이를 가르는 일종의 차단벽으로, 동시에 하나의 연결 고리로 이용한다. 제삼자를 끌어들이지 않는 경우
에는 사무적인 일로 너무 바빠서 개인적인 일을 위해서는 시간과 정열이 턱없이 부족한 직업을 차단벽
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매년 계획을 세우는 세계 여행(실제로는 결코 실행되지 않을), 마약 문제, 스포
츠, 전문화 교육, 심지어 심리치료마저 상대방과 거리를 유지하고, 가까워지기를 거부하기 위한 이유가
된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모든 것들은 핑곗거리에 불과하다. 실제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선 결국
그들도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을 시인한다. 이 표현은 심리학적 상징을 가진 중산
층 사이에 이미 일반화되어 있다. 사실 '정신분열'과 같은 개념이 이해하기에는 보다 쉬울 것이다. 하지
만 그것으로는 얻어지는 것이 별로 없다. 물론 타인과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정신분열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언급되는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대인관계에
서 자주 등장하는 다른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 예를 들어, 함께 사는 두 사람이 겉으로는 안정적이고 친
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매일 헤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다투는 경우를 생
각해 볼 수 있겠다. 다툼이 심해지면 때때로 상대편을 애초에 알지 못했더라면, 하는 말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결속만큼이나 헤어짐에 대해서도 서로 합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은 계속된다. 대부분의
경우 헤어짐이라는 문제는 공공연한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상상 속에서만 이
루어질 뿐이다. 현실적으로는 그저 상대방으로부터 고통받지 않고 마침내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만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사람들은 이처럼 스스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헤어지
지 못하는 곳일까? 그토록 갈망하는 편안함과 친밀감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고, 관계가 단지 고통, 실
망, 좌절만을 안겨 주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우선 그 원인을 어린 시절과, 그보다 더 이전의 단계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자식을 하나의 인격체라기보다 가족이라는 기계의 한 부속품 정도로,
혹은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품 정도로 대하는 부모가 있다면, 이와 같은 가족 모델만을 분석
하고서 만족하는 것은 근시안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례는 '사회가 문제'라는 식의 추상적이고도 불
명확한 관점을 직접적이며 의미있게 설명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관계 장애가 있는 가족의
사례는 위험하다. 여기서는 행위와 원인이 불분명하고, 단지 희생자와 이야기의 상징적인 연결 고리만이
있을 뿐이다.
심리 치료사들은 흔히 가족 관계에 대한 짧은 통찰만으로 이러한 가족 모델의 치료가 현실적으로 가
능하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부부관계 조언가나 가정문제 상담원들은 종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고작 부부가 그냥 문제를 떠안고 살아 가는 경우가 그들이 할 수 잇는 최선의 경우인데도 말
이다. 이와 관련하여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이라는 도구가 더 이상 넘어설 수 없는 '우뚝 선 절벽'에 대
해 언급한 적이 있다. 내 견해로는 프로이트의 생물학적 모델 역시 최근이 심리치료 양태중 하나인 가
족 모델과 마찬가지로 산업화의 세세한 과정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자연과 인간
의 본성은 기술적인 정복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결과는 흔히 심리분석적 노력으로도 바뀔 수가 없다.
'생물학적' 원인이라 불리는 것은 환자의 고통을 그들의 본성 탓으로 돌리고, 그들을 분노, 공포, 질투로
몰아가는 파괴적인 영향력을 도외시한다. 또한 사적이고 은밀한 사랑에 대한 과대평가와 의미의 확장은
산업사회에서의 통화의 인플레이션과 같은 치료제 역할을 하게 된다.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이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품이 되어 언제든지 기능에 따라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러한 산업 사회의 틀은 여러 가지 비판과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 그리고 상
황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바뀌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들은 더 거대하고 막강해졌으며, 인간의 자유 시간을 잠식하고, 소프트 웨어의 망을 통해 하드웨어의
망을 더 확장해 가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식물학자들은 원시림을, 선교사는
인디언을, 교육자는 아이들의 성장기를, 그리고 심리치료사들은 사적인 영역을 정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기술적 진보에는 적응이 인간적인 관계와 감정의 자연스런 성숙보다 더 중시되는 이 시기에, 어
째서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불가피하게 생겨날 수밖에 없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인간 상호간
의 사람은 현상적으로 드러난 감정만을 소비하는 인간관계에서 벗어나야만 개인을 좌절시키고 파괴시키
는 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조직이라는 틀에 적응된 인간은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더 많이 사랑받고자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파트너는 더욱
더 사랑에 수동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그건 마치 물에 빠진 두 사람이 각자 서로의 도움을 받지 못하
고 익사해야만 하는 걸 알면서도 서로를 붙들고 매달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조직의 틀에 희생되어야
하는 것만큼을 파트너가 지불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자유 시간을 줄이면서 부를 축적한다. 그
래서 현실 속의 불행을 깊이 자각하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자초한다. 난 네가 나를 식민지화하고 착취하
도록 할 것이다. 만일 네가 나 또한 그렇게 하도록 허용한다면! 그러므로 "관계에 투자하다", "관계가 잘
기능한다", 혹은 "관계가 제대로 성공하지 않았다"와 같은 말들을 사용하는 것이 결코 놀랄만한 일은 아
니다.
나는 사례들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고 이론을 심화시키고자 한다. 내가 사용하는 방식은 전통적 의미
에서 심리분석적이라 부를 수 있다. 환자가 의식에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도록 하는 프로
이트의 천재적인 발상은 오늘날까지도 그 매력과 타당성을 잃지 않고 있다. 나는 심리분석이 질적인 사
회 탐구라고 본다. 이 연구에 합당한 사례들을 제공한 사람들은 바로 심리분석 치료를 받는 동안 자신
의 체험이나 행동의 배경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을 말해 준 환자들이다. 나는 그들의 신
상에 대한 기록을 변형하거나 생략함으로써 그들을 보호하려 했다. 양적인 연구의 기계적 대상화 부분
에서는 조사자와 조사 대상, 분석가와 환자의 관계에 근거한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 부분
에서는 내가 느낀 감정들도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심리학에서 양적인 연구의 성과를 과
소평가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언제 깊은 물 속으로 빠지게 될지 알기 위해서 연구의
내용과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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