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아테는 결혼 생활에서 자신의 임무가 무엇보다도 고달프고 힘들게 헌신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
에, 남편을 성인이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보길 두려워한다. 다만 남편이 그녀의 이상형에 걸맞는 행동을
(비록 무의식적으로라도) 할 때만, 그가 쌍둥이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
이게 된다. 물론 그가 그 밖의 다른 행동을 보일 때에는 무시하거나 부정한다. 그런 까닭에 베아테는 남
편이 일도 안 하고, 졸업시험 준비도 안 하고, 그가 한 말이 거짓말이었음이 들통날 때면, 늘 예상치도
못했다는 듯이 '놀라곤' 했다. 남편은 동일성에 대한 동경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며, 실체가
아예 없거나 위험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 부분을 도외시한다면, 그의 진정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가 뭔가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그녀는 거의 자제력을 잃고 저항한다. 해결책은 둘
다 문제 해결을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재 상대방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은 결코 만족스럽
지 않은, 그리고 상대방의 동일성에 모순되는 부분과 결합되는 것이다. 둘은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이 사람이 언젠가 시험을 보게 되고 그래서 학업의 스트레스도 없어지고, 덜 힘들게 되면, 그럼 난 보
상받을 수 있을 것이고, 더 이상 희생하지 않아도 될 거야'라고 생각한 베아테는 몇 년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기생충처럼 날 빨아먹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한 번도 준 적이 없을뿐더러 앞으로도
영영 그럴 거야." 적응과 성과물로 규정되는 모든 관계에서는 '예, 아니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모든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 지배적이다. 상대방을 파악하려는 의도는 오히려 그를 예측할 수 없게 한
다. 두려움 때문에 그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함으로써, 그는 한층 더 무장하고 조심스럽게
탐험해 가야 할 캄캄한 미지의 대륙이 되고 만다. 그러다 한 사람이 적의를 드러내며 상대방이 당연히
보여 주었어야 할 모습을 이제까지 한 번도 보여 주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할 때, 종종 두 사람의 긴장
관계는 깨진다.
'이야기 모음 > 두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픔의 회피 (0) | 2020.08.24 |
---|---|
깨지기 쉬운 내적 표상 (0) | 2020.08.24 |
동일성을 향한 갈망 (0) | 2020.08.24 |
성과물과 통제를 위한 노력 (0) | 2020.08.24 |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라 (0) | 2020.08.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