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아테와 남자들 간의 관계의 본질은, 그녀가 정말로 슬픈 일이 드물다는 데 잇다. 그녀는 싸우고 분
노하는 게 두렵다. 그녀에게 슬픔은 성과물이 아니며, 상처를 다른 식으로 가공할 수 있는 감정이다. 한
편 베아테는 자신의 행동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혹은 옳은 것이었는지 그른 것이었는지를 심리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늘 나에게 물었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싶어했고, 앞으로는 더 잘 하리라 다짐하는 것이
었다. 슬픔의 회피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작은 사건이 있었다. 그녀는 이전의 남자 친구와 그래도 한번
더 사귀어 보는 게 어떨까, 하면서 망설였다. 그리고는 그와 만나기 전, 캄캄한 지하실에서 등을 구부리
다가 나뭇조각에 눈의 각막을 다쳤다. 그녀는 자기가 거기서 뭘 찾고 있었는지 조차 몰랐다. 마침내 그
남자 친구가 찾아왔을 때는 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상담 시간에야 비로소 그녀는 그런 행위를 통
해, 자기 감정이 뭔지 분명히 알아내지 못하는 무능력을 상쇄하려고 했다는 결론을 스스로 도출해 냈다.
"단지 내 과거가 그렇게 좋지 않게 끝나 버렸기 때문에, 오토가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았죠.
그는 내가 아프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어요. 내 사고 이야기를 잠깐 듣고 나서는 금세 자기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더군요." 슬픔의 회피를 보여 주는 다른 예는, 그녀가 짰다가 다시 풀어 버린 스웨터 이야
기다. 오토가 베아테 자신이 원하는 만큼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걸 시인하고, 그것을 슬퍼하는 대신에,
그녀는 뭔가 성과 있는 일을 하고, 그와 자신을 통제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어떤 사람을 잃고 슬퍼할 수
있는 하나의 전인적 인격체가 아니라, 분노와 두려움에 쫓기는 모순적인 행동들의 다발이다. 바라는 것
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가 생기고, 그 분노가 관계를 위협하고, 그래서 오토에 대한 이상적인 표상
이 언젠가는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겨나는 식이다. 오토 아니면 그녀, 둘 중 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한 사람은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음이 분명하다. 한 사람은 악하고, 눈물도 없는 인간이다. 관
계가 끝나 버린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슬픈 것'이라는 사실을 베아테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어떤 좋은 설득으로도, 어떤 필사적인 노력으로도, 어떤 적응에로의 의지로도, 이러한 불행한 결과를 막
을 수 없었다. 그녀가 만일 자신의 다른 노력들보다 자신의 사랑에 더 기댔다면, 아마도 그와 같은 헤어
짐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이별과 죽음 역시 출생이나 성장처럼 삶에 속한다. 이것은 물론 뻔한 진리이
긴 하지만, 오늘날의 '진보된' 사회는 그것을 잊은 것처럼 보인다. 또한 많은 개인들도 친밀한 관계를 둘
러싼 갈등 속에서 상대방 역시 얼마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지, 얼마나 나약한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겁나게 하는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여자는 "넌 적극적이지 못해. 너무 차갑고 이성적이야."라고
하고, 남자는 "넌 너의 감정으로 날 질식시키고, 단지 나를 헐뜯으려고만 해"라고 한다. 누가 옳은지 싸
우는 속에서 두 사람 다, 인간이란 존재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라는 것과, 우리 인간들에 의해 매일 조
금씩 파괴되어 가는 지구에 자신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다.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둘러싼 투쟁은, 한 사람이(혹은 양쪽 다) '감정에 의해 규정되는 관
계'를 두려워할 때 생겨난다. 감정과 노력을 혼동하고, 더 이상 그 노력의 정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역시 너무 많이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한다. 자기의 재산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사람은 반면
손해 볼 것에 대해 그렇게 많이 걱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을 인지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두려움을 타인과 나눌수록 덜 두려워지고, 사랑으로 이겨 나가게 된다. 베아테가 자신의 사랑을 보다 분
명하게 표현하고,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기 시작하자마자, 오토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약속 시간보다
늦게 오고, 옛날 애인들을 만나러 가거나, 이전보다 더 바쁘게 일을 했다. 베아테가 이를 불평하자, 오토
는 화를 내며, 한 번도 두 사람간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말을 한 적이 없는 자기에게 너무 억지를 부린
다고 했다. 비록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각자 상대방을 너무 심하게, 모욕적
으로 다룸으로써 두 사람 다 고통받는 것이다. 베아테는 오토의 사랑에 거름을 주어, 그의 두려움과 이
별에 대한 상상을 뿌리째 뽑아 버리고자 했다. 오토는 베아테가 품고 있는 신뢰가 가는, 지속적인 관계
에 대한 기대를 없애 버리고, 베아테도 점차 자기 자신처럼 되어 주기를 바랐다. '그가 만일 정말로 날
사랑한다면, 날 이렇게 매달리게 하지는 않을 텐데!'라고 베아테는 생각했고, 그 반면 오토는 '그녀가 날
정말로 사랑한다면, 날 그냥 내버려두고, 더 이상 내 자유를 구속하지 않을텐데!'라고 생각한 것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토가 멀어지려고 하자 베아테가
집착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베아테가 집착하게 되자 그가 멀어지려고 한 것일까? 그가 오지 않기 때문
에 그를 기다린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기다리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가 오지 않은 것일까? 이것은 마치
엄마가 수유시 아기와 겪게 되는 마찰과 비슷하다. 즉 엄마가 젖을 그만 물리려고 하니까 아기가 엄마
젖꼭지를 문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아기가 물기 때문에 엄마가 젖을 물리지 않으려는 것인가, 하는 문
제와 비슷하다. 이런 갈등을 겪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은 상대방의 행동에 반응할 뿐이라고 믿는다. 그러
나 이 상황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사람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그런 까닭에 생기는 작은 불협
화음이 점점 커지는 것으로 보인다. 아기 엄마는 조심스럽게 젖꼭지를 물리면서, 아기가 살짝 물기라도
하면 즉시 아기를 밀어낼 준비가 되어 있다. 이에 비해 아기는 얌전하게 젖을 빠는 게 아니라, 젖꼭지를
꼭 물고, 엄마가 조금만 의심스런 행동을 보일 경우 깨물게 되는 것이다. 친밀한 관계를 둘러싼 갈등도
이와 비슷하다. 먼저 행동을 보인 사람은, 그 행동이 금방 자기에게 불리하게 다시 작용하는 걸 보게 된
다. 그는 확신할 수 없는 감정을 실질적으로 더 잘 통제할 수 있는 어떤 행동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
러고 나면 정작 친밀한 관계의 영역에서 필요한 적응과 행동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
대방과 거리를 갖고, 행동을 절제하고, 그럼으로써 관계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을 행한
어린아이 같은 행동은 비록 자연적인 행동 양태의 일부이긴 하지만, 관찰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인간과
환경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기술이 삶을 더 쉽게 해 줄 것을 약속하지만, 비판적인 시각으
로 보면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 힘들게 한다.
한 남자를 상담했는데, 그는 두 개의 학위를 받은 매우 성공적인 남자였다. 그는 혼자 살고 있었으며,
적적한 저녁이 되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여자와 잤는지 곰곰 생각해 보는 게(그 당시 65명이었다) 위
로가 되었다. 나이가 그보다 좀더 많은 몇몇 여자들과는 그래도 비교적 오래 관계가 이어졌다. 그의 추
론으로는 그 여자들에게서는 다른 침실 파트너에게서보다는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
는 상담 중에 자주 카알이 얼마나 인내력이 강한지 알 수 있었다. 한번은 상담 중에 건물 공사가 시작
되었다. 그는 소파에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옆방의 벽을 뚫는 소음이 들려 왔다. 난 놀라서 그만 의자
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강철로 된 신경을 가진 듯이, 침착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가고 있었다. 한편 그는 늘 상담 시간에 조금씩 늦게 왔다. 거기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지만, 그는 늘
지각을 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그가 성과에 대한 부담을(그는 상담할 때도 잘 해야 한다는 압박을
갖고 있었다) 덜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만남을 자
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힘든 작업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것과
는 별도로 나는 그가 왜 그토록 여자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 가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의 이야기에서 분명해진다. 그는 어느 날 한 '소녀'(그는 '성적인' 대상으로서의
여자를 그런 식으로 불렀다. 이에 반해, 그보다 더 인생 경험이 많아서 '이로운' 여자들은 '성숙한', '성적
이지 않은' 이란 표현을 썼다)를 주말에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월요일에 그는 완전히 지치고 의기소침
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에 항상 그녀를 신경 써야 하고, 늘 그녀 곁에 있어
야 하고, 그녀를 즐겁게 해 주고, 그녀가 원하는 게 뭔지 귀를 쫑긋 세워 들어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잠시도 편안히 앉아서 혼자 신문을 읽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그가 편안히 쉴 수 있고, 무언가를 하고 싶은 대로하게 내버려두는 그런 상대가 아니
었다. 결국 그 주말은 여가가 아니라, 아주 고된 노동의 시간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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