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에서 흔히 '대상불변'과 '내적 대상'이란 개념으로 표현되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감정으로 채
워진, 대상에 상응하는 내면의 표상을 의미한다. 이 표상의 불변성은 사람이 성장하는 동안에 얻어지는
데,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가진 내적 표상은 매우 손상되기 쉽다. 어린아이들
은 생후 4개월이 지나면, 기대했던 대상(엄마나 아빠)이 아닌 낯선 타인이 안아주거나 가까이 다가올 경
우, 얼굴을 찡그리거나 울면서 '낯가림'을 보인다. 이러한 낯가림은 일종의 내적 표상이 이미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내적 표상은 점점 강해지고, 지속성을 띠게 된다. 아이는 자라면서 점차 혼자
서도 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는데, 그러다 어느 날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면(예를 들어, 사고가
났는데 엄마가 없어서 옆집 아줌마와 함께 병원 응급실로 가게 되는 경우), 그 순간 이 내적 표상이 까
지고 만다. 산산조각이 나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 결과 엄마가 병원으로 처음 찾아오는 날 아이는 엄
마를 아주 낯선 사람으로 대하게 된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아이는 자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엄
마의 품에 의존하게 되며, 그러면서 점차 내적 표상을 다시 만들어 나가게 된다. 아이는 엄마를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게 되고, 미소로 인사하게 되는 것이다.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환자들은 상대방에 대한 내적 표상을 사랑으로 가구지 못한
다. 언젠가 베아테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녀가 이혼한 후 몇 년 뒤, 아주 오래된 옛날 친구를
만났다. 아직 정신적으로 지쳐 있던 그녀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그녀는 그 남자 친구를 위해
스웨터를 짜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녁 내내 스웨터를 짰다. 그녀는 그 친구가 자기를 위해 스웨터를 짜
는 여자들을 딱 질색이라고 예전에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예쁜 스웨터를 짜
서, 결국 그가 자기의 생각을 바꾸도록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밤중이 지나 더 이상 손을 움직일 기력이
없어지자, 그때부터 그녀는 이제까지 짰던 부분을 다시 풀기 시작했다. 베아테의 이 경험은 어째서 견고
한 내적 표상을 발전시킬 수 없는가를 잘 보여준다. 견고한 내적 표상은 대상이 항상 동일인으로 지각
되는 걸 전제로 한다. 하지만 베아테의 경우, 그 진정한 모습에 대한 어떤 명확한 표상도 얻을 수 없었
던 것이다. 그녀는 단단한 한 조각의 진실을 보기보다는, 가지각색의 추측, 선과 악, 우호적인 것과 적대
적인 것 등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가 밑으로 가라앉는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만을 굽어볼 따름이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좋은' 친구를 위해 스웨터를 짜다가, 다시 '나쁜' 친구를 핑계로 털실을 풀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단지 관찰자일 뿐만 아니라, 그 소용돌이 속에서 함께 도는 존재다. 나중에 그녀는 이
남자 친구와도 헤어졌고,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와 다시 함께 하는 일만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다시 앞에 나타나 함
께 살자고 한다면 이성의 힘을 잃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변하기 쉽고 불분명한 내적 표상은 스스로를
통제하는 부분에서 큰 지장을 준바. 베아테는 어떤 관계 속에 있을 때는 결코 '아니오'란 말을 못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그 관계 자체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녀가 상대방에 대해 견고하고 지속적인, 사랑하는
감정으로 채워진 내적 표상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애처럼 그 대상에 매달리게 되고, 그를 만족시켜
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에게 다가서고 진심으로 연인관계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그
의 소유가 될까 봐 겁내는 것이다. 내적 표상이 그렇게 불안정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서 어떤 분명한
것도 기대할 수 없고, 서로 다른 욕구에 대한 갈등도 있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베아테를 정말로 사랑
하는 사람도 어떻게 해 보지 못하고, 결국 베아테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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