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인용한 글에서 우리는 어떤 목표를 향하여 돌진하는 전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그들이
향하는 목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와 조화이다. 그러나 안간힘을 다해 나아가도 이 목표에는 도달
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목표는 마지막 순간에 사막의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확실히
'대인관계의 어려움'은 심리치료사의 도움을 요하는 가장 흔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국가보험
체계에서 질병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다만 진단에만 머무르고 있다. 우울증이나 공포증, 혹은
심인성 질병의 원인을 규명해 보면 대개 그 배경에는 외로움, 이별, 친밀감 유지의 실패 따위가 있게 마
련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 환자들의 경우,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친밀감의 회복이다. 이
별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의 경우, 심리 치료사의 도움이 없이는 다음, 그리고 그 다음의 대인
관계마저도 실패할까 염려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환자들은 좋은 인간관계를 위해 필요한 어떤 능력이 본인에게는 '결여'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습득하고, 바람직한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심리치료
에서는 (자동차의 부품 하나에 이상이 발견됐다고 차 자체를 새로 설계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와는
다른 방향이 과정이 전개된다. 환자들은 우선 자신이 무언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
들은 파트너와의 관계를 개선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중에도 얼마나 자주 자신이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지 알게 된다. 여기서는 어린아이들과의 비교가 필요하겠다. 거리낌없이 사귀고 헤어지는 어린아이
들의 자유분방함은, 그들이 어떤 파트너 관계를 이루면서 터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자연스럽게 생겨나
는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은 모
두 대인 접촉과 친밀한 교류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흔히 본인에게 의식되지 않으
며, 의식의 한 귀퉁이에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베아테는 결혼에 실패한 후 몇 년 뒤 심리치료를 받으러 와KT다. 그녀는 새로운 파트너 관계에 무능
력한 채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상류층 가정에서 다섯 아이 중 막내
딸로 태어난 베아테는 큰오빠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집안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로 느끼며 자라났다. 엄마와 단 한번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 기억
이 없다. 아버지는 가끔 산책길에 그녀를 데려가곤 했는데, 그것은 참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
지만 집에 돌아온 뒤의 아버지는 배신자였다. 엄마가 야단 칠 때마다 그녀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던 것
이다. 스무살 때 그녀는 한 대학생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외롭게 보였고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녀
는 자기가 도와 줄 수 있다고, 아니 반드시 도와 주어야만 한다고 느꼈고,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결혼했다. 베아테는 이전의 친구관계를 멀리하고 두 명의 아이를 낳아 길렀으며 남편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남편은 공부에 소질이 없었으며 계속해서 시험에도 떨어졌다. 10년 후, 남편과의 관계는 변했
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들이 세운 공동의 목표를 결코 달성할 수 없고, 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할 것이며,
자신이 지고 있는 부담을 덜어 줄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혼
은 5년이란 시간이 소비되는 길고도 지루한 과정이었으며, 몹시도 쓰라린 전쟁이었다. 남편은 자신의 변
호사를 통해 모욕적인 편지를 발송하게 하는가 하면, 어느 날 만나서는 당장 예전처럼 같이 살자고 졸
라댔다. 베아테는 남편의 터무니없는 행동에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심리치료 초기에 나는 자주 지치고
화가 났다. 베아테는 모든 이혼 절차와 전남편이 보낸 서류들에 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녀는 전남편을
사기성이 있다고 비난하면서, 거기에 자꾸만 말려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학을 했다. 난 그녀의 죄
의식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와의 계속되는 갈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
의 영역에서, 바로 실패한 부부관계 '밖'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그녀가 실패
한 부부관계로부터 파생되는 고통과 갈등으로, 그녀와 나 사이에 일종의 벽을 만드는 것을 깨달았다. 그
거짓말쟁이이자 사기꾼을 향한 베아테의 공격성, 그리고 자신의 무능력과 아둔함에 대한 질책은, 내가
마치 두 적지 사이를 오가며 양쪽에서 공격받는 종군기자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고 감
정적으로 동요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한번은 나 스스로를 방어하며 말했다. 난 법학자도 아니며, 현재
누가 옳은가에 대해서만 묻고 있는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후, 늘 그렇듯이, 새로운 구실로 자기 정당화를 하기 위해 지금의 처지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난 마음이 약해졌으며, 죄의식마저 느꼈다. 그만 너무 멀리 와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의 관계는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 많이 그
녀의 투쟁에 관여하게 되었고, 그녀는 조금씩 이혼 법정을 둘러싼 공방 이외의 체험에 대해서도 털어놓
기 시작했다. 이제는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상이 보다 분명해졌다. 나는 환자가 자신의 반
대편에 서서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한 파트너를 힘겹게 자기편으로 돌아서게 하려다가 결국 이에 실
패한 사실을 상세히 설명한 다음엔, 으레 전혀 다른 대상을 찾곤 하는 데에 이미 익숙해 있다. 만일 환
자가 가공의 심리외과적인 수술에서 출구를 찾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사랑받을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베아테 역시 이혼 직후에는 외롭고 멸시받은 감정에 빠졌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녀에게 다가
온 많은 적극적인 남자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물론 아무도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녀는 곧
그들을 잊어버렸고, 다시 그들을 떠올리는 것이 왠지 비윤리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베아테의 사례를 토대로 이제부터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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