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와 다위니즘
어떤 행성에서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이다. 만약 우주의 다른 곳으로부터 지적으로 뛰어난 생물이 지구를
방문했다고 할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도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묻는 것은 우리가 "이미 진
화를 발견했는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지구의 생물은 어느 한 사람이 진실을 이해하기 전
까지 30억 년 동안 자기가 왜 존재하는가를 모르고 살았다. 그 사람의 이름은 찰스 다윈이
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 진실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우리가 왜 존재하
는지에 대하여 일관성 있고 조리 있는 설명을 매듭지은 사람은 다윈이었다. 다윈은 이 장의
표제와 같은 질문을 하는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에게 우리가 이치에 맞는 답을 가르쳐 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생명에는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나? 인간이란 무엇
인가? 등등 심오한 문제에 부딪힐지라도 우리는 이제 미신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 저명한
동물학자 심프슨(G.G. Simpson)은 이런 의문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의문에 대하여 답하고자 하는 1859년 이전의 시도는 모두 가치
가 없으며 차라리 그것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편이 나올 것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진화론은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이론과 같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다윈 혁명이 뜻하는 모든 것은 아직 널리 이해되지 않았다. 대학에서 동물학은 아직도 소수
의 연구 분야이며 동물학을 선택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깊은 철학적 의미를 평가한 후에 그
와 같이 결심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철학과 인문학 분야에서는 아직도 마치 다윈이
존재조차 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교육을 하고 있다. 이런 일이 언젠가는 고쳐질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쨌든 이 책의 의도는 다위니즘의 일반적 옹호에 있는 것이 아
니다. 대신에 어떤 논쟁점에 대하여 진화론의 중요성을 추구함에 있다. 나의 목적은 이기주
의와 이타주의의 생물학을 연구하는 것이다.
동물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
학문상의 흥미는 별문제로 하더라도 이 문제가 인간에게 중요함은 명백하다. 그것은 우리
의 사회 생활의 여러 면, 예를 들어 사랑과 미움, 싸움과 협력, 줌과 훔침, 탐욕과 관대에 관
한 것이다. 로렌츠(Lorenz)의 (공격에 대하여), 아드레(Ardey)의 (사회계약), 그리고 아이블-
아이베스펠트(Eibl-Eibesfeld)의 (사랑과 미움)도 이와 같은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책들의 어려운 점은 그 저자들이 전전체적으로, 또한 완전하게 틀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화의 과정을 오해했기 때문에 틀렸다. 그들은 진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개체(또
는 유전자)의 이익이 아닌 종(또는 집단)의 이익이라고 잘못 된 가정을 하고 있다. 몬태규
(Ashley Montagu)가 로렌츠를 "19세기의 '이빨도 발톱도 피범벅이 된 자연'파 사상가의 직
계 자손이다"라고 비판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진화에 관한 로렌츠의 견해를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는 테니슨(Tennyson)의 이 유명한 어구가 의미하는 것을 배척한다는 점에서 몬
태규와 같다. 그 두 사람과는 달리 나는 '이빨도 발톱도 피범벅이 된 자연'이라고 하는 표현
이 자연 선택의 현대적 이해를 아주 잘 요약하고 있다고 본다.
나의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그것이 어떠한 성격의 논의이며, 어떠한 성격의 논의가 아닌
가를 간단히 설명해 보고자 한다. 만약 어떤 남자가 시카고의 갱간에서 오랫동안 순조롭게
살아왔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아
마도 그는 굉장히 빠른 총잡이이고 의리의 친구를 많이 거느릴 수 있는 능력의 사나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절대로 확실한 추론은 아닐지라도 그가 생존했고, 성공해 온 조건에 관해
서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성격에 관해서 약간은 추론을 할 수 있다. 이 책이 주
장하는 바는 사람과 기타 모든 동물이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
공한 시카고의 갱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전자는 경쟁이 격심한 세계를 때로는 몇 백만 년
이나 생을 계속하여 왔다. 이 사실은 우리의 유전자에 무엇인가의 특별한 성질이 있다는 것
을 말하고 있다. 내가 이제부터 말하는 것은, 성공한 유전자에게 기대되는 특질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정한 이기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성은 이기적인 개체
행동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볼 바와 같이 유전자가 동물 한 개체 수준
에서 한정된 이타주의를 육성함으로써 자신의 이기적 목표를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특별
한 경우들이 있다. 전자의 '한정된(limited)'과 '특별한(special)'이라고 하는 용어는 중요한
말이다.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사랑이든가 종 전체의 번영이든가 하는 것
은 진화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천성이냐 교육이냐
여기서 우선 나는 이 책의 성격이 아닌 첫번째 사항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진화에 따른
도덕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사물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가를 말할
따름이다. 나는 우리 인간이 도덕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
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과 어떠하다고 하는 진술을 구별 못하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의 느낌으로, 단순히 그
리고 항상 비정한 이기주의라는 유전자의 법칙에 기초한 인간 사회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싫은 사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안됐지만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탄식할지라도 그것
이 사실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 책은 주로 흥미롭게 읽도록 의도하였으나 이 책으로부터 도
덕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사람은 이것을 경고로써 읽어 주기 바란다. 만약 당신이 나와 같
이 개개인이 공통의 이익을 향하여 관대히 비이기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하기를
원한다면 생물학적 본성은 거의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한다. 우리가 이기적으로 태어
난 이상, 우리는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칠 것을 시도해 보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의 이기
적인 유전자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가를 이해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적어도 우리는 유
전자의 의도를 뒤집어 볼 기회를, 즉 다른 종이 결코 바라지 못했던 기회를 잡을지도 모르
기 때문이다.
교육에 관해서 이와 같은 의견을 말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계승되는 특성이 고정되고 변경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기 때문이다(덧붙여 말하자면 이 오류는 아주 흔히
볼 수 있다).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에게 이기적인 것같이 보이나 반드시 우리의 전 생애가
유전자에 따르도록 강제당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확실히 이타주의를 배우는 것은 유전
적으로 이타주의인 것같이 프로그램되어 있는 경우보다는 훨씬 어려울 것이다. 오로지 인간
만이 문화에 의하여 학습하고 전승되어온 영향에 의해서 지배된다. 어떤 사람은 문화야말로
중요하기 때문에 유전자가 이기적인든 아니든 간에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는 실제로 관
계가 없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하는 사람도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속
성에 대한 결정 요인이 "천성이냐 교육이냐"라고 하는 논의에서 어느쪽의 입장을 취하느냐
에 달려 있다. 여기서 나는 이 책의 성격이 아닌 두 번째 사항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책은 "천성이냐 교육이냐" 논쟁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는
이에 대하여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푶명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마지막
장에서 제시할 문화에 대한 견해는 여기서 제외된다. 만약 유전자가 현대인의 행동 결정에
는 전혀 무관함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이 점에서 동물계에서 유일한
존재임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극히 최근에 인간이 예외로 됐다는 그 규칙에 대하여 아는 것
은 여전히 흥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 종이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만큼 예외적이
아니라면 그 규칙을 배우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이 책의 성격이 아닌 세 번째 사항은 인간의 행동이나 기타 동물의 상세한 행동을 기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자세한 사실은 설명할 때 예로서 사용할 것이다. 나는 "원
숭이의 행동을 보며 그 행동이 이기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도 이기적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의 '시카고 갱단론'의 논리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이
러한다. 인간도 비비(원숭이의 일종)도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되어 왔다. 자연 선택의 과정
을 보면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되어 온 것은 무엇이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비, 인간 그리고 기타 모든 생물의 행동을 보면 이 행동이 이기적
임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예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면, 즉 인
간의 행동이 참으로 이타적이라고 관찰될 경우 우리는 곤혹스러운 사태와 설명을 필요로 하
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기에 앞서, 성의가 필요하다. 어떤 실재(예를 들어 한 마리의 비비)가 자기를 희
생하여 또 다른 같은 상태의 실재의 행복을 증진시키 위해 행동했다고 하면 그 실재는 이타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적 행동에는 이것과는 정반대의 효과가 있다. '행복'은 '생존의 기
회'로 정의된다. 가령 실제의 생사 가능성에 대한 효과가 극히 적고 무시할 수 있게 보여도
다윈 이론의 현대적 설명의 놀라운 결과의 하나는 생존의 가능성에 대한 사소한 작용이 진
화에 주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와 같은 작용에 영향을 끼치는 데 필요
한 시간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상술한 이타중의와 이기주의의 정의가 주관적인 것이 아닌 행동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이
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여기서 행동의 동기에 대한 심리학에 관여할 생각은 없다. 이타
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정말로'숨은 혹은 무의식의 이기적인 동기로 그것을 하고 있나 아
닌가를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든 아니든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므로, 그것은 이 책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다만이 행위의 결과가 이타행위자로 보여지
는 자의 생존 가능성을 갖추고 동시에 수익자로 보이는 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 주면 나는
이것을 이타 행위로 정의한다.
오랜 기간에 걸친 생존 가능성에 대한 행동의 효과를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다. 실제의 문제로서 실재하는 행동에 정의를 적용할 때는 '~과 같이 보인다.'라는 말을 보충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표면상 이타주의자의 죽을 가능성을 (비록
얼마나 적든 간에) 높이고 동시에 수익자의 장수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생각게 하는 행위이
다. 잘 조사해 보면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실은 모양을 바꾼 이기주의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근원적인 동기가 실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가
능성에 대한 행위의 실제 효과가 우리가 처음 생각한 것과는 반대라고 말하고 있다.
검은머리갈매기와 사마귀
이기적으로 보이는 행동과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우리가 우
리 자신의 종을 취급할 때에는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억제하기 어려운 고로 다른 종
의 동물을 예로 들기로 하겠다. 우선 개체에 의한 이기적 행동의 여러 가지 예를 들어보자.
검은머리갈매기는 커다른 집단을 이루어 집짓기를 하는데 둥지와 둥지 사이는 불과 수십
cm밖에 안 된다. 갓 태어난 어린 새끼는 작고 무방비 상태여서 포식자에게 먹히기가 쉰다.
어떤 갈매기는 이웃 갈매기가 집을 떠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 둥지를 습격하여 어린 새끼
를 삼켜 버리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렇게 하여 그 갈매기는 출어 시간을 줄이고 자기 둥지
를 지키면서도 풍부한 영양을 섭취할 수가 있다.
더 잘 알려진 예로 암놈 사마귀의 동족끼리 서로 잡아먹는 무서운 성질이 있다. 사마귀는
커다란 육식성 곤충이다. 그들은 보통 파리와 같은 작은 곤충을 먹는다, 움직이는 것은 무엇
이든 공격한다. 교미시 수놈은 주의 깊게 암놈에게 접근하여 위에 타고 교미한다. 암놈은 교
미가 끝난 후에 수컷을 잡아먹기 시작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머리가 없
다는 것이 수놈의 남은 몸통 부분의 성적 행위의 진행을 멈추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실제
로 곤충의 머리는 억제 중추 신경의 자리이므로 암컷은 수컷의 머리를 먹음으로 인해 수컷
의 성행위를 활발하게 할 수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이점을 높이는 결과가 된다. 물
론 첫째의 이점은 암컷이 좋은 먹이를 얻게 되는 것이다.
펭귄과 바다표범
이기적이라는 말은 공식성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에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표현이 부드러울
지 모르겠으나 이와 같은 예는 우리의 정의에 잘 맞는다. 남극의 황제펭귄에서 보고된 비겁
한 행동에 관해서 라면 아마도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펭귄은 바다표범에
게 먹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물가에 서서 물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중 한 마리가 뛰어들기만 하면 나머지 펭귄은 바다표범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당연히 누구도 자기가 희생물이 되기는 싫기 때문에 전원이 그저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리
고 때때로 서로 밀치다가 누군가를 수중에 떠밀어 버리려고까지 한다. 더 일반적으로는 이
기적인 행동이란 다만 먹이나 영역, 또는 교미의 상대 같은 가치가 있는 자원을 서로 나누
기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이타적인 행동으로 보이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일벌의 이타적 행동
일벌이 침으로 쏘는 행동은 꿀 도둑에 대한 아주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다. 그러나 쏘는
벌은 육탄 특공대다. 쏘는 행위로 인해 생명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내장이 흔히 침과 함께
빠져 버리기 때문에 그 벌은 그후 곧 죽게 된다. 그 벌의 자살적 행위가 집단의 생존에 필
요한 먹이저장을 수호했을 지는 몰라도 그 벌 자신은 그 이익을 바지 못한다. 우리의 정의
로 이것은 이타적 행동이다. 의식적인 동기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 경우
에도 또 이기주의의 경우에도 의식적인 동기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은 우
리의 정의와 무관하다.
경계음
동무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것은 이타적 행동임에 틀림없으나 동무를 위해 작은 위험을
당하는 것도 역시 이타적 행동이다. 대부분의 작은 새는 매와 같은 포식자가 떠 있는 것을
보면 특징적인 '경계음'을 내는데, 이에 의해 무리 전체가 적당한 도피 행동을 한다. 경계음
을 내는 새는 포식자의 주의를 자신에게 끌리게 하므로 특별히 몸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있다. 그것은 남보다 위험이 좀더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나 역시 이것은
적어도 언뜻 보면 우리의 정의에 따른 이타적 행위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동물의 이타
적 행동 중에서 가장 흔히 그리고 뚜렷이 볼 수 있는 것은 양친, 특히 새끼에 대한 어미의
행동이다. 그들은 집 곳에서나 체내에서 알을 부화시킴으로써 많은 희생을 치르며, 새기에게
먹이를 주고 큰 위험에 몸을 던져 포와 같은 포식자가 접근할 때 소위 '혼란 과시'를 행한
다. 어미새는 한쪽 날개가 꺾인 양 몸 짓을 하며 여우를 집으로부터 먼 곳으로 유인한다. 포
식자는 잡기 쉬워 보이는 목적물에게 유인되며 새끼가 있는 집에서 멀어진다. 마침내 어미
새는 이 몸짓을 멈추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감으로써 여우의 습격을 피한다. 이 어미새는 자
기 새끼의 생명을 구하였으나 이러한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의 위험 속에 던졌다.
나는 지어낸 이야기로 어떤 점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적당히 선택된 예를 훌륭한
일반론의 정당한 증거로 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은 단지 개체 수준의 이타적
행동과 이기적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들었을 뿐이다. 이 책에
서 나는 유전자의 이기성과 나의 기본 지식에 의하여 개체의 이기주의와 개체의 이타주의가
어떻게 설명되는가를 표명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전에 우선 이타주의에 관해서 틀린
설명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와 같은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설명이 일반에게 알려
져 있고, 학교에서도 널리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은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 즉, "생물은 '종의 이익을 위하여'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행위를 하도록 진화한다."라고 하는 오해이다. 생물학에서 이
사고 방식이 어느 정도로 우세한지는 쉽게 볼 수 있다. 동물의 생활은 대부분을 번식에 이
바지하고 있고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이타적 자기 희생 행위는 어미가 새끼에게
하는 것이다. '종의 존속'이란 번식이라고 하는 것에 잘 사용되고 있는 완곡된 표현이다. 확
실히 그것이 번식의 결과임은 틀림없다. 논리를 조금 비약시켜 번식의 '기능'이 좋을 존속시
키는 '일'이라고 추론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사실로부터 동물이 일반적으로 종의 존
속에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한다고 결론짓기에는 약간의 잘못이 있으나 그 정도로 하고, 그
다음에는 같은 동족에 대한 이타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룹 선택설
동족에 대한 이타중의라는 사고 방식은 어쩐지 다위니즘적인 느낌을 준다. 진화는 자연 선
택에 의하여 진행되고 자연 선택은 '최적자'의 생존에 가담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최적
자'란 최적 개체에 관한 것일까, 아니면 최적의 품종 또는 최적의 종에 관한 것일까? 이것은
목적에 따라서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이타주의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이것은 매
우 중대한 것이다. 다윈이 생존 경쟁이라고 말한데 있어서 경쟁하고 있는 것이 종이라고 하
면 개체는 장기 게임의 졸로 볼 수가 있다. 졸은 종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희생
이 되는 것이다. 좀더 좋게 말하면 각 개체가 그 집단의 행복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종
내지는 종내 개체군과 같은 집단은 각 개체가 자기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우선으로 추구하
고 있는 다른 경쟁자 집단보다 아마도 절멸의 위험이 적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자기 희
생을 치르는 개체로 이루어진 집단에 의해 대부분 점령되게 된다. 이것이 '그룹선택설
(theory of group selection)'이다. 이 설은 윈-에드워즈(V.C. Wynne-Edwards)의 유명한 저
서를 통해 소개되었고, 아드리(Robert Ardrey)의 (사회계약(The Social Contract))이란 책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이는 진화론의 상세한 것을 모르는 생물학자에게 오랫동안 진실이라고
생각되어 온 설이다. 옛부터 지지받아 온 '개체 선택(individual selection)'이 라는 설도 있
다. 나로서는 '유전자 선택(gene selection)'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은데...
반역자
이 그륩 선택설에 대한 '개체 선택론자'의 답은 간단히 말해서 다음과 같다. 이타주의자의
집단 중에는 어떤 희생도 거부하고 의견도 다른 소수파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다른 이타
주의자를 이용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반역자가 한 개체라도 있으면 -정의에 의하면,- 그 개
체는 아마도 다른 개체보다 생존의 기회도, 새끼를 낳는 기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새
끼는 각각 이기적인 성질을 이어받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몇 세대의 자연 선택을 거친 후
이 '이타적 집단'에는 이기적인 개체가 만연해 이기적인 집단과 구별이 어렵게 될 것이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최초에 반역자가 전혀 없는 순수한 이타적 집단이 약간 있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이웃의 이기적 집단에서 이기적인 개체가 이주해 오는 것이나 이기적 개
체와의 교배에 의해서 이타적 집단의 순혈통이 오염되는 것을 막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기
는 어렵다.
개체 선택론자는 집단이 실제로 멸망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그 집단의 개체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함에 틀림없다. 또 어떤 집단의 개체들이 선견지명이 있다면 그들은
결국 이기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집단 전체의 붕괴를 방지하는 것이 자기들의 최대의 이익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이를 인정도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최근에 영국
의 노동자에게 수없이 말해 온 것이다. 어쨌든 집단의 멸망은 개체간의 가열된 경쟁에 비교
하면 매우 느린 과정이다. 집단이 느리게 그리고 확실히 쇠퇴하여 가는 사이에도 이기적인
개체는 이타주의자를 희생하여 단기간에 성공한다. 영국의 시민이 선견지명의 혜택을 받고
있든 않든 간에 진화는 미래에 대하여 맹목적이다.
'그룹 선택설'은 이제 진화를 이해하고 있는 전문적인 생물학자들 사이에는 별로 지지받고
있지 못하나 이 설은 직관적으로 호소하는 면이 있다. 동물학을 전공하는 학생의 후속 세대
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 이것이 정통적인 견해가 아님을 알고 놀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책망하는 것은 좀 심하다. 왜냐하면 영국의 수준 높은 생물학 교사를 위한 책인 (너필드
(Nuffield) 생물학 교사 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고등 동물에서는 종의 생존 확
보를 위해서 개체의 자살이라는 행동 형태를 취하는 수가 있다." 이 지도서의 무명의 저자
는 다행히도 논쟁거리가 되는 것을 논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노벨상 수상자에 해당된다. 로렌츠는 (공격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공격 행동의 '종 보
존' 기능의 하나는 최적 개체만이 번식이 허용되도록 보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
은 순환 논법 가운데 일품이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너필드 생물학 교사 지도서) 의
저자와 같이 분명히 로렌츠도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정통 다위니즘에 반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그룹 선택설은 뿌리가 깉다는 것이다.
요젠에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산 거미에 관한 BBC TV 프로에서 비슷하고 재미있는 예를
들었다. 출연한 '전문가'는 대부분의 거미 새끼가 다른 종의 먹이가 되는 것을 관찰하고 다
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도 이것이 그것들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종의 유지를 위해서는 극
소수가 살아 남으면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사회계약' 중에서 아드리는 일반적인 사회 질서 전반의 설명하는 데 그룹 선택설을 이용
했다. 명백히 그는 인간을 동물의 정도에서 벗어난 종이라고 보고 있다. 이로써 아드리는 적
어도 그의 숙제는 끝냈다. 권위 있는 설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그의 결의는 명백히 의식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론은 평가받을만 했다.
아마도 그룹 선택설이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것은 첫째로, 그것이 대부분 우리가 갖고 있는
논리적 이상이나 정치적 이상과 조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종종 이
기적으로 행동하나 이상적 측면으로는 타인의 행복을 위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칭찬한다. 그
러나 우리가 '타인'이란 말을 어느 범위까지 설정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다소 혼란이 있다.
집단 내의 이타주의는 집단간의 이기주의를 동반할 때가 많다. 이것이 노동조합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또 다른 수준에서 국가는 이타적 자기 희생의 주요한 수익자이며 젊은이는 자기
나라 전체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도록 되어 있다. 또한 그들은 타국인이라는 것 외에
는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을 살상하도록 장려받는다(이상하게도 개개인에 대하여 자기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속도를 좀 희생하라고 하는 평화시의 호소는 개인에게 자신의 생명
을 바치도록 격려하는 전시의 호소만큼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다.
종의 이익론
최근 인종 차별주의나 애국심에 반대하여 동지 의식의 대상을 인류의 종 전체로 대치하려
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타주의의 대상을 확장하는 인도주의자들은 흥미로운 자연적 결론을
낳는다. 즉, 그것은 역시 진화에 있어 '종의 이익론'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
으로 자유주의적인 사람은 보통 종의 윤리를 가장 강하게 믿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이타
주의를 더욱 확산시켜서 다른 종까지도 포함시키려고 하는 사람을 매우 경멸한다. 만약 내
가 사람들의 주택 사정을 개선하는 일보다 대형 고래류의 살육 방지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면 몇몇 친구들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기적인 종
동족의 일원이 다른 종의 일원과 비교하여 윤리상 특별한 배려를 받아야 당연하다는 감각
은 원래 강하다. 전쟁 이외의 상황에서 살인하는 것은 통상 범죄 중에서 가장 큰 죄로 생각
되어 왔다. 우리의 문화에서 이것보다 더 강하게 금지되고 있는 유일한 것은 깃인 행위이다
(비록 이미 죽은 자일지라도). 그러나 우리들은 다른 종의 일원을 기꺼이 먹는다. 우리들 대
부분은 극악스러운 범인에 대해서까지도 사형 집행을 꺼려하는 데 반해 별로 해로운 야수도
아닌 동물을 재판에도 부치지 않고 기꺼이 쏴 죽인다. 그뿐인가! 우리는 많은 무해한 동물
을 오락이나 놀이를 위해 죽이고 있다. 아메바만큼도 인간적 감정을 갖지 않는 태아는 장성
한 침팬지보다 월등히 경의와 법적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실험적 근거에 의하면
침팬지는 풍부한 감정을 가지며 생각도 하고 어떤 인종의 말을 기억할 수도 있다. 태아는
우리의 종에 속하므로 특혜와 특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라이더(Richard Ryder)가 말하는 '종
차별주의' 윤리가 '인종 차별주의' 윤리보다 어느 정도라도 확실한 윤리적 입장에서 설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그것에는 진화 생물학적으로 엄밀한 근
거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수준에서의 이타주의가 바람직한가? 가족인가, 국가인가, 인종인가, 종인가 아니면
전체 생물일까라는 문제에 대한 인간의 윤리에 있어서의 혼란은 어느 수준에서의 이타주의
가 진화론적으로 보아 타당한가라는 생물학에 있어서의 문제와 같은 혼란을 반영하고 있다.
그룹 선책주의자까지도 적대 집단의 일원끼리 서로 미워하고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아도 놀
라지는 않을 것이다. 즉, 그들은 노동조합주의자나 병사처럼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싸움에서
는 자기네 집단에 동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그룹 선택주의자가 어느 수준이
중요한가를 어떻게 해서 정했는가 하는 것은 물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만약 선택이 같은
종 내의 집단간이나 이종간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더 큰 집단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 종은 속으로 집단을 이루고 속은 목으로 되어 묶이고 목은 강에 속한다. 사자와
영양은 둘 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포유강의 일원이다. 그러면 '포유류의 이익을 위해'영양을
죽이지 말라고 사자에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강의 절멸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자는
영양 대신에 새나 파충류를 잡을 것이다. 그렇다면 척추 동물문 전체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는 어떨게 하면 좋을까?
경계 도약
간접 증명법으로 논하고 그룹 선택설의 난점을 지적하는 것은 이만하고, 개체의 이타주의
의 겉보기상의 존재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아드리는 "톰슨가젤(영양의 일종)에서
'경계도약(stotting)'과 같은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룹 선택뿐이다"라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포식자 앞에서 행해지는 이 (사람의 눈을 끄는) 박력 있는 도약 행동은 새의 경계
음에 상당하는 것이다. 이 행동은 위험에 처해 있는 동지들에게 경고를 발하면서 한편으로
는 경계 도약을 하고 있는 개체 자신에게 포식자의 주의를 끈다. 우리에게는 톰슨가젤의 경
계 도약이나 기타 이와 같은 현상 모두를 설명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다음 장
에서 다루어 보려고 하는 문제이다.
우선 진화를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관점에서부
터 보는 것이라고 하는 나의 신념에 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신념에 관하여 나는
윌리엄스(G.C. Williams)의 명저 (적응과 선택(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내가 이 책에서 활용하는 중심적인 아이디어는 금세기 초, 유전자이전 시
대에 와이즈만(A.Weismann)이 예시하고 있었다. '생식질의 연속성(continuity of the
germ-plasm)'이라는 그의 학설이 그것이다. 나는 자연 선택과 자기 이익의 기본 단위가 종
도, 집단도 엄밀하게는 개체도 아님을 논하려고 한다. 그것은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이다. 일
부의 생물학자에게 있어 이것은 최초이며 극단적인 견해인 양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어떠한 의미로 그러는지를 알면, 그들은 비록 그것이 낯선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을지
라도 실제로 그것이 정통이라는 것에 동의해 줄 것으로 믿는다. 이 논의를 전개하기에는 시
간이 걸린다. 그리고 우리는 우선 '생명' 그 자체의 참된 기원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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